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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졸업여행 (1)
우리는 가장 무더운 여름밤 토요일 자정을 택해서 졸업여행을 떠났다. 연령차를 초월하고 39세에서 68세까지 하고 싶던 국문학 공부를 늦게나마 마친 금년 졸업생들이다. 동아리회원들이 수개월 전부터 수차례 만나 계획하고 꿈꾸던 여행이었지만 막상 떠날 때는 14명뿐이었다. 정원이 44명인 버스에 양쪽 일곱 줄로 편하게 앉아 아름다운 남쪽바다의 부푼 꿈을 가득 안고 비 오는 밤을 달렸다.
탄천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줄기속을 뚫고 버스는 달렸다. 우리는 조용한 침묵 속에 눈을 감았다 떴다 잠을 자기도 하고 멀리 별빛처럼 빛나는 도시의 불빛을 감상하기도 하다가 강진 마량 나루터에 도착했다. 다섯 시 이십 분이었다. 부염 밝아오는 시각 빗소리바람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들리게 버스 몸체를 강타한다. 버스 안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회색빛 하늘 아래 선착장에 바닷물이 출렁이고 좌측에 어렴풋이 아치형 고금대교가 보인다.
여섯 시도 안 되어 금성횟집에 들어가 돔과 광어와 장어를 넣은 매운탕과 숭어회와 청각 콩자반으로 이른 아침식사를 했다.
비는 계속 오고 태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뜰 기미가 없으므로 강진의 다산 초당과 영랑생가를 먼저 답사하기로 했다. 버스 창밖으로 바라보니 한 산자락에 “청자골 환영” 큰 잔디글씨가 확 눈에 들어왔다. 해안선 따라 포졸차림의 군대가 창을 들고 늘어선 모습은 옛날에 허수아비로 왜구를 물리친 것을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연녹색 들판의 벼들은 바람 따라 일렁이며 춤을 추는 모습이 싱그러워 내 마음도 청정해지는 듯싶다.
『다산유물전시관』
우선 에 들려 다산의 생애를 대강 살펴보았다. 다산 정약용(1762 ~ 1836)은 7세에 시를 짓고 28세에 문과급제하고 경기도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펴보고 탐관오리들의 부패를 폭로했다. 과학적, 자주적인 실학사상으로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여 정조 대왕의 수원 화성의 능행길을 돕고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성축조에 이용하였다.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무적시의(無敵時宜)의 신념으로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그 시대에 알맞게 하라’고 말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만이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공동소유 공동경작 노동일수에 의한 공동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 개혁을 위한 여전제(閭田制)를 주장하였다. 종두법을 최초로 시행했던 내용 등 한 사람이 했다고 믿기기 어려울 정도의 너무나 찬란한 업적이 있었다. 시인으로서 과학자로서 일생 600여 권의 책과 2,46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호치민이 항상 목민심서를 옆에 두고 읽었다고 할 정도로 다산은 세계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7세에 “산(山)”이라는 시를 써서 주위를 놀라게 한 시를 소리 내 읊어보았다.
小山蔽大山(소산폐대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遠近地不同(원근지부동)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다산초당(茶山艸堂)』
노란 비닐 옷(雨衣)을 걸치고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쳐 들고 컹컴한 동백숲길을 따라올라 갔다.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는 금방 멀쩡한 오솔길에 작은 내를 이루어 우리는 물살을 헤치며 걸었다. 혼자라면 무서워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다. 1Km는 걸었다고 생각될 때 『다산초당(茶山艸堂)』이란 현판이 걸린 기와지붕이 나타났다. 1936년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57년 해남 윤씨의 협조를 받고 정다산유적보존회가 복원 지붕을 기와로 덮은 것이고『茶山艸堂)』이란 현판은 선생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다산이 1808년 유배 당시는 귤원처사 윤단의 초가로 후손을 가르치던 서당으로 다산이 1818년 8월까지 십년간 18명의 제자를 강학하던 곳이다.
『서암(西庵)다성각(茶星閣)』
삼나무와 대나무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더욱 컹컴한 숲길을 빠져나온 산 중턱에 『서암(西庵)다성각(茶星閣)』이 나타났다. 다산이 가르치던 윤종기, 윤종벽, 윤종상, 윤종전등 18명의 제자들의 거처였다. 현재 건물은 1975년 강진군에서 건립한 것이다.
서암에서 동쪽으로 비껴 올라가니 송풍암(松風庵)이라고도 불리는 동암(東庵)이 있다.
『동암(東庵)』
다산이 초막을 짓고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을 저술 실학 집대성을 한곳으로 솔바람이 부는 곳이라『송풍암(松風庵)』이라하기도 했다.
1976년 강진군에서 복원한 건물로 『寶丁山房)』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데 보배롭게 다산을 모시는 산방이란 뜻으로 추사 김정희 가 쓴 글씨를 모각한 것이란다. 『茶山東庵』이란 현판은 다산의 친필이었다.
『천일각(天一閣)』
동암에서 작은 고개를 넘으니 누각 하나가 보였다. 앞서 간 우리 일행들이 누각난간에 빙 둘러 앉았다. 무슨 이야기들인지 박장대소를 한다. 신 선생이 풍수학을 강의하고 있었나 보다.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 귀가 솔깃하게 재미가 있다. 이야기를 듣다가 친구 하나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힘이 몹시 들었나 보다.
