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인의 마을
김계선(시인)
내가 시라는 걸 시작한 것은 고교시절로 기억된다. 아니 시라기 보다 그저 긁적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그냥 한 두절 쓰기 시작한 때였다. 초등학교 시절엔 포스터 문구 등으로 입선을 하기도 하던 경험이 있어선지 그때부터 흉내를 내보곤 하였던 것이다.
추첨제로 광주 사레지오 여고에 갓 입학하여 국어담당이셨던 이젬마 수녀님은 독후감을 숙제로 내주셨고, 그 시절 나의 독후감은 자신의 느낌과 의견을 피력하기보다는 줄거리를 추린 것처럼 약간은 어설펐던 것 같다.
이정자 수녀님과 함께 두 자매가 다 서울대 국문과출신으로 젬마수녀님의 넉넉한 몸매는 마치 그분의 성격처럼 어머니 같은 푸근한 인상을 풍겼다. 우리는 수녀님들의 생활이 우리와 많이 다르리라는 호기심에 어떻게든 교내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가 보고 싶어 했으나, 그곳은 일반 학생들에겐 출입금지 구역이나 다름없었다. 졸업 후 수녀님과 편지가 오가기도 했다.
대학 여자선배가 광주일보 편집부 기자로 근무했었다. 영창피아노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종례란 동창이 있었는데, 그곳 정원면사장님 친구인 김용옥부장님이 광주일보에 계셨다. 이후 그분은 논설국장으로도 활동하셨고, 언론에 근무하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분께 전화를 드려 도움을 얻기도 했다.
대학 같은 과 남학생 김재식씨의 친구가 이재창 시인이었는데, 이태극 선생님이 출간하시는 월간 ‘시조문학’이라는 계간지를 선물 받고서 현대시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환경청 발령으로 서울 국립환경연구소에 근무하며 문학지를 구하고 싶었으나 시중에서는 팔지 않아 출판사로 전화를 드렸다.
문학지를 구하려 전화를 드렸다고 하자, 찾아오라는 말에 갔더니 그곳은 이태극 선생님 댁이었다. 그날이 휴일이라 출판사가 문을 닫은 관계로 댁으로 오라고 하신 것이었다. 처음엔 출판사 관계자로 알았는데 이야기를 하다 선생님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광주에서 강연을 들었는데도 얼른 못 알아보지 못해 죄송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은 시도 쓰느냐 물으시고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이전에 출간되었던 몇 년간의 문집을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주시는 것이어서, 일 년분 돈만 억지로 내려놓고 나왔다.
이후 순천시립도서관에 순천대 정한기 교수님이 강의를 오셨는데, 시를 제출했더니 시조시 형태인데 수작이라며 열심히 쓰라고 권해주셨다. 정교수님은 새벽녘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셨다는 소식을 TV에서 듣고 너무 좋아하시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또한 여수수필문학 조정현 회장님도 편지를 보내오시기도 했는데, 요즘은 활동을 하지 않고 계시는 것 같아 애석하다.
순천 팔마문학모임에 최홍련씨가 광주에서 용진호 선생님을 모셔왔는데, 한시를 질문하셔서 대답했더니 이름을 물으시고, 어떤 시를 주로 쓰느냐 물어오셨다. 그날 최홍련씨와 숙소를 잡아드렸는데, 얼마 뒤 돌아가셨다고 듣고 좋은 한시 시인을 잃어 서운하였다. 이제는 이태극, 정한기 교수님, 용진호 선생님은 모두 하늘나라로 가셨으나 우리 후배들은 더욱 좋은 작품으로 선배들의 길을 빛내야 하리라.
내가 다니는 순천제일교회에 장애우인 공두훈 집사님이 있는데, 예전 잡지사 편집부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시집을 재판할 때 초판된 시집의 시를 수정해주고 교정도 해주면서 참고하라고 했더니 무척 고마워했다. 앞으로도 장애우들이 글을 많이 쓰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미국에 두 번째 갔을 때는 아파트가 아닌 주택으로 갔는데, 초록지붕의 아담한 주택이었다. 연립주택형의 집 네 채가 맞대어 있어 이웃과 교류하게 되었다. 바로 옆집은 할머니 혼자 사시며 몸이 불편해 쇠로된 네모 버팀대를 짚고 다니시는데, 비슷한 연배인 여동생이 날마다 찾아와 도와주셨다.
가끔 음식을 갖다 드렸으나 당뇨도 있으신지 육류나 맛이 강한 음식과 단것은 병원에서 금하고 있어 드시지 않았다. 김밥은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잡채나 달지 않은 빵은 드시는 것이었다. 가끔 아들이 찾아와 병원에 모시고 가는데, 공구가 필요하면 빌려주시기도 했다.
