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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우리 가정
증언자 : 김순만(남)
생년월일 : 1944.(당시 나이 36세)
직 업 : 대학 수위(현재 대학 수위)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김순만 씨는 5월 21일 아이들을 찾으러 밖으로 나왔다가 잡혔다. 그때 공수대에게 구타를 당하여 새끼손가락의 힘줄이 끊어지고 이도 하나 나갔다. 교도소와 상무대 교육대에서의 고통의 44일이 지난 뒤 그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는 6·25 때 형님, 형수님, 누님을 잃었다. 아버지도 6·25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거기에다 어머니마저 5·18 때 받은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6·25가 가져온 형제들의 죽음
나는 영암군 학산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우리 형제는 모두 5남매였다. 그중에서 둘째 형은 다섯 살 때 어린 나이로 죽었고, 큰형님과 큰누나는 6·25 때 희생되어 지금은 나와 내 바로 위의 누님 한 분만 남았다.
나는 7살 때 6·25를 맞았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타격이었겠지만 우리 집에서도 그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큰형님은 그 당시에 경찰 후속 자위대에 소속돼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빨치산한테는 눈엣가시와도 같았을 것이다. 빨치산은 검정면에 있는 뒷산에 있으면서 주로 밤에만 마을로 내려왔다. 낮에는 경찰들이 활동해 못 내려오고, 밤에 마 을에 내려온 빨치산들은 큰형님을 내놓으라고 닥달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큰형님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주로 낮에 경찰들과 함께 마을에 왔다가 어디론가 퇴각해 가곤 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우리 집 형편이 남부럽지 않을 만큼 여유가 있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지주급은 못 되었어도 상류층에 들 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라서 땅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집이 503평 정도로 굉장히 큰 집이었다.
아버지는 부락 사람들로부터 상당히 인심을 얻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에 소위 인민재판을 할 때 마을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는데, 그중에는 빨치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형님을 내놓으라고 아버지를 때리는 일도 맡아서 했다. 그때 아버지가 마을에서 얻고 있는 인심 덕분으로 아버지에게 가해지는 체형이 어느 정도 적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1950년 내가 7살 때 일이었다. 형님을 찾지 못한 그들이 먼저 형수님과 누님 두 생명을 빼앗아 간 것 이다. 그 1년 뒤인 1951년 형님도 그들의 손에 죽었다. 당시에 형님이 소속돼 있던 자위대가 빨치산 토벌작전을 나갔다가 형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형님의 나이 25세였다.
어머니는 43세 되던 해에 나를 낳으셨다. 지금 살아 계시면 88세이신데, 늦게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장형과 막내인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던 것이다.
부모님께 전란이 가져온 충격은 컸다. 형님과 형수님, 누님, 세 분을 잃으셨다. 원거리에 있는 땅도 거의 없어졌다. 자식이라곤 누나와 나 둘뿐이었다. 자연히 독자가 되어버린 나에 대한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지나친 관심이 내 앞길 망쳐
나는 1956년도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구림중학교에 다녔다. 구림중학교보다 더 좋은 낭주중학교가 있었으나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구림중학교에 간 것이다. 부모님은 누나가 일찍 결혼하고 나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집을 떠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셨다. 중학교를 마친 나는 고등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학산면내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하시는 부모님 때문이었다. 광주, 목포에 살고 있는 아버지 친구분들이 나를 그쪽으 로 보내면 방을 제공하겠다고까지 했으나,
"너를 멀리 떠나보내고 우리가 어떻게 살겠느냐? 네가 외지로 나가 꼭 학교를 다녀야겠냐?"
하며 극구 반대를 하셨다.
남들은 없어서 못 배운다는데 넉넉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 나에게도 문제는 있지만 어쩌면 나는 부모님의 희생양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6·25만 없었더라도, 6·25가 형님을 빼앗아 가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은 쉽게 열렸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69세를 일기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6·25 때 당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너무 컸고 화병이 도졌던 것이다.
직장을 찾아 온 가족이 광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실상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아직 어린 나이로 내가 농사를 잘 지을 리 만무했다.
나는 22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그 뒤에는 일꾼을 내보내고 내가 직접 농사를 지었다. 나는 5남매를 낳았는데, 죽자사자 농사를 지어봐야 농사 밑천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누나의 권유로 1979년도에 광주로 올라오게 되었다.
애들을 찾아 도청까지
1980년 아내는 광천동에 있는 농가게에 다니고 있었다. 그 농가게는 이름 있는 회사에서 하청을 받아 제품을 만들었다. 같은 회사의 상표를 달고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이라도 그 회사에서 직접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하청을 주어 물건을 만들게 한 뒤 그중에서 합격품, 불합격품을 골라 그 회사 상표를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았다. 집사람은 그곳에서 농에다 페인트칠을 했다. 거기서 얻는 수입은 쥐꼬리만했다. 내 한 달 월급이 7만 6천 원 할 때였으니까 여자로서 그 농가게에서 집사람이 받는 급료는 뻔한 게 아니었겠는가?
5월 18일날 휴교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내가 근무하고 있던 성인경상전문대학교에도 계엄군이 들어왔다. 그들은 31사단 소속 군인들인 것 같았다. 그들이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수위로서 학교 정문에 근무하면서 우리는 그들과 자주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까지 이렇게 들어올 수 있소?" 처음엔 이렇게 말도 해보았으나 그들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들어온 뒤 3일간 그들이 숙직을 전담했다. 그들은 주로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통제했다. 또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외부 사람들도 학교에 들어올 수 없었다. 교직원을 비롯한 학교 직원들은 출입증을 제시한 뒤에야 출입이 허용되었다. 출입증이 없는 사람은 정문에서 인터폰을 통해 본부나 아는 교직원과 연락을 취한 다음에 들어올 수 있었다. 광주시내에 있던 전남대나 조선대, 서강실업전문대 등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출입증이 있었기 때문에 20일까지 별 변화없이 근무를 했다. 20일 저녁에는 학교에서 야근을 했다. 그날 밤에 시내 쪽에서 상당한 소요가 일어났던 모양이다. 우리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광주시내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나는 궁금해서 옥상에 올라가보았다. 군인들 몇 명도 그곳에 올라왔다. 옥상에서 보니까 광주교육대 부근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광주교육대 쪽이라는 것을 몰랐다. 옆에 있던 주둔군의 사령관이 그쪽에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기 집 근방에서 난리가 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물었다.
