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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설교-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
Abstract: The eminent trait of reformed preaching should be the transformation of the lives of the listeners, not the apt presentation of biblical information to the congregation through the theological and logical arguments. For the effective life-transforming sermon, preacher has to communicate biblical values practically with the understanding of the change process. Merits and limits of the inductive sermon structure, and the emotional aspects of the preaching including expressions, plot making, illustrations, delivery and persuasion will also be discussed for this purpose. And the effectiveness of Biblical preaching is to be judged not by the size of the listeners of a church, but by the transformation of the listeners' lives firstly, and finally by the formation of the community in the church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world. Because that is the very proof of the living reformed theology. 설교를 배우면서 사람들은 강해설교는 무엇이며, 다른 방식의 설교는 잘못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종종 한다. 마찬가지로 개혁주의 노선에 서있는 설교자라면 개혁주의 설교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동시에 그 나머지 설교는 다 잘못된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개혁주의 설교란 유형이 따로 있는가? 개혁신학을 강의하는 것이 개혁주의 설교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목회자라면 설교사역에서도 그 신학의 선상에서 분명한 방향과 한계선을 가지고 설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 설교에 대해 논하기 전에 모든 목회자는 설교자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19세기 미국 최고의 설교가였던 필립스 브룩스(Philips Brooks)는 예일대학교에서 행한 설교학 특강을 통해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의 영혼을 설득하고 움직이는데 있음1)을 분명히 했다. 삶의 변화, 그것이 목회 현장에서 사람들을 목양할 때 모든 설교자가 추구하는 진정한 개혁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설교의 특징을, 성경말씀에 입각해 삶의 목적과 실천 행위를 가르치는 설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 생활에 적용함으로써 가족과 교회와 세상과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해 나가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을 두는 것2)이라고 한 조엘 비키(Joel Beeke)의 관점은 적절하다. 이처럼 개혁주의 설교의 핵심으로, 설교를 듣는 청중이 갖게 되는 지식적 인식의 즐거움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임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대다수 강단의 상황이 그렇지 않은 현실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발생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설교를 듣기 위해 나와 앉아있지만 철저히 타락한 인간들이 갖고 있는 연약함 때문이다. 1600 여 년 전에 강단을 지키던 오거스틴(Augustine)이 “가르치는 진리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며, 가르치는 목적도 실천하게 만들려는 경우에는,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담화내용이 진리인 것을 믿게 되어도 무익하며, 말하는 방식을 기뻐해도 소용이 없다3)”고 굳이 강조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이처럼 시대와 관계없이 항상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공존하고 있는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1.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위해 필요한 사전 이해 그런데, 누구나 인정하듯 단순한 설교학적 기교나 방법만 가지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4). 그렇다면 우리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흔히 취하는 태도처럼, 단지 더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것 이상이 필요하다. 철저히 죄로 굳어진 인간과 공동체의 변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교자로서의 연구와 사전이해가 있을 때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1.1 변화 단계 이해 설교를 통해 영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설교자의 주 과제라면 우선 변화의 영적인 단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뢰센의 연구5)에 의하면 진정한 영적 변화를 위해서는 첫 째로 죄문제를 다루고 거기서 정결케 함을 경험케 해야 하며, 두 번째 단계로는 조명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단계를 거쳐, 세 번째 단계로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으로 이끄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것은 우리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전체적인 흐름을 구성하고 설교 전개를 계획할 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설교자의 이런 구체적이며 단계별 전략은 각 과정 속에 성령께서 도우실 것과 설교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약속을 믿는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개인의 영적 변화 단계 뿐 아니라 변화의 사회적 접근 단계를 알고 있는 것이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위해서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면 러브리스(R. Lovelace)가 지적했듯이 개인적 차원의 변화와 공동체적 차원의 갱신(Renewal)6)에는 다른 역학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심은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없이 일어나지 않듯, 모든 공동체의 진정한 변화는 현재에 대한 거룩한 불만족에서 출발한다. 현재 자신의 모습과 현재의 삶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굳이 힘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은 물론 그가 속한 공동체나 사회 속에 변화가 일어나기 원한다면, 현재 모습에 대한 거룩한 불만을 야기해야 한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회복과 축복의 삶을 대뜸 선언하지 않고, 먼저 말씀 곧 모세오경에 비춰 현재 이스라엘의 삶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일깨워주며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따라 심판이 불가피함을 보여주는 것을 주목해 보라. 그 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언약에 순종하면 회복과 축복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음을 언급하는 패턴7)으로 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신약에서 세례 요한의 메시지 패턴8))이나 예수님의 사역 패턴9)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물론 사도들의 메시지도 그 형태를 지속하지만,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려는 이 시대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그렇지 않다. 청중들의 죄의 모습을 깊이 드러내주고 그 엄청난 결과와 심판을 분명히 보여주는 예언자적 설교는 점차로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교인은 생산해 낼지라도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과 변화된 성도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현재 상황에 대한 거룩한 불만을 갖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문제의 해결에 대한 욕구와 성취에 대한 도전을 해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 나을 가망이 없음을 깊이 인식한 베데스다의 38 년된 병자에게 주님께서“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고 물으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안정과 편함을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나 변화를 일으키려는 설교자는 그것을 극복하고 적절한 긴장을 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늘어진 바이올린 줄은 아름다운 음악을 낳지 못하기에, 사도들은 사람들이 듣기에 편한 말이나 청중들을 즐겁게 하는 설교를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갈등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다10). 