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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옷고름과 노리개
-여인네의 옷을 통해 본 한국의 미 -
우리나라의 봄이 화창하게 무르익어 가던 지난해 4월의 어느 날. 영화 의상 제작으로 이름난 한복 디자이너가 곱고 화사한 한복을 입고 어느 호텔 식당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해 쫓겨 난 사건이 있었다. 호텔에 들지 못하게 한 이유인즉 “한복은 위험한 옷이라 저희 식당 출입을 금합니다.” 그리고 “한복은 부피감이 있어 다른 사람들을 훼방할 수 있는 위험한 옷”이라는 것이었다.
한복의 특성상 발등까지 덥히는 치맛단이 발에 밟히고 소매 끝에 음식이 닿는 일이 많아 그런 드레스코드를 만들었다는 것이 호텔 측의 설명이 있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빠른 뉴스를 타고 세계 토픽 감이 되었고 전 세계가 주시하는 우리한민족 정신과 연결지은 고유의상문화에 대한 인식의 문제로까지 거론 될 만큼 온 나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날 여 디자이너가 호텔에서 홀대를 받을 만큼 입었던 한복은 평범했다는데 그 한복은 얇은 비단 옷감으로 지어 입은 우윳빛 저고리와 청 보랏빛 치마를 입었었다고 하며 우리의 고유의상이요 여인네들이 입는 평상시의 한복으로 홀대를 받았으니 빅뉴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이 소식은 해외토픽으로 다뤄졌을 뿐만이 아니라 어느 뉴스에서는 ‘황당 뉴스 (odd news)'섹션에 분류됐고 ’황당한 일‘로도 분류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이를 저지른 호텔을 향한 온 국민의 질타와 호텔 측의 사과가 있은 후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호텔만의 의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사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우리 민족 전부의 책임이라 지적하고 싶다. 남여를 막론하고 한복을 우리의 일상생활 의상이 아닌 우리의 생활과는 멀어진 하나의 예복으로 인식하고 변해버린 것과 한복을 입고 시위를 주도하는 모습들이 자주 언론에 노출되고, 친북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할 때도 어김없이 흰색 한복을 걸친 모습을 보여줬고, 노동을 하는 경우에는 좀 불편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한복이 일반 평상복으로서는 너무 값이 비싸다는 이유도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이 캐주얼 등 편한 옷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보아 좀 거추장스럽다는 이유가 있기는 하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한복은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 한국인의 의상에는 분명히 한국인 고유의 미(美)가 있다. 남자들의 한복보다는 특히 여자들의 한복 입은 옷매무새는 가히 일품이다. 어느 민족의 의상보다 우리 고유의 여인네 한복은 그 고유의 멋이 담겨있고 아름다우며 우아미와 고상함이 띄어나다.
옷이란 몸을 감추면서도 드러내 놓는 데 그 아름다움이 있고 돋보임은 말할 여지가 없고 특히 여성의 옷이 그런 것이다. 의상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우리나라의 옷은 북방적인 폐쇄성과 남방적인 개방성이 가미된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비밀스레 몸을 감추어 신비감을 주기도하고 때로는 여인네의 엷은 모시적삼 속으로 얼비치는 싱싱한 육체의 탄력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허리를 감고 흐르는 치마의 선이 아슬아슬하게 마음을 간질이는 맛과 비상할 가벼운 선의 율동에 의상미의 특색이 있지 않나 싶다.
특히 여자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옷고름은 길게 드리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늘대는 매무새야 말로 참으로 “원더풀”이다. 바람이라도 살랑 일게 되면 바람에 날리는 옷고름을 매고 남은 긴 옷고름은 하늘을 향해 나르는 선녀를 연상시킬 만큼 비상의 율동 감을 보여준다.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란 글에서 ‘서양의 천사는 날개를 달고 있지만 동양의 선녀들은 펄럭이며 나부끼는 옷자락의 리듬으로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그편이 날개보다 훨씬 더 나은 것 같은 이미지를 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옷고름과 치맛자락은 하나의 날개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상의 현실을 박차고 아슬아슬한 천공(天空)의 푸르름을 꿈꾸는.....’라 했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풍속화에 나타나 있는 여인의 모습은 매우 선정적으로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혜원(惠園)이 그린 그림이 그 대표적이다. 저고리는 가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짧아서 상체를 지극히 작게 표현한 반면, 하체는 겹겹이 풍성한 속옷을 껴입은 위에 폭이 넓은 긴 치마를 살짝 둘러 입음으로써 구름 같은 얹은머리와 함께 우아한 자태와 율동미를 충분히 나타내 주고 있다.