"아저씨 집은 어디요?"
"난 신안동이오."
그는 나더러 밖에를 한번 다녀오라고 했다.
"에끼 이 사람아, 밖에 나가기만 하면 찔러버린다 안 하더라고."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괜찮아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 같은 나이든 사람들이 20일까지는 밖에서 활동하는 데 별지장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아니면 그가 그때 상황을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아무튼 얘기는 거기서 끝났고, 내가 집에 갔다와야 할 의무도 없었으려니와 그럴 마음도 없었기에 관두었다.
21일 아침이 되어 퇴근을 하려는데, 그날 아침에는 이상하게도 교대조가 늦게 나왔다. 8시에 교대조가 출근을 하면 인수인계를 한 뒤에 퇴근을 했다. 그런데 평소보다 훨씬 늦게 출근한 교대조는 시내에서 차량이 통제되고 분위기가 살벌하여 길을 돌아서 오느라고 늦었다고 했다.
교대조에게 인수인계를 한 뒤 자전거를 타고 퇴근길에 올랐다.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광천동 사거리쯤에 오니까 차량이 통제되고 있었다. 송정리 쪽에서 오는 차량은 중앙병원까지만 운행이 가능했고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광천동 공단 네거리에서부터 우리 학교까지는 완전히 평화지대였다. 우리 학교 왼쪽에서 첫번 째에는 정보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국군통합병원이 위치하고 있었고, 학교 뒤쪽으로는 상무대가 있었다. 그쪽에서는 감히 어떠한 소요도 일어날 수도 없었다. 차량도 공단 사거리까지만 통제되었고, 학교는 마음대로 통행이 가능했다. 송정리 쪽에서 오는 모든 차량이 우리 학교 앞까지 밀려와 되돌아가곤 했다.
그때까지 일어났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나는 별로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는 구경나가지 않았다. 나갔다가 괜히 얻어 맞으면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차량이 통제되는 것을 보고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서서히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나에겐 확실한 신분증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두려움이 없었다. 광천동에서 아내를 만났다. 아침에 농가게에 출근을 했던 아내는 농가게가 문을 열지 않은 것을 보고는 그날 따라 유난히 늦어진 나의 퇴근길을 걱정하면서 나를 마중나오던 길이었다. 아내와 함께 집에 도착했는데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애들이 모두 나가고 없다. 어서 나가보아라."
"뭐 하러 나갔대요?"
"구경한다고 나간 것 같다. 아이고, 길도 잘 모를 텐데 걱정이다."
광주로 이사온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애들은 광주 지리를 잘 몰랐다.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아침밥을 먹은 뒤 출근복을 그대로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아내도 함께였다. 길거리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디에서 애들을 찾는단 말인가? 막막했다. 2번 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 광주역 쪽으로 갔다.
"자네는 이쪽으로 가소. 나는 이쪽으로 갈 테니까."
아내와 나는 서로 길을 걸어갔다. 광주역을 지나고 유동 삼거리를 지났다. 가던 도중 시위차량을 만나기도 했다. 유리창이 모두 깨진 차에 탄 시민들은 차체를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도청 쪽으로 간다며 우리들을 보고 차에 타라고 했으나 아이들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타지 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도청 앞에까지 이르렀다. 도청 앞에는 경찰들과 군인들이 시커멓게 서 있었다. 시민들이 군인들과 몸으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자동차보험 빌딩 앞에서부터 도청 앞까지 금남로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시민들은 모두 겹겹이 둘러싸인 철의 장막(?)을 뚫고 도청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도청 앞으로 돌진하는 장갑차에 총격이
오후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장갑차 한 대가 서서히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 뒤를 버스 한 대가 뒤따랐다. 버스에는 운전수 외에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과 그곳에 있던 시민들 사이에 묵시적인 약속이 이루어졌다. 차가 돌진함과 동시에 모두 한꺼번에 몰려가자는 듯 했다. 장갑차와 버스는 길을 뚫어버리자고 군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시민들도 함께 우하고 몰려갔다. 그러자 경찰들과 군인들은 우르르 도청 안으로 도망갔다.
마침내 철의 장벽이 무너지고 길이 뚫릴 즈음이었다. 난데없는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장갑차와 버스에다 대고 쏜 것 같았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 중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죽었을 성 싶다. 이번에 광주특위 청문회를 보니까 21일 오후 1시 30분 발포는 자위권 발동에 의한 위협사격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았던 바에 의하면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은 분명히 차에 대고 총을 쏘았던 것이다. 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때 시민들 중에도 총에 맞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장갑차와 버스는 총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달렸다. 아마 그랜드호텔 쪽이거나 그 옆골목이었을 것이다. 시민들도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났다. 총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최루탄도 날아왔기 때문이다. 도청 안으로 퇴각했던 군경들도 다시 몰려나오며 시민들의 뒤를 쫓았다.
나는 수산업협동조합 건물 뒷벽 쪽에 있었다. 최루가스를 난생 처음으로 맡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무조건 어느 곳으로 뛰어들어갔다. 식당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식당 안에는 20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있었다. 한참 지난 뒤 밖이 좀 차분해지자 시민들은 한둘씩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점심을 안 먹었던 나는 그때서야 시장기를 느꼈다.
"여기 밥 팔아요?"
식당 주인에게 내가 묻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에이 여보쇼, 이런 판국에 지금 밥을 팔게 생겼소. 댁에 가서 드시오."
그는 말하기를, 종업원이 한 사람도 안 나와서 밥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귀가길에 공수대에게 붙잡히다
배도 고팠고 아이들도 혹시 집에 들어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귀가길에 올랐다. 충장로 1가 쪽으로 내려오는데 간호원들이 뛰어나와서 부상자들을 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 도청 진격 후 도망을 치다가 군인들에게 당한 것 같았다. 총에 맞았는지 곤봉에 맞았는지 그것은 구별할 수 없었다. 몇 사람이 축 늘어진 채 실려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다시 금남로로 나와서 서서히 내려오는데 시민들이 밥, 빵, 음료수 등을 가져 와 사람들에게 주고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기 때문에 나는 걸으면서 문을 연 식당이 있는가 살폈다. 먹으려고만 하면 먹을 수도 있었지만 앞에 음식이 있는데도 길거리에서 먹는다는 게 이상해서 그만두었다. 그때 거리에 앉아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대부분 넝마주이였을 것이다.
