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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는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기독교한국침례회’라는 기성교단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이 기독교복음침례회 말고도 에수교복음침례회, 대한예수교침례회 등 유사구원파 집단이 있다.
현재는 곳곳에 박옥수파 계열의 구원파가 활동하는 중에 (2002.10월말)부터는 매년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란 주제로 집회를 하는데, 도대체 왜 구원파는 이단인가?
1. 구원파의 설립.
1961년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은"유병언씨와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의 영향으로 '죄 사함을 깨달은" 권신찬씨(1951년에 총신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1962년에 경북노회로부터 이단으로 판명되어 면직된 사람)에 의해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이 권신찬은 1923년 1월 13일 경북 영덕군 병곡면 원항리에서 4남매 중 둘째로 출생했고, 1937년 영해 보통학교를 나와 1940년 일본 통신중학교 과정을 중퇴하고, 1951년 7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졸업. 1951년 11월30일 목사 안수를 받고, 1962년 12월 21일 경북노회로부터 이단으로 목사 면직 처분된 사람이다. 1962년 1년간 대구 장로회신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기도 했다.
권신찬과 함께 구원파의 숨은 실권자로써 좌지우지하는 실질적인 인물은 권신찬의 사위 유병언(세모사장)이다.
1962년 12월 30일 독립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66년 2월 인천에 있던 복음주의방송국(현 극동방송) 전도과장(방송 목사)으로 부임해서 ‘은혜의 아침’을 담당했는데,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과 시인”에 의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청취자들을 위한 하기수련회를 통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처음에는 어떤 특정단체의 명칭을 갖지 않고 다만 극동방송국 xx선교회라는 간판으로 출발했다가 청취자들 중에 수천 명의 사상전환자들이 생기자 이들을 중심으로 1969년부터 1982년까지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모임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1981년 12월 6일 교계신문인 교회연합신보, 한국복음신보, 크리스챤신문에 5단 광고를 통해 기독교복음침례회’로 창립했음을 알렸다.
“복음을 깨달았다”는 경험을 근거로 기존교회의 새벽기도, 예배형식, 주일성수, 십일조 및 헌금생활, 장로와 집사 같은 교회의 직분을 비난하면서 율법과 죄책감과 종교의식에서 해방 받을 것을 주장하다가 1974년 2월 초교파적으로 연대하여 방송국 점령을 시도했으며, 그 후로 계속 세력을 확대했다.
그래서 극동방송은 1974년 구원파측 직원 11명을 해고했다.
이들은 "구원받은 교인들은 한데 모여 생활해야 한다" "떨어져 있으면 휴거하지 못한다" "우리 생전에 이 세상은 끝나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 완성되고 있다"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면 인(문신)을 새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생활용품을 구할 수가 없게 되는 날이 온다. 666인을 받게 되면 휴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게 땅을 산다. 공장을 짓는다. 삼우회사를 도와야 한다"고 반복 설교해 남의 돈까지 차용해 바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2.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 권신찬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 (주)세모(세모 스쿠알렌, 한강 세모 유람선, 인천 백령도간 정기 여객선 데모크라시호)등 사업을 하고 있으며, 본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의 서울 교회로서 통상 삼각지 교회로 불린다. 이들이 대전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 사건 후에 아래 두 계열이 분리되어 나온 것이다.
2) 이요한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본명이 이복칠로 목포출신으로 1962년에 '중생을 경험했다‘며, 권씨에게 안수를 받았다. 유병언이 교회 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 교회와 기업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비난 성명을 내고 '복음 수호파'로 분리되었다.
3) 박옥수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중학교 3년 중퇴생이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1962년 10월 7일 '거듭난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죄 사함과 거듭남 의 비밀>을 주제로 전국순회집회를 하고 있는데, 현재는 '대한예수교침례회'란 간판을 걸고 대전 한밭중앙교회가 본거지이다. 전국에 100여 개의 지부를 두고 '기쁜 소식'이란 월간지와 여러 종류의 단행본('죄사함 거듭남의 비밀'등)을 출판했다.
3. 교리비판-구원파라는 명칭대로 이들의 이단성은 구원관에 집중되어 있다.
(1) 성경을 교묘히 왜곡시킨 구원관.
①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해서 10가지 질문을 가지고 3단계 방법으로 접근한다.
