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인기드라마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대하드라마 [야인시대]가 8월 20일(화) 제8회 후반부터 소년 김두한 시대에서 청년 김두한 시대로 건너뛴다.
본격 청년 김두한 시대의 도래로 당당한 사나이들의 승부세계와 조국애, 사랑등이 선굵게 펼쳐진다. 그 동안 액션스쿨을 다니며 연기력을 다진 청년 김두한역의 안재모는 "최선을 다해서 드라마 속 실제 김두한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두한(곽정욱)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빠진다. 친할머니(정영숙)는 아버지가 못다 이룬 뜻을 이루어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두한에게 충고한다. 독립운동가 유태권(장동직)은 두한에게 단 일격에 상대를 무너뜨리는 권법 필살의 도를 가르쳐준다. 또 유태권은 필살의 도를 배우게 되면 인간도 보고 싸움도 볼 수가 있다며 세상을 혼자 사는 방법을 알아야 된다고 충고한다. 두한은 열심히 배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미와(이재용) 경부는 원노인(이순재)이 운영하는 설렁탕집이 수상하자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를 눈치챈 원노인은 유태권에게 몸을 피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고 유태권도 만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며칠후 유태권은 두한에게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만주로 떠난다.
한편 세월이 흘러 두한(안재모)은 17세의 청년이 된다. 두한이 만주로 가서 아버지처럼 독립군이 되고 싶다고 말하자 원노인은 주변상황이 좋지않다며 만류하는데….
씬 삼청동 방 안
두한이 박군과 안으로 들어온다. 방안의 어두운 기운을 느끼고 멈칫한다.
조모: 두한아... 이리 와 앉거라..
두한이 그 앞에 가 앉는다.
조모: 두한아...
두한: 예..
조모: 지금부터 이 할미가 하는 얘기 잘 듣거라.
두한: ...........?
조모: ....두한아...(그러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오씨: (눈물).............
두한: .............?
조모: 두한아.. 네 아비가.. 네 아비가 세상을 떠났단다.
두한: ..............?
조모: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말이다.
두한: (충격) 아, 아버님이요? 아버님이요...?
두한의 그 놀란 모습에서...
# 1 삼청동 방안
조모: 두한아, 잘 듣거라. 네 아버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셨단다.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왜놈들과 싸우다가 돌아가신 것이야.
두한: ............
두한이 눈물을 참으려 입을 굳게 앙다문다. 그러나 굵은 눈물이 한줄기 떨어져 내린다. 그때 김좌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두한에게 들려온다.
김좌진: (E)울다니.. 장부가 눈물을 보여서야 되겠느냐? 독립군이란.. 오로지 싸우는 것뿐이란다. 싸우고 또 싸우고....죽고 또 죽어서 광복의 그 날만을 바라보는 것이 독립군의 운명이니라.
두한이 주먹으로 눈물을 훔친다.
조모: 두한아..
두한: ......예, 할머니.
조모: 이제 네가 네 아비의 대를 이어야 하느니라.. 작게는 우리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것이며, 크게는 아비가 못다 이룬 뜻을 네가 이뤄야 할 것이니라. 알겠느냐?
두한: ............
조모: 알겠느냐고 할미가 묻지 않느냐?
두한: ...예, 할머니..
조모: 훌륭하게 커야 한다. 네 아비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두한: 예..
조모: (끄덕이며) 그래.... 그럼 됐느니라.
두한: ..............
조모: 원서방.
원노인: 예, 큰마님.
조모: 두한이 데리고 그만 일어서게.
원노인: 예?
조모: 그리고 에미야. 밖에 숯이 다 되었을 게다.. 들여오너라.
오씨: ...........?
조모: 바느질감이 많이 밀렸느니라. 손님들에게 약속은 지켜주어야지. (바느질감을 뒤적거린다)
오씨: .................
조모: 뭐하고 있는 게냐? 어서 숯을 가져오래두.. 원서방 자네두 어서 그만 가 보아.
원노인: 예, 큰마님. 자, 두한아, 일어나거라.
두한이 일어나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다. 끄덕이는 친조모. 원노인과 두한, 박군이 밖으로 나가고 오씨도 따라나간다. 그들이 나가고 나면 일감을 놓는 친조모. 비로소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모습에서...
# 2 동 밖(밤)
원노인과 두한, 박군이 대문 밖으로 나온다. 오씨도 따라 나온다. 이제 비는 그쳤다. 찬바람만 소리를 내며 불어대고 있다.
원노인: 나오지 마십시오. 바람이 찹습니다.
오씨: 괜찮습니다. (두한의 뺨을 어루만지며) 두한아.. 할머니 말씀 잘 들었지?
두한: 예, 큰어머니..
오씨: 그래.. 우리 두한이는 잘 할 게야.. 이렇게 아버지를 쏙 빼어 닮았는데.. (눈물이 글썽인다)
두한: ...............
오씨: 가거라.. 이 에미가 보살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원노인에게) 영감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원노인: 예, 염려 마십시오. 그럼 저희들은 이만..
오씨: .......
