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함께 이야기 나누는 한국근대건축사가 쉽게 머리에 정리되지 않아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글의 일부를 올려봅니다.^^;;
1. 한국근대건축사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한국건축에서 모더니즘과 탈 식민성의 문제) ..건국대학교 건축대학원 이상헌 교수
“한국의 근대건축에 대한 이해를 함에 있어 비판적 역사서술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한하고자 한다. 이것은 서양 근대의 지엽적 개념을 한국건축에 그대로 적용하여 일반화하거나 그것을 그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근대건축의 지배적 프레임의 역사 안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그 수용의 과정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비판적 역사를 의미한다.
구체적이고 부분적인 문제 속에서 실마리 발견하여 전체의 균열을 찾는 비판적 역사의 서술은 동시에 보편적이고 균질하게 보이는 서양근대건축 자체의 균열과 모순에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의 역사를 보편적이고 균질한 것으로 재생산하는 것을 부정하는 비판적 역사는 결국 누가 누구를 재현(represent)하는가 하는 탈 식민주의의 과제를 문제삼는 것이다.”
(???)
“한국건축사는 건물사인가?”라는 이 글의 여러 질문 속에서 우선 전반적인 건축학적 이해의 관점에 대한 다양한 시각으로서 접근을 볼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말하고자하는 한국건축사의 의미를 두자면 단순히 건축을 건물로 보는 것이 아닌 그 건축의 본질을 알고자 한 것 같았다. 즉, 환경사(환경적 질서의 문제)로서 한국건축사 및 관계사(공간적 관계의 문제)로서 한국건축사의 의미를 배경으로 갖추어진 상태에서의 한국건축사는 단순한 건물사가 아닌 본질적인 건축적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다.
‘한국 현대 건축의 방향’으로서 덩어리만의 근대건축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전통 건축적 미학을 현대 건축 언어를 이용하여 현대건축을 구현하는 방법인 동시에 동서간에 공존할 수 있는 즉, 동등하게 교차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찾아내어 건축물로 구현하는 방법을 그 추구 방향으로 말할 수 있으며 결국 서양과 동등하게 겨루어 낼 수 있는 방법이라 하겠다.
2. 한국근대건축사 개관
<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건축의 수용과 변천에 관한 연구(1989) 中, 서울대박사논문>
1. 실학파의 건축사상과 도시건축의 발달
1)실학파의 건축사상
2)도시건축의 발달
2. 개화파의 건축사상과 서양건축의 유입
1)개화파의 건축사상
2)서양건축의 유입
3. 건축기술자와 외국 건축 재료의 유입
1)건축기술자
2)외국 건축 재료의 유입
실학사상은 전래사상 중에서 우리의 주체적 요구에 적합한 근대 지향적이고 민족 지향적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근대와 가깝다. 물론 실학파의 기술이 서양의 근대기술과 곧바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도시와 건축에 대한 개혁적인 사상은 즉물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자연에 대한 중세적 자기동일적 인식을 극복하려는 인식을 제공하였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실학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근대 지향적 건축사상으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민본사상을 근간으로 고을과 분리되어 있는 산성을 지양하고 읍성을 주장하며 화성(수원성)을 계획하여 축조한다.
둘째, 생산 확대사상으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건축 재료의 규격화와 작업의 분업화 및 기기의 사용을 주장한다.
셋째, 재료의 내구성, 구조성, 규격성, 시공성 등을 이유로 벽돌의 사용을 적극 주장하고 찰쌓기방식, 기와제조, 규형축조법 등 생산기술의 개발을 주장한다.
실학파들의 도시개조론은 현실적으로 수용되기가 어려웠지만 그들의 건축에 대한 주장은 민중의 입장에서 민중의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고 지배층의 이해와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으므로 부분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이들의 주장은 실제로 이후 한국건축의 변화양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18세기 화성 축조 시에 벽돌을 대량생산하여 사용하여 화성자체가 갖는 도시계획적 차원에서의 근대 지향적 의의와 더불어 한국건축사에서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후 벽돌의 사용은 궁궐이나 대갓집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담장과 합각부분, 굴뚝의 축조 등에 부분적으로 사용되었고, 19세기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건축사업이자 근대지향적인 목적을 갖는 경복궁 중건공사에서는 벽돌이 전반적으로 사용되어 그 사용논리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3. 한국건축사 - 근대건축
<출처 : http://gunnet.co.kr >
1. 근대건축의 유입과 전개
1-1. 서구식 근대건축의 유입경로
- 외국공관 계통의 건축
- 외국인 선교사를 통한 종교관련 건축물
- 외국인 상사건물 및 주택
-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한 관청 및 공공건물