5·18이 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넝마주이들이 많았었다. 그들은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다녔다. 행실이 거칠고 험악했다. 돌아다니면서 동냥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물건을 훔쳐가기도 하였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성인경상전문대학에도 그들은 자주 왔다. 그렇게 많았던 넝마주이들을 5·18이 지난 뒤에는 아예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아마 5·18 때 많이 죽지 않았을까 한다. 그들이 죽었다고 해도 대부분 홀홀단신으로 가족도 없이 떠돌던 사람들인지라 사망자나 행불자로 신고되지 않았을 것이다.
헬기가 한 대 떠서 자제를 요청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금남로에는 다시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동차보험에서부터 도청 사이에만 있었고 그 뒤부터는 밤과 같이 고요한 거리였다. 모든 상점의 문을 닫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도청 쪽으로 몰려가고 없었다. 내가 '자동차보험'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광주역으로 가자고 외쳤다. 사람들이 광주역으로 향해 오고 있다고 했다. 나도 거기에 따라붙었다. 어차피 집으로 가는 길도 그쪽이었고, 또 혼자 걷느니보다는 여럿이 걷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광주역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울, 광주간 기차가 끊긴 상태였는데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올 리 만무했다. 다만 스피커에서 여자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시민들에게 어떻게 하자고 당부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시외곽지역으로 나가는 길에 계엄군이 매복해 있으므로 위험하니까 될 수 있으면 시내에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전날 저녁에 야간근무를 했기 때문에 잠을 못 잤고 많이 걸었던 탓으로 몹시 피로했다. 걸음을 재촉해서 내가 전남대 사거리 조금 못 가서 철교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람들이 그쪽에 몰려 있었다. 철교 위와 아래에는 공수대들이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이 지프차에 불을 붙여 공수대 쪽으로 몰고 갔다. 웬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운전수는 뛰어 내리고 차는 공수대 쪽으로 밀어버렸다. 그런데 차가 곧 멈췄으므로 거기서 다친 사람은 없었다. 시민들의 그런 행동을 공수대는 관망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총을 멘 채 그냥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10분간 구경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때 시민들의 행동이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전남대학교로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군인들이 철수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집을 향했다. 나이든 사람 너덧명이 집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앞서 가는 그들과 나와의 거리는 10미터 정도였다. 함께 가고 있었지만 피곤해서 도저히 걸음을 빨리 할 수 없었다. 내 뒤에서도 몇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은 복개되고 없지만 신안동 동사무소 쪽으로 가는 조그만 천변길이었다.
공수대는 광주역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철둑 위에도 죽 일정한 간격으로 군데군데 서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도 나는 별로 위험을 못 느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랴 싶었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안심이 되었다.
동사무소 가까이 왔을 무렵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총을 난사하면서 우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악도 썼다. 앞으로 계속 달려버렸으면 괜찮았을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놀란 나는 우선 가까이 있는 동사무소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피할 수 없는 곳이었었다. 어느 쪽에서 왔는지 사람들이 일곱 명 정도가 있었는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이면 모를까, 그렇게 젊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 틀림없이 당하더라도 더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공수대가 들어왔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10-20명 사이였을 것이다. 오자마자 그들은 우리들을 무차별 난타했다. 곤봉을 사정없이 휘두르고 워커 발로 밟았다. 될 수 있는 대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때 곤봉에 맞아 새끼손가락을 잇는 힘줄이 끊어져버렸다. 이도 하나 나가 버렸다.
한참 구타를 당한 후에 우리들은 끌려갔다. 동사무소에서 잡힌 사람은 모두 10명 정도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웃옷을 잡아뜯어 벗겼다. 또 허리띠를 모두 풀게 한 뒤 그것으로 손을 묶었다. 그런 다음 철둑길로 끌고 가서는 '원산폭격'을 시켰다. 그것이 끝나자 우리 모두는 용봉국민학교 앞길로 해서 전남대학교로 끌려갔다. 나는 끌려가면서 공수대 소령한테 항의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데려가는 것입니까?"
"야! 이 새끼야, 까불지 마. 너 돌멩이 몇 개 던졌어?"
말 한마디도 못한 채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것도, 또 험악한 모습으로 끌려가는 것도 참으로 억울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아무 일도 안 했으니까 신분증을 보여주면 곧 보내주겠지.'
차 안에다 최루가스를 뿌려
전남대 본관 앞에 있는 용봉탑을 지난 뒤 어느 강의실로 끌고갔다. 별로 큰 강의실은 아니었다. 강의실 안은 먼저 잡혀온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웃옷을 벗은 상태로 자신들의 혁띠로 손을 뒤로 묶인 채였다. 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우리들도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야 했다. 그렇게 있으면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언뜻 보기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등은 물감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이번에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윤흥정 씨가 증언한 내용 대로 하자면 시위 한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뿌린 물감이었다. 윤흥정 씨는 화염방사기를 통해서 물감을 뿌렸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모르겠다. 머리에 피가 엉겨붙은 사람도 있었다. 머리를 곤봉으로 구타당한 뒤 흘렸던 피가 그대로 응고되어 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조사를 받았다. 머리를 처박은 채로 있다가 한 사람씩 앞으로 불려나갔다.
"야! 이 새끼, 너 이리 나와."
발로 툭 차며 그들은 한 사람씩 불러냈다. 나도 그렇게 해서 불려나갔다. 나가자마자 주민등록증을 비롯하여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너 어떻게 해서 시위를 하게 됐냐?"
나는 시위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때까지 일어났던 일을 대강 말했다. 야간근무를 한 뒤 아침에 퇴근해 보니까 아이들이 없어서 찾으러 나왔다고 했다.
"이 새끼야, 거짓말 마. 그럼 너 차 탔어. 안 탔어?"
"애들을 찾으러 나간 사람이 차를 타겠습니까?"
"이 새끼, 신원조사 해보면 당장 나타나. 거짓말 하지마. 너도 같이 했잖아."
나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바로 앞에 나갔던 사람이 항의를 하다가 많이 맞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고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비명소리를 들었다. 조사가 끝난 뒤 밖으로 끌려나왔다.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뛰다시피 어떤 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차 안은 컴컴했다. 단지 고개를 내놓을 만한 윗구 멍에서 광선이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차의 입구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올라가기가 힘이 들었는데 늦게 올라간다고 발길질을 해댔기 때문에 뛰다시피 들어갔 던 것이다.