원노인이 두한을 데리고 멀어져 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오씨가 눈물을 짓고 있다.
오씨: 두한이가 천애의 고아가 되어가는구나. 친부모가 다 세상을 버렸으니 이 일을 어이할꼬...?
# 3 종로 거리(밤)
전차가 경적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다. 원노인과 두한, 박군이 전차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곳을 건너온다.
원노인: 두한아,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사람이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마련이니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는 것이겠지.
두한: ..............
원노인: 네 아버님이신 장군님은 누구보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한 세상을 사셨느니라. 정말이지 너무도 위대한 분이셨다.
두한: ..............
원노인: 두한아, 더욱 강해져야 한다.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서 살아가자면 차돌처럼 단단해져야 하느니라. 나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를 목숨이고, 삼청동에 계시는 조모님이나 큰어머니도 너와 함께 사실 형편이 못되시느니라.
두한: ..............
원노인: 유태권 아저씨에게 무예를 열심히 배우거라. 언젠가는 너도 장군님처럼 위대한 독립군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제부터는 조국이 너의 부모라 생각하거라. 조국이 너를 단련시키고 강한 사내로 키워줄 것이니라.
두한은 생각이 많다. 뭔가를 다짐하듯 입술을 굳게 다문다. 그 위로 미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 4 명월관
미와와 형사들이 기분 좋게 웃고 있다. 고등계 형사들이 회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생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무라: 하하하..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습니다, 경부님. 그 동안 김좌진이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습니까?
미와: 그랬지.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골치가 아팠어. 굵직한 사건마다 김좌진이라는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어. 지긋지긋했지. 하지만 그렇게 죽고 나니 좀 서운한 감이 있구만.
오무라: 예?
미와: 김좌진 그 자는 내 손으로 꼭 죽이고 싶었는데 말이야.
문달영: 역시 미와 경부님다운 말씀이십니다. 하하하..
미와: 하지만 김좌진과의 악연이 여기서 다 끝난 것은 아니야. 그 자의 잔당들이 아직 국내에 잔존해 있는 게 틀림없고, 또 그 자의 아들 긴또깡이 이 종로 바닥에서 살고 있어.
김태서: 그렇습니다. 정기적으로 긴또깡이 살고 있는 사동옥을 감시해 왔는데 아무래도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미와: 그럴 게야. 뭔가 있을 게야. 계속 주시해 보게. 언젠가는 단서가 잡힐 게야.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우편물.. 그리고 그곳 동정을 늘 감시해야 해.
김태서: 알겠습니다, 경부님.
미와: 김좌진이 죽었으니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게야. 지하로 숨어들기 전에 어떻게든 놈들의 뿌리를 뽑아야 해.
김태서: 걱정 마십쇼. 반드시 놈들을 일망타진하겠습니다.
미와: (미소) 어쨌거나 아주 재미있게 됐어. 낮에 그 최기자의 표정을 보았나? 참으로 볼 만 하더군.
오무라: 하하하.. 맞습니다. 최기자가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미와: 사동옥도 볼만 할 거야. 말 그대로 초상집이 아닌가? 그래 정말 재미있겠어.. 하하하하...
미와의 그 교활한 웃음에서..
# 5 신문사 외경(밤)
국장: (E)자 이제 그만 일어들 나지.
# 6 동 안
여느 때와는 달리 그 곳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다. 모두들 침울한 표정들이다.
국장: 이런다고 죽은 백야가 살아나기도 한단 말인가? 일어들 나.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세. (일어난다)
기자1: (한숨처럼) 그러시죠. 술이라도 마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습니다. 세상에 김좌진 장군이 죽다니요?
기자1이 일어서자 다른 기자들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최동열은 깊은 생각에 빠져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국장: 최기자. 이봐, 최기자. 같이 안 나갈 거야?
최동열: 먼저들 가십시오. 전 남아서 할 일도 있고...
기자2: 오늘 같은 날 일은 무슨...
국장: 그래, 자네는 할 일이 있을 게야. 우리 먼저 가네.
국장과 기자들이 그렇게 밖으로 빠져나간다.
최동열: (소리) 믿을 수가 없다. 김좌진 장군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 그것도 동족의 총탄에 그렇게 가시다니.... 그 분은 나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게 하신 분이시다. 아, 아.... 그 분이 가시다니...
최동열은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 생각에서...
# 7 최동열의 집(회상)
문이 벌컥 열리고 김좌진과 독립군 2명이 권총을 들고 뛰어든다. 놀라는 최동열의 아버지(이하 동열부)... 잣죽을 들며 아들과 마주 앉아 있다가 수저를 떨어뜨린다.
김좌진: 내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당신은 중추원 참의 최상우..
최동열: 당신들은.... 누구요....?
김좌진: 나를 아는가 물었다. 최상우, 이 매국노.. 나라를 판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생활이 어떠하던가?
동열부: (떨며) 사.... 살려 주시오.. 살려만 주시오... 김좌진 선생..
최동열: ......김좌진? 그 독립군...?
