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시경 도착 금골리 식당으로 이동 점심
(육회 비빔밥, 떡국)
4.13시30분경 용장성 탐방로 걷기(약 20분,800미터)
용장성 좌측 탐방로를 따라 걷기시작.
좌측 탐방로를 오르면 이런 풍광을.
용장성 남측 탐방로에서 본 홍보관과 용장사.
바라보면 우측 계단 이용하여 내려옴.
우측 탐방로로 내려옴.
5.14시 홍보관 둘러보기 해설
용장성 홍보관.
홍보관을 둘러보며 해설청취 후.
6.14시30분부터 영상 실에서 상호 답사 후 소감 발표.
귀가 예정 입니다
●1018년(현종 9)에 읍성(치소)을 고성에서 용장으로 옮겼다.
1270년 삼별초군 입도(252년 동안 용장이 진도치소)
1271년 삼별초군 제주로 퇴각.
1350년 정부 공도정책으로 지금의 영암시종(진도군 명산면)으로
진도치소 설치
조선(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건국했으며 1910년 순종이 마지막)
1409년(태종 9)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으로 하였으며
1431년 해진군 당시 금갑진 설진하였고,
1437년(세종19)에 해남과 분리하여 진도군으로 복귀하였습니다.
(1437년부터 3년간 고성치소, 활용)
1438년 진도군 복귀 후 남도진성 설진
1440년진도읍치소 정착)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1271년부터 1350년까지
79년 동안 진도치소는 어디였을까요?
1271년부터 몇 년은 혼란기였을 것으로 살펴지지만
1350년 공도정책 이전에도 진도치소는 용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330년 동안 용장이 진도치소 역할로 추정)
참고사항:
목포대박물관은 지난 8월 말부터 시작된 사적 제126호 용장성(龍藏城) 왕궁지의 6차 조사에서 건물지와 배수로, 축대, 아궁이, 궁장, 기와 유구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특히 궁장(宮墻/牆 궁궐을 둘러 싼 성벽)의 북벽 바깥쪽에서 확인된 명문기와는 왕궁이 들어선 장소가 ‘용장사’가 아닌 ‘금사사’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명문기와의 암키와 외면에 새겨진 여러 글자들은 ‘太平十年庚午四月..金沙寺..造印’로 판독됐다.
太平은 중국 요나라 성종(1021~1030)의 재위기간에 사용된 연호이며, ‘太平十年庚午’는 1030년(현종21)으로 해석되고 있다.
용장성 왕궁지는 출토유물로 볼때 9~10세기 무렵의 나말여초기에 창건돼 운영돼 온 산지가람을 강제로 폐기하고 폐기된 공간과 주변을 확장해 조성됐다.
폐기된 사찰의 존재는 조선후기에 편찬된 ‘沃州誌’(저자 김몽규, 1761년)에는 창건 당시의 사찰명이 용장사로 표기하고 있다. 반면 이번에 확인된 명문기와에는 그동안 왕궁터가 ‘용장사’로 당연시됐던 사찰명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첫댓글 바닷길 행사 바로뒷날이라서 ~~~~~
변함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12월이 되면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 합니다
사전자료 모음 수고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