그곳에 10여 명씩 들어갔는데 차 내부가 꽉찼다. 우리들을 차 안으로 밀어넣은 뒤 그들은 무슨 가스를 뿌렸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눈물이 나고 목이 아팠다. 최루탄 가스, 아니면 다발탄 가스였을 것이다. 조그만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가스로 인해 기진맥진했다. 정신이 아득했다. 공기가 통하는 곳이라곤 차 위 쪽에 나 있는 조그만 구멍뿐이었다. 점심도 못 먹었던 나는 별로 힘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견딜만 했다.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잡혀온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무튼 물 한 방울도 못 마시고 며칠간을 지냈기 때문에 기력을 잃어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우리들의 정신을 잃게 해서 그들이 가한 잔학행위를 잊게 하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연행장소나 연행된 거리를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혹은 공포감을 심어주어 우리들을 더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몇 분간 지독한 가스에 시달린 우리들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군용 트럭에 실렸다. 몇 명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군용 트럭이 꽉찼다. 우리들을 태운 뒤 그들은 군용 트럭을 포장했다. 밖에서 봤을 때 빈 차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도 밖을 전혀 내다볼 수 없었다. 단지 벌어진 틈이라고는 차 앞 쪽에서 우리들을 향하고 있는 총구가 들어온 구멍뿐이었다. 운전석에 탄 군인들은 운전석 뒤에 달린 창문을 통해 총구를 들이대고 감시했다. 차가 지나가는 양 옆 도로변에서는 군인들이 차를 따라 행군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차는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모두 여전히 손을 뒤로 묶인 채였다. 또한 군인들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감히 도망갈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묶인 손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다시 묶일 것 같아 풀어진 곳을 손으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군용 트럭에 태워진 뒤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손을 앞으로 내릴 수가 있었다. 나는 차의 앞쪽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총구가 들어온 곳으로 밖을 볼 수가 있었다. 차는 전남대 후문을 지나서 어디론가 갔다. 한참 지난 뒤엔 시외곽으로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몇 시쯤이나 되었을까? 해질 무렵 차는 멈췄다. 군인들은 차에 씌워진 포장을 벗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이 개새끼들!"
그들의 손에는 대검이 꽂힌 총이 들려 있었다. 닥치는 대로 그들은 대검을 휘둘렀다. 차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대검에 찔리지 않기 위해 가운데로 몰려들었다가 앞쪽으로 쏠렸다가 난리였다. 나는 앞쪽에 있었기 때문에 대검을 피할 수 있었다. 두 팔과 정신이 멀쩡했기 때문에 내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검을 피할 수 없었다. 또 대검에 찔리지 않기 위해 이쪽저쪽으로 몰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피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짓눌린 채로 그들은 실신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거기서 몇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광주교도소의 창고에 4, 5백 명 수감되다
그렇게 한바탕 당한 뒤에 우리들은 다시 차에서 내려 어느 건물 앞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는 손을 더 이상 묶지 않고 풀어줬다. 무릎만 꿇게 했을 뿐이다. 분위기가 훨씬 자유스러웠다. 말도 할 수 있었고 담배를 피울 수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소지품을 모두 압수했다.
"가진 것 있으면 지금 모두 내놔. 만약에 조사해서 물건이 발견되면 죽을 줄 알아."
담배와 라이터까지 압수를 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은 실컷 피우라고 했다. 몸에 지니지는 말고 피우려면 피우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 깊숙이 담배를 숨겨 가는 사람도 있었다. 소, 대변을 볼 사람은 보라고 했다. 공포증에 시달려 내장이 타버렸는지 대소변을 보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곧이어 우리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함께 들어간 사람은 대략 4백-5백명이었다. 들어갈 때 혁띠를 모두 압수당했다. 우리들이 들어간 곳은 굉장히 넓은 곳이었다. 우리들을 그곳에 수용하기 위해 매우 급하게 준비한 것 같았다. 처음엔 맨 땅이었으나 나중에는 가마니를 깔았다. 덮을 것도 없었으나 심문이 끝난 뒤로 모포 몇 장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곳이 어딘지 잘 몰랐으나 알고 보니 광주교도소 안에 있는 창고였다. 들어가서 10일간은 조사를 받았다. 그런 뒤에야 창고 밖으로 나와서 한 번씩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죄를 짓고 들어온 일반 수감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가 있는 곳이 교도소 창고라는 걸 알려주었다. 창고 앞에는 일반죄수들이 세탁을 하는 우물이 있었는데, 건물 앞에 우물이 있다고 하자 그곳이 바로 창고라고 했다.
들어가던 21일 저녁에는 자리가 비좁았기 때문에 눕지도 못하고 그냥 아무렇게나 잠을 잤다. 먹을 것을 전혀 주지 않다가 22일 저녁이 되어서야 건빵 한 봉지씩을 주었다. 물도 없이 건빵만 주었기 때문에 배는 고팠지만 그 건빵을 다 먹지 못하였다. 입 안에 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간 굶어 탈진한 상태였기에 입 안에 침이 있을 리 없었다. 건빵 안에는 별과자가 열 개 정도 들어 있었다. 별과자가 입 안에서 녹으면서 침이 생겼다. 그것으로 간신히 건빵을 넘겼다. 별과자 10개로 건빵 20개 정도를 먹었다. 먹지 못하고 남은 건빵을 베고 자기도 했다.
첫날 저녁에 한 명이 죽었다. 물을 달라고 외치면 군인들이 와서 사정없이 밟아 버렸다. 군인들이 문을 닫고 나가버린 뒤에 사람들은 그에게 오줌을 싸서 주었다. 그 전에도 나는 사람이 오줌을 먹는 경우가 있다고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때 처음 보았다. 컵으로 오줌을 받아서 준 모양인데 처음에는 버리고 나중 것은 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갈증이 해소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까 그 사람은 죽어서 가마니에 덮여 있었다. 군인들이 시체를 내갔다.
23일 아침부터 밥이 나왔다. 밥이래야 보리에 콩과 쌀이 몇 알씩 섞여진 순꽁 보리밥이었다. 또 사각 모양으로 잘라져 나왔는데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을 수저로 찌르면 밥이 대롱대롱 달려나올 정도였다. 반찬도 국물도 없이 물만 주었다. 이를 다친 나는 그 딱딱한 밥을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밥을 못 먹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군인이 물었다.
