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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와 함께 걷다> 한홍구
《한홍구와 걷다 - 평화의 눈길로 돌아본 한국 현대사》는 한국 현대사 전문가 한홍구 교수가 10여 년간 성공회대학교에서 진행한 교양 수업인 ‘문화답사기행’과 ‘문화유산탐방’에서 돌아본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장소 중 열 곳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고 있는 한홍구 교수는 단순히 보이는 유물이나 유적들에 대한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공간 속에 숨겨진 역사적 의미와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잘 전달하고 있다. 한홍구 교수가 설명하는 서울 근교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된 장소들은 굴곡이 많았던 우리 역사를 다시 되새길 수 있게 해 준다. - 출판사 서평 중
‘전쟁’을 기념하는 곳에 ‘평화’는 없다. - 전쟁기념관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에서 미8군, 육군본부가 있던 용산에 전쟁기념관이 있다.
세계의 전쟁 관련 시설 중 규모만 놓고 보면 제일 크다고 한다.
국방예산 1,226억 원을 들여 1990년 9월 28일 시작하여 1994년 6월 개관했다.
전쟁기념관 입구에 형제상. 국군‘형’과 인민군‘아우’의 모습.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멈춰선 시계.
호국추모실에 전사자 명부 (군인들의 이름만 기록). 군인이 아닌 죽음, 군인에 의한 죽음은?
6.25 전쟁실에 있는 육탄 3용사, 육탄 10용사.
전광판에 있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의 군사력 비교.
한강철교 폭파. 학도병의 전투장면.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북진. 그 10월 1일이 국군의 날.
전시생활관 – 피난민의 천막, 천막 학교의 모습, 전쟁 중의 생활상 등.
해외파병실 – 베트남전쟁 등
질문> 전쟁기념관이라는 명칭이 적절한가? 전쟁이 기념할 만한 것인가?
거기에 평화 또는 전쟁을 통한 아픔이 남아 있는가? 국군의 날은 언제로 해야 하나?
평화기념관 이라고 하면 어떨까? 평화기념관은 피해자의 시각과 입장에서 출발
2. ‘피해자’와 ‘역사’가 공존하는 곳 – 나눔의 집
1995년 12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가새골길 85에 위치. 031-768-0064.
1998년 8월 ㈜대동이 건물을 기부하여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개관.
지상2층, 지하1층, 총104평 대지 850여 평에 전문요양시설과 수련관 한 동, 사무실 한 동, 역사관 한 동이 있는 노인주거 복지시설.
‘정신대’라는 말이 널리 쓰였으나 지금은 잘 쓰지 않는다. 정신대는 일제의 전쟁 수행에 동원된 사람들을 통칭하기 때문에 위안부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한편, ‘일본군 성 노예’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할머니들은 싫어하신다고 한다.
대개의 전시 강간은 군 지휘부나 국가 지도층의 묵인 하에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군부의 적극적인 계획에 의해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제도화한, 국가에서 관리하는 제도적인 강간이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 시베리아 출병 등을 통해 전쟁에서 성병에 의한 전투력 손실 역시 엄청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가가 병사들에게 ‘깨끗한 성’을 관리하여 공급해 준다면 병사들의 사기도 높이 유지하면서 병력의 비전투 손실도 최소화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
이런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 등장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였다.
일본 정부, 한국 정부, 한일 시민사회 모두 책임이 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을 시작으로 공론화.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성 노예’를 주제로 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곳.
5개의 전시 공간 (나눔의 집 홈페이지를 참고)
‘제1전시공간–역사의 장’, ‘제2전시공간–증언의 장’,
‘제3전시공간–체험의 장’ : 실물크기로 재현된 ‘위안부의 방’, 사용하던 물품 등.
‘제4전시공간–기록의 장’ : 각종 문서와 사진 자료 전시. ‘위령의 장’ 이름도 흔적도 없는 여성들을 기림, 향로. 적으면 8만 많으면 20만 명으로 추산할 뿐, 일본군 위안부의 80%는 조선 사람. 신고한 사람은 겨우 243명.
‘제5전시공간–고발의 장’ : 할머니들이 그린 작품들을 주로 전시.
외부 전시공간 및 공연장 : 공연장 뒤쪽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상징하는 최초의 소녀상 ‘못 다핀 꽃’이 돌아가신 피해자 할머니들의 흉상과 함께 전시
수요집회, 기네스북에 기록.
질문> ‘위안부’라는 단어가 적절한가? 누구를 위안한다는 말인가? 미군 기지촌 문제, 라이따이한 등의 문제는?
