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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2월 21일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순국 83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날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이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유인태)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을 맞아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씨가 정부에 쓴소리를 했다.
“매국노가 물려준 땅과 재산은 후손들에게 잘도 돌려주면서, 독립운동가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우기 위한 방편으로 호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현실은 무시하면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는 재산을 돌려주지 않는 나라가 정상인가?”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씨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매국노 땅은 후손에게 돌려주면서 독립운동가 후손인 우리 땅과 집 등 재산은 기본권이 없다며 안 돌려줬다”면서 독립운동가 후손을 예우하기는커녕 박대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 씨는 “1996년쯤 시아버지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살았던 서울 삼청동 집터에 대한 재산반환신청을 했는데, 당시 담당 판사가 ‘백작’ 이완용(李完用), ‘공작’ 송병준(宋秉畯)의 호적을 보여주며 ‘호적이 정리돼 있으니 안 줄 도리가 없다’고 했다”면서 “‘단재 선생은 호적이 없어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호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가 식민 통치를 위해 도입한 호적에 이름 올리기를 거부했기 때문으로,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후에도 호적 없는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단재 선생의 호적도 이씨가 정부에 수차례 탄원한 끝에 2009년에야 만들어졌다.
이 씨는 “단재 선생의 차남인 남편(신수범 선생)은 호적에 부모 없는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하다 1991년 돌아가셨다”며 “시아버지 호적이 없어 시어머니 박자혜 여사는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고 말했다. 시어머니 박 씨 역시 간호사 출신 독립운동가다.
이 씨는 “후손들은 단재 선생 저작물에 대한 지식재산권도 갖지 못하고 있다”며 “국가가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또 이 씨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항일투쟁을 한 ‘베이징 3걸’(우당 이회영, 심산 김창숙, 단재 신채호) 중 단재만 기념관이 없다”고 아쉬움도 토로했다. 현재 단재 선생의 대전 생가와 충북 청주시 묘소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단재 선생이 1905년부터 1910년 중국 망명 직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집터는 주자창으로 쓰이고 있다. 이 씨는 1966년 신수범 선생과 결혼한 뒤 한국에서 생활해왔지만, 법정투쟁으로 건강이 악화된 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자 2004년부터 베이징에서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이 씨는 “오는 4월쯤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단재 신채호는 일제 침략에 맞서 민족 자주 자존을 지키고자 중국대륙을 전전하며 투쟁하다가 순국한 열혈 독립투사였으며, 확고한 신념과 투철한 연구정신으로 민족주의 사학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뿐만 아니라 단재는 탁월한 언론인· 문인이기도 했다. 단재는 말했다.
“반드시 죽는 나를 보면 마침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지 아니하는 나를 보면 반드시 길이 죽지 아니하리라.”
이처럼 57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오로지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충청북도 청주에서 상당산성을 넘어 512번 지방도로를 타고 미원면 쪽으로 24km를 가면 왼쪽에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 2.5km’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 바로 아래에는 ‘귀래리 입구’라는 표지석도 서 있다. 차를 몰고 좌회전 하여 안내판에 쓰인 대로 2.5km를 들어가면 귀래리에 이른다. 좌우로 야트막한 야산들이 연봉을 이룬 가운데 20여 채의 농가가 띄엄띄엄 흩어져 있고, 좁은 들과 산기슭에는 논밭들이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곳이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된 단재영각(丹齋影閣)과 단재 신채호 묘가 있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인경산 기슭의 고두미 마을이다. 필자가 1998년 7월 3일 신문사 선배 한광희(韓光熙) 씨와 이곳을 찾았을 때 큰길에서 마을에 이르는 진입로는 확장공사가 한창이었고, 단재사당과 묘역 옆에서도 단재선생기념관 건립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단재영각은 1978년 6월에 착공하여 단재 탄신 100주년이 되던 1980년에 준공하였다. 정문인 정기문(精氣門)을 들어서면 아담한 8평짜리 단재영각이다. 영각 안으로 들어가 분향하고 돌아 나와 영각 뒤쪽으로 돌아가니 바로 단재 묘역이다. 평생을 두고 매서운 기개로 살았던 단재의 묘답게 주변이 깔끔하게 잘 손질되어 있고, 묘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그 앞에서 약간 오른쪽에 단재의 일생을 새긴 사적비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평소 존경하던 단재 선생의 유택을 뒤늦게 찾은 죄송한 마음으로 큰 절을 올리고 묘 앞 잔디밭에 앉아 단재의 일평생을 돌이켜보았다. 단재영각과 묘가 있는 이곳은 바로 소년 신채호가 글공부를 하던 서당자리였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곳은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마을이다. 이곳에서 신채호는 1880년(고종 18년) 12월 8일에 가난한 시골 선비 고령 신씨(高靈申氏) 광식(光植)과 밀양 박씨(密陽朴氏) 부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 재호(在浩)와는 8년 터울이었다.
