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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시와사람 겨울호>
생명의 소리와 사랑의 힘
-송수권 시집,『허공에 거적을 펴다』(지혜, 2014)
이성혁(문학평론가)
송수권은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 어느 누구 보다도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시인이다. 특히 최근 그 창작열은 더욱 뜨겁다고 하겠는데, 1년에 두 권씩 시집을 낼 정도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볼 시집『허공에 거적을 펴다』는 제17시집이다. 시인이 최근에 작업한 『달궁아리랑』(2010)과『빨치산』(2012), 또한 앞으로 발간하게 될『흑룡만리』등은, 시인에 따르면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 등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복원하고자 시도하는 시집이다. 시인이『허공에 거적을 펴다』에 실린 자전적 시론에서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서정시에 역사의식이 빠지면 가락과 소리만 남고 맥 빠진 감상만 남는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117쪽)에 이제는 누구도 손대기 꺼려하는 아픈 역사를 시화하고자 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 제17시집에 대해서 시인은, “그동안의 역사정신을 천착한 시집들에서 주제로 묶이지 못한 일상생활 속의 느낌을 가볍게 써 본 시편들”(「시인의 말」)을 실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의 말처럼 마냥 가볍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허공에 거적을 펴고
시를 써온 것이 몇 년인가
햇빛 오고 바람 불어 좋은 날
새로 핀 벚꽃
꽃눈보라 와작히 내리는데
내 눈에선 자꼬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이는 지상에 발을 대고
걸어가는 때문
죽는 날까지도 그러리라
-「허공에 거적을 펴다」전문
허공에 어떻게 거적을 펼 수 있단 말인가? 허공은 비어 있지만 비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할 테다. 그곳은 흰 도화지 같은 공간이리라. 흰 도화지는 비어 있는 동시에 바탕이 실재하고 있어서, 그곳에 그림을 채울 수 있다. 시인에게 허공은 시를 그릴 수 있는 흰 도호하지와 같은 곳인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허공에 거적을 펴”고 살아가면서 허공에다 시를 쓰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허공은 지상의 현실이 아니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 지상은 마음대로 상상력을 따라 날아갈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걸어가야 한다. 그렇기에, 허공에만 쓸 수 있는 시와 “지상에 발을 대고/걸어가”야 하는 현실과의 낙차 때문에, “죽는 날까지도”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 눈물은, 또한 “와작히 내리는” ‘꽃눈보라’의 슬픈 아름다움의 시인의 마음을 자극하기 때문에 흘리는 것이기도 하다. 저 청명한 바람이 부는 날씨에 대조적으로, 아름다우나 허망하게 지는 벚꽃이 바로 지상과 허공 사이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삶을 아프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시인은 ‘허공’ 시편을 이 시집에서 몇 편 더 남기고 있다. “하늘이 저토록 파란 것은//구름이 다 흐른 탓”이라면서 “허공을 건너가는//길 없는 길을 내며 가는 새들”에 대해 읊고 있는「허공」이 그중 하나다.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허공에는, 한편으로 새들에 의해“길 없는 길”이 놓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길 없는 길”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새들이 허공을 건너가기 위해 낸 길일 것이다. 저 새들의 행로는 시인의 상상력의 행로 또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나타내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허공의 눈동자 1」은 허공에 대한 시인의 아이러니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잠자리 한 쌍’이 “가을 빈 허공”을 “무엇으로든//채워놓”기 위해 “가루지기로 날”고 있다. 그런데 그만 “제비 한 마리 잽싸게 날아들어 할퀴고” 가버리는 것이다. 구름이 하늘을 지나면서 허공을 비우듯이, 허공은 또한 비워져야 하는 것이 허공의 본질이다. 무엇을 채워두고자 하면 안 될 것 같은 장소가 허공이다. 허공을 채우고자 한 잠자리의 욕심은 결국 제비에게 먹이가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를 교훈삼아, 송수권 시인은 시를 쓴다는 일도 역시 허공을 채우고자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공에는 “빨간 목댕기를 두른 장끼 한 마리//번뜩 솟구쳤다 사라지는 현란한 빛”(「허공의 눈동자 2」)만 순간 빛나고는 잠잠해질 뿐으로, 허공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없다. 허공에서 써진 시 역시 그러한 빛-‘허공의 눈동자’-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방금 인용한「허공의 눈동자 2」는 “겨울 하늘 壁을 치고 내리는 매방울 소리//내동산과 성수산 일대가 술렁거린다”라는 진술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된다. 이 소리에 의해 산 일대가 술렁거리다가 갑자기 장끼 한 마리가 ‘번뜩’ 나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소리는 시적인 것이 번뜩이면서 등장하기 직전의 전조를 드러낸다는 것일까? 이 술렁거림이 없다면, 번뜩 나타나는 시적인 것의 충격은 그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을 것이다.
