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의 세 가지의 병행적이며 점진적의 진행 구조로 기록되어, (1) '이미 본 것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일이다(1장). (2)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인 교회에 되어지고 있는 일이다(2-3장). (3)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인 하늘 세계의 광경이다(4-22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서두(1장 1-3절)
2.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1장 4절-3장)
1)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와 교회(1장 4-20절)
2)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의 교회(2-3장)
3. 하늘 성전의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의 교회(4-5장)
4. 일곱 재앙 시리즈의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의 교회(6-20장)
5. 새 창조의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21장-22장 5절)
6.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교회(22장 6-20절)
Ⅰ. 요한계시록의 서두/1장 1-3절
위의 구조에 의해서 요한계시록 1장을 설명하고자 한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3절은 요한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계시를 받게 된 것을 설명하는 서두이다. 이 서두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말해지고 있으며, 이후 이 주제에 대한 본론이 말해진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요한에게 그가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계시를 주실 때 그 계시를 전승받은 요한이 한 일은 그가 듣고 본 것을 목격한 자로서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듣고 본 것을 증거하였다.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이다. 이것이 요한의 설교인 요한계시록이다. 요한은 이 설교를 선포하는 것에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증거했으며, 그래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 본문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셔서 또한 요한에게 전하신 계시인 예언의 말씀은 교회에 읽혀지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여기서 '복이 있다'고 축복의 선언을 하시는데, (1)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읽는 것은 개인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회당장이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낭독하는 것이다. (2) 그리고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면 듣는 자들이 있으니, 온 회중이 듣는 것이다. (3) 그러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이를 들은 온 회중은 다같이 함께 그 기록한 것을 지킴으로써 복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 전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신과 이를 듣는 온 회중이 다같이 복이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로부터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러면 왜 이들이 복이 있는가?를 말해 준다. 그것은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때의 가까움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요한에게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에게 전달한 예언의 말씀이 실현되는 때를 의미한다. 이 예언의 말씀이 실현되는 때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교회에 전달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으니까 이 때로부터 종말의 시기가 시작되고 있으며,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말의 시점에 교회는 와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그의 재림까지의 기간을 '종말적 기간'으로 본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가 종말의 시점에 와 있는 것이 왜 복이 있는가? 하면, 예언의 말씀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설교가 '이 때'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이 갖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다. 이 뜻은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성취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종말의 상태에 있다. 즉, 십자가의 구속의 성취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을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백성에게 전달하여 그 믿음에 있게 함으로써 복 있는 자가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
Ⅱ.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1장 4절-3장
1.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와 교회(1장 4-20절)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자기의 종들에게 알리려고 그리스도께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를 그의 종 요한에게 보내 그 뜻을 설명해 주심에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곧 자기가 듣고 본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기록하였는데, 이제 그 기록한 것을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1) 요한은 이 편지에서 인사말(편지의 서문)을 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예언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주신 분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한다(4-8절).
(1)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계시해 주신 분이신 데,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하나님과 그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함께 하시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을 알게 해주고 있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설을 말하고 있듯이 이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말함으로써 그만이 참된 신이심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언이다. 당시 요한이 편지를 보내는 일곱 교회는 황제 숭배 사상과 우상 숭배 사상에 신앙에 있는 세계 속에 있었다.
(2)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하였다. 이 은혜와 평강은 구원론적 관계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주시는 은혜는 죄를 용서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구원의 은혜이다. 요한은 이 은혜가 계속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평강을 기원하였는데, 이것은 단지 전쟁이 없는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모든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일곱 영과 함께 하신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니까 요한이 교회에 있기를 기원한 은혜와 평강은 이 땅의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인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이다.
(3) 요한은 구원의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설명을 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다. 구원의 은혜와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데, 여기선 '주'란 개념이 빠져 있으면서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충성된 증인'이란 다른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충성된' 이란 용어는 "신실한"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충성된 증인이신가?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그대로 전하는 증인이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그분이 지니신 뜻을 다 전수 받았기에, 그 뜻을 온전히 따름으로써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온전히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충성된 증인이셨는지를 그의 죽음과 부활로 증거하셨다. 그럼으로써 '성경대로' 되어진 일임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어진 것임을 확증하셨다(고전15:3-4). 그런데 여기서 '먼저 나시고' 란 말에 우리의 관심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인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이제 자신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있게 되는 부활의 열매를 맺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자'이시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A.D. 95년경)는 로마의 황제인 도미티안의 치세 말기로, 땅의 임금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머리처럼 행세했는데, 그들이 아니라, 이들에 대칭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다스리는 머리가 되신다는 통치의 개념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다스리는 주관자이시기에 이분만이 은혜를 주실 수가 있고 평강을 주실 수가 있다.
