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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이동민
12) 다시, 평면으로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ㅇ(앙리 마티스)
잭슨 폴록의 흘리기 그림의 전면화(all ovet painting)
(배넷 뉴먼의 색면화)
서양 미술사에서 착시와 환영으로 입체감과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 그림은 고전주의 회화에서 절정을 이룬다. 미술 교육은 환영을 만들어 내는 기법을 익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고전주의 미술이 서양 미술의 전범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19세기 중엽이 되자 서서히 변화가 나타났다. 사진기의 등장이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자연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는 사진기의 기능을 회화가 따라잡기에는 힘에 겨웠다. 예술과 비예술이라는 구분 짓기로 사진을 미술에서 따돌려버렸지만 그림이 초상화와 기록물의 영역을 지켜내기는 어려웠다. 동, 서양의 교류가 왕성해지자 평면성의 동양 그림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밝은 색상의 일본 판화(우끼요에)는 평면이면서도 환영식으로 그린 서양 회화에 조금도 못하지 않는 감동을 주었다.
착시 효과에 의존하였던 서양 회화가 서서히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다. 마네는 1866년에 ‘피리부는 소년’을 그렸다. 손과 발의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그림이다. 배경도 종이를 바르듯이 단순화시키므로 배경이 사라져 버렸다. 이 그림은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을 배제하고 대상을 단순화시켰지만 오히려 더 강력한 장식적 흥미를 일으켰다. 강한 색상을 대비시키므로 색의 조화에 의한 효과를 강조한 그림이었다. 마네는 이외에도 몇 몇의 작품에서 명암법과 원근법을 무시하고 평면으로 보이도록 그렸다. 그림에서 착시 효과만이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은 그 시대에는 인정받지 못 하였다. 살롱전에서도 뽑아주지 않았다.
철학이나 예술을 이야기를 할 때 양 극점을 설정하는 것을 흔히 본다. 예로서 플라톤의 이상적인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제적인 것의 대비로, 칸트의 정신적인 것과 헤겔의 사회적 현실 사이를 양극으로 설정한다. 예술의 흐름은 양 극점 사이를 왕복하는 주기성으로 설명하는 것을 본다. 회화사는 평면에서 착시에 의하여 환영을 만들어 온 긴 과정을 보여준다. 환영이라는 한 쪽 극점에 도달한 회화가 다시 반대편인 평면을 향하여 되돌아가는 것이 오늘의 미술이다.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준 화가는 마네이다.
세잔은 그림을 색면의 조합으로 보았다. 세잔 그림이 원근법을 무시한 순수한 평면화는 아니지만 평면적인 색면에 눈을 뜬 화가이다. 그가 변화의 물꾜를 틀자 입체감의 중요성이 점점 줄어 들었다. 세잔과 동시대의 화가인 고갱은 남태평양의 섬으로 들어가서 원시미술을 찾아 나섰다. 고갱은 서양 회화의 전통인 자연의 정확한 재현을 버렸다. 중앙 원근법과 음영을 무시함으로 양감 나타내기를 포기하였다. 세부의 묘사마저 등한시 함으로 화면을 완전히 평면화 하였다. 넓은 색면은 이집트와 그리스까지, 그리고 페루, 자바, 일본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의 고대 미술로 되돌아 갔다.
1899년에 마티스는 색상을 통하여 강렬한 장식성을 추구한 ‘스튜디오의 누드’를 그렸다. 그의 의도는 인상주의 이래로 전개되어 온 회화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회화의 평면성에 하나의 족적을 남겼다. 여인의 인체는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서 주홍의 단일색으로 칠하였다. 주위와 배경의 색도 사실적인 색채와 무관하게 임의로 선택한 색을 칠하였다. 전통적으로 인체의 입체감은 어둡고, 밝은 색의 대비로 이끌어 내었다. 반면에 마티스는 따뜻하고 찬 책의 대비로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원근법과 공간감을 나타내고 있지만 전통적인 그림에 비하면 평면에 가깝다. 성긴 붓질과 꼼꼼한 붓질을 함으로 색상만을도 공간감을 나타내었다. 1910년에 발표한 작품 ‘춤’은 주황의 단색으로 고르게 칠하여 평면으로 처리한 다섯 명의 누드 군상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그림이다. 배경의 상단은 청색으로, 하단은 진한 녹색으로 하였다. 역시 단색으로 처리함으로 공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원시미술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함으로 회화가 다시 고대 미술의 평면성으로 환원하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였다.