멀리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천일각은 동암으로 부터 약 사십 보 되는 지점이었다.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 약전(若銓)과 가족이 생각날 때 이곳 잔등에서 저 멀리 강진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던 곳이었다. 당시 건물은 없었으나 선생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1975년 강진군에서 건립한 것이다.
걸레자루를 든 노옹이 천일각 마룻바닥 청소를 하기 위해 올라와 우리는 자리를 내주고 백련사로 향하였다.
『백련사(白蓮寺)』
다산초당과 백련사간 숲길은 다산과 초의 선사 혜장법사 등이 차와 시국담을 나누며 거닐던 길이라 한다. 그 역사적인 수많은 동백나무 고목 숲길을 우리노란 우비부대가 폭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중산책(雨中散策)을 하며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했다. 백련사에 다다르자 문 앞에서 꽃이 곱게 핀 큰 백일홍 나무가 우리를 맞이했다.
만덕산(萬德山) 높은 깃대봉(408m)이 포근히 감싸 안은 천년고찰 백련사는 만덕산에 있으므로 만덕사라고도 하였으며,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었고, 조선 세종 때 주지 행호(行乎)가 2차 중수를 하였으며,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푸조나무가 있고 절 좌우 뒤쪽은 천연기념물 151호인 동백나무숲과 대숲이 어우러져 있어 아름다운 풍경이다.
신 선생의 이어진 풍수 강의로는 백련사는 배산임수 좌청룡우백호가 가장 좋은 돈이 많이 생기는 절이라고 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로 고개가 끄덕여지며 자리를 잘 잡은 좋은 절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웅전 앞뜰에서 남쪽 드넓은 강진만의 해안선을 바라보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백련사 주차장은 바로 백 미터 아래에 있어 우리는 힘들게 올라올 때와는 달리 편히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오솔길이 아닌 대로를 이용해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었다.
영랑생가를 찾아가는 너른 들판은 밝은 연두색 벼가 일제히 춤을 추고 그 제방은 연녹색이고 제방 위에 산들은 검은 녹색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어린 날에 수놓던 복가시 색실이 생각나고 커다란 붓대를 잡은 화가가 이 들판을 골고루 색칠을 잘해 놓은 것 같이 느껴진다. 드문드문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하얀 새들의 여유로운 놀이는 우리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어떤 논배미는 성미 급한 벼이삭이 고개를 쳐들고 있고 잿빛 두루미도 날아와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었다.
환상적인 졸업여행 (2)
백련사 주차장은 바로 백 미터 아래에 있어 우리는 편히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오솔길이 아닌 대로를 이용해 순식간에 내려올 수가 있었다.
영랑생가를 찾아가는 너른 들판은 연두색 벼가 일제히 춤을 추고 그 제방은 연녹색이고 제방 위에 산들은 검은 녹색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소녀 시절에 수놓던 복가시 색실이 생각나고 커다란 붓대를 잡은 거인 화가가 ‘이 들판을 색칠하지 않았나.’하고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드문드문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하얀 새들의 여유로운 놀이는 우리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어떤 논배미는 성미 급한 벼 이삭이 고개를 쳐들고 있고 잿빛 두루미도 날아와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었다.
『영랑 생가』
영랑은 1903년 1월16일 태어나 1920년 일본 청산학원 중학부에서 수학하며 박용철과 친교를 가졌다. 1921년 일시귀국 1922년 다시 도일 청산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하다가 관동대지진 후 귀국하여 시문학 등 창작활동을 하였다. 1931년에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시문학』동인시작활동을 하여 3월 창간호를 냈다. 이때 모란이 피기까지와 4행 소곡 6편을 발표하고 1935년『영랑시집』을 발간했다. 생가는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 복원한 것이다.『영랑생가』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 전남기념물 제89호이다.
영랑생가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우측으로 현대적인 시설의 강진향토문화관이 있으며. 돌담길은 옛 정취를 자아내고 이어지는 담 너머는 ‘이 지역에서 제일 좋은 집이지.’ 싶을 정도로 현대적 감각이 느껴지는 건축과 조경이 잘되어 부잣집이라고 생각되는 아름다운 집들이다.
영랑생가 들어가는 길 좌측에는 큰 우물이 있다. 돌로 쌓은 사각형 모양에 새로 이은 초가지붕을 금방 벌거벗은 듯한 나목(裸木)의 네 기둥이 받치고 있다. 돌과 돌 사이사이를 황토 흙을 바른 것이 어쩐지 관광객을 위한 어설픈 단장만 같아 눈살이 편치가 않다.
영랑생가 입구는 표지판에 『영랑찻집』이라고 씌어 있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영랑시집과 녹차를 팔며 문지기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영랑생가를 아마도 강진군에서 관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영랑기념 사업회와 강진군에서 발행한 87수의 영랑의 시가 담겨 있는『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영랑시집 한 권을 샀다. 싱싱한 담쟁이넝쿨이 뒤덮여 있는 돌담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고 커다란 쑥돌에는 진한 검정글씨로「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를 새긴 시비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한국근대작가론에서 첫 번째로 접한 시이기도 하고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샘물가치, ~붓그럼가치, ~물결가치>의 경쾌한 리듬반복의 서정적인 언어가 뇌리에 박혀 있던 것이 튀어나와 몹시 반가웠다. 현대 순수 시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직유를 여러 번 반복 사용했는데도 아름답다고 느낀 작품이다.