요한은 구원의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송영을 돌린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고 찬양을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려고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셔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킨 것은 창세 전에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예정과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신 선택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인되었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속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찬양을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으로, '나라와 제사장' 이 둘을 하나로 표현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언어인데, 이것을 일곱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교회는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2의 출애굽에 놓여져 있다. 교회가 환난에 참여하는 것은 출애굽의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겪은 것에 연계되는 의미가 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고 찬양을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실 것과 영원 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을 구한 것이다.
요한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의 서문을 장식하는 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확실성을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 이는 상징적인 것으로 사도행전 1장 9절과 11절에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신 말씀에 따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의 그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재림의 확실성을 말해주는데, 그때 모든 눈이 그분을 뵐 것이다. 그때는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며, 주님의 재림을 똑똑히 목격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배척한 일로 인해서 몹시 수치를 당하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슬픔에 복받쳐 통곡할 것이다.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데서도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분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행하여 오신 온 세상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구원을 베풀어 오신 일을 마침으로써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사건이다. 또한 구원의 반대인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다.
2) 요한은 이제 그가 듣고 본 모든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을 받는다(9-20절).
(1) 요한 자신에 대한 설명(9-11절)
첫째, 환난과 나라에 참여하는 자된 요한
여기서 그는 자신을 "이 편지를 쓰는 나 요한은 여러분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환난을 겪어 온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나 역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예수께 인내를 배웠으며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이유로 밧모라는 섬에 갇히는 몸이 되었습니다"라고 먼저 편지를 써서 보내는 자신에 대한 소개를 한다. 요한은 예수 안에서 같은 형제 된 자들이 겪은 환난을 그들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겪으며 같이 인내하며 같이 환난 속에서 이미 미래의 영광을 내다보며 기뻐하면서 선취하고 있다. 즉 환난 속에서 영광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이 '이기는 모습'이다. 교회가 당하는 환난을 요한은 먼저 미리 겪은 사람이며, 이를 이기고 영광의 나라에 이미 참여한 자이다. 그가 이러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이를 본 교회는 요한이 겪은 환난이 위로가 되고, 또 자신들에게 주어질 환난에 대비(준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언은 미래를 예고해 주는 특성과 또 현재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을 받기에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운다. 그런 그들은 영광의 나라에 함께 참여할 것으로 연결된다. 요한은 "나는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인 예언의 말씀을 전하면서 먼저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믿음의 형제들인 교회도 그들이 받은 예언의 말씀을 인하여 환난과 나라에 참여하여 있을 것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 현재 임하여 있는 것이다.
둘째,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고 주의 계시를 받는 요한
10-11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9절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요한은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어느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주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며 계시를 받아 책에 기록하게 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게 하는 일이 주어졌다. 여기서 일곱 교회를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이는 이것을 통해서 다음에 나오는 일곱 메시지의 윤곽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열거되는 일곱 교회에게 '책을 써서…보내라'고 했을 때 이것이 2-3장의 내용이 아닌, 요한계시록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지라도 2-3장에 한해서는 그렇다.
요한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주의 계시를 받아 그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모습은 선지자적 소명을 받는 모습이다. 요한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 지역은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었다. 당시 3대 도시로 불려지는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고린도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으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함께 거주하고 있어서 이들 지역에 요한계시록을 보내는 소명을 받은 것은 동서에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이 되었다.
그런데 요한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주의 날에 계시를 받은 것은 인상적이다. 여기서 요한은 왜 '주의 날'이란 표현을 썼는가? 이 날에 대한 특별한 개념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날'은 문자적으로는 '주님에게 속한 날'인데, 이 용어가 사용된 원래의 용도는 '주'가 로마의 '황제'에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의 날'은 '황제의 날', 곧 '황제를 기념하는 날'이다. 당시 이 지역에 사는 이방인들은 이렇게 황제를 섬기는 날로서 '주의 날'을 가졌었다. 그러나 구약의 전통 속에는 주의 날이 '여호와의 날'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황제를 기념하는 날이 있었고,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지켜온 날의 개념에 따라서 '여호와의 날'을 '주의 날'로 가졌다. 이 모두가 다 각각 '주의 날'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지키는 주의 날을 초대교회에서 이미 가져왔다. 그 개념이 '(이스라엘의 왕<신>이신)여호와를 기념하는 날'을 갖는 것으로, 이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갖는 영원한 종말적 개념의 통치를 받는 날로 가졌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의 날을 안식일에 국한하지 않고 날마다 지켜왔던 것으로 여겨지며(행2:42, 46),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확장되면서 점차 이방인들이 지켜온 '주의 날'에 대한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날'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요한은 주의 날에 갑자가 그의 등 뒤에서 큰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그 음성은 마치 나팔소리와도 같이 울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11절). 요한은 이제부터 그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2-3장에 기록된다.
