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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없는 카나다 여인, 고마움을 알기나 하는지
순간적이나마 한국 여인이기를 포기한 그녀로 인해 속상한데다 겨울을 방불케 하는
추위에 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록 늙은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추워서 떠는데 남들인들 아니 그러겠는가.
단 하나 있는 난로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밤이었다.
심한 일교차가 아니더라도 해발 1.000m대의 고지대이므로 추위를 느낄 만도 하다.
배낭 안의 옷들을 다 껴입어 추위는 면했으나 상심을 달랠 길은 없지 않은가.
아직 컴컴한 6시 반쯤 나서는데 한 중년 여인이 따라붙었다.
길도 모르고 전등도 없으면서 무작정 나를 따라나서는 그녀 간도 크셔라.
마을을 빠져나왔을 때 침대 난간에 타월을 걸어놓은 채 나온 것이 생각났으나 차마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멈춰서서 망설이니까 왜 그러냐며 불안해 하는 그녀.
타월을 두고 왔다니까 난감한 표정임을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는데 별것 아닌 타월
때문에 그녀를 추운 새벽에 떨며 오도가도 못하게 할는 없지 않은가.
이 여인 고마움을 알기나 하는지.
긴 오르막 돌짝 길을 걸으며 카나다 여인임을 알았다.
미세스 굿 아이디어를 비롯해 겁 없는 카나다 여인들이다.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걸어야만 했다.
나를 놓치면 낭패일 것 같은지 그녀도 잘 따라왔다.
대형 십자가가 외롭게 서있는 평원, 해발1.078m 정상(Matagrande)까지 지루하게
올라가는 돌길인데도 어렵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추위 덕이었다.
부르고스가 한눈에 들어오며 전망 좋기로 이름난 정상이라지만 지척만 간신히 분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대낮이라면 좋은 휴식처가 되겠지만 벌벌 떨면서 날 밝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지저분하게 남아있는 폐광의 잔해와 TV, 래디오 타워가 눈에 거슬릴 만큼 밝아오는
시각에 널따란 농로를 따라 아주 작은 마을 비얄발(Villalval)을 지났다.
카르데뉴엘라 리오삐코(Cardenuela-Riopico)와 오르바네하 리오삐코(Orbaneja-
Riopico) 마을을 거치고 A-1고속도로를 건너서면 카미노는 둘로 갈린다.
부르고스 공항을 우측에 끼고 N-120도로와 동행하는 소위 추천루트 카스타나레스
(Castanares)길과 철길을 건너 비야프리아(Villafria)로 가는 대체루트로.
여기에서 나는 부르고스 10km 외곽에 있는 비야프리아 길을 택했다.
나뿐 아니라 이 아침에 내 뒤를 따르는 순례자들은 모두 이 길을 택하는 듯 했다.
이어지는 부르고스 진입로는 추천루트와 결합할 때까지 지엠(GM), 뿌조(Peugeot)
등 자동차와 세라믹(Ceramics)을 비롯한 각종 공장지대인 산업도로다.
비야프리아를 통과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해 때문에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달리듯 걸은 덕에 10시가 되기 전에 부르고스에 진입했다.
부르고스
이베리아 반도의 북부, 해발 860m 고지에 위치한 부르고스(Burgos)는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on) 자치지방의 한 주인 부르고스주(province) 주도(州都)다.
서울의 산, 산각산(북한산)의 정상인 백운대 보다 높은 곳에 형성된 면적 108km2에
인구 177.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중형 도시다.
카미노 프랑세스에 있는 도시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고원지대이며 인구는 팜프로나에
이어 두번째로 많다.
카미노에서 뿐아니라 스페인 50개주를 통틀어서100.000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지역에 있다.
또한, 스페인 17개 자치지방중 최대임은 물론 전체 유럽연합에서도 가장 큰 지방인
카스티야 이 레온의 9개 주도 중 비야돌리스에 이어 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고원지대에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 예정지인 해발 600m~700m대의 강원도 평창군이다.
강원도 태백시를 비롯해 전북 남원시 지리산 자락의 4개면 등 500m대 이상에 자리
잡은 도시와 마을도 더러 있다.