김좌진: 너희들은 쌀밥에 고깃국 먹고 일본에 머릴 조아리고 있을 때 이 나라 백성들은 원한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 속에 죽어 가는 걸 아는가?
동열부: 살려만 주시오.. 그저 살려만 주시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소이다. 내가 무얼 알겠소? 나는 무식해서 모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김좌진: 그랬겠지.. 그래서 돈도 받고, 재산도 늘리고 처자식과 호의호식 잘 삭고 있는 게 아닌가? 일본의 개, 주구가 되어서 말이다.
동열부: 아이구 제발...
최동열: ...........
김좌진: 조국에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조국 독립에 쓸 자금과 네 목숨을 내 놓아야겠다.
동열부, 급히 돈궤와 땅문서들을 허둥지둥 찾아 내놓는다.
동열부: 예 예 여기 있습니다. 다 가져 가십시오. 허지만 이완용이나 송병준에 비하면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저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김좌진: 그렇게도 살고 싶은가?
동열부: 예, 살고 싶습니다.
김좌진: 자식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가?
동열부: 제발 목숨만... 아이구 목숨만....
김좌진: (동열을 보며) 잘 보게 젊은이. 이것이 조국을 팔아먹은 매국노의 모습일세. 여기 오기 전 잠시 알아보았네. 경성제대에 다녔고 유학도 다녀왔다지?
최동열: ...........?
동열부: 그 정도의 최고학부를 나와서 뭘 하려는가?
최동열: ............
김좌진: 젊은이의 부친은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알고 있네.
동열부: 그러믄입쇼. 알고 있구 말구요. 어찌할 수 없어서 그저..
김좌진: 아비의 죄를 갚아볼 용기는 없는가? 누가 뭐래도 자네에겐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자네를 보아 부친의 목숨은 살려주겠네.
돈을 챙겨 태연히 일어선다. 문을 나가며 다시 최동열과 시선이 마주치는 김좌진. 이윽고 사라진다.
동열부: 고맙습니다.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최동열: .....
# 8 현실
괴로운 듯 책상에 발을 걸쳐놓고 회상에 잠겼던 최동열이 깨어난다. 그리고 물끄러미 어둠에 잠겨 있는 밖을 본다.
최동열: (E)그래, 사람들은 이런 기록을 역사라고 하는 것 같다. 내 아버님의 그 부끄러운 친일이나 혹은 김좌진 장군의 죽음 같은 것 말이다. 역사라...? 나는 훗날 알았다. 큰 역사의 강줄기 속에 또 다른 많은 역사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서 있는 이 종로는 머지않아 바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그 긴또깡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구마적과 내 유학 후배인 신마적 엄동욱, 그리고 저 혼마찌패 하야시들의 그 무서운 세력들을 밀어내고 김좌진 장군의 아들 두한이가 다음의 역사를 지배하는 것이다. 조선 주먹의 역사를 말이다.
최동열의 그 독백과 함께 치열한 종로통의 결투장면들이 지나친다. 하야시패들과 구마적의 패들이 어우러져 접전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스쳐 가는 구마적, 신마적과 하야시들의 면면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이어지면서 최동열의 그 담배 연기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최동열이 생각에서 깨어난다. 계속해 울어대는 전화를 한참 멍하니 보다가 수화기를 집어든다.
최동열: 예, 중외일봅니다. (사이) 춘성 스님? (사이) 예... 만해 스님께서요? 예... 알겠습니다. 내일 찾아 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최동열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다.
# 9 사동옥 외경(낮)
'今日休業' 이라는 푯말이 창문에 붙어 있다. 행인들이 의아하게 보며 지나친다.
# 10 동 밀실
김좌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향불이 타오르고 있다. 두한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아버지의 영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원노인과 유태권이 그 옆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두한: (E)아버님..원수를 갚아드리겠습니다. 이 두한이가 그렇게 할 거예요.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한 일본놈들에게 꼭 복수해 드릴 게요.
앙다문 그의 얼굴 위로..
해설: 그랬다. 평생을 야인으로 산 김두한에게 있어 아버지 김좌진의 존재는 이 때부터 신앙 그 자체가 된다. 그는 평생 아버지처럼 살고자 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당시 어렸던 김두한은 김좌진이 일본인에게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복잡한 민족진영의 알력에 대해 원노인은 설명을 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때문에 김두한은 누구보다도 일본에 대해 크나큰 적개심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해설이 끝나면 박군이 안으로 들어온다.
박군: 영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최기자님하고 어떤 스님 한 분이 같이 오셨는데요..
원노인: 스님이라구? 어서 안으로 뫼시거라.
박군: (잠시 밖으로 나가) 들어오십쇼.
원노인들이 일어나면, 최동열에 이어 만해가 들어와 합장을 한다.
원노인: (놀라) 아니... 만해 그가 아니신지요?
만해: 예.. 언젠가 최기자한테 백야의 아들이 이 곳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노인: (감격)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두한아 어서 인사드리거라. 만해 그이시니라.
두한: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
만해: 오.. 네가 백야의 아들이냐?
두한: 예.
만해: 그 녀석.. 아버지를 빼어 닮았구나. 참으로 많이 닮았어.