긴 치마 자락은 발등을 덮고 지면에 그대로 끌리게 입었으며 길을 거닐 때에는 치맛자락을 저고리 위까지 추켜올려 입음으로써 주름져서 늘어지는 드레이퍼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 이 때도 옷고름은 하늘대며 허공을 날고 있고 살짝 오른쪽 가슴팍 아래 느려 뜰인 아름다운 노리개가 눈길을 끄는데 한복에 덧붙인 우아미가 한결 돋보인다. 이 것이 바로 한국의 미(美)다.
하늘을 나는 선녀를 연상케 하면서 바람에 하늘거리고 나부끼는 옷고름의 모습과 치맛자락을 본 외국인들은 감탄을 쏟아내고 있고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 여인들의 한복을 ‘바람의 옷’이라고 극찬까지 한다. 그렇다. 비상의 의지와 혼이 담긴 ‘바람의 옷‘. 이는 분명 한국 여인의 한복이요 한국의 미(美)를 상징하고 있다.
한국여인네들의 한복엔 발끝에서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아기자기한 멋이 스민 복식문화를 보면 어느 것 하나 그 미(美)가 깃들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노리개를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노리개를 우리 여인네들이 어느 때부터 사용했을까? 문헌을 살펴보면 신라의 요패(腰佩-허리에 차는 신분을 나타내는 증표)에서 시작했다는 설과 고려시대의 여성들이 허리에 찬 금방을과 비단으로 만든 향낭(香囊-향주머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그 대표적이다.
아무튼 한복을 입고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지금도 이 전통은 멋과 아름다움의 장식품으로 이어내리고 있다. 조선시대 때 왕족이나 귀족뿐만 아니라 궁중가례 때 주인공인 왕비와 왕세자빈, 그리고 혹은 공주나 옹주 또는 이날 참석하는 귀부인들이 몸에 찼었다고 한다. 대 유행의 보편적 흐름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여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의상역사문화가 도도히 흘러 오늘에 이르렀음을 볼 때에 앞으로 영원히 의상문화와 한국인의 유산으로 남겨야 할 미(美)라 하겠다.
평민은 경사가 있는 날이나 명절, 그리고 시집가는 날 신부가 시부모 앞에 폐백드릴 때에 찼었다. 다홍치마와 노란후장저고리에 당저고리를 입은 신부는 삼작(三作)하나를 찼을 때는 단작(單作)노리개라 했고, 세 개를 동시에 찼을 때는 이를 삼작(三作)노리개라 했다는데 혼인잔치에 참가하는 새색시들도 노리개를 찼다고 한다.
고구려 시대 때부터 시작해 조선시대 때까지 특히 여인들의 마음속에서 씨족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염원과 다산다남을 기원하는 무속신앙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맺히고 닫힌 삶을 '풀이'하여 새로운 삶을 살려는 부단한 노력을 그들의 일상복식에도 반영하였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다남을 기원하는 길상문양을 새긴 노리개를 부적 겸 장식으로 몸에 지니고 다닌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토록 노리개에는 다양한 기복신앙(祈福信仰)심이 깃들어 있다. 지금도 이 정신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아 보이고 멋과 미가 이 속에서도 살아 있어 부귀와 다산과 안영을 기원하는 옥이나 금붙이로 만든 십장생칠보문양등을 보면 짐작이 간다.
“그 옛날 내가 아주 작은 아가씨였을 때 나의 저고리에는 조그마한 천도(天桃)노리개 한 쌍이 매달려 있었다. 이것은 외할머니가 주신 것으로 우리 어머니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어머니 가슴에 채워주신 것이었다 한다...(중략) 먼 훗날 내 딸아이가 시집을 가면 거기에 그 옛날의 향낭 대신 신식 향수를 뿌려서 물려주리라. 그리고 그 속에 외할머니와 우리 어머니의 많이도 고달팠던 세월이며 한(恨)이며, 나의 사랑, 그리고 나의 인내, 나의 설움을 조금 묻혀서 물려주리라. 이 여인의 대표적인 장신구의 하나인 노리개는 이렇듯 단순히 정신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에게서 여인으로 물려 내려지는 하나의 소중한 여인정신사의 상징이었다고 나 할까.”