그래서 그 갈등 속에서 ‘우리가 어찌할꼬?’11)라는 깊은 탄식이 쏟아져 나오게 했기에 삶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변화의 단계 이해는 개인의 영적 변화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특히 공동체나 조직 변화에 유용하다. 다음으로, 변화의 이점과 변화된 상태 곧 아름다운 목적지를 보여줌으로 소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설교를 위해서는 설교자는 이와 같은 변화 과정(process)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그 과정 가운데 청중과 함께 해줄 것이며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따라서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그 특징상 이런 리더십 스킬이 뒷받침해주는 설교이기도 하다. 1.2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위해 이해가 필요한 영역들 오래전 오거스틴은 사람의 변화를 위해서는 하나님 이해, 인간 이해, 그리고 문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 와이코프(Wyckoff)같은 기독교교육학자는 성경적 지식과 사람에 대한 이해와 환경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와이코프는 특히 환경에 있어서 개인의 환경을 신성과 인간성 및 자연성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며12) 인격의 변화를 위해 환경과 사회적 상호작용13)을 고려해야 함을 지적했는데 이것은 설교자에게도 필요한 이해이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청중의 삶에 진정한 변화 곧 변혁(transformation)을 일으키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성령의 역사 외에도, 설교자는 다음 3가지 영역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첫 째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 둘째로 인간에 대한 이해, 셋째로 세상과 문제에 대한 이해이다. 삶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가 하나님과 말씀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이 당연하다. 그러나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설교자는 철저한 석의(Exegesis)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일부 보수신학계 설교자 가운데는 한 때 자유주의적인 비평학 때문에 각종 비평 도구들과 석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암흑시대 전 4-5세기의 옛 교회에서도 교회 밖에서 유행하는 어떤 지식분야에는 경솔하게 뛰어들지 말고 냉정하고 조심스럽게 검토하며 식별하라고 경고했지만14) 동시에 석의 기술, 언어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15)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전하기 위해 성경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오거스틴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바른 석의를 통해 원저자가 의도한 것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16) 이처럼 석의 역량이 없어서 원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뜻을 경솔하게 채택하는 사람은 조화되지 않는 발언들을 할 수 밖에 없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게 되며 성경을 성가신 것으로 느끼기까지 하여, 결국 그 자신이 완전히 파멸될 수 있음17)을 알고 역량개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설교에 있어서 성경 석의를 강조한다고 해서, 그 결과 말씀이 하나의 학문적 이론의 제시로 끝나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석의를 통해 말씀의 원의도가 드러나고, 그 말씀이 인지 단계를 넘어 청중에게 경험되는 것이다. 설교자가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이 때 인간 이해란 개인에 대한 인간이해와 타인(청중과 공동체) 이해 모두를 포함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났던 대각성 운동들과 부흥을 연구해온 복음주의 교회사학자 러브리스 역시 하나님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자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이 부흥의 전제조건18)이었다고 지적한다. 이 때 인간 이해는 자아에 대한 깊은 이해, 곧 전적 타락으로 인한 우리 인간의 죄의 깊이에 대한 이해19)를 말하며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 변화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전도자와 달리 하나님과의 깊은 각성적 만남20) 곧 회심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청중의 생태 전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 점에서 미국 교회 역사에서 두 번째 대 각성 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즈(Edwards)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얼마나 심원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는가를 연구해 보는 것은 설교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사회 속에 살고 있는 현대 청중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설교자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방식과 원리,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 사람들의 감정이 나오는 원천, 무의식적인 동기 등21)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매일 생활 속에서 겪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생각과 행동의 동기들을 설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 노출22)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즉, 설교자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목자의 심정으로 입을 열어야 하며, 인간 심성 내부의 깊은 과정들을 다룰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23) 한다. 그것은 곧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위해 설교자가 이해야할 할 세 번째 영역인 세상과 문제로 이어지게 한다. 설교자는 말씀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계성으로 구성된 사회의 제 현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예로 든 고대 설교자 오거스틴 역시 성경지식 못지않게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고, 심지어 이교도들의 여러 가지 역사, 과학과 음악, 기술까지 알려고 노력했던 것도24)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이사야를 통해 말씀을 전하며, 당시 사회에 깊이 퍼져있었던 고르반 제도의 폐해를 지적하고 언급(막7:6-13)하신 것도 삶의 제반 문제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청중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설교의 내용: 가치관을 다룬다. 많은 설교자들의 주관심인 설교 전달 기술 곧‘어떻게’ 설교를 잘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설교의 내용이다. 성경적 설교가 아니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설교가 아니라 교훈이요 웅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회 현장에 서게 되면 사람들이 원하는 설교를 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데, 이는 이웃교회에 교인들을 잃고 싶지 않은 설교자를 짓누르는 압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청중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설교자의 태도는 쉽게 노예 근성에 빠지게 된다는 브룩스는 경고25)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사람들의 필요를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만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정말 가치있고 중요한 것을 주도적으로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설교의 내용에 있어서 성경적 가치관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설교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십자가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이 중요한 것이다. 