만해가 그렇게 두한을 보다가 영정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합장을 한다.
만해: (한참만에) ........백야.. 이보시게, 백야..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나라 백성들은 어찌하라구 그렇게 훌쩍 떠나버렸는가? 허허, 하늘도 야속하구먼.. 이 나라 조선은 어찌하란 말인가? 청운의 뜻을 다 펴지 못하고 그렇게 떠났단 말인가? 백야, 얼마나 한이 크시겠는가? 이 늙은 중이 편안히 극락왕생 하라고 염불 한자리 해주려고 왔다네.
만해가 바랑에서 목탁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하며, 염불을 왼다. 염불 소리가 조용히 이어지면서, 모두들의 표정이 경건해진다. 흐르는 두한의 그 눈물에서...
# 11 삼청동
호롱불 아래서 두 여인이 말없이 바느질을 하고 있다. 오씨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내쉰다.
조모: 웬 한숨이냐?
오씨: ...........저 어머님..
조모: 말해보거라.
오씨: 어떻게 해서든 아범의 시신을 모셔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모: 시신을?
오씨: 시신이나마 조선 땅에 묻혀야 아범도 편히 눈을 감지 않겠습니까?
조모: (끄덕이며) 그럴 테지..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법한 일이냐? 만주에 있는 시신을 어떻게 여기까지 옮겨 올 수 있단 말이냐?
오씨: 원노인에게 도움을 청하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조모: 도처에 감시의 눈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시신을 어떻게 가져오겠다는 게냐?
오씨: ............?
조모: 어려운 얘기다. 지금은 그게 그리 급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막중한 일을 어찌 아녀자들끼리 치를 수 있겠느냐? 두한이와 의논을 해야지. 두한이가 큰 다음에...
# 12 사동옥 외경(밤)
유태권: (E)이제 너에게 본격적으로 무술을 가르칠 때가 된 것 같구나.
# 13 동 마당
유태권과 두한이 마주해 앉아 있다.
유태권: 그 동안 너는 그 나이에 참으로 어려운 수련을 통과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차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두한: .................
유태권: 참 잘 이겨냈다. 내가 처음 무술을 접한 건 바로 너 정도 나이 때였을 것이다. 처음엔 택견을 배웠지.. 우리 민족 고유의 무술인 택견 말이다. 나라가 망하고 나는 중국 대륙을 떠돌아 다녔다. 여러 독립 단체를 전전하다가 마적떼에 끌려가기도 했고, 수없이 죽을 뻔하였지.
두한: .................
유태권: 너희 아버님이신 김좌진 장군님을 만난 것도 그때 쯤이었지.. 그리고, 비로소 우리의 적들을 죽이는데 이 싸움하는 기술인 무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서 수없이 싸웠고, 수없이 죽였다.
두한: 죽였... 어요...?
유태권: 왜, 허허허... 겁이 나느냐?
두한: ......(고개를 가로젓는다)
유태권: 내가 너에게 일러주려는 것이 바로 그 필살의 도다. 단 일격에 상대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권법 말이다.
두한: ..............
유태권: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너 스스로를 해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배우겠느냐?
두한: 예, 배우겠어요. 반드시 배우고야 말겠어요.
유태권: 무도가 있고 무술이 있다. 무도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법이 거기에 섞여 있는 것이고 무술이란 글자 그대로 기술이다. 힘을 쓰는 기술 말이다.
두한: ............?
유태권: 나는 주로 무술을 배웠다. 그러나 너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무술은 인간의 존엄을 헤친다. 그렇게 되면 싸움은 잘할 지 모르지만 망나니밖에 안 된다. 도와 술을 함께 배우거라. 필살의 도를 배우게 되면 인간도 보고 싸움도 볼 수가 있다. 아직 어리겠지만 그걸 알아야 한다.
두한: 네.
유태권: 이제 너는 혼자다. 이 세상을 혼자 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특히 너는 말이다. 알겠냐?
두한: 네, 아저씨.
두한의 타는 듯한 그 눈빛에서..
# 14 종로 주택가(낮)
정진영과 양코가 큰 망태기를 짊어지고 오고 있다. 양코는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망태기가 거추장스러운지 연신 몸을 뒤튼다.
양코: 에이.. 난 그냥 동냥질하는 게 좋은데...
정진영: 잠자코 따라와. 내가 봐둔 데가 여러 곳 있어.
저만치 큰 기와집 앞으로 다가간다. 대문 앞에 쓰레기를 모아둔 통이 놓여 있다. 정진영이 통을 열고 집게로 안을 헤집는다. 그리고는 헌옷 따위를 꺼낸다.
정진영: 봤지..? 이게 다 돈이라구.
정진영이 자신의 망태기에 헌옷을 담는다.
양코: 이렇게 해서 얼마나 벌겠냐?
정진영: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어. 자 저쪽으로 가자.
양코: 티끌이.. 뭐가 어쨌다구?
# 15 다른 골목
정진영이 어느 집 앞에 이르러 대문을 두드린다. 언젠가 밥덩이를 얻은 적이 있었던 그 집이다.