(2) 요한에게 예언의 말씀인 계시를 주시는 주님의 모습(12-18절)
첫째,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는 인자 같은 이
요한은 주의 날에 일곱 교회에 편지로 보내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보려고 뒤돌아 섰다. 그런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일곱 금 촛대와 그 촛대 한 가운데에 서 계신 '인자 같은 분'이었다.
여기의 일곱 금 촛대는 구약성전의 성소에 있었던 기물인데 일곱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20절에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설명이 되고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있었다. 설령 20절을 근거하지 않더라도 일곱 금 촛대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빌립보서 2장 15-16절에서 충분히 밝혀져 있기도 하다. 즉 거기에서 바울이 '빛을 나타내는 자'로 묘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친히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며(요 8:12) 이 칭호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부여해 주셨다(마 5:14).
그리고 요한이 본 것은 그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서 계신 '인자 같은 이'였다. 요한은 그 분을 볼 때 '인자라고 불리는 예수'라고 생각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성경은 "그 촛대 사이에는 예수님 같은 분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현대어 성경도 "나는 그분이 인자라고 불리는 예수라고 생각되었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무엇보다도 요한이 주님을 '인자 같은 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모습이 다니엘 7장 13절 이하의 광경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면 '인자와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이끌려 가서 영광을 받으셨고, 왕권을 받으신 분으로 묘사되었는데, '인자'란 용어는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가르침을 주실 때 자주 사용하셨던 것으로 요한은 지금 자신의 눈에 들어온 환상에서의 주님의 모습에서 그 '인자 같은 이'를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인자 같은 이'가 구약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다니엘 7장 9절과 13절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인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메시야 전승에 입각하여 온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다니엘 7장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있었는데 영원한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인자 같은 이', 곧 메시야가 우리 주님 자신임을 강조하신 것이 주님의 '인자' 칭호로서, 메시야의 인성을 표현하는 초월적 기독론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인자 같은 이'로 예언한 그 메시야 나라의 왕이심을 이 '인자' 칭호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인자 같은 이'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서 계신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때 그분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들려져 있었다. 이 일곱 별은 20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로 일곱 교회의 사자이다. 그러니까 일곱 각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인 것이다. 그러나 일곱 교회의 사자를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부리시는 영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로 본다. 우선 일곱 교회를 위해 부리시는 영인 천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리스도께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를 그리스도의 종 요한에게 보내 그 뜻을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는 그것을 기록하게 하여서 일곱 교회에 보내게 하셨다. 일곱 교회는 요한이 듣고 본 것을 받아서 읽고 듣고 지킴으로 복이 있다. 그렇다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역자라야 마땅하다. 현대어성경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이요"라고 번역한 것은 옳다. 그리고 이 별이 인자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은 주께서 교회의 사역자들을 든든히 붙잡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니 이는 주께서 그 교회들과 더불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인 일곱 재앙의 반복 속에서도 교회의 구원을 붙들고 계신 것이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사상인 것에서 볼 때 분명히 그렇다.
둘째, 구약계시의 인용에 의한 묘사
요한은 주의 날에 갑자기 자기 등 뒤에서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 들려오므로 자신과 함께 하는 음성을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그는 일곱 금촛대를 먼저 보았다. 요한의 이러한 행동은 선지자적 부름을 받는 행동이다. 선지자는 (1) 듣는다 (2) 본다. 이 둘은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양식이다.
1장 12-20절에 묘사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전부 구약계시에서 따온 것들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나팔소리는 출 19:19; 민 10:1-10, 큰 음성은 겔 3:12, 일곱 금 촛대는 출 25:32; 슥 4:12, 인자는 단 7:13,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띤 금띠는 출 25:7, 28:3, 흰 양털 같은 머리와 눈 같은 털은 단 7:9, 불꽃같은 눈은 단 10:6,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은 겔 1:7,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은 겔 43:2, 오른 손의 일곱 별은 사 62:3; 단 12:3,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입은 사 11:4; 히 4:12,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얼굴은 마 17:2, 그 발 앞에 죽은 자 같이 된 모습은 출 33:20, 단 8:27을 주님의 모습에 인용하여 묘사한 것이다.