이 대목은 ‘한국의 미(美)‘를 칭송하는 문정희라는 시인이 칼럼에서 쓴 글이다. 이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 한국 여인네들은 모두가 그런 염원을 하고 있을 것이란 점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라 생각한다.
노리개는 통상 끈의 문화로 상징되는 매듭이 받쳐주고 또는 매듭을 늘여 뜨려 품위를 유지하는데 색깔의 곱고 색깔의 배합에 따라, 그리고 정갈하게 역고, 맺고, 짜는 솜씨에 따라 그 화려함과 생명력과 아름다움의 등급이 매겨지고 한국인의 시각화한 언어라는 매듭에 그 생동감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하는 마력을 각각 지니게 된다. “인간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맺고 풀고 잇고 끊는 끈의 관계로 나타낸 것이 한국인의 인간관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고립무원의 상태를 끈 떨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끈의 사상을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호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매듭이라는 수예품이다.(이어령 저, 우리문화 박물지)”라고 지적했듯이 매듭은 손의 언어이자 마음의 꽃이라고 불린다. 매듭을 드리우는 것은 예(禮)를 갖춘 정갈한 마음의 자세를 표현하는 것인 동시에 침묵으로 향기로운 뜻을 전하기 위함이라고들 말한다. 그와 같은 이유로 꽃에 향기가 있듯 매듭에는 인격의 향기가 품어져 있으며, 꽃의 색이 청초하듯 매듭 또한 그 빛이 곱다. 이 매듭은 한국의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 매듭 예술 또한 수천수만 년의 유구한 우리 역사 속에 스며 전해 오고 있다. 또한 매듭은 한국인의 정식적인 정서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노리개와 매듭은 생명을 일체를 이루면서 하나의 문화통속이다. 그래서 더욱 노리개가 아름답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나의 아내가 작고하기 두해 전 설 명절을 맞았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며 노리개를 찾느라 시간을 깨나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노리개는 찾지 못했고 그날 이후 그 노리개는 영영 찾지 못했다. 가끔 한복을 입을 때엔 치맛단에 청옥노리개를 달고 약지손가락에는 사파이어 반지를 끼었었다. 사파이어 반지는 내가 태국에 다녀오면서 아내에게 선물한 반지로서 그녀가 세상을 뜨면서 딸에게 전해 져 아내의 유산으로 물려졌지만, 아내가 차던 노리개는 그 날 이후 아내가 작고한 후 나도 찾았지만 영영 그 둔 곳과 흔적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래서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노리개는 아내가 희망하기를 같은 노리개 하나를 더 사 차고 다니다 하나는 딸에게, 그리고 또 하나는 며 느리에 전하겠다고 마음에 다짐하면서 내개 그 다짐을 말한 적이 있는데 그만 그 노리개 하나마저 흑적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내의 정신이 담긴 사랑과 전하고 싶은 여인의 정서와 마음과 한과 모든 것이 담긴 그 노리개가 아니던가. 그래서 가끔 내가 생각하기를 아내의 뜻을 담고 새겨 내가 다시 옥으로 만든 노리개 두개를 준비해 아내의 뜻으로 각각 딸과 며느리에 전하면 어떨까하고 생각해 본다. 그렇게 하고 싶다. 지금이라도.
하여간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해 내려왔던 이 노리개, 그래서 딸의 딸에게 물려줄 여성의 혼(魂)과 애환과 역사를 담은 노리개가 지금 시대의 우리들에게 그 정신이란 것이 남아 있기는 하는가라고 묻고 싶기도 하다.
지금의 이 세상살이에 찌들고 물들어 우리 의상에 대한 홀대문화가 팽배한 이상 이 문화유산을 물려줄 한국의 미(美)와 지혜의 노리개와 고유의상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음은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유명한 호텔 식당이었던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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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문화유산을 홀대 해서은 안되는데ㅡ정신나간 인간들이 나라망신을 시킨답니다.
여자의 마음을 그리셨는데
어부인의 생각과 노리게의 전수 모두가
선생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