시집 뒤에 실린 ‘자전적 시론’인「남도의 소리와 말가락」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소리’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한 사람이다(필자 같은 문외한으로서는 시인이 탐구한 ‘소리’와 ‘가락’의 영역에 대해, 그리고 그것의 지역적(local), 전통적 의미에 대해 입 벌리고 들을 뿐이다). 근대 서구문화는 시각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언급한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을 기초에 둔 문화인 것이다. 그래서 근대에서는 청각이나 미각, 후각, 촉각 등의 감각은 명석판명의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왔다. 서구적 근대화에 매진한 한국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신인은 그렇게 서구적 근대성에 억압되어 온 ‘소리’에 대해 탐구하고 지역에 독특한 소리문화를 발굴하여 대안적인 근대성, 또는 ‘트랜스모더니티(transmodernity)’를 추구했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에 실린 시에서 시인은, 죽은 이후의 삶에까지 소리에의 지향을 계속할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월이면 일진광풍(一陣狂風)
솔바람 하나로 넘치는 골짜기
그 아래 밥 짓는 연기 자욱하고
개 짖는 소리도 들리는 곳
나 너무 외롭지 않게
미인송(美人松)도 관음송(觀音松)도 아닌
그 산자락 위 풍입송(風入松) 한 그루가
쳐보내는 솔바람 소리에
온전히 귀를 묻고 잠들리
두 눈과 콩팥 비장도 이웃에 주고
살과 뼈는 녹아 흘러 미세한 자양분으로
그 소나무 푸른 솔방울의 열매가 되리
그러면,
멀리서 찾아온 밤늦은 신혼부부 한 쌍
그 솔바람 소리 파고들어 귀를 묻고
솔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새벽기차를
타도 좋으리
여름에는 수많은 솔매미떼 깃들어 울고
-「수목장(樹木葬」전문
이 시의 시의 화자는 풍입송 한 그루 밑에 “온전히 귀를 묻고 잠들”게 되면, “두 눈과 콩팥 비장”을 이웃에게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것인데, 그 말은 죽음 이후의 삶에서는 시각이 필요 없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반면, 그는 “살과 뼈가 녹아 흘러” 풍입송의 “미세한 자양분”이 되면서까지 풍입송이 쳐내는 ‘솔바람 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래서 풍입송 밑에 귀부터 묻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죽음을 살면서 그가 거주하고 싶은 곳은, “밥 짓는 연기 자욱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솔바람 하나로 넘치는 골짜기”다. 그곳은 소리로 가득한 곳이다. 솔바람 소리뿐만 아니라 “개 짖는 소리”와 “솔매미떼 깃들어” 우는 소리가 가득한 곳이다. 그는 그곳에 묻혀 풍입송에 살과 뼈를 녹여 흘려보내서 “푸른 솔방울의 열매가 되”고자 한다. 그것은 열매가 된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솔바람 소리”로 신혼부부 한 쌍의 귀에 파고들었으면 하는 욕망이다. 그 소리를 통해 신혼부부가 “솔씨 같은 아이 하나 얻”는다면, 시의 화자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그 욕망은 소박해보이지만, 사실은 시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욕망이라고 할 것이다. 저 솔방울 열매란 바로 시인이 남긴 시를 의미하며, 그 열매를 스치면서 내는 솔바람의 소리란 그 시가 내는 가락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의 가락이 새로운 세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세대의 아이가 그 가락에 따라 솔씨처럼 자라게 된다면, 시인으로서의 그만한 영광이 더 있겠는가.