분명한 그리스도 중심성이 없는 설교는 교훈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며, 세상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핵심을 상대적으로 비교하게 되며, 청중들에게 자기중심적 선택의 여지를 남겨주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과 복음은 흔들릴 수 없는 가치관의 기초가 되며, 거기서부터 삶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반면에 설교에 분명한 성경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지 못할 때, 그것은 자신의 감정, 행동, 욕망, 결정, 이웃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경계선(boundaries)26)이 사라지게 만들며 결국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27)에 빠지게 만든다. 따라서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는 그 내용상 성경적 가치관이 분명하여 그것에 의해 삶의 경계선을 세워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리학에서는 인간 의식과 생각의 흐름은 통제된 생각과 통제되지 않은 생각의 두 가지로 구성된다28)고 본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청중들의 무의식적이며 통제되지 않은 생각이다. 이에 대한 설교자의 깊은 이해와 다룸이 없이는 삶의 변화는 일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건전한 삶을 낳는 건전한 생각을 하게 하려면 설교자는 통제되지 않는 생각이 주는 영향을 줄여줘야29) 하며, 그런 숨겨진 부분들을 공개하고 의도적으로 의식하는 습관을 형성시켜줘야 한다. 그런 작업을 통해 청중들이 인생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게 된다. 이 때 각 사람의 인격를 형성하는 자아, 성벽, 습관 및 결정적 반사작용30)이 균형과 조화와 통일과 완성을 이룰 수 있는 변환 현상이 일어나도록 설교자는 설교할 때마다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설교이다. 청중의 가치관을 건드리지 못하는 설교, 그것은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무딘 칼날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삶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설교에서는 석의 결과 드러난 분명한 성경적 진리를 다루되, 그 진리가 삶 속에서 경험되도록 해야 한다. 현대인의 삶의 변화에 효과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존 오트버그(John Ortberg)31)는 리더십(Leadership)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대학 다닐 때 가장 중요한 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32)이었지만, 30 여년이 지난 지금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Experiencing God)’33)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굶주려 있다.34)”고 했다. 이는 현대 설교 사역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의 진리는 학문과 교리의 영역을 뛰어넘어 설교를 통해 삶의 현장으로 침입하지 않으면, 현대인의 삶의 변화는 요원한 문제로 남을게 될 것이란 말이다. 이 시대 영성운동의 중요한 한 흐름을 이끌었던 머튼(Merton) 조차도 ‘신앙생활에서 비현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다35)’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설교들이 청중의 삶의 현장과 유리되어 있다. 이처럼 설교가 지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측면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가 실질적이고 경험적 영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생활은 물론 통상 세속문제라고 생각하는 매일의 삶 속에서 겪는 금전문제, 인간관계, 사회문제 등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적 가치관을 통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등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다른 신학 체계와는 달리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개혁주의 신학의 본질36)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는 그 내용에 있어서 성경적 가치관 측면을 분명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3. 효과적인 설교의 구조(Structure)와 구성(Plot) 어떤 설교는 귀에 들리는데, 어떤 설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설교의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설교의 구조가 무시된 설교작성 방식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설교는 오늘 이 설교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가 분명하며 설교를 통해 성취하고자하는 목표가 명료해야 한다. 교리적 설교나 교회력에 따른 설교 혹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책별 혹은 장별 설교를 하는 것은 분명히 청중들에게 성경을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섭취하게 하는 등 교육적 측면에서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자 중심적 방식이다. 설교의 대상인 청중이해에 따른 설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즉 좀 더 효과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설교자는 기도하면서 청중들이 현재 영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변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진단하여 우선순위에 따라 매 설교 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목표를 가지고 설교해야 한다. 이 때 설교의 대지(outline, 개요)를 작성할 때도 “이는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사는 사람입니다”(요11:44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는 식의 본문 내용의 단순 묘사나 서술 형태보다는, “얽매인 것을 풀고 자유의 삶을 사십시오.”같은 형태로 즉- 설교에서 청중들이 붙잡고 살 수 있는 도전, 격려, 변화 요구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좀 더 쉽게 일어난다. 대지는 또한 한 설교 내에 서로 다른 다수의 사상들37)로 청중에게 들리지 않고, 하나의 주아이디어(main idea)38)를 지원하는 클라이맥스를 향한 움직임(move)들로 여겨질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구성되어야 한다. 복잡한 설교보다는 단순성이 있는 설교가 청중의 삶의 변화에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설교의 구성에 대해서도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혹자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되지, 설교의 구조(structure)와 구성(plot)까지 고려하는 것은 인간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한 성령의 역사로 대 각성을 일으켰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토론에 대해서 쉽고 분명하게 그 방법과 순서를 제시하는 것은 목회자가 설교함에 있어 매우 유익한 것39)이라고 했다. 한 편의 설교를 구성함에 있어서 전환과 반전의 기법은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 기법으로 매우 유용하다. 리더십 학자들은 물론 기독교교육학자들도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있듯이 인격의 성장은 마찰, 긴장, 난문제를 통해 일어난다. 동적 긴장감 야기는 기독교인화 과정에 있어서 교육학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40) 인격과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에서도 동일하게 중요한 요소이다. 설교를 통해 제시된 기독교적 진리는 청중의 과거의 경험과 인격을 어느 정도 전복시켜야 하며(피터슨은 이것을 subversive spirituality41)라고 한다), 새로운 인격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긴장이 제기되고 그로 인해 마음에 갈등을 겪지만 결국 그 난제가 해결되어 완성42)을 향해 가도록 설교를 구성43)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복잡화→급작스런 전환→실마리가 드러남과 같은 플롯 구조44)를 이야기체 설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의 서론 부분은 본문 말씀에 관심을 집중하며 오늘의 주제를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능으로 끝나야지, 거기서 설교의 결론적 사항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서 구성해야한다. 