정진영: 계세요? 안에 아무도 안 계세요?
잠시 후 아낙이 대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정진영: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아낙: (인상을 찌푸리며) 또 너희들이야? 적선도 하루 이틀이지 우리 집 살림 거덜낼 참이냐? 다음에 오너라.
정진영: (다급하게) 잠깐만요.. 오늘은 동냥을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아낙: .............?
정진영: (한구석에 쌓아둔 신문과 쓰레기들을 가리키며) 저기 저.. 유리병과 신문을 가져가면 안될까요? 저 찌그러진 양재기도요.
아낙: 저걸 뭐에다 쓰게?
정진영: 저희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돼서요. 가져가두 되죠?
아낙: 그야 뭐... 마음대로 하려무나.
정진영: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양코야.
정진영과 양코가 집안으로 들어가 신문들을 챙긴다. 그 중 한 신문을 빼놓고 나머지를 망태기에 담는다.
아낙: 그건 왜 담지 않니?
정진영: 가면서 보려구요. 어제 신문이네요.
아낙: (놀라) 너 글을 읽을 줄 아니?
정진영: (긁적이며) 예.. 가자 양코야. 안녕히 계세요, 아주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아낙: ..응... 그래..
정진영과 양코가 밖으로 나간다. 아낙이 뻥해 보다가
아낙: 거지가 글을 다 읽다니... 세상에 별 일일세..
# 16 그 골목길
진영이 신문을 읽으면서 오고 있다. 양코가 기웃기웃 거리며 묻는다.
양코: 재밌냐? 뭐 재밌는 거 있어?
정진영: (귀찮다는 듯) 기다려봐.. 이건 조선일보인데... 이게 뭐야?
양코: 뭔데? 말 좀 해봐. 짜식.. 글 좀 읽는다고 되게 재네..
정진영: (별안간 놀란다) 엉? 이게 뭐야? 김좌진.. 사망?
양코: 뭔데? 뭔데 그래? 재밌는 얘기야? 응?
정진영: 김좌진이라면... 두한이 아버님인데..?
박군이 두한이를 데리러 온 장면이 짧게 스쳐지나간다.
정진영: 그래.. 그래서 그렇게 급히 간 거였구나. 아버지 때문이었어. (뒤돌아서 성큼성큼 앞서간다)
양코: 야, 어디가?
정진영: (돌아보며) 두한이한테... 두한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양코: 뭐?
# 17 사동옥
예전처럼 그 곳은 다시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박군과 유태권이 분주히 음식들을 나르고 있다. 한 테이블의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 카운터로 간다.
원노인: 맛있게 드셨습니까?
손님: 예.. 아주 잘 먹었습니다. (돈을 건넨다)
원노인: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손님들이 그렇게 나가고, 놀랍게도 미와가 오무라 형사와 함께 들어온다.
원노인: 어서 오십쇼.
하다가 흠칫 놀란다. 미와가 거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박군이 다가가 미와들을 맞는다. 유태권은 다른 손님들을 맞고 있다.
미와: 설렁탕에 머리카락이 빠졌어. 조선 음식점은 불결하고 더러워.
원노인: .....바꿔 드리겠습니다. 다시 가져오게.
박군이 설렁탕을 다시 쟁반에 담아 돌아서려는데 미와가 발을 건다. 박군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설렁탕이 바닥에 쏟아진다. 손님들의 시선이 일순 그 쪽으로 쏠린다. 이때, 유태권이 달려와 설렁탕 그릇을 주워 담는다. 미와가 그런 유태권을 유심히 본다.
미와: 이런.. 종업원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가?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그때 두한이 안채에서 나온다. 미와가 두한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미와: 오, 긴또깡.
두한: ............?
미와: 너 아주 오랜만이로구나.
두한: .....(놀라며, 입을 앙다문다)
미와: 아주 많이 컸다.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하여간 조선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니까..
두한: (증오로 보며) 여긴 왜 왔어요?
미와: 허허허 이렇다니까.. 이 놈아 설렁탕 집에 설렁탕을 먹으러 왔지 뭘 하러 왔겠느냐? 반갑다.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냐? 아니 그러냐? 하하하...
두한: 나가요. 여긴 우리 집이야.
미와: 오, 긴또깡, 나는 손님이다. 손님.......
오무라: 긴또깡, 감히 누구에게....?
원노인: 두한아. (미와에게) 죄송합니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두한아, 들어가 있거라.
미와: 이봐 주인장.
원노인: 예, 손님.
미와: 저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고 있나?
원노인: 예, 알고 있습니다.
미와: 대체 어떤 관계인가? 왜 김좌진이의 아들을 데리고 있느냐 말이다.
원노인: 예전에.... 그 분께 은혜를 입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와: 은혜? 우리 대 일본 제국의 대역죄인 김좌진이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은인의 자식을 거두었다?
원노인: ............
미와: 듣자하니 김좌진이가 죽었을 때 이틀 동안 여기 문을 닫았다는데.. 왜 그랬는가?
원노인: ............