서양 회화사에 1907년은 아주 의미 있는 년도로 치부한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피카소도 원시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형상의 표현을 위하여 환영에 의한 재현의 방법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았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피카소가 오래 동안 고대 미술과 원시미술을 탐색한 결과로서 단순하고, 고졸하게 그렸다. 서양 미술의 전통인 원근법과 공간감을 무시한 낯 선 작품이 되었다. 이전의 그림에는 인체와 인체 사이의 공간은 단지 배경으로 간주하였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는 인체 사이의 공간도 그 자체만으로 형태를 가진다. 인체와 동등하게 날카로운 파편으로 분해하여 서로 혼합하고, 침투하여 인체와 유사하도록 표현하였다.
피카소의 의도야 어떠하였든 간에 양감과 공간감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폐기되었다. 입체감의 표현 방법은 명암법이다. 명암법은 오직 회색을 여러 단계나. 색조의 변화를 통하여 형태를 환영적인 입체 효과를 만들므로 나타냈다. 피카소의 그림은 형태의 입체감을 파괴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은 오히려 형태의 입체감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는 방법으로 평면화를 그린 것이다. 피카소는 마티스가 택한 색채도 버렸고, 물리적인 광학 법칙도 버렸다. 회화는 회화 고유의 표현 법칙이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 회화의 원리를 새롭게 세웠다.
말레비치는 환영에 의한 재현 대신에 회화의 자율적인 법칙이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여 그림을 그렸다. 회화에서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찾아 나섰다. 이제는 재현이니, 환영이니, 명암법인, 원근법이니 하는 전통적인 회화의 논리가 발붙일 수 없었다. 회화의 본질로서 색상과 평면만이 남게 되었다. 형태로서는 사각형을 겹치게 함으로 구석기 시대의 양식으로 돌아갔다.
몬드리안은 오래 동안 네델란드에서 자연주의 기법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수직선과 수평선을 강조하여 대상물을 단순화 시키면서 공간감은 아예 무시해버렸다. 원근법은 없어져 버리고, 그림이 걸린 벽면을 연상시키는 사각형의 그물 조직이 나타내는 균등성과 정지성이 기반을 이루었다.
야수파의 평면회화와 원시적인 민속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칸딘스키는 재현적인 모든 요소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색상과 색조, 붓자국은 의식적인 구획에 의하지 않고 잠재적인 무의식에 의한 감정의 표현을 우선하였다. 칸딘스키 회화는 의식적으로 화면을 구획하는 양식이 아니고,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렸다. 이제는 명암법과 원근법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닐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회화 이론을 60회 생일 때 ‘점과 선이 평면으로’라는 책으로 발표하였다. 명암법과 원근법에 의존하였던 회화가 평면 위에 색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허용하였다.
추상으로 흐르지 않는 화가들도 명암법과 원근법의 규칙을 무시하였다. 표현주의 계열의 화가들은 평면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공간감을 무시하는 그림을 그렸다.
나치스가 독일을 지배하는 동안에 전통 회화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은 퇴폐적인 그림을 그린다면서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압제를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 갔다. 미국으로 이주한 화가들에 의하여 추상표현주의라고 부르는 미국의 평면화가 꽃을 피웠다.
미국으로 망명한 아쉴 고르키는 명암법과 원근법을 무시하고, 거대한 화면에 아주 빠른 속도로 색을 칠하는 작업을 하였다. 자동기술적인 방법으로 붓질을 함으로 무의식을 표현하였다. 감정을 화면에 담았다. 형태는 없어져 버리고 물감이 멋대로 뒤엉켜 있는 무정형의 평면 그림을 그렸다. 그는 고독을 이기지 못하여 1947년에 자살을 하였지만 미국 화단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에서 평면의 화면에 형태가 없는 그림을 그리는 미술 운동이 일어났다. 추상표현주의라고 부르는 미술은 당시의 미술사에 주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잭슨 폴록은 거대한 화면에 물감을 뿌리기와 흘리기로 동일한 화면을 구성하였다. 형체도, 입체감도, 공간감도 없는 평면의 회화이었다. 잭슨 폴록은 2차 대전 중에 미국으로 건너온 유럽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거대한 화면을 균일하게 처리하여 동질적이고 단일한 이미지를 만드는 올 오브 페인팅을 그렸다. 환영을 지우고 오로지 미물체적이고, 무중력 상태를 창조하였다. 화면에 꼬불꼬불한 선과 혼재하는 색상만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 1949년에 라이프지가 잭슨 폴록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생존 화가로 평가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부터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미술 시대를 열었다.