1-2. 한국 근대건축의 전개과정
- 구한말의 근대건축 (1910년 이전)
- 일제시대의 근대건축 (1910~45년)
- 해방이후의 근대건축 (1945년 이후)
2. 구한말의 근대건축
2-1. 개관
- 1910년 이전의 시기로 한국 전통건축양식으로부터 근대건축으로의 과도기
- 강압에 의한 개국으로 일본과 서구의 외교시설, 상업시설 등이 다수 건설됨
- 1900년 전후 선교계통의 종교, 의료시설이 다수 건설됨
- 종교건축은 고딕양식을, 공관건물은 르네상스양식을 각각 모방
2-2. 주요 건축실례
- 종교건축물
약현성당, 서울 중림동, 1892년 - 3랑식 고딕양식의 성당
명동성당, 서울 명동, 1892~98년-한국 유일의 순수한 고딕양식 건축물,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벽돌교회당
정동교회, 서울 정동, 1895~98년-단순화된 고딕양식의 건축물
천주교 원효로 성당, 서울 원효로, 1907년 -붉은 벽돌의 고딕양식 건축물로서 현 성심 여중고 예배당
- 외국공관
영국 공사관, 서울, 1891년 - 벽돌조 2층의 죠오지안 양식 건축물
러시아 공사관, 서울, 1892년 - 벽돌조 2층의 제정 러시아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
프랑스 공사관, 서울, 1896년 - 벽돌조 프랑스 바로크 양식 건축물
- 상업건축물
인천 일본제일은행 지점, 인천, 1897~99년 - 후기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로서 현 조달청 인천 사무소
부산 세관, 부산, 1910년 - 벽돌조 2층의 영국풍 르네상스 건축물로서 현 부산 세관 건물
- 의료시설
세브린스 병원, 서울, 1904년 - 벽돌조, 2층의 영국 르네상스 건축물
대한의원 본관, 서울, 1907~08년
- 기타
독립문, 서울, 1896~97년 - 순수한 석조양식 건축물로서는 최초
서북학회 회관, 서울, 1908년 - 벽돌조 2층 건물
덕수궁 석조전, 서울, 1900~10년 - 고대 그리이스의 이오니아 주범양식의 석조건물
3. 일제시대의 근대 건축
3-1. 개관
- 한일합방(1910년)이후로부터 해방(1945년)까지의 건축
-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 주관하에 관청, 학교, 은행 등을 건설
- 초기에는 르네상스 양식, 후기에는 절충주의 양식의 건물을 다수 건설
- 박동진, 박길룡 등의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적 건축가들이 활동
3-2. 주요 건축 실례
- 한국인 건축가들에 의한 건축물
보성전문학교 본관 및 도서관,서울,1933~37년 - 박동진 설계의 고딕양식 건물로서 현 고려대학교 본관
화신백화점, 서울, 1937년 - 박길룡 설계의 근대 합리주의적 경향의 건축물
경성제대 본관, 서울 동숭동, 1931년 - 박길룡 설계의 건물로 현 문예진흥원 청사
- 공공건축물
경성역사, 서울, 1922~25년 - 건물의 중앙에 대형 돔을 가설한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로서 현 서울역
조선 총독부 청사, 서울, 1916~26년 - 돔을 가설한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
경성부청, 서울, 1925~26년 - 현 서울시청으로 철근콘크리트조의 절충주의 양식 건축물
- 상업건축물
조선은행, 서울, 1908~12년 - 현 한국은행 본점으로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
제일은행 본점, 서울, 1935년 -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
삼월 백화점, 서울, 1930년 - 현 신세계 백화점
- 기타
서울 성공회 성당, 서울, 1922~26년 - 우리나라 유일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
경성 부민관, 서울, 1935년 - 근대 합리주의 계열의 절충주의 양식으로서 현 서울시의회 청사
4. 해방이후의 근대건축
- 해방이후 한국건축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
- 1950년 이후 합리주의적 경향의 국제 양식 건축이 성행
- 김중업의 작품
명보극장, 서울, 1957년
프랑스 대사관, 서울, 1960년
서강대학교 본관, 서울, 1960년
제주대학 본관, 제주, 1964년
서산부인과, 서울, 1965년
삼일빌딩, 서울, 1969년
- 김수근의 작품
자유센터, 서울, 1964년
세운상가, 서울, 1967년
국립 부여 박물관, 부여, 1970년
- 기타 건축가와 작품
박동진, 영락교회,석조건물, 서울, 1950년
이천승, 국제극장, 서울, 1957년
이희태, 절두산 복자기념성당, 서울, 1967년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은 1879년에 준공된 부산의 일본관리청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일본 영사관인 왜관의 관수(館守)집을 헐어 지은 것으로 양식과 일본식의 절충식 건물이었다고 한다.
1880년대에 지은 양옥으로 인사동에 있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의 집터에 지었던 일본공사관을 들 수 있는데,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성난 군중이 몰려가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1880년대 양옥인 인천 대불(大佛)호텔은 1980년까지 장수했다. 개화기에 인천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사들이 유숙했던 한국 근대화의 요람이었다. 헐리기까지 중화루라는 중국음식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보존되었다면 한국 개화의 1등사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890년대의 양식건물로는 영국대사관, 서울 중림동의 약현성당, 독립문, 서울 명동성당, 정동교회가 남아있을 뿐이다. 19세기의 양식건축은 도합 26개였는데 겨우 100년도 지탱 못하고 다섯손가락으로 헤아릴 만큼만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