‘신혼부부 한 쌍’이 “솔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타는 새벽기차는 기적을 울리면서 달릴 것이다. 이 기적은 시의 가락으로 대를 잇는 새로운 가정, 더 나아가 새로운 세계를 예고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기적」에서 “기적은 소리가 아니라 집이다”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은 그와 관련될 것이다. 기적 소리는 둥글다. “앞에서만 듣던 기적이 등 뒤에서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시의 전개가 기적 소리에서 둥근 빗방울에 대한 연상으로 나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둥근 기적 소리는 가정-집-을 품는다. “수줍게 웃는” 새로운 세대의 소녀들도 품는다. 그러나 기적 소리는 언제나 떠남의 소리이기도 하다. 기적 소리는 새로운 정착을 위한 집이기도 하지만 그 집을 떠날 것을 재촉하기도 하는 것이다. 신인에게 소리란 그런 것이다. 둥글게 품기도 하면서 떠나도록 재촉하기도 하는 것. 마치 허공에 길을 내면서 날아간 새들의 궤적과 같은 것이 소리인 것이다. 허공에 남았다가 사라지는 시와 같은 소리. 즉 소리란 송수권 시인에게 시의 원형이다. 그에게 시란 “두루뭉수리, 저희들끼리 한 세상 깔고 누워/내어지르는 물소리/둥근 물소리”(「보길도 행」)다. 시인이 허공에 쓴 시가 바로 이 두루뭉수리의 물소리를 내지 않겠는가. 송수권 시인에게 소리는, 시의 바탕이자 시의 정수다.
소리는 또 다른 감각, 즉 후각을 이끌어오기도 한다. “흙담길을 따라 들어가면/어디선가 한낮에도” ‘다듬잇소리’ 들리고, 곧 이어 “코가 미어지는 참깨 볶는 내음/한약 끓는 내음”(「구림리의 골목길」)이 나는 것이다. 이는 흙담길을 걸으면서 떠올린 소리가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이끈 장면을 보여준다. 흙담길이야말로 시인이 어릴 때 늘 거닐었던 길 아니겠는가. 어릴 적 시인은 그 길을 걸으면서 언제나 ‘다듬잇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참깨 볶는 냄새와 한약 끓는 냄새를 맡았으리라. 또한 소리는 보이지 않던 길을 보이게도 만든다. “꺄르륵 아기 웃음소리”가 들리면 “허파꽈리 같은 빨간 목울대가 보이고” “솜사탕 같은 구름이 물안개를”(「가을 산책」)미는 것도 보이는 것이다. 이를 보면 시인에게 소리는 뭇 감각들을 새로이 형성시키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소리의 ‘제죽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시인이 소리를 들으면서 몸에 숨겨져 있던 그의 시각과 후각이 소리의 율을 타고 현재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감각들의 원천은 자연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러므로 자연은/우리 시의 첫 문장이며 마침표다”(「변방(邊方)에 피는 꽃」)라고 말하는 것인데, 허공에 펼친 거적에 누워 쓰는 시란 바로 이 자연의 움직임에 감각을 맡기고 그에 순응하면서 이루어질 테다.