바깥마당 한가운데에는 꽃 진 모란(牧丹)이 잎이 무성하게 어우러져「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진 시비를 감싸고 있다. 그 앞에는 패랭이꽃, 층꽃, 꽃 범의 꼬리, 부처꽃, 도라지꽃, 범부처, 옥잠화, 비비추, 할미꽃, 원추리, 털머위가 가득한 화단으로 꾸며져 있다.
대문이 중앙에 있는 문간채는 곳간과 허접한 농기구들을 두었던 곳인지 디딜방아와 삼태기물레, 풍구(風具)와 소 구유가 놓여있다.
동백 등 녹음 우거진 야산이 안채를 감싸 안은 뒤꼍에 대숲이 울창하고 돌로 잘 쌓아올린 우물은 나무 뚜껑으로 덮여 있다. 이 우물 주위에도 실한 많은 꽃 진 모란이 싱싱한 잎을 자랑하고 있다.
마침 강진군청 소속 사십대 여인 문화해설사가 사랑채에서 진지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강진군청 안내문에 의하면 1906년 영랑이 네 살 때 지어진 안채는 영랑부모님의 거처였다.
사랑채는 1930년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님맞이용으로 정자와 한옥의 멋을 살려 지어진 사랑채는 해설사의 말을 듣고 보니 처마 아래 나무기둥이 약간 뒤틀려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지은 시가 「사개틀린 고풍(古風)의 툇마루에」라고 한다.
「사개틀린 고풍(古風)의 툇마루에」
사개틀린 古風의 툇마루에 업는 듯이안져
아즉 떠오를긔척도 업는달을 기둘린다
아모런 생각업시
아모런 뜻업시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삿분 한 치식 올마오고
이 마루우에 빛깔의방석이
보시시 깔니우면
나는 내하나인 외론벗
간열푼 내그림자와
말업시 몸짓업시 서로맛대고 잇스려니
이밤 옴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사랑채 앞뜰은 넉넉한 양반가의 풍모가 느껴지는 정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고목이 된 살구나무 석류나무, 배롱나무, 보리수, 마삭줄 나무, 삼백 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 그리고 일반가정에서 볼 수 없는 종려나무까지 있다. 널찍한 사랑채 마루에 일렬로 우리 일행이 앉아서 해설사의 즉석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사랑채에는 이중선, 임방울선생, 박용철 시인이 며칠씩 묵고 가기도 했단다. 원래 선생은 타고난 성악가로 음악공부를 하고 싶어 했는데 부모님의 뜻에 따르느라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랑채에서 국악인들과 어울려 며칠씩 북과 장구를 치면서 놀았다. 음악과 스포츠에도 조예가 깊어 그의 방에는 레코드판이 가득 쌓였을 정도이고 원래 타고난 장사라 지역민속행사에 씨름선수로도 나갔었다고 한다.
영랑은 14세에 두 살 연상인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일 년 육 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첫 부인을 잃고 작품「쓸쓸한 뫼아페」를 썼는데 이는 외로움을 달래고자 시를 쓰지 않았나 싶다.
「쓸쓸한 뫼아페」
쓸쓸한 뫼아페 후젓이 안즈면
마음은 갈안즌 양금줄 가치
무덤의 잔디에 얼골을 부비면
넉시는 향맑은 구슬손 가치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열여섯 앳된 소년이 뽀뽀의 그 상큼한 맛도 채 알기 전에 누님 같은 부인을 사별한 슬픔의 표현이다. 부모님 몰래 아내의 묘지를 자주 찾아가 애틋한 정을 어디다 둘 길 없어 산소 잔디에 얼굴을 부벼대는 광경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영랑작품이 등단작품인「동백닙에 빗나는 마음」,「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나「마당앞 맑은 새암을」처럼 생가주변의 자연과 사물들을 소재로 생동감 넘치는 정취를 토속어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해설사 말로는 “골부른”의 뜻은 “단풍든”의 토속어라고 한다.
사랑채 우측 넓은 뜰에는 여러 개의 모란화단으로 꾸며져 있어 모란꽃이 필 때는 참으로 장관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꽃이 지고 난 자리, 모란 잎들은 내년에는 더 좋은 꽃을 피우기 위하여 “열심히 양분과 햇빛을 흡수하고 있다.” 는 듯 싱싱하고 푸른 잎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곳은 정구코트였다고 한다. 가정에 이런 시설이 있을 정도이면 가히 그 재력을 짐작할 만하다. 당시 소금이 재화였던 시절, 그 정구코트에 많은 소금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영랑이 휘문의숙 재학 중 기미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려고 구두 밑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왔는데 일경에 정보가 누설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48년 제헌 국회 초대 민의원에 우익으로 출마했다가 당시 강진 일대가 좌익지역이었던 관계로 낙선하였고 이 후 서울 성동구 신당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950년 9 ․ 28 수복 작전에 포탄을 맞고 9 ․ 29 서울자택에서 47세로 타계하였다.