신채호가 본고향 충북 청원이 아닌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그때 아버지가 그곳 도리미 마을에 있는 자신의 외가 옆의 묘막(墓幕)을 빌어 헐벗고 굶주리며 연명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더기옷에 쑥죽과 콩죽조차 하루 세 끼 배불리 먹지 못하는 무서운 가난 속에서 철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라던 신채호는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의 고향 귀래리 고두미마을로 이사하게 된다.
평생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집안을 이끌던 아버지가 38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두 아들을 이끌고 시댁 마을로 돌아와 장례를 치른 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신채호 소년은 여기서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의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시작했다. 형 재호는 홀어머니의 집안일을 돕는 한편 친척들의 농사를 거들며 가장 노릇을 했다. 비상한 머리를 타고난 신채호는 글방에서 이내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 가르치면 잊는 법이 없고 깊은 뜻까지 막힘없이 풀이해 내는 총명함에 감탄해 할아버지는 신채호가 자신의 친손자였지만 다른 학동들 앞에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재가 우리 역사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이 서당에 다니던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중국의 역사책인 『통감(通鑑)』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이어서 우리나라 역사에도 자연히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작은 집’인 나의 가정보다도 ‘큰 집’인 나라를 위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특히 어린 단재에게 감동을 준 것은 고려 말의 충신인 최영(崔營) 장군의 시조였다.
-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
단재는 이 최영의 「단심가(丹心歌)」와 더불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의 마지막 두 기둥의 하나였던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를 통해 충신열사의 험난한 길, 참다운 나라사랑의 길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신채호가 뒷날 일편단생(一片丹生)· 연단생(鍊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등을 자신의 아호로 삼은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서당에 다닌 지 1년 만에 사서삼경까지 막힘없이 읽고 뜻을 새길 정도로 학문의 진도가 일취월장하자 훈장인 할아버지의 입에서 “열세 살도 안 된 너를 이제 내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구나!”하는 찬사가 나왔고, 잇달아 『열국지』『삼국지』『수호지』및『국조명신록』같은 책들도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죄다 빌려다 보자 낭성 일대에서는 “귀래리 서당골에서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단재가 태어나 자라던 시기는 조선왕조의 국운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내우외환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때였다. 단재가 15세가 되던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는 조선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함에 따라 유생들을 중심으로 항일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1896년 16세의 단재는 당시의 조혼 풍습에 따라 풍양 조씨(豊壤趙氏)를 부인으로 맞아 성혼했으나 불과 10년 정도밖에 함께 살지 못했다.