기존 교인들을 만나면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완전히 중생 했습니까?, 지금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등의 질문을 던져서 구원의 확신에 혼란을 가져오게 한 다음,
2단계로 기존교회의 약점을 들어서(예: 신자들이 힘들게 생각되는 새벽기도, 십일조, 예배당건축-최근 자신들의 예배당도 전주에 수십억원을 들여서 건축했다, 직분제도 등)기성교회를 불신케 하고,
3단계로 종말에 관한 그릇된 교리를 가지고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여 비윤리적인 공포심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킨 다음,
구원파의 교리대로 양심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 율법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 종교로부터의 해방, 임박한 종말의 때로부터 해방을 맛보게 한다.
기존 교회의 예배, 십일조, 장로. 집사제도, 주일성수 등을 모두 율법과 종교라고 규정해서 거기서 해방 받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결국 구원파는 그들이 경험했다는 "깨달음의 교리"와 기성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만적인 것들을 부각시키고,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 특별히 이스라엘과 중동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② 복음이 깨달아지면 인간의 영 즉, 양심에 해방과 자유가 온다고 가르치는데, 자기들과 똑같은 회심경험을 따라, 똑같은 깨달음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구원받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깨닫고 거듭난 시각-구원받은 시각, 즉 영적 생일을 기억해야 구원받은 증거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비판> 그러나 육적인 생일도 어릴 때는 모르다가 나중에 ‘아, 내가 태어난 존재로구나!’라고 알게 된다.
구원도 자신이 미쳐 모를 수가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깨달음은 믿음에서 오는 것으로 깨달음 자체가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구원파가 가장 복음 전하기 어려운 대상이 어린애들이다. 복음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서 깨달아야만 하기에 어린애들은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실과 구원의 사실을 인지(認知)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사실과 인식의 차이)
깨달아야 구원이란 주장은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다. 누구든지 예수의 보혈을 믿는 순간 즉시 구원받고 의롭게 된다(요 1:12). 구원은 인간의 행위(=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씨는 자기 경험으로 말하기를, 자기 형편을 바라보면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었기에 그 속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매일 죄를 짓고도 추하고 더러운 자신의 형편은 허상이고 내 죄가 깨끗이 씻어져서 내가 깨끗한 것이 믿음의 실상이라는 것이다.(마치 불교 같다)
구원이란 마음이 죄로 인한 가책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참된 구원이 임하면 죄(육신의 정욕이나, 음란한 생각들)과 싸우던 전쟁도 끝난다는 것이다. 참으로 죄에서 해방을 받게 되며 참 쉼을 주시기 때문에 날듯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비판> 박씨의 가르침은 가난한 실업자가 자신은 돈 많고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심으면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과 비슷한 것이다.
매일 죄 짓고 추하고 더러운 상태의 인간에게 '나는 깨끗해, 나는 거룩해, 나는 온전케 됐어' 하고 마음의 생각을 바꾸고 방향을 바꾸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인데, 이것이 믿음의 실상이며, 죄를 짓고 추하고 더러운 자신의 형편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마치 신라의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중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뒤에 <모든 분별은 마음에서 일어나며 사람의 마음은 모든 분별을 넘어서 자유로운 경지에 들어간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불교적인 거다.
•그러나 성도의 믿음과 행위의 기준은 자기 신념이나 깨달음, 마음의 경험이 아니라 말씀이어야 한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거룩해졌다"고 선언(히10:10)하는 반면, "거룩해지라"고도 권고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살전4:3,7). 예수를 믿으면 그는 분명히 거룩해졌고(히10:10) 하늘에 앉혀졌고(엡2:6)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아 죄와 분리되지만, 그것은 영적인 신분이 그렇게 된 것이지 우리 상태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성도들은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품행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권면한다.(엡5:8-14)
거룩은 두렵고 떨리는 순종과 말씀과 기도로만 이루어진다(딤전4:5, 빌2:12,13)
우리 신분은 의인인 반면, 우리의 실존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사는 죄인이다.