그러한 시 쓰기란 “하늘에 뿌려 놓은 별들”을 낚는 ‘밤낚시’-“서울서 내려온 친구”가 “웬 헛낚시만 던지느냐고 타박”(「밤낚시」)인-와 같은 일이다. 허공에 시를 쓰듯이, 실제의 물고기를 잡지 않고 ‘별고기’를 낚기 위한 낚시질, 그리고 별고기에 의해 “낚싯줄이 쓸리면서” 나는 “기탓줄 소리”(같은 시)를 들을 수 있는 낚시질. 그 낚시란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빛과 그윽한 달빛이 쏟아지면서 빚어내는 유현(幽玄)의 감각을 시인이 오감을 열고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별고기’ 한 마리를 낚는다는 것은 시의 말 하나를 붙잡는다는 것이고, 이 말 하나를 잡을 때 “기탓줄 소리”와 같은 ‘말소리’가 울릴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이 자연을 취하는 데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하염없이’놔둔 상태에서 활짝 연 오감으로 접촉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왜 떠 있는지도 모르면서” 꿈꾸고, “무엇을 꿈꾸는지도 모르면서” 떠 있는 섬과 같이 “너무 오래되어 기다리고 있다는/사실조차 모르면서”(「섬」2) 사는 것이다. 즉 시인의 삶은 자연으로서, 자연과 함께 그대로 존재하면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양태의 삶이 권태롭거나 무덤덤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자연 자체가 폭발하는 불꽃처럼 격렬한 양태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지상의 한켠 어딘가의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폭설에 지는
은은한 불꽃을 머금은
집 한 채
알등도 켜지 않은 거실
자작나무 잡목들의 불꽃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두 개의 의자에 앉은 반신상(半身像)들
나는 책을 읽고
그녀는 손을 놀려 난이를 깁는다
이마를 수그릴 때마다 타오르는
생명의 소란스러움......
누구랄 것도 없이 이따금 마주보며
어색한 듯이 웃는다
눈 속에 핀 두 그루 설중매처럼
때로는 신성의 그것과 같고
때로는 마성(魔性)의 그것과 같은
그녀의 한쪽 뺨에 어룽지는 불꽃 무늬
한 다발의 매화가 폭발하는 소리
-「불꽃 무늬」전문
시가 보여주는 표면적 장면은 매우 평온하다. 장면을 보여주는 렌즈는 원거리에서 잡은 집을 보여주는 데에서 시작하여 ‘그녀의 한쪽 뺨’을 근거리에서 조명하는 데에로 점차 대상을 좁히면서 나아간다. 또한 시의 중심을 지탱하는 시어인 불꽃의 강도가, 시가 진행될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것도 눈에 잡힌다. 시를 따라가 보자. “지상의 한켠 어딘가의 어둠” 속, “은은한 불꽃을 머금은 집 한 채”가 보인다. 그 집 거실에는 “자작나무 잡목들의 불꽃이 타오르는/벽난로”가 있으며 그 앞엔 ‘나’와 ‘그녀’가 반신상처럼 별 움직임 없이 의자에 앉아 있다. ‘나’는 책을 일고 있으며 ‘그녀’는 모자를 깁고 있다. 그런데 나와 그녀가 “이마를 수그릴 때마다” “생명의 소란스러움”이 타오른다. 타오르는 자작나무의 불꽃이 ‘나’와 그녀에게로 전이되어, 이들은 소란스럽게 타오르는 생명으로 나타난다. 하여, 시의 마지막 연에서 그녀의 한쪽 뺨은 “불꽃 무늬”로 어룽지다가 폭발하면서, “한 다발의 매화”로 피어난다.
‘그녀’가 생명으로 소란스럽게 타오르다가 그녀의 뺨이 매화로 급전하여 재탄생하는 시ㅢ 이 마지막 장면은, 시인에 따르면 신성한 동시에 마성을 띠고 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은, 그것이 식물과 같은 것일지라도, 은은한 생명의 불꽃이 점점 강도가 강해지다가 나중에는 결국 폭발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일까. 이 마지막 장면은 독자에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연과 융화되는 삶, 시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시인은 지상의 삶 또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자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시적인 삶은, 지상을 걸아야 하는 우리의 삶에서 허공의 눈동자가 뿜어내는 현란한 빛이 순간적으로 “번뜩 솟구쳤다 사라지”듯이 생명이 폭발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녀의 뺨에 어룽지는 불꽃 무늬를 포착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나와 그녀가 시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그런데 그 폭발은 위의 시에서도 소리로서 현상한다는 것에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시인은 생명이 폭발하는 소리를 매개로 그녀의 뺨과 매화의 개화를 중첩시킴으로써, 자연의 생명 속에 ‘그녀-우리’와 매화가 함께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나 저 꽃들은 모두 자연의 생명력이 낳은 산물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집에서 가장 웅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 「앙코르와트 사원의 비욘 계단을 오르며」를 살펴보자. 이 시는 시인의 자연에 대한 사유가 우주적으로 뻗어나가면서도 자연의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판야나무는 앙코르와트 사원의 사방으로 뻗쳐 있는 9백년 된 나무로, “크레르 루즈의 대학살을 견디고도/살아 남은 나무”다. 그 나무는 “사원 한 채를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다. 시인은 이 나무에 대해 “당신의 판야나무”라고 부른다. 당신은 누구인가? 신인가? 생명의 신, 자연인가? 앙코르와트 사원인가? 이 모두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산출하는 자연과 같은 신,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의 신일 것이다. 그런데 시에 따르면 이 나무는, 그녀의 뺨에 매화가 피어나듯이, “나의 뇌수”에서도 서서히 자라나고 있다. 하여, 시인 뇌수에 자라고 있는 판야나무는, 그 나무가 앙코르와트 사원을 옭죄며 서서히 부수듯이 그의 뇌수를 부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우리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아니가.