그러나 평창은 군 전체 면적 1.463.7평방km라는 넓은 지대에 50.000명 미만의 적은
인구가 거주할 정도로 주거에 부적한 지역이다.
광산도시인 태백시도 탄광의 퇴락으로 인구 감소에 비상이 걸려 있다.
남원시의 고원지대 역시 제약이 많아 인구의 이탈 현상을 막을 길이 없다.
남북대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간첩들의 은거지로 악용된다는 이유로 높은 산속의
화전민촌과 산간 외딴 집들을 강제 철거한 것은 이데올로기 대립의 비극이었지만.
아무튼, 고원지대는 취락형성의 불모지인 우리에게는 부러운 땅임을 스페인 순례길
12일째 되는 날 처음으로 느끼게 한 부르고스다.
노상의 시계가바늘이 10시를 향해 가는데도 해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고 수은주는
6도c에 머물러 있으니 계속해서 걸음을 빨리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긴 상가 거리에서는 팜프로나, 로그로뇨에서 그랬던 것 처럼 한국인의
가게가 눈에 뜨이기를 갈망하여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끝내 발견하지 못했지만.
부르고스에는 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을 비롯해 무수한 교회들이 있다.
교회와 수도원 및 관련된 건물들이 없다면 부르고스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러나 나는 거대한 교회 건물에는 관심이 없다.
단순히 가톨릭 신도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는 아니다.
거창한 교회의 웅장하고 장엄한 내부가 내겐 반그리스도적 사치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분의 탄생과 행적으로 볼 때 화려한 교회에 머물 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짧은 생애지만 늘 눌리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과 함께 파격적으로 살다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 분은 없고 경건한 의식만 있다.
문패만 당신의 이름일 뿐 이미 장사꾼의 소굴이 된 집에서는 살 수 없는 체질이다.
결국, 가출하여 머리둘 곳 조차 없는 가련한 떠돌이 신세가 된 형국이 아닌가.
이는 오늘날의 신구 그리스도교 교회 전체에 대한 나의 견해다.
오히려, 그 분은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나를 포함해 힘겨워 하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과 함께 하며 위로와 격려, 용기를 북돋아 주는 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무서울 것 없도록 동행하는 분이지 눈부신 교회
안에 안주하여 대접이나 받고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과 길에서,국내와 국외에서 늘 지치지 않고 행복하게 걸을 수 있는 내 힘의 원천은
그 길이 언제나 고향가는 길이며 그 길에서 그 분이 변함 없는 동행자라는 사실이다.
부르고스대학교에서 만난 디에고 이스끼에르도 메리노
4시간여나 지각한 태양이 미안했나.
일시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 대성당을 비롯하여 여기 저기 눈요기 좀 하고 부르고스
대학교(Universidad de Burgos)를 찾아나선 정오쯤 부터 한 여름을 방불케 했다.
학교는 산타 마리아 다리(Puente de Santa Maria)건너 아를란손 강(rio Arlanzon)
따라가는 우회 루트의 거의 끝인 빠랄 공원(Parque El Parral) 근처에 있다.
카미노에서 가장 큰 순례자 병원이라는 왕립병원(Hospital del Rey) 건물의 일부를
교사(校舍)로 하여 1994년에 설립된 대학이기 때문에 역사는 일천하나'순례자의 문
(Puerta de Romeros)'을 비롯해 고풍스런 건물들이 돋보인다.
늙은 방문객에게 특히 관심 가진 사무처의 나이 지긋한 여직원이 오히려 많은 것을
물어왔으나 내 6개월짜리 스페인어가 질문들을 다 소화해 정답을 줄 리 있는가.
어벙하게도 동문서답이 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청년이 참견했다.
이 학교와 어떤 용역관계에 있는 듯이 보인 청년은 '세뗀따 이 시에떼'(77)라는 말을
듣고 경악했다지만 이제는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일상화 되었다.
영어를 할 줄 알아 더 반가운 그에게 UNED(Univercidad Nacional de Educacion
a Distancia-Burgos)의 위치를 물었다.
그는 서쪽 끝인 현 위치에서 동쪽 끝까지 가야 하는데 부르고스 길을 아느냔다.