"여기서 죽 먹을 놈들 몇 놈이나 되냐?"
그 뒤로는 죽을 먹게 되었다. 5일간 죽을 먹었는데 더 계속 먹을 수 없었다. 죽을 먹은 뒤 2시간 정도 되면 곧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소화가 빨리 되기도 했고, 크지 않은 스덴 그릇으로 하나씩만 주었기 때문이다.
극렬시위 가담자라는 거짓 자술서 강요당해
조사를 받을 때는 한 사람씩 불려갔다. 교도소 건물 2층에서 받았는데, 그곳에는 책상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사복 수사관이 그때까지의 상황을 얘기하라고 했다. 아이들을 찾으러 나왔다가 거기까지 끌려오게 된 과정을 죽 얘기했다. 수사관은 내 얘기를 듣고 자술서를 작성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읽을 테니까 틀린 것이 있으면 말하라며 자술서를 읽었다. 자술서의 내용은 내가 했던 얘기와는 전혀 달랐다. 나를 완전히 극렬 시위가담자로 써놓고 있었다.
"내가 애기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야, 이 새끼야, 그러면 네가 데모를 했지 안 했어?"
"애들 찾으러 나왔다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했지, 내가 언제 데모했다고 했소? 다시 하시오."
"이 새끼 봐라. 너 데모 안 했으면 왜 잡혀왔어? 또 데모 안했는데 왜 맞았어? 네 상처만 봐도 분명히 데모했잖아?"
그는 군인들이 선량한 시민을 때리겠냐고 도리어 나에게 물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인정을 하지 않자 그는 병장을 불렀다. 한번 맛 좀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병장한테 끌려가 소위 '빳다'를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맞고 난 뒤에 다시 조사를 받았다.
"너 이 새끼 이래도 안 했다고 해?"
했다고 해야 할지, 안했다고 해야 할지 나는 망설였다. 시인하자니 내용이 너무 엄청나고, 부인하자니 또 맞을 것 같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대답을 안 하니까 데모를 했다고 시인한 걸로 인정되어 조사가 끝났다. 그런 뒤 군인에게 업혀서 창고로 갔다. 많이 맞은 탓으로 내가 보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를 업은 군인은 말했다.
"아저씨, 무조건 했다고 하세요. 안 했다고 하다간 괜히 생죽음만 당해요. 우리가 아저씨를 때리고 싶어서 때리겠어요. 자술서를 작성하는 데 자백을 받으려고 그러는 것이니까 우리 원망은 마세요."
나를 조사했던 수사관은 허장완이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번에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 안다. 그는 광주 사람이었다. 나는 석방된 뒤로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가 작성했던 나에 대한 자술서의 내용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나오고 나서도 불안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점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빌미로 석방된 뒤에 사람들이 그들에게 당했던 모든 것에 대해 함구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 번 조사를 받고 난 뒤에 나는 더 이상 불려가지 않았다. 두세 번이나 불려갔다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반죽음 상태로 돌아오곤 했다. 미처 치우지 못 하고 한쪽에 쌓여 있던 물건들을 가지고가자 창고 안이 넓어졌다. 그곳에 있는 몇백 명의 사람들은 모두 간신히 누울 수 있었다. 한쪽에 '변기통' 3개를 놓았다. 대소변용이었는데, 그것은 드럼통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창고 안은 악취가 심했다. 휴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옷을 찢어 사용했지만 그런 것쯤은 당시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자리를 넓게 잡고 좀 더 편하게 있을 것인가? 잠을 좀더 잘 것인가?' 하는 것들이 더 중요했다. 악취가 심했지만 그것 역시 문제도 안 되었다. 사람들은 똥, 오줌냄새를 맡아야만이 극한상황에서도 살아날 수 있다고 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제일 고통스러웠던 때는 밤이었다. 도청이 진압된 27일까지 군인들은 계속해서 밤이면 광주시내에 나갔다 오곤 했다. 그들은 타박상 등 가벼운 상처를 입고 오는 수가 있었는데, 그 화풀이로 우리들을 무조건 때렸다.
"이 새끼들, 광주 새끼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다쳤어."
그들은 또 '취침!'이라고 해놓은 뒤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무조건 와서 때렸다. 나도 그렇게 한 번 당한 적이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탁! 하며 뭣인가가 머리에 부딪혀왔다. 동시에 칼날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 새끼 일어나."
그러나 나는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잠을 자는 척했다. 일어나면 분명히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새끼 잠꼬대 했나?"
하면서 그만두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교도소 부근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있으니까 군인들이 씩씩거리며 들어와서 말했다. 어떤 놈들이 교도소를 습격하기 위해 왔는데 다 죽여버렸다고 했지만, 그들이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을 과장해서 하곤 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매우 궁금했다. 뒤에 들은 바에 의하면 시민군들이 일부는 담양 쪽으로 가고, 또 일부는 교도소 쪽으로 왔다고 한다.
상황 염탐군으로 몰린 이리 사람
그곳에 있으면서 나는 매우 어이없이 잡혀온 사람들을 보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어이없게 잡혀왔지만 말이다. 21일날 '광성여객' 회사 직원들 8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들은 회사에서 차량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키고 있다가 잡히거나, 일직이어서 사무실에 나왔다가 잡혔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차량절도죄로 몰렸다. 차량탈취를 해 시위를 했다고 몰아붙였으나 8명이 계속 진정을 함에 따라 회사로 연락을 취하여 신원을 확인하였다. 다행히 그들은 우리들보다 더 먼저 나갔다.
23일에는 이리에 사는 사람이 잡혀왔다. 그는 조그만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광주시와 통화가 불가능했으므로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금 조달면에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직접 광주에 와보기로 하고 자가용을 몰고 왔다고 한다. 비아까지는 아무 일 없이 내려왔다. 그는 '말로 듣기와는 다르구나. 이렇게 차가 마음대로 다니는 걸 보면 광주까지는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를 본 그곳 사람들은 광주로 가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생각 대로 광주를 향해 차를 몰았다고 한다. 비아를 지나 얼마만큼 오는데 갑자기 도로 양옆 산에서 총알이 날라오기 시작했고, 그 총에 맞아 차 바퀴가 터져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는 더 속력을 내어 차를 몰았다고 한다. 한참 달린 뒤에 차가 길 옆 고랑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잡힌 것이다. 그는 머리가 깨진 채로 들어왔는데 대검에 찔렸다고 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검에 찔린 뒤 정신을 잃고 끌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잡혀와서 굉장히 시달려야 했다. 광주상황을 염탐하기 위해 내려왔다고 난리였던 모양이다.