이것들의 묘사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와 성전이 겹쳐지는 모습이다가 나중엔 성전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곧 성전의 모습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인데 성전 개념과 겹쳐 있다가 성전의 개념은 없어지고 성전이 곧 하나님 나라로 남는다. 하나님 나라의 도시인 새예루살렘 안에는 성전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도시의 성벽은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을 갖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21:9-27).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고(엡1:22-23), 그리스도 안에서 선지자와 사도들이 놓은 기초 위에 그를 믿는 자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또 서로가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사시는 성전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아름답게 점점 커가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엡2:20-22) 신비한 원리가 마침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에 의해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하나 하나가 어떻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거룩한 능력으로, 이 모든 표현은 이 땅의 표현이 아닌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강조한다. 주님이 내뿜는 무한한 거룩한 능력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 죽은 사람을 주께서는 자신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 앞에서 사도 요한은 죽은 자처럼 되었다. "죽은 자 같이 되매". 이것은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을 때의 반응이다. 요한은 선지자들이 일해온 소명의 전통을 주께서 그에게 계시를 주시는 것에 의해 이어받게 되는데 그 앞에서 그는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이 반응은 자기 죄를 철저히 깨닫게 되는 것에서 갖게 되는 자세인데 주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무한한 영광 앞에서 전적 부패한 자신의 상태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같이 된 선지자들의 소명의 확신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에 있다. 왜 두려워 말라 했는가?
첫째, "처음이요 나중이니". 창조로부터 창조의 마지막까지의 완전한 통치권에 대한 표현이다. 창조부터 완성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부활하셔서 온 세상의 주가 되심으로 만물의 왕으로 등극하신 주님은 창조의 주님이셨고 구원 완성의 통치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두려워말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둘째, "나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었었으나 부활하여 지금은 영원히 살아 있는 자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통치를 하고 계신다. 여기서는 '죽었었다'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죽었었다. 이 죽음은 대제사장의 사역인 대속죄의 제사로서의 죽음을 겪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는 이 제사에 참여한 자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고, 이는 새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속죄의 개념에서 그리스도는 백성 전체를 대신해서 대표적 제사를 드렸다는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의 개인 개인의 죽음을 대신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으로 헌제사역에 참여하여서 단번에 영원한 헌신제물이 되심으로 흘린 피로 새언약을 세우셨다. 그것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새언약을 세우는 것으로 대속죄의 제사를 드려 죽은 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메시야적 사역을 새언약에 참여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왕적 사역으로서 하고 계신다.
셋째, "사망과 음부(지옥)의 열쇠를 가지셨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분으로 죽음의 권세가 그를 이기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몸과 영혼(목숨; 생명)을 능히 죽이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에게서는 생명과 함께 죽음이 같이 나온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자기에게 오는 모든 자를 영생을 얻게 하시나, 자기에게 나오지 않는 모든 자를 자신이 죽음에 처했던 그 저주에 두신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어느 사람이 이 저주를 면할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이 저주를 내리는 심판을 친히 행하신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영원한 문을 열고 닫는 왕권을 행사하신다. 따라서 언약의 백성의 운명을 담당하시고 계신 분이 그리스도이시기에 이분에 의해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교회는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3) 요한에게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신 이유(19-20절)
요한이 '인자 같은 이'인 주님을 뵙자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그러자 그분이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7-20절).
요한은 11절에서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리고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낼 내용은 요한이 이미 본 것과 함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며, 주님의 손에 들려져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요한은 2절에서 자신이 듣고 본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기록하였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요한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셔서 책으로 기록하게 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게 한 이유는 그 계시가 요한이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며, 이는 곧 일곱 교회와 그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에 관한 것이기에 이를 교회에 알게 해 주어서 이를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위로 속에 있게 하시고자 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주님이 그와 같이 하시는 까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셨으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그 교회를 '내 교회'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일곱 개의 편지마다 "내가 알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런 주님이 가지신 자신의 교회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의 현재 상태와 마땅히 되어야 할 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장차 되어질 일 속에서도 위로를 받게 하시는 바, 요한이 일곱 교회의 형제들과 함께 겪었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