"처음 길인데 어찌 알겠소" 대꾸하고 포기하려는 내게 그는 감동 펀치를 날렸다.
UNED까지 태워다 주겠단다.
칸타브리아 거리(Avenida de Cantabria))에 있는 부르고스기술대학교(Politecnica
Universitaria) 건물까지 갔을 뿐아니라 대학 사무실까지 안내한 그의 이름은 디에고
이스끼에르도 메리노(Diego Izquierdo Merino).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하기도 전인 4월 27일 메일을 내게 보냈다.
내 일정을 상세히 기억하며 "hope that your adventure was greatfull..."
기네스북이 hitch-hiking기록도 취급한다면 나는 단연 1위로 등재되어야 할 것이다.
나 만큼 많이 편승해온 사람이 또 있을까.
심산과 장거리 길을 누비고 다닐 때마다 택시를 제외한 일체의 노상 차들이 내 자가
용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 경운기는 물론 분뇨청소차와 장의차 까지도 편승했으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청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자진해서, 심지어 달리던 길을 되
돌아와서 태우고 가는 자발적 봉사자(volunteer)도 부지기수다.
늙어가면서, 나이에 비례해서 용이도(容易度)와 빈도를 높혀가는 유일한 일은 바로
이같은 편승이다.
그러므로 교통편은 내게 걱정 목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자만은 국내용일 뿐 해외에서도 통하기를 어찌 기대하겠는가.
편승이라 해서 불로 소득이 아니다.
편승의 귀재가 되려면 도로망, 차량의 순간적인 정차 가능 여부, 차량의 흐름까지도
동시에 고려하는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사정에 백지인 외국에서 어찌 편승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프랑스길을 비롯해 여러 카미노에서 늙은이라는 이유 만으로 바룬티어들이
속출하여 극동의 늙은 나그네를 감동하게 했다.
메리노의 말대로 한국영감과의 해후는 그에게뿐 아니라 내게도 기쁜 일이긴 했지만
실은 UNED는 들리지 않아도 되는 대학이다.
UNED는 우리의 방송통신대학교 또는 사이버대학교에 해당한다.
따라서 눈여겨 살펴볼만한 학교 시설이 없고 만나보고 싶은 교수, 학생도 없는 작은
사무실이므로.
품위와 민족적 자긍심이 손상 입지 않아야 한다.
부르고스대학교 앞까지 회귀하는데 3km 이상을 다시 걸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했어도 오후 2시를 넘지 않았다.
결국, 추운 새벽이었기 때문에 부르고스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아니다. 추위 덕에 부르고스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이 가게 되었다"가 맞는 말이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달리듯이 걸었고 그래서 오전중에 부르고스에 도착함으로서 더
많이 가게 되었으며 프랑스 길 완주기간의 단축에 공헌했으니까.
부르고스대학교의 현대식 캠퍼스와 순례자 동상 앞을 벗어나면 버찌 묘목 농원(Los
Guindales/Vivero Postal)을 지나 한가로운 시골 농로가 이어진다.
순례자 대부분이 부르고스에 머무는지 사람이 그리운 길이었다.
순례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즉 관광 명소인 부르고스를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 듯
순례자들이 탐방길에 오르느라 걷기를 잠시 중단하는 까닭이리라.
(나도 두번째 부르고스를 지날 때에는 한낮인데도 머물렀으니까)
그래서, 독점한 시골길을 더욱 한가롭고 여유롭게 만만디로 걸었으리라.
재회한 N-120도로와 함께 A-231고속도로 밑을 통과하고 아를란손 강을 다시 건넌
카미노는 얼마 가지 않아 타르다호스(Tardajos) 마을을 거쳐간다.
아직도 시간은 여유롭지만 카미노에서 식사는 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35km
이상 걸은 기록을 갖게 되었으나 시장끼가 들어 알베르게에 듦으로서 마감했다.
공복을 채우고 내일 먹거리도 준비했으므로 편한 밤이 되겠거니....
기대하는 밤이 깊어갈 때 아주 지친 듯 하나 연인에 다름 아닌 젊은이 한쌍이 들어와
내 맞은 편 침대 2층 2개를 차지했다.
한데 이럴 수가,
아따뿌에르카의 "재파니스 데스까" 여인이라니.