영랑은 스물세 살 때 3년 연하의 여인 안귀련(호적명 김귀련)과 재혼을 해서 후손으로는 7남 3녀를 두었다. 단국대 국문학 교수를 지낸 5남 김현태는 미혼으로 있다가 3, 4년 전에 타계하였고 현재 생존해 있는 자녀로는 2남이 1녀가 있다. 4남 김현철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고 7남 김현도가 호주에 거주하고 막내딸 김애란이 있다. 모란이 활짝 필 때를 기다려 금년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열렸던 2회 영랑문학제에 생존해 있는 삼 남매가 모두 참석했었다고 한다.
환상적인 졸업여행 (3)
한국의 나폴리 『옥섬워터파크』
영랑생가를 돌아 나와 강진향토문화관 골목을 지나 부성식당에서 돼지고기 수육과 고등어구이 두부찌개 콩자반 열무김치 등을 반찬으로 간이 한정식으로 점심을 하였다. 이 지역 식당으로 꽤 이름 있는 식당인가보다. 우리뿐만 아니라 예약된 상차림이 여럿 있는 걸 보니 단체손님 전문 식당인 것 같았다.
1시에 우리는 모두 전용버스에 탑승했으나 아직 여객선 출항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소식이다. 섬에로의 부풀었던 기대는 기약 없이 접고 갈 곳을 잃어버린 미아가 되어 모두 침울한 표정들이 되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다가 찜질방이 있다는 장흥 “옥섬 워터파크”를 향해서 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발 사이로 푸른 들과 산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다.
장흥시내에서 10Km를 달려간 곳에 병풍으로 우뚝 둘러서 있는 좌우 산 사이에 해상레저파크 『옥섬워터파크』가 나타났다.『옥섬워터파크』앞에 시야가 확 트이는 바다가 펼쳐져있다. 이곳 행정지역은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8번지이다.
주변 가장자리에는 백사장이 펼쳐진 해수욕장이다. 반원으로 감싸 안은 듯한 해안에 잔잔한 바다, 어쩐지 가보지도 못한 나폴리나 지중해의 어느 휴양지 같다는 느낌은 왜일까, 아름답다. 은모래 옥빛 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주변 경관이 빼어났다. 요술의 집처럼 빨간 삼각 지붕의 16층 빌딩과 큰 규모의 시설물들이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2층 안내하는 곳에서 내주는 수건과 찜질 복을 받아 챙기고 목욕탕에 들어가서 우선 비누칠해서 샤워를 하였다. 찜질방은 아주 시설이 좋은 찜질방이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우리는 자수정 보석 방이 가장 시설이 훌륭하고 찜질하기가 좋아 그 방에 10분 정도씩 땀을 내며 드나들었다. 삼삼오오 짝을 짓기도 하고 각각 헤지기도 하고 자유롭게 시설을 이용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우나에 드나들며 때를 밀어도 매끄러운 살은 때가 하나도 밀리지 않는다. 해수(海水)라 그렇단다. 참으로 신기하다.
바다를 향한 옥외는 다이빙대가 있는 풀장과 분수와 어린이 놀이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옥외 풀장 옆 야외 벤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해풍을 맞으며 재깔재깔 떠들고 좋아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철부지 아이들 분위기였다. 담소를 오랫동안 나누기도하고 휴게실에서 한 잠자기도 하다 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H와 K는 그간에 강진 항에서 준비해 온 문어를 식당을 빌려 데쳐서 우리 일행 열네 명이 둘러앉아 초고추장에 찍어서 실컷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요즈음 소라가 제철이고 문어는 원래 겨울이 제철인데 이상하게도 요즈음 문어가 잘 잡힌단다. 일곱 시 반에는 키조개를 넣은 미역국에 L 회장이 준비해온 깻잎 장아찌로 저녁식사를 맛있게 했다. 후식은 미리 준비해온 수박을 S 시인이 자르기 솜씨를 발휘해서 즐거운 저녁 한때가 되었다.
텔레비전 보도로는 우리가 갈 평일도 행 임시 운행선(運行船)은 다닌다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찜질과 잠자기도 지겨워 밤바람을 쏘이러 옥외로 나가기도 하고 노래방으로 노래 부르러 가기도 했는데 나는 너른 휴게실에 누워 일요일 연속극 “대조영” 에 푹 빠져 있었다.
마지막 뉴스 시간에 일기예보는 오늘 장흥지방 강우량이 121mm이었고 내일에도 이곳과 강진과 목포와 보성지방에 비가 내릴 것이라고 보도를 해서 걱정이 되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일행들 잠자는 모습을 보니 끼리끼리 잠자는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미스 U 과 S 시인은 그 더운 방에서 뚝뚝 떨어져 까딱 않고 쿨쿨 잘도 잔다. 시원하지만 기계음이 요란한 방에서 여러 명의 우리 일행이 다닥다닥 붙어서 역시 잘도 잔다.