도청에 다시 계엄군이 진주하던 27일 새벽 군인들은 말했다.
"너희들 행복한 놈들인 줄 알아."
우리들 중 누가 이유를 묻자,
"오늘 광주시가 쑥밭이 되는데 너희들 가족은 죽더라도 너희들은 우리가 보호해 주고 있으니까."
말인즉 그들이 말하는 소위 도청 진압작전이 실시되는데, 만약 어려움이 있다면 광주시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었다.
28일부터는 교도관들이 들어왔다. 교도관들도 그때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21일 근무를 맡은 사람이 교대를 못 하고 27일까지 죽 근무했다. 교도소에 많은 사람들이 잡혀와 있다는 걸 알리지 않기 위해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일반죄수들도 27일까지 일주일 동안 감방 안에 꼬박 갇혀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밖에 나와서 작업도 하고 운동도 했는데 가둬만 둔 것이다. 27일 이후에 그들은 종전대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우리들도 창고 밖으로 나와 움직일 수 있었다. 밖에서 그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과 우리를 사이에는 새끼줄이 쳐져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를 가르고 있는 38선처럼. 밖으로 나왔을 때 여자들도 우리들처럼 잡혀와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직접 보지는 못 하였다.
또 27일 이후부터 칫솔, 치약, 비누, 타올 등이 나왔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광주에 있는 어떤 방위산업체 사람들이 돈을 거두워 사보낸 것이라고 했다. 그 뒤 얼마 지나서 군용 팬티와 러닝샤쓰가 나왔다. 그것들을 우리들에게 주면서 입고 난 뒤 반납하라고 했다. 한 번만 입으면 그냥 더러워지는 것을 말이다. 우리들은 군용품이라며 별로 입지도 않았다. 휴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찢어서 휴지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교도관들이 머큐로크롬을 가져와 상처를 치료 해 주기도 했다.
어느 날 교도관이 내 이름을 호명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또 뭐가 잘못되어 끌려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슴을 조였다. 옆에 있던 서석고등학교 3학년 학생(그 학생이 지금은 내가 근무하고 있는 호남대학교에 다니고 있다)이 나에게 말했다.
"아저씨 이름 아니요?"
내가 대답을 않자 교도관은 괜찮으니까 있으면 대답하라고 말했다.
"접니다."
그러고는 나오라고 해서 나갔다.
교도관은 나에게 박종근 씨를 아냐고 물었다. 매형의 이름이었다. 내가 매형 된다고 얘기를 하자,
"매형을 좀 아는데 당신이 여기 있는가 확인해 달라고 했다"
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 연락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뭐 연락할 게 있겠소? 어머님이 한 분 계시는데 연락을 해보아야 괜히 걱정만 끼쳐드릴 텐데. 나가서 그저 잘 있다고만 말해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는 또 애로점은 없냐고 물었다. 다음날 근무교대로 밖에 나가게 된다며 부탁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연락해서 담배 좀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제일 궁한 게 담배였다. 교도관에게 말한 그 다음날 담배가 들어왔다. 처음에 담 배 한 보루가 들어왔는데 한자리에서 없어지다시피 했다. 창고 안으로 그냥 던져줬으므로 내 손에 들어온 건 한 갑뿐이었다. 그것을 주위 사람들과 나눠 피고 나니까 호주머니에는 대여섯 개피만이 남았다. 나는 하루에 두 갑 이상씩만 넣어달라고 말했다. 그것이면 주위 사람들과 나눠피울 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집에서 현금으로 얼마를 교도관에게 줬다고 했다. 담배도 넣어주고 애로점이 있으면 보살펴달라면서. 그러나 다시 현역군인들이 우리들을 담당하면서부터는 담배가 끊어졌다. 5·18 후에도 군인들은 아직 교도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반죄수들을 맡을 손이 딸리게 되자 교도관들은 다 그쪽으로 가버리고 다시 현역군인들이 우리를 맡았다.
그런데 군인들 중에 광주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원동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저녁이면 담배 두 갑을 가져왔다. 그것을 두세 사람 앞에 한 개피씩 나눠줬다. 그곳엔 나같이 나이든 사람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 젊고 나이의 사람들이었는데 고등학생들도 많았다. 그 사람은 고등학생들에겐 담배를 주지 않았다. 나이 든 사람도 다 못 피우는 담배를 어린 놈들이 피울 수 있냐는 것이었다. 고등학생들은 우리가 태우고 남으면 그걸 피웠다. 그 군인의 이름은 누군지 모르지만 참 고마웠다. 아마 같은 광주 사람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부마사태처럼 총검 휘둘렀지만 더 악화된 상황
이번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윤흥정 씨가 얘기했던 걸로 안다. 그 교도소는 지역적인 감정을 고려하여 경상도인이 주측이 된 20사단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의 말 대로 우리를 담당했던 군인들은 거의가 경상도 말투였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5·18이 얼마만큼 과잉진압에 근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역시 청문회에서 윤흥정 씨가 증언했던 것처럼 그들은 전라도 놈들은 완전히 오기만 남아 있다고 욕을 해댔다. '부마사태' 때도 자기들이 진압을 했는데 총에다 대검을 꽂은 뒤 하룻밤을 휘둘러버리자 조용해졌다고 했다. 전라도 놈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강하게 진압하면 할수록 시위가 더 확산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A, B, C, D급으로 분류되었다. 나는 C급으로 분류되었다. D급이 아니고 C급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허장완이가 들어와 분류한 것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고 얘기했다.
"데모도 안 하고 그랬는데 왜 D급으로 안 하고 C급으로 했소?"