청중의 삶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설교자는 이런 점에 본능적으로 익숙할 뿐 아니라, 서론에서 청중들의 심적 안전지대를 흔드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설교의 서론에서 왜 이 설교를 들어야하는지도 청중에게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 채 아무런 기대감도 없는 사람들에게 결론부터 들이대는 전통적인 연역적 설교 방식은 교인들의 삶을 변화시키기에는 비효과적이다. 교인들의 삶의 변화에 효과적인 설교자들을 살펴보면 또한 설교의 클라이맥스를 잘 사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런 사실들은 결국 삶의 변화를 야기하는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귀납적 구조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현대의 국내외 일부 설교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야기체 혹은 서사체 설교만이 옳고, 전통적인 연역적 설교 방식이나 대지를 사용하는 강해설교는 모두 폭력적45)이요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교리적 교육이 요구되거나, 위기 속에서 분명한 논지를 전달해야만 할 때는 연역적 설교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설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전환과 반전의 전달기술이 사용된 귀납적 설교가 매우 효과적이다. 따라서 이런 설교 구성과 전달기법을 습득하고 적용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청중들의 귀에 잘 들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 전체가 커다란 덩어리 한 개로 던져지지 않고 단락별 혹은 모듈화해서 전달하는 것이 좋다. 음식을 먹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설교라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짜여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 신경을 다 집중해 들어야만 파악할 수 있는 커다란 덩어리 한개 보다는, 작게 잘라서 먹기 쉬운 설교를 더 쉽게 이해하고 반응한다. 그것이 왜 타고난 이야기꾼이 전하는 서사체 설교가 아닌 경우, 현대 청중 대부분이 잘 만들어진 두 세 개의 대지로 구성된 단락 설교를 선호하는 이유이다. 즉 전체 흐름은 귀납적이며 플롯 구조를 가지되, 한 주간 동안 하나라도 기억하고 붙잡고 살 수 있는 적용적 대지로 단락지어진 설교가 삶의 변화에 가장 효과적이다. 4. 설교에 있어서 표현과 전달(Delivery) 방식의 변화 효과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위해서는, 설교 구성 뿐 아니라,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능력과 전달 방식으로의 변화를 요구한다. 신학적 지식의 전달이 아닌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성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방법과 함께 잘 표현하는 방법46)에 익숙해야 한다. 진지한 석의에서 출발한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설교 중 청중들을 휘어잡기기 위해 웃겼다가 울렸다가 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물론 설교의 도입부분이나 설교 도중 전환을 위해서도 유머는 매우 유용하다. 유머는 무장을 해제해 말씀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마음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에서 시종 일관 그런 분위기를 지속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며, 청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거룩한 설교행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분명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유머를 좋아한다. 그러나 설교를 행하는 동안 피상적 가벼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생과 사를 가늠하는 설교의 중대성을 망각하기에 가능한 일47)이다. 청중의 삶을 깊이 있게 변화시키기 원하는 설교자에게는 가벼움을 뛰어넘는 진지함이 있다. 청중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기 때문48)이다. 유머가 있되 설교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잃지 않는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듯, 인생의 가장 깊은 진리를 전하되 청중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단순하고 쉽게 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자에게 또 다른 도전이다. 그러나 설교가 신학도를 향한 신학적 강론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설교자는 기꺼이 그 짐을 질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의 종이 고백한 것처럼 주 여호와49)께서 우리 설교자들을 아침마다 깨우치고 알아듣게 하시는 이유는, 매일의 삶 속에 지치고 힘든 청중들의 귀를 어떻게 일깨우고 말(설교)로 도와줘야 할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바로 학자의 혀의 기능이지(사50:4), 곤핍한 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학문적 언어를 구사하라는 것이 아님을 설교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즐겁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막12:37). 설교의 언어와 표현은 따라서 진정한 학자의 혀의 기능을 다해, 추상적이고 학술적이지 않고 쉽고 단순 명료해야 한다. 전도를 하면서도 전도자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서 기독교인들만이 알 수 용어를 쓰는 우를 범하듯, 설교자들은 일반 청중들을 향해 신학 용어 (대속, 성화, 영화 등)로 말하는 어리석음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종 범한다. 그것은‘반(反)-학자적 혀’의 설교이다. 그것은 우리 설교자 혹은 그리스도인 중심의 설교이지, 정작 변해야 할 설교의 대상인 불신자와 구도자와 초신자들을 제대로 배려하지 않는 설교이다. 따라서 그런 설교를 듣고 보통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설교를 작성할 때는 또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청중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해하고 행동하게 된다. 미국 교회사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프린스턴대학의 총장까지 지냈던 지성이요, 최고의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철학자요 형이상학적인 사람이었기에 그의 글은 현대인들이 읽기에 부담을 느낄 정도로 매우 논리적이고 깊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를 통해 대각성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성령의 역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설교학적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이유 한 가지는, 추상적인 것들이 거룩한 감정을 거의 자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항상 설교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표현50)을 했다는 점이다. 에드워즈의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이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또한 강렬한 표현과 함께 분명한 경고를 담고 있다. 조엘 비키는 오늘날 설교들이 청중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신자가 누릴 축복과 불신자가 당하게 될 심판을 강조하지 않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 때문51)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청중을 공격하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설교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52). 다만 현대설교에서 죄에 대한 경고성이 사라져가고 있는 경향만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성장이란 부담 속에서 설교자들은 사람들이 격려를 원한다는 사실에 지나칠정도로 민감해져 있고, 교인들을 책망이나 단호한 말을 싫어하는 설교의 소비자로 생각한다. 그런 입장에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5:29)”는 예수님의 설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은 비교와 궁극적 가치 근거성을 제시(27-28절)한 후, 강렬한 표현을 통해 핵심을 분명히 전했다. 