미와: 왜 대답을 못하는가? 지금도 김좌진을 존경하고 있는가?
원노인: .....평생 그 분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겁니다.
미와: 빠가야로! (원노인의 뺨을 후려친다)
두한: 할아버지?
미와: 똑똑히 들어라. 다시 말해준다. 김좌진 그 자는 대 일본제국의 원수다. 그 자를 존경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모두들: ..............
미와: 이 미와가 너희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긴또깡, 다음에 또 보자꾸나. 심심할 때 가끔 들르마.
미와와 오무라가 밖으로 향한다. 두한이 증오로 보고 있다. 그런 두한이를 원노인이 인자하게 어깨를 토닥여준다.
원노인: 됐다, 두한아. 다 됐다. 더 이상 생각할 것 없다.
두한: ............
# 19 동 밖
정진영과 양코가 그 안을 기웃거리고 있다가 부리나케 피한다. 미와와 오무라가 나와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정진영: (안도의 한숨) 됐어. 저쪽으로 갔어.
양코: 그래?
정진영: 이제 들어가 보자.
정진영과 양코가 사동옥 쪽으로 향한다.
# 20 동 안
유태권과 박군이 미와들이 나간 탁자를 치우고 있다. 두한이 들어서는 정진영과 양코를 보았다. 시무룩했던 표정이 밝아진다.
두한: 진영아?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린다. 거지들이 들어선 것이다.
정진영: 안녕하세요?
원노인: 오 그래.. 진영이와 양코로구나. 두한이 보러 온 모양이구나. 두한아, 동무들하고 안채로 들어가거라.
두한: 예. 진영아, 이 쪽으로 와.
# 21 그 마당
그들이 마당으로 들어선다. 양코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본다.
양코: 야, 뒤로 들어오니까 마당이 있네. 이야 굉장하다.
양코가 샌드백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간다. 신기한 듯 만져보며
양코: 두한아, 이거 니꺼야?
두한: 아직은 내꺼 아니야.
양코: 그럼 언젠간 니꺼가 된다는 거네? 좋겠다. 나두 이런 거 하나 있으면 날마다 싸움 연습을 할 텐데..(권투 시늉을 한다)
두한: (미소)... 근데 웬 일이야? 너 여기 오는 거 싫어했잖아?
정진영: ....너희 아버지 소식.. 신문에서 봤어.
두한: ....(어두워지며) 그랬구나... 그래서 온 거구나.
양코: .............
정진영: 힘 내, 두한아. 니 옆엔 우리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두한이 넌 우리들의 대장이잖아.
두한: ......고맙다, 진영아. 양코 너두.
두한의 그 모습에서..
# 22 종로서 외경(낮)
미와: (E)뭔가 수상해..
# 23 동 안
미와와 오무라, 김태서가 마주해 있다.
미와: 그 원노인이라는 자도 그렇고.. 종업원들도 어딘가 모르게 눈빛이 달랐어. 냄새가 난단 말이야.
오무라: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경부님.
미와: 하지만...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물증 말이야.
김태서: 그거야 잡아다 족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며칠만 돌리면...
미와: (도리질) 아니야.. 그 자들이 김좌진의 국내 조직책이 확실하다면 그런 방법으로는 안 통해. 그 동안 여러 차례 겪어보지 않았는가? 긴또깡의 생모인 박계숙이 때도 그랬고.. 그 자들은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라면 그런 고문에 견딜 리가 없지.
오무라: 그러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미와: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나? 일단 두고보는 수밖에..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핵심 조직원들을 놓치는 수가 있어. 하지만 감시는 더욱 철저히 해야 해. 당분간 주야로 총가동을 하게.
김태서: 알겠습니다, 경부님.
# 24 사동옥 외경(밤)
깊은 밤이다. 사동옥의 불도 꺼진다. 종로서의 김태서와 형사들이 한쪽에서 서성거리며 사동옥을 주시하고 있다.
원노인: (E)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 25 동 안 밀실
원노인과 유태권이 마주해 있다.
원노인: 왜경들이 우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어요. 점점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태권: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일입니다만....
원노인: 가장 위험한 분은 유동집니다. 일단 몸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태권: 그렇지 않아도 만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직선이 완전히 끊어져 국내에 남아서 할 일이 없게 됐습니다.
원노인: (끄덕이고) ....어쨌거나 두한이가 안됐습니다. 이제 막 유동지에게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말입니다. 허허..
유태권: 두한이는 스스로 해나갈 겁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떠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점검해야 할 것도 있고. 그 시간이면 어느 정도 전해 줄 건 다 전해 줄 겁니다.
원노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두한이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주나, 참으로 걱정이 많았는데요, 허허허..
유태권: 두한이에게는 당분간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도중에 마음이 흐트러질 우려가 있습니다.
원노인: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26 사동옥 마당(밤)
두한이 힘차게 샌드백을 두들기고 있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유태권이 밀실에서 나와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유태권: 그만 하거라.
두한: .............?