3.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의 공간 – 국립 서울현충원
국립묘지(국립 서울현충원, 국립 대전현충원, 국립 영천호국원, 국립 임실호국원, 국립 이천호국원, 국립 산청호국원, 국립 4.19민주묘지, 국립 3.15민주묘지, 국립 5.18민주묘지 등)
143만 ㎡, 17만 2000여 위 안장
한국전쟁 이전에 희생된 대한민국 군인의 숫자는 약 8천 명.
현충문과 현충탑, 위패봉안관, 애국지사 묘역과 임시정부 요인 묘역, 충혼당, 박정희 대통령 부부 묘역, 장군 묘역, 이승만 대통령 부부 묘역, 김대중 대통령 묘역, 계엄군의 묘비, 김오랑 육군 중령 묘역(12.12 당시 특전사 비서실장),
(국립 대전현충원에는 친일파이자 김구암살 배후 김창룡 무덤과 김구 모친 곽낙원 여사 묘소.)
질문> 군인들의 죽음만을 기려야 하는가?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무덤은? 애국지사와 친일파의 묘역을 같은 곳에 둔 모순은?
4. 조선왕조의 상징이자 근대 민족 수난사의 비극적 상징 – 경복궁
서울에 있는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태조 이성계가 지은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때 선조와 중신들이 궁을 빠져나간 이후에 백성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살라진 아픈 역사,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광화문 - 일제에 의해 헐려지고 한국전쟁으로 목조로 된 부분이 불타, 박정희에 의해 엉터리로 복원. 해태상(해치), 고궁박물관, 북관대첩비, 1995년 조선총독부, 미군정,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해체.
흥례문, 영제교(금천, 금천교 시장의 간장 떡볶이, 산예), 근정문, 근정전(삼문삼조), 외조, 치조, 연조, 문신은 오른쪽 동문으로, 무신은 왼쪽의 서문으로 출입.
근정전의 마당은 박석이라는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어 깔아놓았다.
초기에는 근정전이 단층이었으나 대원군이 복층으로.
경회루-연산군, 수정전, 사정전의 뒤편에는 강녕전과 교태전, 시어소, 아미산- 굴뚝 네 개(박쥐). 자경전, 민속박물관, 향원정 2층 한옥 정자-1887년 고종이 최초로 전깃불, 열상진원, 건청궁-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참살, 집옥재-고종의 서재.
경복궁은 200여 년은 정궁으로, 270여 년간은 쑥대밭으로.
질문> 경복궁과 광화문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은?
5. 역사적 현장은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 독립공원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1897년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글씨를 누가 썼을까? 독립협회 위원장을 지냈고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완용이라고도 하고 독립협회 회원이자 대한협의회 회장을 지낸, 당대의 명필 동농 김가진 선생이라고도 함.
서재필 동상 독립신문 창간자, 주필은 주시경, 한글전용신문.
3.1독립선언문, 독립관, 1908년 경성감옥(후에 서대문 형무소), 망루, 여사(여성수감자)
경성감옥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서, 서울구치소
1992년 서대문 독립공원,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역사관은 옛 보안과 청사 건물.
1층 ‘추모의 장’, 2층 ‘역사의 장’, 지하 1층 ‘체험의 장’ - 고물기술자
중앙사와 부채꼴 형태 제10, 11, 12옥사 (파놉티콘) 방사형 구조. 위령탑, 사형장
질문> 맹목적 반일감정 보다 제국주와 일제의 잔혹상을 고발하고 있는가?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고 있는가? 반고문 인권 박물관은 어떠한가? 사형제도에 대한 의견은?
6. 풀뿌리 하나에도 역사가 숨 쉰다 - 강화도
단군에서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를 농축해 놓은 곳이 강화역사관.
강화외성 쌓는 모형, 용흥궁(철종의 생가), 수자기(帥字旗), 선정비,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 고금상정예문의 발행부수 28부, 조선왕조실록 4부, 조봉암 추모비, 추모비 건립을 위해 돈을 낸 사람들의 명단-강화와 인천의 유지들, 용흥궁-철종 잠저 구기, 성공회 강화성당-한옥건물 목재를 백두산에서 벌채 운송 1900년 4월 16일 오시에 상량 단층인 중층형 구조 베드로의 천국의 열쇠 바울의 칼 보리수나무 회화나무, 고려궁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2004년에 복원 이방은 월급을 받지 않고 ‘적당히’ 먹고 살았다., 선원 김상용 순절비, 고인돌-세계고인돌의 80%, 양명학자 장제두 친민(親民) 소론의 거두, 양명학-실학-민족사학, 화도면 사기리의 이건창 생가와 양도면 건평리에 있는 이건창 묘소-보수파이면서 철저한 개혁가 암행어사,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용두돈대, 쌍충비, 무명용사 묘지, 손돌목
질문> 조봉암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자기와 신미양요 병인양요에 대한 의견은? 양명학자 장제두의 정신, 이건창의 정신은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는가? 광성보를 보고 온 견해는?