에드워즈 역시 거룩한 사랑과 희망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죄에 대한 두려움은 지옥의 무서움을 표현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에 더 효과적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53), 목회자로서 교인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주님의 위협적인 말씀으로 불신자에게 경고하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했기에 사람들이 변했고 부흥이 일어났던 것54)이다. 현대 기독교 심리학의 연구도 이런 방식이 효과적임을 지지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라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인데, 클라인벨(Clinebell)이 잘 지적했듯이 성장은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돌봄만 있으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대면55)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즉 설교에서 위로와 격려와 같은 돌봄의 측면과 함께 분명한 대면이 필요한데, 이는 선한 의도를 가진 설교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를 출석하고 있지만 생활은 그대로인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구성하는 가치관을 건드리는 대면적 행위 없이는 교인들의 삶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크래독이 주장하는 것처럼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다원화 사회에서 당신이 죄인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전하는 논리적 설교의 어리석음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56)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설교가 본 고에서 지적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어서이지, 청중의 문제를 명확히 제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위가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청중석에 앉아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권위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선포일 수도 있다. 게다가 모든 설교가 다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도설교이지도 않다는 점을 그는 잊고 있다. 사람들이 설교에 귀를 닫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경험되지 못하는 내용, 효과적이지 못한 설교의 구조, 밋밋한 구성, 구태의연한 표현, 둔한 전달 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들 때문이지, 명백한 진리로서의 복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57).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전술한 사항들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대면적(confrontational) 설교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다. 특히 일반 청중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위해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이기에, 불신자 전도 상황과는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필자에게는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는 지나치게 대면적이고, 설교를 들으러 나온 사람들에게는 타협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사역자들이 이상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해결을 위한 깊은 성경적 원리와 미래의 소망도 제시하지 못하며 단순하게 시대를 비평하고 가볍게 칼로 내리치는 것은 주의해야58)할 일이다.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또한 예화 사용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특징을 보인다. 사람들의 삶에 깊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앞에서 언급 했다. 예화는 사람과 세상 이해의 측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예화는 청중을 집중하게 하는 도구나 중심사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설교의 핵심 포인트를 전달59)하기도 한다. 따라서 성경적 설교는 예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란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오히려 삶의 변화를 위해서 적절한 예화 사용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삶의 변화에 효과적 예화는 어떤 것일까? 기독교교육은 교육할 때 피교육자의 경험을 가지고 출발60)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힌트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것은 설교자가 예화를 사용할 때도 청중이 경험하는 사건에 기반을 둔 것을 채택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보통 교인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기고 거리를 느끼는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성인들 얘기나 고전 문학의 인용과 같이 오늘날의 청중과 설교자의 생활 영역에서 벗어난 예화보다는, 설교자의 삶의 일화나 모본이 더 효과적이다. 가능하면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경험했거나 겪을 수 있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생활 얘기를 구체적으로 예시하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은 청중들이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아래서 자신들도 이런 문제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여지를 주고,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통제 안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61)이다. 이런 성격의 예화를 사용할 때 설교자와 청중의 본문에 대한 경험(혹은 경험 가능성)이 하나님과 설교자 그리고 청중을 하나로 묶어 주며62) 거기서 설교 공동체63)에 진정한 성숙(요15:5)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예화를 통해 (앞에서 언급했던 그뢰센이 말한) 영적 변화의 마지막 단계, 즉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요17:23)에 도달해 가는 것이다.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은 그렇지 않은 설교보다 설교자가 전달(delivery)할 때 뜨거운 열정(zeal & passion)을 보인다는 점이다. 마틴 로이드존스가 지적한 것처럼 설교는 영혼의 불을 붙이는 논리이며, 중심에 불이 붙은 사람만이 참된 신학을 전할 수 있는64) 것이다. 설교에서 보이는 열정은 그러나 사람들에게 감상적인 마음을 갖게 하거나 일시적인 감정의 자극이나 깊은 생각 없이 움직이는 선동성65)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는 청중의 삶이 바뀌기 원하는 만큼 뜨겁게 전해야 한다. 설교자의 열정은 청중에게는 권능이며, 제3자의 눈에는 코튼 매더(Cotton Mather)가 묘사한대로 설교에 임한 효능(effect)66)이다. 바울은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행26:24) 아그립바 앞에서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라고 외치던 열정이 있었고,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행20:31)하는 뜨거운 사랑67)이 있었기에 그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은 변한 것이다. 5. 변화를 위한 설교에서의 과정: 설득 일부 신(新)설교학의 흐름에서는 설교에서 설복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전통적으로는 설복하는 것이 모든 웅변의 보편적 책임68)이라고 보았다. 한 예로 로이드존스는 설교행위의 전체 목적은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것69)이라고까지 말한다. 서사체 설교 옹호론자들의 지적처럼 전통적 설교의 권위주의적인 면은 분명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설교에서 설득’은 설교자들이 잃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이 부분을 소홀히 한다면 청중의 삶의 변화는 비효과적이 될 것이다. 설득력있는 설교에서 설득은 첫 째로 하나님의 설복이 있고, 두 번째로 인간 측면의 설득이 있다. 일부 하이퍼캘빈주의자(Hyper-Calvinist)의 주장처럼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설복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 때 설교에서 인간 측면의 설득은 전통적으로 설교자가 일방적으로 청중을 설득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인식되기 시작한 것처럼 청중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자발적 설득 방식70)이 훨씬 효과적일 때가 있다. 