유태권: 이제 제법 정권을 쓸 줄 아는구나. 하지만 외공, 즉 겉껍데기일 뿐이다. 아무리 잘 해야 시정 잡배들을 누일 정도밖에는 안되겠지.
두한: ............?
유태권: 이 샌드백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두한: 예?
유태권: 미와로 보이느냐? 아니면 네 아버님의 원수로 보이느냐?
두한: ..................
유태권: 그렇다면 틀렸다.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두한: ..................
유태권: 초연한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기운이 모아져 나와야 한다. 지금부터 그것을 배워라. 다 비우는 것 말이다. 오로지 그 주먹하나에 너의 모든 것을 다 실어야 한다. 그것뿐이다.
두한: 하지만 전 원수를 갚을 거예요.
유태권: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으로부터 빠져 나와 보다 높은 곳에서 너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면 기와 힘을 모을 수가 없단다. 알겠느냐? 그걸 배우라는 것이다.
두한: ............?
# 27 삼각산(새벽)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캄캄한 산길을 두한이 땀을 쏟으며 뛰어 오르고 있다. 마치 야수의 눈빛처럼 두한의 독기어린 눈이 빛나고 있다.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두한은 다시 일어나 달려간다. 두한은 그렇게 계속 뛰어 올라간다.
두한: (E)그래, 나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구. 꼭 해낼 거야.
# 28 삼각산 정상
두한이 정상에 올라 숨을 몰아쉰다. 저 먼 동녘 하늘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한다. 아침해가 떠오르려는 것이다. 두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두한이 저 하늘에 대고 소리친다.
두한: 아버님... 아버님........! 해낼 거예요. 두한이는 해낼 거예요.
그 소리가 산 속 가득 메아리친다. 두한의 그 눈물범벅인 모습에서 디졸브 되면..
# 29 선학원 외경
만해: (E)듣자하니 벽초가 감옥에서 임꺽정을 집필한다지?
# 30 선학원
만해와 최동열이 마주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최동열: 예, 일본 사람들도 무척 좋아하는 소설이라 이례적으로 집필을 허용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해: 나는 일찍부터 벽초의 재주를 알고 있었지. 그러나,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사람들은 벽초를 춘원이나, 육당과 같은 반열에 놓고 보지만.. 아니야, 아주 잘못 본 거야.
최동열: .............
만해: 우선 그 언어부터가 틀리지 않느냐? 그게 바로 순수한 우리네 조선말이니라. 이야기꾼들이 장터에서 걸쭉하게 풀어놓는 바로 그거란 말이지.
최동열: (미소).........
만해: 왜 웃는 게냐?
최동열: 스님께서 다른 사람을 그렇게 칭찬하시는 모습은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만해: 예끼 이 놈아. 네 놈도 나를 독불장군이라 놀릴 셈이냐?
최동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만해: 임꺽정이라.. 임꺽정.. 우리 시대에도 그와 같은 걸출한 인물 하나쯤은 있어야 할 터인데...
최동열: ...........?
만해: 두한이라고 했던가? 백야의 아들 말이다.
최동열: 예, 그렇습니다만...?
만해: 어리지만 아주 듬직해 보이더구나. 과연 범의 새끼라 할 수 있었어. 한데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문득 임꺽정이가 떠오르는 게 아니냐? 허허..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 31 사동옥 별채 마당(밤)
두한이 기마자세로 기를 모으고 있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유태권: 온 몸의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거라. 배꼽에서 한뼘 아래 단전이라는 곳이 있다. 그 곳에 집중하거라.
두한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유태권: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면 그 곳에 기가 모인다. 온 몸의 기를 한곳에 쌓을 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게 터득 될 것이다. 필살의 도는 그 기를 주먹으로 보내 단 일격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야. 알겠느냐? 단 일격이야.
두한,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유태권: 저기 통나무가 보이느냐?
두한: 예.
유태권: 쳐보아라.
두한: ...............?
유태권: 일격에 쓰러트리지 않으면 네 주먹이 다칠 것이다. 바로 필살의 도가 그런 것이다.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 쳐라! 쳐보아.
두한, 심호흡을 크게 한다. 그리고 온몸의 기를 단전으로, 그리고 주먹으로 모은다. 크게 기합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뻗는 두한. 통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진다. 두한, 스스로 놀라와 주먹과 나무를 번갈아 본다.
두한: 부러졌어요. 나무가 부러졌어요, 아저씨. 내가 나무를 부러트렸어요. 내가요!
유태권: 그래, 이제 시작이다. 지금부터야. 지금부터...
두 사람의 그런 희열에 찬 모습에서...
# 32 사동옥 밀실
원노인과 유태권이 마주해 있다. 원노인이 놀라 되묻는다.
원노인: 떠나신다구요? 오늘밤에 말입니까?
유태권: 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두한이도 이제 혼자 잘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노인: 벌써 말입니까? 허면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말씀인가요?
유태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두한이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혼자 할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원노인: (끄덕이며)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유태권: 그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노인: 은혜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유동지가 곁에 있어서 이 늙은이가 얼마나 든든했다구요. 허허허.. 그나저나 이별주라도 한 잔 나눠야 하는 것이 아닌지...?