"야, 이 새끼, 너 학교에 근무할 때에도 허진이라는 학생을 조종해서 데모하려고 했던 놈 아니냐?"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성인경상전문대에 근무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다. 전날 야간근무를 한 뒤 아침에 학교 정리를 하는데 곳곳에 무슨 벽보가 붙어 있었다. 고교동문회 모임 공고 등을 그렇게 곧잘 붙이곤 했으므로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날 아침 도서관에 갔다가 몇 명의 학생들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일찍 공부하러 왔구나 생각하고는 별로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 뒤에 나는 그냥 퇴근을 했는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날 아침 도서관에서 만났던 그 학생들이 교내에 의식있는 내용의 벽보를 붙여놨던 것이다(그 학생들 중에 허진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당직근무자였던 내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냥 퇴근을 해버렸으니 책임이 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학생들의 시위가 일반화되지 않을 때였고, 특히 우리 학교는 그때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던 때라서 문제가 컸던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서부경찰서에 불려가 1주일간 곤욕을 치렀다. 자술서를 작성하고 나왔는데, 그것이 컴퓨터에 입력이 되었는지 신원조회를 해보면 나왔다. 허장완이는 바로 그걸 두고 말한 것이었다. 또 허장완은 말했다.
"21일 도청에 나간 것은 학생들을 선동해서 데모를 하려고 했던 것 아니냐?"
"너는 주모자다. A급으로 할 수도 있는데 C급 정도로 관용을 베푼 것이다."
재수없이 된통 걸렸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보내주겠지'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1980년 6월 15일 우리들은 광주교도소에서 상무대 교육대로 옮겨졌다. 그곳에 있는 교회에서 성경책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 나처럼 30살 이상인 사람은 몇 사람 안 되었는데, 아저씨처럼 대우한다면서 어린 사람들 교육 좀 시키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하루 빨리 재판을 받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재판은 자주 연기되었다. 재판은 일주일에 하루만 했다. 그래서 그날 못 하면 또 일주일이 연기되었다. 5·18 이후에 시내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던 것이다. 상무대로 간 지 2주가 훨씬 지난 7월 2일 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받을 때 번호순으로 모여서 받았다. 나는 '수위'라고 하지 않고 회사원이라고 해가지고 회사원들과 함께 받았다. 우리들에게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은 채 판결이 내려졌다. 광주소요사태와 관련, 군법 몇 호 몇 항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이러이러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때 A급은 재판을 받은 뒤 징역을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B, C급은 같이 재판을 받은 뒤 함께 석방되었다. D급은 우리들보다 먼저 훈방되었다.
내가 죽었다는 점장이의 말 따라 시체 찾아나서
1980년 7월 4일,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나올 때 사람들은 버스 10대에 함께 타고 나왔다. 얼마나 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잡혀갔는지 알 수 있다.
내가 나가서 며칠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자 아내는 답답한 김에 점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점장이가 하는 말이 내가 죽어서 전남대학교 뒷산에 묻혀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전남대 뒤로 가서 혹시 시체를 묻었던 흔적이 없는가 하고 수소문을 해보았다. 또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광주기독병원 등을 돌아다니며 시체확인을 했고, 도청 앞에서도 시체들을 뒤졌다. 그런 뒤 완전히 포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 시체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어버렸다는 얘기들이 난무했 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증명서를 갖고 있으니까 죽었더라도 그걸 보고 연락을 해주겠지 하며 기다렸다고 한다.
교도소에 들어간 지 2주가 지나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들은 편지 내용도 몰랐다. 봉해진 편지에다 자기 이름과 주소만 기입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그 편지를 받고서야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교도소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맺힌 한으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내가 집으로 돌아온 뒤 얼마 안 되어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6·25 때 형님, 형수님, 누님을 잃으셨던 어머니! 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도 6·25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나마저 5·18로 그렇게 당하고 보니까 어머니는 당신이 무슨 죄를 졌길래 하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건강이 악화되셨는데, 내가 잡혀가있을 때는 그럴 경황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셨다. 내가 나온 뒤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풀려난 뒤 머리가 희어져 죽은 사람
5·18 때 나처럼 잡혀간 뒤 돌아와서 죽은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사람은 운천동에서 조그만 술집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학교에 자주 왔다. 학생들에게 준 외상 술값을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에 그 사실을 몰랐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저렇게 학교를 들락거리는가 싶었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신성한 학교에 와서 지금 뭣 하는 것이냐? 당신 같은 사람이."
"내가 운천동 깡패여."
"깡패면 뭣 한다냐? 등치나 커가지고 깡패나 해야지. 너같이 작은 놈이 깡패 말 듣것다."
"이 새끼 깡패를 몰라봐?"
그는 나보다 몸집이 더 작았다. 그렇게 지냈던 그와 내가 상무대 교육대에서 만났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다가 그리로 왔다고 하니까 그는 운천동 쪽에서 그냥 잡혀왔다고 했다.
"너 데모 좀 했냐?"
"너는 어쨌냐?"
"나는 데모했어야."
"뭐 너 같은 자식이 데모해야? 솔직이 말해."
"광주시민이 다 하는데 내가 안 했것냐?"
그는 많이 맞고 나온 뒤에도 돈이 없어서 처방을 못 했다. 그의 술집이 우리 학교 앞에 있었으므로 가끔씩 그를 볼 수 있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머리카락은 온통 희어져버렸다. 그러더니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죽었다고 했다. 생각할수록 그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식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어린애가 달린 과부를 데리고 살았는데 그가 죽은 뒤로 그 처자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는 아마 신고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부상자에도, 행불자에도, 사망자에도, 그 어디에도......
또 교도소에서 알게 되어 얘기를 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트럭을 가지고 장사를 하기도 하고 물건 배달을 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시내에서 운전을 하고 가던 중에 잡혀왔다. 그는 별로 외상은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 골병이 들었다. 나온 뒤에는 정신이상 증세까지 있다. 살림은 다 망해 버리고 지금은 달방살이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감추고만 싶었던 새끼손가락
나온 뒤에 경위서를 제출하고 그대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해 5월, 6월달치 봉급도 나와 있었는데 나온 뒤에야 수령했다.
공수부대에게 맞았던 새끼손가락은 온전치가 못했다. 힘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펴지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병원에 가서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고 물어보았으나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부위를 찢은 뒤 뼈 안에 든 살을 긁어내고 잘 맞춘 뒤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불룩한 부위가 가라앉기만 하고 손가락은 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대로 둔 상태에서 자주 운동을 하여 새끼손가락을 펴보라고 의사가 일러줬다. 나는 수위실에서 근무 를 할 때나 어디에서 앉아 있기만 하면 손가락 운동을 했다. 2년이 지나니까 마침내 손가락이 펴졌다. 지금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지금도 다쳤던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손가락이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을 때의 습관이었다. 남이 언뜻 보기에는 별로 몰랐다. 그러나 그 손가락에 매우 신경이 쓰였다. 내 신체부위 중 비정상인 곳이라고 스스로 취급을 해버렸던 것이다. 보기가 싫으니까 자꾸 감추려 했던 것이다.