7. 미완의 혁명이 땅에 묻혀 있는 곳 - 국립 4.19 민주묘지
4월 혁명(마산3.15의거 포함)은 185명의 희생자, 현재는 224분의 합동 분묘.
4.19묘지 책임자 조각가 김경승-독립운동가의 동상, 민족주의자들의 동상, 외국장수의 동상, 독재자의 동상,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젊은 넋들을 추모하는 기념물.
김영삼 정권은 1993년 4.19묘지 ‘성역화’ 사업.
묘지에는 주로 대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이 묻혀있다.
묘지 뒤편으로 유영봉안소, 지역주의, 4.19혁명기념관 지상2층 지하1층,
질문> 어린 학생들이 왜 죽음을 각오하고 민주주의를 외쳤을까? 남북간의 친일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지역주의는 과연 타파될 수 있을까?
8. 서울, 민주화 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 공포정치의 무대 ‘남산’과 민주화의 성지 ‘명동성당’
남산의 서울유스호스텔-중앙정보부와 안기부 국내파트가 있던 건물
(민주화 운동 기념관, 인권 기념관이 들어서는 것이 적절한 것이 아닌가?)
당시 이 지하실에 끌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균형발전본부 청사, 교통방송 건물은 공사 중
소방재난본부, 시청 별관 등은 아직 운영 중
한일합방의 조약이 비밀리에 체결된 곳
임진왜란 때 일본식 성을 쌓아서 왜성대라 한 곳에 일본 공사관이 들어섰다. 현재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일대,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
현재 신라호텔 자리에는 박문사 라는 절, 원래 장충단은 을미사변 당시 온몸으로 일본 낭인을 막다가 희생된 조선의 충신들을 기리는 곳.
과거의 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죄의 흔적을 지워서는 안된다.
안기부장 공관은 문학의 집으로, 각종 건물들은 서울시 별관으로 사용 중.
명동성당(옛 이름은 명례방, 종현대성당, 명동대성당), 1784년 이승훈 등에 의해 최초의 신앙공동체, 선교사 없이 현지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최초 사례.
1894년 공사를 시작하여 1898년에 축성.
김수환 47세에 추기경에 서임,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결성.
1987년 6월 항쟁, 민주화의 성지였으나 지금은 변해버렸다.
질문> 옛 안기부 청사 등을 어떻게 운용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경술국치의 치욕이 서린 곳에 대한 평가는? 민주화의 성지였던 명동성당에 대한 평가는?
9. 민주주의가 태어나는 곳 - 광장
광화문 광장에서부터 청계 광장, 서울시청 광장, 남대문 앞 광장, 서울역 광장.
1978년 6월 26일 광화문에서 대학생들의 연합시위.
1980년 5월 14일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시위.
1987년 6월 항쟁, 이한열 영구 행렬.
2002년 월드컵. 2002년 11월, 12월 광화문 광장 미군장갑차 희생 여중생(미선이, 효순이)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 국민mt, 축제 같은 분위기
2008년 이명박 정부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 명박산성,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 노제.
질문> 2016년 10월 29일 이후 진행된 박근혜 하야, 탄핵 집회에 대한 의견?
광장에 있으면 겪은 에피소드나 경험담, 개인의 의견은? 사이버 상의 광장은?
10. 외래 문물이 상륙하던 관문 인천 -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국내 차이나타운은 인천에만 존속 중.
패루-동종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던 동네인 방(坊)의 입구에 세운 문루
차이나타운에 있는 패루는 2000년에 중국 웨이하이 시의 기증으로 세워진 것.
1997년 말의 외환 위기 이후 활기를 띠기 시작.
자장면 거리, 공화춘, 자장면의 역사는 화교의 역사.
한국의 화교는 산둥 성 출신이 대부분. 풍미-제일 크고 오래된 집, 동순태(잡화점)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핍박, 2차 화폐개혁,
중산학교-인천의 유일한 화교 학교. 중산은 손문의 호. 청천백일기 대만의 국기
복래춘(월병과 공갈빵), 일본조차지-조선은행 인천지점 건물 제일은행 18은행(인천 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현재 중구청은 옛 일본 영사관 이후 인천시청 이후 1986년 중구청
조계지 계단(청국과 일본의 경계), 자유공원(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1888년 미영러청일 등 각국 외교관 러시아 토목기사 사마틴이 측량 각국 공원으로 획정, 만국공원에서 서공원으로 개칭,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하여 맥아더 동상을 건립하고 자유공원으로 명명.
질문> 화교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한편, 해외로 나가 정착한 교포들에 대한 생각은? 맥아더에 대한 평가? 그 동상에 대한 견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