청년 역시 어제 밤에 알베르게에서 대면했던 기억이 나는 젊은이다.
어두컴컴한 실내지만 여인도 나를 알아보는 듯 어색하나마 목례를 해왔다.
그들에게 어제밤과 다른 점은 공개적인 애정표현을 여인이 자제하는 듯 하다는 것.
그녀는 내가 한국영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녀가 엉겁결에 내게 던진 황당한 질문이 나오게 된 까닭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그들의 관계를 모르거니와 내 관심사도 아니다.
카미노에서 급조되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행의 길에서 위로와 격려는 국적에 구애됨 없이 친근감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젊은이들은 그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영어지상주의(?)에 몰입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할 때 영어권 젊은이들과
특히 쉽게 친해지거나 교류를 시도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품위와 민족적 자긍심이 손상 입지 않아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급속한 개방화가 진행되고 있다 하나 우리의 애정표현은 공개적 애정
표현이 일상화 된 서구인에 비해 소극적이며 세련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들과의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상이점일 뿐이다.
한국의 젊은 여인은 한국영감 앞에서 이 상이점을 극복하지 못해 당황하게 되었으며
순간적인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당한 질문을 엉겁결에 하게 된 것이리라.
그랬다해도 내게는 아따뿌에르카에서 타르다호스까지 걸어왔을 그녀가 대견해 보일
뿐이었다. <계 속>
1.078m 넓은 정상(matagrande/위2)에 오르는 길은 크고 작은 돌길이다.
(카미노에서 자주 보게 되는)길가의 돌탑이 친근하고 정겹다.(위1)
돌탑은 만국 공유의 정서인가 보다.
가며오며, 오르며 내리며 하나씩 줏어다가 던지고 간 돌이 쌓이고 쌓여 탑이 된다.
돌 하나하나에 담긴 개인의 소원이야 어떠하건 오리지날 이유는 양의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발부리에 걸리지 말라고(넘어지는 일 없게 하려고)줏어 옮긴 것 아닌가.
뒷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반도인의 특성인가.
들길(아래1) 주변의 뒷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폐광과 송신시설(아래2)이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곳을 지나가는 중인 것 처럼 느끼게 했으니까.
비야프리아(위)는 부르고스 전방 10km에 있는 마을이다.
카미노 프랑세스에서 아타뿌에르카~부르고스의 일부 대체루트에 있는 마을.
비야프리아에서 부르고스에 진입하는 길은 부르고스 공단이 들어서 있는 산업도로다.
유명 자동차회사들의 현지 생산공장과 세라믹 공장 등등....(아래)
한국산 자동차만 만나면(아래4)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는 한국 영감.
가마귀가 자동차로 대체되었나 보다.
부르고스 입성 시간은 오전 10시 6분 전(위1)
당시 기온은 6도c(위2)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이 안티구아 데 가모날 교회(Iglesia de Santa Maria la Real y Antigua de Gamonal/아래1)
부르고스 거리(아래2.7)
마르셀리아노 박물관(Museo Municipal Marceliano Santa Maria/아래3.4)
산 레스메스 교회(Iglesia de San Lesmes/아래5.6)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위1.2)은
스페인에서 세비야의 히랄다 대성당에 이어 두번째로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란다.
산타 마리아 아취(Arco de Santa Maria/위3)를 통해 나오면 기괴한 예술품에 다름아닌 가로수 길
에스폴론 거리(paseo del Espolon/위4)다.
부르고스대학교(아래1)와 UNED(아래2)
아래 (3)은 디에고 이스끼에르도 메리노(Diego Izquierdo Merino).
아를란손 강을 따라 서진하는 대체루트에는 부르고스대학교와 순례자의 문(Puerta de Romeros),
빠랄공원(Parque El Parral)이 쭉 이어진다.(위)
한데 순례자의 문은 왜 뻬레그리노스(Peregrinos)가 아니고 로메로스(Romeros)인지 알 길이 없다.
순례자 상(아래1)을 끝으로 부르고스를 버어나면 타르다호스 마을 한하고 한가로운 놀로가 이어진다.(아래2~ )
타르다호스 마을(위)과 알베르게(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