1988년 11월 29일 건강관리협회에서 등급을 판정받기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때 다쳤던 손가락 부위를 촬영해 놓은 게 없냐고 의사는 물었다. 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의사가 했던 말을 죽 해줬다. 수술을 해서 손가락을 펴기가 불가능하므로 운동을 해보라는 등의 얘기였다. 의사는 내가 전에 병원에 왔던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물적 증거로서 촬영한 사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때의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이 그런 것을 생각했겠냐?" 하고는 "내가 거짓말을 하겠냐?"고 말했다.
소뼈 고아 먹으며 치료해
손가락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다리는 많이 맞았던 탓으로 속으로 골병이 들어 있다. 걷기는 괜찮지만 비가 오려고 하면 쑤시고 결린다. 지금도 밤이면 갑작스런 충격이 와 헛발길질을 할 때가 있다. 마치 말이 뒷발질을 하는 것처럼. 그러면 옆에 있던 사람이 매우 놀라게 된다. 또 다리가 결려서 잠을 못 자고 날을 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갈수록 더해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주로 한방치료를 해왔다. 친구가 한약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더 싸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먹었던 보약은 한 제에 보통 4, 5만원 씩 했다. 비싸서 먹을 수는 없었지만 녹용이 들어 있는 것은 20, 30만 원씩 하기도 했다. 돈도 돈이려니와 한약은 달이기도 힘들 뿐 아니라 꼭 제때에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친구의 말을 듣고 소뼈를 고아먹기 시작했다. 소뼈는 돈도 더 적게 들었고, 한번 달여놓으면 시간나는 대로 먹을 수 있었다. 또 여름에는 냉장고에 보관해 놓고 먹을 수 있었다. 몸에는 한약 이상으로 좋은 것 같았다. 거기다가 1988년 6월부터는 병원에 다니며 거기서 약을 타다가 먹고 있다. 약값만 해도 한 달에 5만 원 이상씩 들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지금은 7백40만 원에 입주한 화정동 아파트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다. 아내는 아파트에서 시간나는 대로 청소일을 하고 있다. 딸애들이 직장에서 버는 돈은 저축을 하고 있다. 결혼 밑천으로 말이다. 고향에 다 팔지 않고 남겨두었던 논 2천 평과 밭 3백 평으로 식량을 하고 있다.
요즘 들어 호남대학은 학내 문제로 좀 복잡하다. 학교운영 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 학장에게 폭력을 가했던 이사장이 물러난 뒤 지금은 그의 부인이 이사장으로 있다. 그 뒤로 학생들은 점거농성을 해왔다. 그런 중에도 학사일정은 진행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엔 학생들의 행동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건의사항이 있으면 건의해서 서서히 시정해 나가도록 해야지, 막무가내로 이사장만 물러가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건의하면 쉽게 들어주지 않는다 는 문제도 있다.
제 2캠퍼스 부지로 송정리에 사둔 땅이 있는데, 그것도 문제가 좀 있다. 그 땅은 당시 송정리가 광산군으로 있을 때 샀다. 그러다가 이번에 송정리가 광주직할시로 편입됨에 따라 땅값이 다섯 배 이상이 올랐다. 이렇게 되니까 당시에 땅을 팔았던 땅 주인들이 싸게 팔았다고 야단인 것이다. 금년 9월부터 착공하기로 했는데 못 하고 있다.
5·18 지정병원이 있어야 할 듯
올 봄에 YWCA에 부상자로 신고했다. 진작 신고하지 못한 건 교도소에 있을 때 강제로 시인했던 자술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군수사관들은 말했다. 밖에 나가서 함부로 얘기하면 군법에 의해 몇 년형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수감되어 있을 당시 시달렸다는 사실과 자술과정에서 구타당했다는 사실, 또 부상자들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심리적 불안감을 안은 채 살아왔다.
처음 나는 시청에 신고하러 갔다. 그런데 거기는 처리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당시의 물적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병원의사의 진단서와 촬영해 놓은 사진 등을 제출하라고 했다.
"당신 5·18 이후에 다친 것은 아니오?"
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면서 동사무소에 가서 부상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명단을 복사해 오라고 했다. 동사무소에 명단이 그대로 비치가 되어 있다고 했다. 동 사무소에 가보니까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에 명단을 말소시켜 버렸기 때문에 새로 만든 것은 틀린 게 많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동사무소에서는 그 명단이 일급비밀로 되어 있다고 했다.
"중앙에서 시달이 안 되었기 때문에 내가 공무원 생활을 더 하려면 도저히 보여줄 수 없어요."
라고 동직원이 말했다. 그런데도 시청에서는 허울좋게 복사를 해오라고 했던 것이다.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기는 했다. 매형이 지금 신안동 10통 통장으로 있는데 동장과 알고 지내는 처지였으므로 어떻게 해서 내 이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는 5·18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심하게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생활을 영위해 올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 일당으로 사는 사람이 큰 부상을 당했을 경우에 그것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의료보험카드도 없기 때문에 더욱 어려울 것이다. 돈이 없어 치료도 못 한 채 벌이도 없이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활안정자금으로 나왔던 3백만 원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겠는가? 은행에 넣고서 치료비로 꺼내 쓰다 보면 금방 바닥이 날 텐데. 이번 신체검사를 통해 등급을 매긴 뒤 거기에 따라 보상을 할 모양이다. 그런데 일률적으로 보상을 할 게 아니라 생활이 아주 어려운 사람들을 더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의료보험카드가 나오면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겠다고 한다. 그것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특정병원을 지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병원에서 푸대접을 받기가 일쑤일 것이다. 그러면 의료보험카드가 있으나 없으나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또 진상규명이 먼저냐, 보상이 먼저냐 하는 얘기들이 나돌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생활이 아주 어려운 사람들 중에 보상을 어서 바라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진상규명이 확실히 된 후에 보상이 되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 고 나는 생각한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