유태권: 아닙니다. 바로 떠나겠습니다.
원노인: 하지만 이거 너무 섭섭해서... 두한이는 보고 가셔야 겠지요?
유태권: 두한이에게 전할 말은 이 편지에 적어 놓았습니다. 나중에 전해 주십시오. (편지를 전해 준다)
원노인: 두한이가 많이 서운해 할 텐데...
유태권: 제 발걸음이 무거울 것 같아서요. 그 아이에게 정이 많이 들은 모양입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 33 동 사동옥 밖(밤)
문이 열리고 유태권과 원노인이 나온다.
유태권: 가보겠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원노인: 몸조심하시구려. 개들이 주위에 있어요.
유태권: 알고 있습니다. 너무 염려 마십쇼. 원동지께서도 몸조심하십시오.
굳게 악수를 나누고 유태권이 그렇게 사라져 간다. 원노인이 그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다.
# 34 그 골목
김태서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태서가 다른 두 형사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주자 기민하게 움직인다.
# 35 다른 골목
유태권이 오고 있다. 가다가 뭔가 낌새를 느끼고 멈추어 서는 유태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길을 간다. 유태권이 사라지고 나면 형사들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길목을 도는 순간, 유태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김태서: 어떻게 된 거야? 어디로 사라진 거야? 자네들은 저쪽으로 가봐. 그리고 자네는 나를 따라와.
김태서와 순경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면 잠시 후 어느 집 지붕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사뿐하게 뛰어내려 주위를 살피고는 다른 길로 유유히 사라진다.
# 36 종로서 외경(낮)
미와: (E)뭐야? 놓쳤어?
# 37 동 사무실
미와가 격노해 소리치고 있다.
미와: 이런 머저리들... 여럿이서 단 한 사람을 잡지 못했단 말인가?
김태서: .....면목없습니다. 하늘로 솟구쳤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미와: 듣기 싫다. 그런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아.
김태서: .............
오무라: 어쨌건 수상한 자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 신출귀몰할 수 있겠습니까?
미와: 그래서, 수상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자를 어떻게 해?
김태서: 그 원노인이라는 자를 잡아다가 족치면 뭔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미와: 나오긴 뭐가 나온단 말인가? 간밤에 종업원 하나가 돈을 들고 도망갔다고 하면 그만이 아닌가?
김태서: ...............
미와: 그 자를 끝까지 따라 붙어야 했어. 그랬으면 뭔가 큰 윤곽이 드러날 수도 있었을 텐데.. 다 틀려 버렸어. 에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그 분노한 모습에서.
# 38 사동옥
아직 이른 아침이라 손님은 없다. 원노인과 박군이 자신들이 먹을 아침상을 차리고 있다. 그때 두한이 아침운동을 갔다가 들어온다.
두한: 다녀왔습니다.
박군: 이야.. 정확하구나. 딱 제시간에 왔어. 어서 씻고 밥 먹자.
두한: 예... (가다가) 근데 아저씨는요?
박군: 참, 오늘 아침엔 유태권 아저씨가 안 보이네. 어디 가셨어요?
원노인: 아저씨는 어젯밤에 떠나셨단다.
두한: (놀라) 예? 떠나셨다구요? 어디루요?
원노인: 그건 나도 모른다. 아마 오랫동안 뵙지 못할 것 같구나.
두한: 왜요? 왜 떠나신 거예요?
원노인: (편지를 내밀며) 여기에 다 적혀 있을 게다. 아저씨가 네게 전해달라고 하셨다.
# 39 동 마당
박군이 두한에게 유태권의 편지를 읽어 주고 있다. 얼마쯤에서 유태권의 소리가 이어진다.
유태권: (E)두한아, 이렇게 인사도 못하고 떠나게 돼서 미안하구나. 나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난다. 사나이들의 이별이란 그런 것이다. 슬퍼할 것도, 아쉬워할 이유도 없느니라. 그렇게 각자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면 되는 것이다.
두한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다.
# 40 동 장소
두한이 샌드백을 상대로 맹렬히 주먹을 치고 박차기를 하고 있다. 그 위로 유태권의 소리는 계속된다.
유태권: (E)너는 최고가 될 자질을 타고났다. 또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만하지는 말거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절대 게으르거나 나태해서는 안 된다. 천하에는 네가 알지 못하는 무술의 고수가 너무도 많다. 그들을 제압하고 우뚝 서려면 그들에 앞서 자기 자신을 이겨야 하느니라. 명심하거라, 자신을 이겨야 한다.
그렇게 두한의 수련은 계속된다. 원노인이 나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 이제 두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샌드백에 부딪히는 두한의 주먹과 발만이 쉴 새 없이 보인다. 그러다가 샌드백이 정지를 한다. 그리고 엄청난 기압 소리와 함께 두한의 발이 샌드백을 강타한다. 마침내 샌드백이 터지며 바닥에 쿵 떨어진다. 카메라 서서히 팬하여 두한의 모습을 잡으면 어느새 성장한 청년 김두한의 모습이다. 그 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