9백년의 시간이라는 그늘 속에서 그 뿌리는 지상으로 몸부림쳐서
불상과 사원 한 채를 서서히 부수는 일,
그러면서도 밑뿌리 하나는 당신을 끈기만으로도 서서히
버팅겨 주는 힘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판야나무는 9백 년 동안 사원을 서서히 부수어 왔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밑뿌리로 서서히 ‘당신’을 “버팅겨 주”었다. 그렇다면 시인의 뇌수에서 자라고 있는 판야나무 역시 시인의 뇌를 서서히 부수는 동시에 시인의 정신-사원-을 버팅기는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 아닐까? 매화가 피어나는 것, 생명의 새로운 탄생은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은은히 타오르다가 폭발하면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어쩌면 저 ‘사원-뇌수’를 서서히 부수면서 ‘당신-정신’을 버팅겨 주고 있는 판야나무 자체가 새로 탄생해가고 있는 생명 자체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생명이 타오른다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명의 파괴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파괴를 통해, 그리고 이와 동시에 뿌리의 지속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명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생명의 탄생이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이 시의 후반부를 읽어보자.
나의 또는 당신의 판야나무, 사랑의 힘이란 늘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돔형의 커다란 지붕 위로 펼쳐진 사원의 밤 하늘,
대마젤란 은하에서 초신성이 폭발하는소리가 들립니다.
1604년 케플러가 발견한 그 초신성의 밝은 빛을 타고
수억 광년을 달려 지상에 내려오기까지 당신도 내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처음에는 판야나무의 그 작은 한 톨의 씨앗이 아니었을까요.
초신성은 생명의 탄생처럼 폭발하면서 현현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사라의 힘은 ‘초신성’의 폭발을 이끌 것이다. 사랑만이 새 생명을 탄생케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수억 광년 바깥에 있는 초신성이 폭발하는 소리를 듣는다. 역시 여기서도 ‘초신성-생명’의 폭발은 소리로 현현한다. 이 폭발은 자연의 신성 또는 마성이 깃들어 있는 사랑의 힘에 따른 것일 테다. 시인의 존재가 자연과 융화되어 자신의 뇌수에서 판야나무가 자랄 수 있게 했듯이, 저 초신성의 폭발 또한 자연의 신성 또는 마성의 힘으로 충만해진 자신의 사랑의 힘에 의한 것임을 시인은 이해한다. 이 이해를 따르면, ‘당신’이 거대한 판야나무로 현현할 수 있는 것도 자연이 된 시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랑의 힘-수억 광년을 끌어올 수 있는-에 의해서인 것이다. 이렇게 읽을 때, “당신도 내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초신성이 폭발 이전에는 어두운 별로 존재했던 것과 같이. “판야나무의 그 작은 한 톨의 씨앗”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진술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니 이 시는, 비록 시집의 첫머리에 실린 시이지만, 어쩌면 앞으로 발표 될 송수권 시인의 시세계에 들어갈 열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