미술의 평면성을 다루는 이야기에서는 벗어나지만 미술에 대한 정치적 영향을 잠시 언급해보자. 미술사에서 미국은 한 번도 중심에 서보지 못한 변방이었다. 2차 대전의 영향으로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미국의 국제적 위상은 한껏 높아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는 적대 관계를 유지한 냉전시대가 열렸다. 미국은 소련의 사회 통제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는 방법으로 예술에서 자유를 내세웠다. 미술에서는 자유로운 표현 즉, 자유를 선전하기 위하여 추상표현주의를 대대적으로 부각시켰다고 한다.
당시의 소련은 회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하여 사실적인 그림만을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적 그림이 아니면 반사회주의 그림이라고 하여 제한하였다. 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는 억제를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화가가 제 멋대로 그리는(자동기술법에 의한) 추상표현주의를 두고 예술의 자유를 내세우므로 정치적 선전을 하였다. 또한 체제의 우위를 선전하였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미술평론가인 그린버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회화 미술에서 더 이상 감축할 수 없는 것은 이를 구성하는 두 가지 관행 즉, 평명성과 평면의 구획이다.”
회화에서 환영의 착시 효과는 비본질적 것으로 간주하고, 회화의 본질은 평면성이라고 하였다. 잭슨 폴록 이후의 미국 미술은 미술사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술도 그린버그가 주장한 평면성 그림으로 흘러갔다. 전통적으로 형태, 공간, 색채들이 화면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 회화이었다면, 2차 대전 이후의 미국에서 형태와 공간감을 무시하고, 선, 면, 색으로 단순화한 그림으로 나아갔다.
화면에 붓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거나, 잭슨 폴록처럼 선과 색이 뒤엉킨 그림은 다시 선, 면, 색을 단순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린버거가 주장한 그림으로 바뀌어 갔다.
바넷 뉴먼은 단일 색의 단일 색조로 거대한 화면을 덮는 그림을 제작하였다. 선적인 색으로 거대한 화면을 분할하는 형식의 그림을 그렸다. 공간감과 입체감이 배제되어 버리면 환영이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거대한 화면의 단일 색상이 주는 심적 충격과 정신적 신비감만 느껴진다. 벽면 전체를 가득 매운 단일 색상의 화면을 바라보는 감상자는 충격적인 느낌을 받는다. 미의 개념도 심리적인 쾌에서 심리적 충격으로 해석하였다. 단일한 색면이 구획되는 양식의 그림에 미국에서 많은 추종자가 나타났다. 그림에서 환영에 의한 형태감을 없애버린 대신에 강력한 색채에 의한 시각 효과을 증대시켰다. 그림은 이제 완전히 평면화 되었다. 너무나 극단적으로 간결하게, 또 평면적으로 그린 그림은 무모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환영이 주는 착시 효과를 배제하고 색이 주는 충격적인 방법은 오히려 회의를 부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다시 방향을 틀 씨앗이 배태되었다고 할까.
환영과 평면의 양 극단을 왕복하는 것이 미술사이다. 평면 쪽으로 극단으로 흘러가면 서서히 반전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현대 미술이 예전의 미술로 되돌아 가지는 않는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미술이 다시 구상미술로 되돌아 가는 것을 경험한다. 사진보다도 더 극도로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거나, 신구상 회화, 또는 신표현주의 미술이 등장한다. 그뿐 아니고 트랜스 아방가르드라는 양식의 구상회화도 나타난다. 미술사도 역사의 한 갈래인 만큼 한쪽 방향으로만 끝없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