그렇다고 청중의 자기 설득에의 지나친 강조는, 현대 기독교 상담학에서 주장하는 비지시적 상담 방식과도 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지라도 전적 타락으로 인해 죄성을 가지고 있는 (비록 거듭났을지라도) 인간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설복과 함께, 설교자를 통한 목자리더(shepherd leader)로서의 설득의 균형있는 조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청중들이 경험해야 할 설교에서의 하나님의 설복은, 설교 시간 중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역사로 나타나시고 사람들을 성령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설교자는 청중과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 때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청중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3). 그러나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야기하는 설교를 위한 두 번째 영역인 인간측면의 설복은, 설교자의 인격과 모본이 되는 삶이 있을 때 가장 효과적71)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하고 싶다면 설교자가 먼저 말씀과 주께 순종하는 진실한 삶(요14:31)의 간증을 청중 앞에서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주께서 경고한 것처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것(마23:2)’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청중의 삶의 변화를 위해 설교자가 설득을 할 때는 또한 전통적인 논리적 설득 방식에만 안주하지 말고, 논리적 설득과 함께 정서적 설득을 병행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권위 상실의 시대에서는 설교자의 권위와 논리적인 설득에만 의존하는 것은 잘난체하고 건방진 것으로 여겨져서 청중의 감정적 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감성적 설득을 강조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설득은 주로 교리적 설득72)과 규율적 설득73) 두 가지로 나뉘는데, 가장 큰 문제점은 청중들이 하나님의 존재나 성경의 권위 인정과 같은 전제 조건적 가치관을 설교자와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지 않을 때는 설득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정서적 설득74)은 논리의 약점을 감성의 힘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이르는 데는 논리적 설득에만 의지하는 것보다는 정서적 설득이 더 효과적인 것이 같은 이치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세상적 감성은 아니지만, 사랑의 속성상 감성적 요소가 있으므로75) 설교에 있어서도 정서적 설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논리와 지성 으로 설득하는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오거스틴은 그의 설교사역을 돌아보며 청중의 박수는 그들이 무엇을 깨닫고 마음이 즐겁다는 표시였지만, 그들의 눈물은 설복되었다는 증거였다76)고 증언했다. 따라서 우리도 에드워즈가 이해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머리에 축적되는 지식의 설교를 원치 아니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필요로 함77)을 인정하고, 정서를 움직이는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설교의 사례를 보자. 예수님께서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마5:40)”는 말씀을 하셨을 때 사람들이 과연 쉽게 설득될 수 있었을까? 이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등장하는 ‘너희가 너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냐’는 사람들의 일반적 양심을 터치하는 감성적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권면을 하며, ‘많은 눈물’과‘너희를 향한 넘치는 사랑이 있음(고후2:4)’을 언급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며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빌3:18)’고 한 것을 통해 사도는 감성을 다루는 데 얼마나 정통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설교에서 감성적 측면의 효과성은 우리들의 일반적 경험에서도 증명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회심 순간에 대속적 죽음의 완벽한 교리적 이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주셨다는 감격 때문이다. 이처럼 논리와 교리보다는 감성이 최후의 변화를 야기한다. 거룩한 감정(affection)이 없는 곳에서 행동은 지극히 미온적78)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지식과 논리 뿐 아니라 감성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사명은, 진리가 드러나 사람들의 삶 속에서 경험되게 돕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주의 설교의 결과,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개혁주의 설교는 하나의 교파적 혹은 하나의 신학적 사조에 따른 설교 방식이 아니다. 진정한 개혁주의 설교는 그 설교를 들은 청중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는가 아닌가라는 본질적 부분으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설교의 1차적 결과는 청중 개인의 삶에 헌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설교의 결과로 개인적 삶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경험되도록 해야 한다. 경험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경험되는 것이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실천되는 것이다79).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를 통해 귀로 들은 기독교적 진리가 참생명이며 영생이신 예수로 경험되고, 그 사건이 하나님의 일로 청중의 삶에 일체화되도록 설교자는 노력해야 한다. 성경적 설교는 이전에 알지 못하여 받아들일 수 없었던(요1:10-11) 하늘에 계신 주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와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거하심으로 청중들이 그 로고스를 삶 속에서 듣고 보고 만나고 (요1:1,14,41) 만지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요일1:1-3)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것을 실현하지 못하며 설교자의 주장이나 본문의 신학적 지식 자체를 해설하는 것으로 끝나는 설교는, 우리가 추구하는 설교의 모습이 아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될 때 형성되는 것이지, 설교자에 의해 전달된 성경 지식과 교리에 대한 분석과 인지적 동의로 볼 수 없는 것80)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설교는 설교의 본질과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 또한 개혁주의적 설교의 장기적 결과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 설교가 진정 개혁적이라면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사이에 교회가 세워져 가고, 그들이 거하는 사회가 변할 것이다. 즉 우리의 설교가 효과적이었는가 아닌가는 그 설교의 결과로 성경적 공동체가 형성되었느냐 아니냐로 판단되어야 한다. 아무리 청중이 우리의 설교를 좋아하여 설교자를 따를지라도, 듣는 이의 삶의 변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건강한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져가지 않는다면 이는 성경적인 설교라고 말할 수 없다. 복음주의 교회사 학자인 러브리스는 떼아르(P. Theilhard)의 비유를 인용81)하며 오늘날 설교사역에 따라 사람들이 몰려들어 형성된 대형교회를 자석에 달라붙은 철가루로 묘사한다. 자력이 없어지면 우수수 떨어져 쌓이는 그 철가루 퇴적물에는 참된 생명이 없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철가루들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 철가루가 아무리 많이 쌓여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설교를 통해 대형교회는 세웠는지는 몰라도 진정한 공동체를 세우지 못했다면, 그것은 설교자로서의 소명과 관계없는 일이며 나의 왕국을 건설한 것일 뿐이다. 개혁주의 설교라는 유형이 만일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인과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으로 정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혁주의 신앙이 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끝 1) 필립스 브룩스, 『설교학특강』(서문강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108.