단재가 서울로 올라간 것은 그의 나이 19세. 그때까지 3년 동안 천안 목천에 있는 문중의 어른이며 당대의 학자인 신기선(申箕善)의 집으로 찾아가 수많은 전적을 단시일에 독파했다. 단재의 재능이 비범하고 학문적 성취가 빠름에 감탄한 신기선의 주선으로 그는 성균관에 입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에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단재는 은인인 신기선을 포함하여 송병준(宋秉畯)· 조중응(趙重應) 등 세 사람의 친일 행적을 「일본의 큰 충노(忠奴) 세 사람」이라는 글로 탄핵하게 된다. 그만큼 단재는 공사(公私)가 분명하고 매서운 사람이었다.
성균관 유생이 된 단재는 이곳에서도 이내 두각을 드러내 스승인 수당(遂堂) 이종원(李鍾元),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등의 아낌을 받게 되었고 두 사람의 수당이 단재를 두고 서로 자신의 수제자라고 주장하는 일도 벌어졌다.
단재는 성균관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여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이승훈(李昇薰)· 이동녕(李東寧)· 노백린(盧伯麟) 등 쟁쟁한 애국지사들과 교분을 나누며 열성적으로 활약했고, 한때 체포되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01년 22세 때에는 잠시 고향으로 내려가 신규식(申圭植)과 문동학원(文東學院)을 설립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05년 2월에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이미 세상이 바뀌어 성균관 박사가 되더라도 옛날처럼 벼슬길에 나아가 제세(濟世)의 경륜을 펼칠 수가 없었으므로 단재는 곧바로 사퇴하고 다시 낙향했다. 그리고 신규식 등과 산동학당(山東學堂)을 개설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이 찾아와 황성신문(皇城新聞) 논설위원으로 초청하므로 다시 상경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황성신문은 그해 10월 이른바 을사조약 체결에 통분한 나머지 장지연이 유명한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함으로써 무기정간을 당하고 만다. 황성신문이 사실상의 폐간 상태에 이른 직후 단재는 양기탁(梁起鐸)의 초빙을 받아들여 남궁억(南宮檍)이 발행인으로 있던 대한매일신문 주필을 맡았다. 그리고 이 신문에 투옥중인 장지연의 뜻을 이어 ‘오늘에 또 목 놓아 운다’는 뜻의 「시일(是日)에 우방성대곡(又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썼으며, 이후 시론과 사설 등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구국대열의 선봉에 나섰다.
단재가 대한매일신보에 재직한 것은 1905년부터 1910년까지였다. 이 5년간을 전후로 그는 매서운 필봉을 휘둘러 우리나라 현대 언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가정잡지』를 발행하고, 위인전을 저술 번역하거나 계몽소설을 펴내는 등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당대의 문호로서 위치를 다져 나갔다.
특히 단재는 이때 앞서 말한 단생· 연단생· 일편단생 같은 필명 외에 무애생(無涯生)· 금협산인(錦頰山人)· 열혈생(熱血生)· 천희당(天喜堂)· 검심(劍心) 등을 필명으로 수많은 역사물을 발표했다.
중요한 저작을 보면 『을지문덕』『이순신전』『최도통전』『한국의 제일 호걸대왕』『유화전』 등이 있는데,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을지문덕』은 민족주의 애국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곧 금서가 되었고,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이순신전』과 최영 장군 전기인 『최도통전』, 광개토태왕의 전기소설인 『한국의 제일 호걸대왕』 등도 독자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 어쨌든 단재에게 있어서는 문학도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정신없는 문학에 불과했다.
1909년 10월 26일 ‘대한국인’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단재는 이렇게 썼다.
- ……개인의 생존만 구하다가 전체가 죽어 없어지면 개인도 따라 죽어 없어질지니, 그러므로 군자는 개인의 희생하여서라도 전체를 살리려 하며, 육체의 생존만 구하다 정신이 죽어 없어지면 일부의 추한 가죽자루만 남아 무엇이 귀하리오. 그러므로 역사는 적국과 싸우다가 전 국민이 백골을 태백산만치 높이 쌓아 놓고, 명예의 멸망을 할지언정 노예가 되어 구차히 살고자 하지 안하나니, 구차히 삶은 생존이 아니니라……. -
단재의 주체적 역사관은 이렇게 윤곽이 잡혀 갔다. 이런 사실은 『독사신록(讀史新論)』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해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킨 것으로도 잘 나타났다.