휴게실 여러 개의 방중에 환기가 되고 좀 시원하다 싶은 곳에는 기계소음이 요란해서 잠을 잘 수가 없고 조용한 방은 실내온도가 너무 높아 괴로워 잠을 잘 수가 없다. 목침을 들고 이 방에 누웠다가 저 방에 누웠다가, 잠을 제대로 자기는 다 틀렸다. 여기저기서 자다가 샤워를 몇 번씩이나 해서 겨우 두세 시간 눈을 붙일 수가 있었다. S 시인은 여행할 때에 길거리에서도 잠을 잘 잔다고 한다.
새벽 네 시 반에 기상해서 다섯 시에 모두 버스에 탔다. 비가 그쳤다. 무척 긴 하루를 보내고 옥섬을 떠나는 것이다. 내가 명명한 한국의 나폴리 『옥섬워터파크』를 떠나면서 이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가족과 한 일주일 푹 쉬는 호사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섬워터파크』의 시설은 1층부터 5층까지는 영화관, 노래방, 단란주점, 가족실, 단체실, PC방 안내데스크, 휴게실, 찜질방 여성 전용 사우나, 남성 전용 사우나, 녹돈영양쌈밥전문점, 세미나실이 있다. 6층부터 12층까지는 객실이고 13층은 스카이라운지, 14층은 스카이바가 있고 15,16층은 관리실이었다.
환상적인 졸업여행 (4)
『친구의 고향집』
아직은 회색 하늘이 염려되었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쁜 우리는 지난 6월 개통한 고금대교를 거쳐 약산면 약산대교를 지나 당목 항에 다다랐다. 버스기사도 초행인지 사십 분 예정이던 거리를 어인 일로 한 시간 오십 분이나 걸렸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일곱 시에 약산, 당목 항에서 생일, 서성을 오가는 작은 여객선을 탈 수 있었다.
이슬비가 보슬비가 되어 내릴 때 우리는 버스 무릎에 버스는 배 무릎에 앉아 너른 바다를 가르며 평일도(금일도)로 향했다. 큰 바닷물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섬 섬 섬들의 경치, 우리나라 가장 남쪽 다도해지방의 풍경이다. 멀고 가까운 섬마다 짙은 녹음 위에 운무가 드리워져 있어 선계(仙界)에 와 있는 듯하다.
금일도 선착장이 가까워지자 하얀색, 붉은색 검은색 부표가 둥둥 떠 있는 큰 가두리 양식장이 바다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바람 따라 춤추는 부표와 여객선 꼬리를 따라오는 흰 물거품을 번갈아 바라보는 동안 평일도 작은 배들이 묶여 있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숲이 우거진 큰 산을 등지고 빨간 지붕, 파란 지붕의 올망졸망한 섬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우리의 버스는 구불구불한 낯선 도로를 따라 약 삼십 분 거리의 K 집으로 달렸다. 논밭을 지나 언덕을 넘고 바닷가를 끼고 다다른 중심지는 쾌 큰 읍 소재지였다. 상상하던 섬마을이 아니라 육지의 어느 소도시에 당도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남쪽 끝이라고 할 만한 금일도( 평일도)의 생활상도 서울 변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상용품 상가를 비롯한 보건진료소, 경찰지서, 우체국, 농업협동조합, 수산업협동조합, 농업기술센터, 한국전력공사출장소, 무선전신전화국 등 관공서가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으니 현대에는 유통망 덕분에 생활에 큰 불편은 없을 듯싶다.
농협마당에 버스를 세우고 K네 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마도 이렇게 많은 손님이 들이닥치기는 처음일 터, 동네 어르신들이 길가에서 어느 집 손님일까 궁금하게 생각하다가 K를 발견하고 환한 웃음을 띠었다.
우리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 고향 어르신들에게 인사하듯 했다.
돌담에 귤이 주렁주렁 달린 귤 나뭇가지가 늘어져 있는 K 네 집으로 들어서자 K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섬이 싫다고 일찍 당신 곁을 떠나버려 섭섭한 마음은 잠시고 오랫동안 애면글면하면서 딸의 서울생활을 염려했을 터이다. 딸의 부모뻘이 되는 나이 많은 친구를 포함해서 열네 명의 손님을 맞이하면서 얼마나 딸이 대견스러웠을까.
‘오! 내 새끼, 서울에서 세상과 잘 어울려 살고 있구나.’ 아마도 이렇게 느끼셨을 것이다.
우리가 불편할까 봐 재미있게 놀라 하고 이웃에 있는 친정으로 자리를 피해주셨다.
뜰에 귤나무 옆에 단감이 많이 달린 단감나무와 사철나무가 있고 마당에는 상추 가지 고추 부추 들깨 더덕 도라지 생강 등 채소와 옥수수 수수로 가득하다. 글라디올러스 국화 민들레 샐비어 채송화 꽃이 채소밭과 어우러져 곱다. 어머니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집이 정갈하다. 처마를 고쳐서 산뜻한 알루미늄새시로 단장한 지가 얼마 안 되는 듯하다.
우리는 골방에 짐을 풀고 아침식사 당번이 주방에서 수고를 하는 동안 안방과 마루와 평상에서 선풍기를 켜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여덟 시 사십 분에 긴 마루에 상차림을 하고 돼지고기 볶음과 깻잎 상추 고추와 김치로 소주 한 잔씩 곁들여 맛있게 아침밥을 먹는데 소낙비 소리가 요란했다.