2) 조엘 비키, “개혁주의 설교”,『설교개혁』(ed. 돈 키슬러, 조계광 역; 서울: 생명의 말씀, 2003), 106.
3)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교육론』(김종흡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152.
4) 싱클레어 퍼거슨, “마음을 변화시키는 설교”in 『설교개혁』, 202.
5) 베네틱트 그뢰센, 『심리학과 영성』, (김동철역; 성바오로출판사, 1999), 134-159.
6) Richard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An Evangelical Theology of Renewal (Downers Grove IL: IVP, 1979), 224.
7) 이에 대해서는 Douglas Stuart, Hosea-Jonah (Word Biblical Commentary Vol.31; Waco Texas: Word, 1987)를 참조하라. 아모스의 메시지와 사역이 그러하며 (p.288), 구약선지자들의 사역은 사실 독자적이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근거한 선언이며 따라서 선지자들의 사역은 야훼의 법 특히 모세오경에 근거한 갱신사역이었음을 주지시켜준다 (pp.xxxi-xxxii).
8) 눅3:7-14를 참조하라.
9) 막7:6-16, 마23장 등을 참조하라.
10) 존 암스트롱, “생각을 변화시키는 설교” in 『설교개혁』, 175.
1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7)
12) D. C. Wyckoff, 『기독교교육의 과제』(전택부역; 서울: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91), 140.
13) Ibid., 141,143,215.
14)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교육론(De Doctrina Christiana)』,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92-93. 39장을 참조하라.
15) Ibid., 3권 2장-5장(98-103쪽)과 24-29장에서 오거스틴은 말씀사역에서 흔히 발생하는 단어, 표현방식 문법적 언어적 번역과 해석적 석의 작업의 구체적 사례들을 일일이 들고 있다.
16) Ibid., 53. (36장 41절)
17) Ibid., 53. (37장)
18) Lovelace, 82.
19) Ibid., 86.
20) 그뢰센. 139.
21) 로렌스 크랩, 『인간 이해와 상담』,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 1993), 114.
22) Ibid., 320.
23) Ibid., 319.
24) 『기독교교육론(De Doctrina Christiana)』, II권 18장28. 75쪽, 27장 82쪽, 29장 84쪽, 30장 85 등을 보라.
25) 필립스 브룩스,『설교학특강』, 38.
26) 헨리 클라우드,『변화와 치유』 (양은순 오부운 역; 서울: HOME, 2001), 125-150.
27) Ibid., 210-231.
28) 아치발트 하트,『마음의 습관』(윤후남 역; 서울:요단출판사, 2000), 250.
29) Ibid., 251.
30) Wyckoff, 『기독교교육의 과제』, 146.
31)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전도설교를 담당했던 빌 하이벨스목사와 함께 설교목사로 오랫동안 거듭난 성도들의 영적 양육을 담당한 후 현재 멘로파크(Menlo Park) 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하고 있다.
32)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9)
33) 헨리 블랙가비, 클로드 킹,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서울:요단출판사, 2000)
34) "Holy Tension- The Leadership Interview with John Ortberg", Leadership Vol.25. Number 1, (Winter 2004), 23.
35) 토마스 머튼, “고독속의 사색”에서 (하트, 『마음의 습관』, 213에서 재인용.)
36) 제임스 M. 보이스, “개혁주의 전망”,『개혁주의 신학 시리즈 2- 웨스트민스터 신학과 화란 개혁주의』(데이빗 F. 웰스 편집; 서울: 엠마오, 1992), 202-203.
37) 설교학자 버트릭은 이것을 대지와 단락을 전환문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개의 카테고리별 설명이라고 잘 묘사했다. David Buttrick, Homiletic- Moves and Structu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70.
38) 이에 대해서는 키이스 윌하이트, 스콧 깁슨 편저, 『빅아이디어 설교』 (서울:디모데, 2002)가 유용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39) Edwards, Concerning the Revival, ed. C. Goe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2), 4:386.