1910년 4월 8일 망명길에 오른 단재는 정주· 의주를 거쳐 5월에 만주로 건너갔다. 6월에 청도(靑島)에서 동지들과 만나 논의 끝에 길림성 밀산현(密山縣)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의 기지를 삼기로 했으나 이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단재가 국치(國恥)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였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단재는 『권업신문』과 『대양보』 주필로 동포들을 일깨우는 한편 광복회 일도 주관했다.
1913년 상해(上海)로 갈 때 단재는 34세였으나 그 동안의 노심초사로 건강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치료도 할 겸 함께 있자는 신규식의 청을 받아들여 상해로 간 단재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소앙(素昻) 조용은(趙鏞殷) 등과 합숙하며 지내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와 백두산과 집안 등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답사하고 민족사학의 필요성을 더한층 절감하게 되었다. 단재가 “김부식(金富軾)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도 집안을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도 바로 이 민족사의 성지순례에서 비롯되었다.
1915년부터 북경(北京)에 머물며 『조선사』 집필에 전념하는 한편, 중국 신문에 논설을 기고하고 문명을 떨치던 단재는 40세 되던 1919년 길림성에서 대한의군부가 선언한 대학독립선언서에서 민족대표 39명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데에 대해 그의 임시정부 대통령 및 국무총리 선임에 적극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임하고 반이승만노선을 분명히 했다.
단재가 재혼한 것은 1920년 41세 때였다. 북경에서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소개로 만난 당년 28세의 박자혜(朴慈惠)와 혼인한 것이다. 그때 박 여사는 연경대학 의예과에 유학중이었다. 그 이듬해에 장남 수범(秀凡)이 태어났다. 2년 뒤 단재는 건강악화와 생활고를 이유로 가족을 귀국시킨 뒤 상해에서 당대의 명문(名文)으로 꼽히는 「의열단선언」을 완성했으며, 국민대표회의에도 참가했다. 다시 2년 뒤 건강이 더욱 악화된 그는 북경의 고찰 관음사(觀音寺)에 입산, 1925년까지 승려 생활을 했다.
벽초의 요청으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인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단재는 국권회복의 적극적 활동을 위한 필요성에 따라 동방무정부주의연맹에도 가입했다.
운명의 해인 1928년, 무리한 독서와 집필로 실명 직전에 이른 단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가족들을 비밀리에 불러 한 달 남짓 함께 보낸 뒤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연맹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가 5월 8일 대만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중국 대련(大連)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차남 두범(斗凡)이 태어난 것은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고 있던 그 이듬해였다.
1931년 투옥 2년 2개월 만에 단재는 10년형을 선고받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旅順)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다가 1936년 2월 21일 단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시신은 이틀 뒤 화장하여 24일 서울을 거쳐 고향인 귀래리로 돌아와 옛 집터이자 서당이 있던 자리에 안장되었다.
민족의 선각자 단재는 순국 뒤에도 편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순국 6년 뒤 차남 두범이 영양실조로 병사했고, 이듬해인 1943년에는 부인 박자혜 여사도 일경의 감시와 가난에 시달리다가 48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떴다.
단재는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한평생을 일제에 맞서 투쟁하다가 일제에 의해 옥사한 위대한 선구적 민족주의 사학자였으나, 우리 사학계는 광복 이후에도 식민주의 황국사관에 민족정기를 빼앗긴 자들이 강단을 지배하고 오늘 현재까지 수많은 김부식의 후예를 길러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역사교육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제대로 된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했으며 결국은 또다시 국난을 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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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긴글을 읽기도 힘든데 직접 집필하는 원갑친구가 대단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