앞집 할머니는 나이가 드셨지만 친구 분들과 털실로 장갑이나 덧버선을 짜서 병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해 선물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할머니에게 뜨개질을 배워 모자와 함께 덧버선 두 개를 짜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몫으로 마련했다. 집 앞 나무를 다듬어야 할 때는 전정가위를 빌려주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친구 분들과 포커를 하거나 여행을 가시기도 했는데, 딸 가족과 여행으로 여름 휴가동안 한 달 가까이 집이 비어서 예쁘게 가꾸어 놓은 꽃밭과 화분들이 시들해졌다. 그래서 나는 호스로 물을 뿌려 집 바깥의 열기를 식혀놓고 화단과 집 주위 나무에도 물을 뿌려주었다.
할머니가 여행이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화초가 마르지 않고 그대로 푸르른 것을 보고는 고마워하셨다. 할머니도 자주 맛있는 쿠키나 호도빵 등을 만들어 갖다 주곤 하셨다. 나중에는 동네 사람들이 알았는지 모르는 아저씨가 인사를 해오고 낯선 집 앞을 지나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주 인사를 해왔다.
집주위에는 새들이 많아 관리실에서 새 모이를 주기도 하고 나무를 관리하거나 새로운 나무를 심어주는데, 나는 심겨져 있는 장미는 뽑지 말고 나무보다는 꽃나무를 좋아한다며 심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대로 해주는 직원들에게 여름날이라 더워 보여 냉커피와 물 얼린 것을 갖다 주었더니 고마워하며 나뭇가지를 묶어 뒤처리까지 깨끗이 해주었다. 미국은 나뭇가지를 환경보호로 플래스틱 끈을 금하고 있어 규정된 종이끈을 사용해야만 한다.
겨울엔 초록지붕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집 주위로 새들이 몰려왔다. 한꺼번에 오륙십 마리들이 떼 지어 다녀서 나는 해바라기 씨앗이나 빵조각들을 그릇에 담아 창문 앞에 놓아두었는데 조심하던 새들도 몇 시간이 지나자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먹고는, 먹이가 보이지 않을 때는 내게 달라는 듯 창문 앞을 맴돌곤 했다. 주로 참새들이 몰려다니는데, 가끔은 배에 빨간 털이 달린 로빈 같은 새나 처음 보는 어여쁜 새들도 있어 한참을 새를 연구하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맞은편 집에 사는 꼬마 제이미와도 친해졌는데, 발렌타인 데이에 애들 초콜릿을 주려고 산 것 중 하나를 주었더니 우리 집에 곧잘 놀러왔다. 때로는 맨발로도 달려와 놀라게 했는데 회화에 도움이 되었고, 조카들이 한국에서 놀러 왔을 때에 일부러 불러 회화공부를 시켜주거나 함께 풀장에 보내기도 했다.
제이미 아버지는 화가였는데, 전국 화가들과 어울려 전시회를 다니거나 해외교류도 다니는데, 한국도 한번 가보았다고 했다. 제이미 엄마는 아주 친절해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수영장을 같이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가 없어도 우리 애들을 데리고 가주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 가족들을 불러 밤에 집 앞에 테이블을 내놓고 와인을 마시며 여러 가지 폭죽을 터트리기도 했는데, 우리 가족도 불러 와인을 나눠 마시며 같이 폭죽을 감상하기도 했다. 우리가 귀국할 때 제이미 아버지는 그림 한 점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집주인 낸시와도 친해져 씽크대가 막히면 바로 달려와 수리해 주었다. 녹차와 다기를 선물하면서 녹차가 다이어트에 좋아 낸시 남편의 많이 나온 배가 조금은 들어갈 것이라고 했더니 재미있어 했다. 이렇게 두 번째의 미국생활도 내게 정겨운 추억들을 간직하게 해주었다.
현재 북한과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데, 예전 남도사람들에 근무할 때 여수의 대모로 알려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환희 이사장님을 취재하면서 북한시인 김응관씨 얘기를 하셨는데, 선산김씨로 함북 성진이 고향이라고 들었다.
이 여사님은 내게 지금은 작고한 김 시인이 직접 쓴 육필원고로 출판했던 ‘벙어리’란 시집을 한 권 주시고 육필원고도 함께 주셨는데, 얼마 후 이 여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북한의 통일을 못보고 돌아가셔서 안타까웠다. 이 여사님은 김응관 시인의 아버지가 영춘씨인데, 북한에 있는 가족의 소식을 알아내 자신이 출판해준 김 시인의 시집을 전달하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이제 경의선이 다시 이어진 지금 새삼 이환희 여사님이 생각나면서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납북된 은혜고모님의 아버님과 가족들이 하루속히 상봉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아울러 탈북자들을 위한 취업알선과 북한의 문화가 우리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