비가 그친 후 동백리에 있는 금일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소나무 숲을 지나서 아직 편의시설도 제대로 없는 넓은 모래밭에 다다랐다. 육지에서 너무 먼 탓인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청정한 해수욕장이 수도권에 있다면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려들 것인가.
우리 일행은 모두 버스에서 내려 바다로 달려갔다. 버스에 혼자 남았다. 창문에 커튼을 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제일 늦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얼마 만인가, 해마다 물가에 갈 때마다 수영복을 잊지 않고 싸들고 다녔는데 번번이 허탕을 쳤었다. 오늘이야말로 내 수영복이 제대로 물을 만난 것이다.
아! 그런데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오리무리에 백조 한 마리가 끼면 바보 오리가 되는 줄 왜 몰랐을까.
삼복더위에 바다에 올 때는 당연히 누구나 수영복을 가져오리라 생각했었다. 우리 일행 중
수영복을 입은 사람은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 젊디젊은 K, H, U, S… 등등 모두 부끄럼쟁이들이란 말인가. 여름 바다에 오려면 수영복은 필수품이 아닌가. 해수욕장이 무색하다.
모두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들이고 L 선생은 숫제 사각팬티 차림이다. 그래도 모두 좋다고 물을 먹이려고 붙잡고 안 잡히려 도망가고 물장난을 서로 치느라 옷들이 흠뻑 젖어도 박장대소를 하며 어린이들처럼 즐거워한다. 소리를 지르며 밀려오는 파도에 쫓겨 달아나다가 다시 바다로 뛰어들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나이를 잊은 개구쟁이들이다. L은 웬일인지 함께 어울리지 않고 일행들의 소지품을 혼자 지키고 그 노는 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내 가족에게 비너스 몸매라고 치기 어린 자랑을 했는데 이제 배불뚝이가 된 내 모습을 오랫동안 과시할 용기가 없어 남보다 먼저 버스로 달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K 어머니가 문어를 손질하고 계셨다. 문어를 데쳐 실컷 먹고 라면을 끓여서 아침 찬밥과 신 열무김치로 점심을 먹었다. 비가 오다말다 하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무더운 더위를 선풍기로 날리며 잠시 낮잠을 즐겼다.
세시가 넘자 바지락조개를 캐러 간다고 모두 일어나서 긴 장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호미와 양동이, 그물망을 들고 나섰다. 진도에서처럼 모세의 기적같이 바다 가운데 덩그렇게 있는 큰 굴 섬까지 물이 빠져 갈라진 길이 나 있다. K가 앞장서고 한 줄로 뒤따라 큰 굴 섬 앞까지 들어갔다. 조금만 옆으로 걸어가도 발이 푹 빠지고 위험해서 똑바로 걸어야 했다. 개펄에는 벌써 여러 명의 마을 어른들이 와서 조개를 캐고 있었다. 우리도 밭을 매듯이 엎드려서 호미로 개펄을 파 젖혀서 거무스레한 바지락조개를 채취했다. 너무 적은 것은 놓아두고 큰 것만 집어넣었다. 부지런히 하고 물이 들어오기 전에 나가야 했다. 여러 사람이 허리가 아프도록 캐서 모으니까 꽤 많다. 그물망에 넣어 바닷물에 씻어서 들어온 길을 따라 반대로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부엌 뒤에 있는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 시간을 맞이했다. 부침개를 부치며 저녁준비를 하는 동안 뜻밖에도 K의 어머니가 외삼촌 댁에서 오리고기를 넣은 전복죽을 쑤어 오셨다. 아주 맛난 별미였다. 후식으로는 참외 수박을 시원하게 먹었다. 얼마나 바다에서 짓궂게 놀았는지 P는 귀에 물이 들어가 몹시 괴로워하였다.
여섯 시쯤 S에게 어머니의 부음(訃音)이 전해졌다. 전화 연락을 해서 부리나케 S가 택시를 불러 타고 귀경길에 올랐다.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계속 오는 밤길에 S가 몹시 걱정되었다. 선착장에서 일곱 시 반에 떠난다던 여객선은 출항하지 못해서 작은 배를 독배로 사서 건너가 광주에서 서울행 버스를 탔다는 연락을 받은 시각은 열 시 반이었다. 우리가 모두 한시름을 놓았다.
자정이 다되어서 서너 명이 양동이를 들고 바닷가에 가서 바닷물을 길어왔다. 조개를 담가두기 위해서다. 작은 S가 준비해 온 연잎 차를 한 잔씩 음미하는 시간을 갖고 어린 날의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는 부풀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융의 집단 무의식에서부터 죽음과 영혼, 사후세계 등의 담론이 펼쳐졌다.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 하나 둘 잠자리를 찾아 들었다. S 시인과 젊은 L이 제일 나중까지 하는 토론을 자장가로 들으며 나도 잠이 들었다.
밤새 태풍과 비는 이어지고 바닷물 소금기를 잘 씻는다고 샤워를 했건만 상체가 따갑고 더워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에 모기 몇 마리가 계속 물어서 몇 번이고 잠이 깼다.