40) Wyckoff,『복음과 기독교교육의 과제』,149.
41) 유진 피터슨, 『하나님의 신비에 눈뜨는 영성』 (서울: 좋은 씨앗, 2003)
42) Wyckoff, 『복음과 기독교교육의 과제』,142-143.
43) 이런 구조(structure)에 대해서는 전술한 Buttrick의 저서 Homilectic을 참조하라.
44) Eugene Lowry, The Sermon: Dancing the Edge of Myste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81.
45) 프래드 크래독, 『귀납적 설교의 이론과 실제- 권위없는 자처럼』(김운용역;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3) 등을 보라.
46) 『기독교교육론(De Doctrina Christiana)』, 30.
47) 존 파이퍼는『하나님의 방법대로 설교하십니까』(서울: 엠마오, 1995)의 4장에서 이것을 설교의 장중함(gravity 무게)이라고 일컫는다.
48) 오거스틴, 조나단 에드워즈 등 한 시대에 깊은 영향을 끼친 설교자들은 다 그러했다. 존 파이퍼의 『하나님의 방법대로 설교하십니까』5-7장과『기독교교육론(De Doctrina Christiana)』, 17쪽 등을 보라.
49) '주 여호와(Adonai Yahweh)'는 4,5,7,9절에 계속 반복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서, 종(servant)의 수동성과 야훼께서 주체 되심을 보여준다. Walter Brueggemann, Isaiah 40-66,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8), 122.
50) 예를 들어,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는 대신 계19:15를 인용해 그의 입에서 나온 이한 검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철장으로 다스리며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을 것이라는 구체적 표현을 인용하고 그런 표현을 확장한다. 존 파이퍼,『하나님의 방법대로 설교하십니까』(서울: 엠마오, 1995), 95쪽 등을 참조하라.
51) 조엘 비키, 111.
52) 퍼거슨, 207.
53) 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 (1834; repr. ed.,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4), 1:308.
54) 파이퍼, 『하나님의 방법대로 설교하십니까』97,99.
55) 심지어 그는 ‘돌봄+대면=성장!’이란 공식까지 제시한다. 하워드 클라인벨, 『성장그룹』,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0), 22.
56) 프래드 크래독, 『귀납적 설교의 이론과 실제- 권위없는 자처럼』136-130.
57) 불신자 전도를 통한 교회성장으로 유명한 윌로우크릭교회는 불신자들이 교회를 거부한다고 하나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님을 조사 결과 발견했다. Lee Strobel, Inside the Mind of Unchurched Harry and Mary (Zondervan, 1993) 참조. 또한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역시 오랜 목회경험을 통해 비교인들은 희석된 메시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에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것을 주일에 듣고 싶어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릭워렌, 『목적이 이끌어가는 교회-새들백교회 이야기』 (서울:디모데, 1997), 218.
58) 브룩스, 『설교학특강』, 205.
59) 프레드 크래독,『설교-열린 체계로서의 귀납적 설교방식』, (서울:컨콜디아사, 1997), 243.
60) Wyckoff, 『복음과 기독교교육의 과제』,66-67.
61) 하트,『마음의 습관』226-228.
62) 청중이 설교자의 경험된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는 현상을 Chapell은 'mind binding'이라고 한다. Bryan Chapell, Using Illustrations to Preach with Power,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1), 132.
63) 예화의 공동체 형성 기능은 전기한 Chapell의 책 68 쪽을 참조하라.
64) D. M. 로이드 존스, 『목사와 설교』 (서문강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27. 암스트롱, 192-193.
65) 퍼거슨, 208-209.
66) D. M. 로이드 존스, 『목사와 설교』, 404,416.
67) 고후2:4와 빌3:18 등을 보라.
68) 성 아우구스티누스,『기독교교육론(De Doctrina Christiana)』, 172.
69) 로이드존스, 『목사와 설교』, 119.
70) 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 책으로 Robin R. Meyers, 『설득력있는 설교의 비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설교자)』 (이호형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9) 를 참조하라.
71) 오거스틴은 말에 설득력이 있으려면 어떤 숭고한 웅변보다도 설교자의 생활이 더 큰 영향을 주기 때문(『기독교 교육론』 27장 59. 175쪽)이라고 지적했고, 19세기 최고의 설교가인 브룩스도 다시 지적했듯이 오늘날 설교에 힘이 없는 이유는 진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사람됨에 실패의 원인이 있기 때문(브룩스, 37쪽)이다.
72)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또박또박 강해하는 설교 등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73) 한 예로, 율법대로 살지 않았을 때 어떤 징계를 받았는가를 구약을 통해 예시하는 것.
74) 이 때는 흔히 대의명분, 책임감, 인간성, 양심에 호소하며 그리고 사랑 미움 증오 불의 정의 절대성과 같이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종종 활용한다.
75)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Affection이라고 불렀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죠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서울: 지평서원, 2000)을 참조하라.
76) 성 아우구스티누스,『기독교교육론(De Doctrina Christiana)』, 173. 그는 “내가 한 말에 효과가 다소라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박수칠 때가 아니라 그들이 우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라고도 했다(171쪽).
77) Jonathan Edwards, "Concerning the Revival", ed. C. Goe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2), 4:388.
78) 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 1:238.
79) 조엘 비키 in 『설교개혁』, 107.
80) Wyckoff, 『복음과 기독교교육의 과제』, 70.
81)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 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