비는 계속 오고 여행 마지막 날이 밝았다. 아침밥 당번 J 과 H 이 주방에서 준비를 하고 나는 마룻바닥에 식탁준비를 했다. 울릉도 명일엽, 깻잎, 쪽파장아찌를 준비해온 것들이 나왔다.
점심은 우리가 바지락조개를 삶아서 껍데기를 제거하고 죽을 쑤어 깨소금을 듬뿍 넣어 김치와 맛있게 먹었다. 직접 우리가 채취한 조개라 더욱 맛이 있었다.
이웃 섬인 생일도에 가는 계획은 접고 우리 일행은 모두 짐을 꾸려서 K 어머니께 하직인사를 하고 귀경길에 오르고자 금일도 일정 항으로 향했다. 약 30시간 동안 북적대던 친구의 고향집이 다시 옛날처럼 적막에 싸일 것이다. 친구의 어머니는 가끔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천방지축 떠들어 대던 우리를 더듬어 내고 막내딸을 더욱 그리워하지는 않으실까.
환상적인 졸업여행 (5)
『청자도요지』
우리의 여행 일정이 다해서 섬을 떠나게 되니까 하늘이 맑게 개고 햇빛이 반짝인다. 그렇게 출발 때부터 끈덕지게 따라다니던 비님도 지쳤나 보다. 꼭 우리의 이 아름다운 여행에 심술을 놓은 것 같다. 한 시 삼십 분에 떠나는 카페리호 풍진 7호를 탔다. 정원 57명에 11.5 톤 트럭 3대가 한도 중량이다. 금일도 일정항의 대기실 겸 마을회관 건물 앞에서 약산 당목 행 작은 여객선을 탄 것이다.
아직도 비 미련이 있는지 하늘 저 멀리는 검은 구름 안개구름 뭉게구름이 그림을 그린다. 우리 머리 위에서 내리비치는 햇빛에 남해의 비췻빛 푸른 물빛이 더욱 곱다. 아! 시원한 바람,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달린다. 가슴이 활짝 열린다. 사방을 휘둘러보니 아름다운 섬, 섬들의 풍경, 모두 우리에게 오라는 듯….
섬 앞바다에 출렁대는 물결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길쭉한 검은 통 모양과 붉은 공 모양과 흰 원기둥 모양의 부표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맨스 그레이풍의 L 선생은 젊은 친구들과 갑판난간에 기대서 멋진 포즈로 함박웃음을 머금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두 시에 당목 항에 도착했다.「특산품 판매장」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지만 새로 2층으로 지은 대기실 겸 상가 건물이 텅텅 비어 있다. 담배와 잡화를 파는 부두슈퍼를 겸한 여객매표소만이 바쁘게 붐비고 있다. 고금 대교가 개통되고 버스가 삼십 분마다 운행하여 섬을 오가는 배타는 시간이 이, 삼십 분으로 단축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귀경길에 강진군 대구면에 있는 청자도요지 박물관을 찾았다. 고려시대의 관요(官窯) 강진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은 같은 시대의 중국인도 천하제일이라 하여 칭송하였다. 뛰어난 아름다운 청자제작기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고려시대 사람들의 미감(美感)에 맞는 유약과 그릇형태 개발을 한 것이다.
1964~196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실시한 강진 사당리 강전에 있는 청자 가마터 발굴조사는 역사적 사료로서 큰 가치가 매우 높은 청자편이 많이 출토, 최고의 수요자였던 고려왕실과 국가 주요관청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유사한 국보, 보물로 지정된 청자 유물 역시 강진의 청자도요지에서 생산된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여러 조각의 고려시대 청자파편과 청자양각모란당초문막새와 용무늬, 모란무늬, 연꽃무늬, 참외모양, 구름 학 무늬, 국화무늬, 앵무무늬, 표주박무늬, 파도무늬 등으로 생활자기를 만든 선조의 숨결을 느끼고 그 미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규보의 짧은 찬시(讚詩)가 눈길을 끌었다.
가늘게 점찍어 꽃무늬를 그렸는데
묘하게 정성들인 그림 같구려
우리나라 청자 가마터는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많다. 그중에 강진이 으뜸이다. 강진은 첫째 고령토와 규석이 있는 자연적 여건이 좋고 둘째 중국과의 문물교류로 선진적 기술을 이해하여 도입하고 셋째 창조적인 힘을 보탰다.
9세기~14세기 신라 말과 고려시대 귀족들의 미의식, 특히 12세기 작품으로 맑고 깊은 미감을 유추할 수 있다. 상감청자는 은은하고 맑고 선명한 비색(翡色)과 회화적이고 시적 아름다움의 붉은색은 진사의 미(辰砂, 美)를 나타내고 있다.
청자자기의 제작과정은 고령토를 채출(채출하여 물래 질로 형태를 만들어 반건조 상태에서 조각을 한다. 검은색, 흰색으로 상감기법으로 장식을 하여 천천히 건조시켜 섭씨 700~800 도에서 초벌구이를 하여 유약을 바른 후 섭씨1300도에서 본벌구이를 해서 완성시킨다고 했다.
강진군청자요지(康津靑磁窯址)는 1963년에 사적 제 68호로 지정된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대운리, 사당리, 수동리에 고령토 규석 등 좋은 조건을 갖춘 곳에 188개소가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도요지의 이모저모 고려청자 가마터와 전시장 등을 두루 구경하고 밖으로 나와 느티나무그늘에서 잠시 쉬다가 버스에 올랐다.
S시인의 강진 고려청자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강진은 좋은 태토((胎土 흙)와 강이 뻗어나 있어 무역로가 발달한데다가 도공들이 많이 모여 살아 고려자기의 산지로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고려자기의 선은 여자의 곡선과 남자의 어깨선을 표현한 것이란다. 이러한 고급청자에 대해 1123년(인종 1) 송(宋)의 사신 서긍(徐兢)은〈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인은 청자의 색을 비색(翡色)이라고 하며 상형청자의 조형은 중국과 달리 독창적이며 이러한 청자를 고려인들은 귀하게 여긴다"라고 기술했단다. 강진청자박물관을 관람하고 보충강의를 들어 고려청자에 대한 많은 것을 새로이 알게 된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이란 물총새의 깃털 색이라는 것이다.
예술 본래의 기술의 회화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서정적 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어 상감청자가 발달한 것을 보면 고려인들의 수준 높은 미의식(美意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우리만의 고유한 창조적 미의식인 고려청자 기술이 강진의 청자골을 더욱 빛내주길 기대한다.
고려청자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며 부르고 싶은 노래를 가라오케에 맞추어 하기로 했다. 키 큰 Sm이 어머니에 대한 상념, Ja의 부침개이야기, U의 언니 오빠이야기를 하였다. 거의 모두 한 곡씩 노래를 불렀는데 Us가「클레멘타인」과「당신은 모르실거야」를 감칠맛 나게 부르고 D는 장시「청춘」을 암송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노래를 못하는 나는 고사를 하다가 어찌어찌해서 할 수 없이 부른 노래가「뜸북새」를 불렀는데 못 불러서 우리 일행들을 즐겁게 해준 모양이다.
안성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 잔치국수, 쌀국수, 가락국수 등으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였다. Ps이 감자와 호두과자를 사고 큰 Sm이 아이스콘을 사 돌려서 더욱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서울에 닿자마자 경찰병원으로 찾아가 Sh의 모친상에 경건히 문상을 하였다. 졸업여행에 참여하느라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애석함을 어쩌랴. 말은 안했으나 우리 모두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삶은 언제나 희로애락이 함께 이어진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졸업여행을 끝내고 헤어진 시각은 열 시 반이었다. 대 자유는 부챗살처럼 접어두고 나를 몹시 기다리는 가족을 향해서 발길을 옮겼다.
『여행 후기』
수필을 씁네, 시를 씁네 하다가 보니 대체로 국문학을 전공한 분들의 작품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이왕 글쓰기를 하려면 제대로 알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고 싶던 국문학 공부 방편을 찾다가 평생교육의 산실인 우리 학교 국문과 삼 학년에 편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다. 환갑나이가 지나 입학해서 공부하기란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욕심이 많고 세상 걱정 다하는 성격에 2년 예정이던 기간이 반년을 더해서야 정식 문학사가 되었다. 배울수록 공부욕심은 더욱 늘어났지만 가뭄에 단비가 내린 듯 해갈은 된 듯싶다. 좋아하는 여행기간이 시험과 겹칠 때 가장 마음의 갈등을 느꼈지만 기회를 포기하지 않고 여행을 하고 국문학 공부와 병행해서 기행문을 쓰는 습관을 기른 것은 나의 가장 큰 소득이다. 2년 반을 함께한 벗들과 처음 밟아본 남쪽 땅과 섬, 남쪽바다의 모습, 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두고두고 즐기리라.
생각해보면 학교행사나 문학 기행에 빠지지 않고 교수님들과 벗들과 함께한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 젊은 벗들이여! 친구 해 주어서 고맙다. 안녕! ***
첫댓글 그야말로 환상적인 졸업여행을 즐기셨군요. 강진 해남 일대의 중요한 유적지들을 보셨군요. 다음엔 진도 보길도 등의 섬도 한번 보고 오시기 바랍니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언제나 저의 글을 제일 먼저 읽어주시고 격려의 말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은 저의 또 한 분, 큰 스승이십니다.
어쩌면 그리도 정확하고 재미있게 서술해 주시는지요? 만학을 즐기시는 민 시인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눈으로 보아주시니 좋게 보이는 것이 겠지요.
꼼꼼하게 모든 것을 메모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알차고 즐거운 여행의 모습이 읽는 이를 흥겹게 합니다.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
꿈초롱님과 주거니 받거니 하셔서 두분이 친구인 줄 알았습니다. 서울 분을 청주 분인 줄 오해했습니다. 서울에 사니까 언제 또 만나겠지요?
민선생님! 무엇보다 문학사 되시고 졸업하심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이렇게 장편의 수필을 쓰시느라 고생하셨을걸 생각하니 또한 안타 깝구요. 선생님도 대조영 보세요? ^^* 열성적으로 사시는 모습과 대조가 되어서요. ㅎㅎ 선생님! 행복하신 모습이 역력하시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