그것은 몸의 구속을 얻기까지 계속될 갈등이다. 그러기에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를 얻었음과 동시에 죄의 능력으로부터도 구원을 얻기 위해 죄를 자백하고 죄와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요1:9, 롬6장)
"그 육신은 멸망케 하여도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즉 구원받고 나서도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육신의 더러운 행실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 안에 들어와 사시는 성령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그 귀한 구원을 욕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구원받았고(죄의 형벌로부터, 엡2:8), 현재 구원받으며(죄의 능력으로부터, 롬6:11-19), 미래에 구원받을 것이라고(죄의 실존으로부터, 롬8:23) 말하는 것이다.
③ 죄 사함을 받았으니 다시 회개할 필요 없고, 영혼이 거듭났으니 육체의 죄는 영혼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거듭난 나(참나)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그래서 해방감을 맛보게 하고, “복음시대에는 율법이 필요 없다, 육은 더럽고 영은 선하다, 성도는 은혜로 보호되기 때문에 육적으로 어떻게 살든 구원에는 영향이 없다. 만약 죄를 회개하면 그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율법에 매인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죄 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는 거다. 죄와 범죄, 회개와 자백을 구분해서 반복적 회개는 부인하고 삶에서 나타나는 범죄는 일일이 고백해서 용서 구할 필요가 없으며 죄를 인정(自白)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죄가 용서됐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사했으므로 회개를 계속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이므로 구원받지 못한 지옥 자식이라 한다.
그래서 주기도문도 외우지 않는다(‘죄를 사해 주옵시고’ 라는 부분 때문에 외우지 않는데, 우리 죄를 사해 주셨다는 내용으로 바꾸어서 외우기도 한다) 또 죄인이냐 의인이냐 를 물어서 죄인이라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지옥에 간다고 한다.
◣<비판> 얼핏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고, 회개의 고통이 없으며, 확신을 주기에 매력적이다.
신앙생활이 잘 안될 때 이 말을 듣게 되면 그 논리와 확신에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초대교회의 니골라당과 영지주의 이단이 새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성화 되어 간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완전히 성화되지 못했기에 죄악과 허물과 실수 가운데서 살게 된다. 참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도 자신의 죄인 됨을 (딤전1:13)에는 과거 시제로 고백했다가 (15절)에는 현재 시제로 고백하면서 아예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바울이 죄인의 괴수면 어느 누가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구원파는 (15절) 원문이 번역에 잘못되었다고(‘죄인의 괴수’가 과거형이라고 가르치면서 죄인이라 하면 지옥 간다고 한다) 그러나 한글성경이 원문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또 성화가 배제된 구원만 강조하면서 성경을 억지해석하고, 구원을 위한 단 일회적 회개(히6:1이하)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별치 못한다.(시51편,삼하24:10, 요13:8-10,요일1:8-10)
•또 죄에 대한 통회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결국 회개하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 본성을 합리화하며 자유롭게 죄 짓고 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④ 안수복음.
박씨는 (레4:29)에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죄가 넘어가서 하나님께 열납되고 속죄가 되는 것처럼(레16:21), 죄를 예수께 넘기기 위해서는 예수의 머리에 안수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3:13-17) 세례 요한이 안수할 때(=단지 세례를 주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께 전가되었고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모든 죄가 사해졌다 의미라고 가르친다.
◣<비판> 그러나 이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예수님은 안수 받은 적이 없고 다만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뿐이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셨을 때 우리 죄가 전가되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죄가 되시고 저주와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 대신 죄가 되셔서 내 죄를 담당하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내 모든 죄를 예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이다(롬 4:5,6).
◣(요일1:9) 성도는 날마다 죄를 자백하고, 양심을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하며, 말씀의 물로 씻어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박씨의 간증과 교리를 따라가다 보면 죄를 지어도 자백할 죄가 없게 된다. 세례 요한이 안수할 때 그 죄도 넘어가서 이미 거룩하고 깨끗하고 온전케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여 용서를 구하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정죄해 버린다. 그러나 요일 1장은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 거짓말쟁이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요, 진리가 그 속에 없다고 한다.
당시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죄 없다고 하기보다는 죄를 자백해야 하나님과 사귐이 가능하다.
◣(시51편)에서 다윗은 죄 지은 후에 자백했는데, 이것도 박씨는 다윗이 자백한 것은 근본적인 악인 자신을 고백한 것 뿐이라 한다. 그러나 다윗은 구체적인 범죄를 인정하고 자백한다.
⑤ 이미 구원받았으니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는 주장.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 대신 할 일을 다 하셨으니 내가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것은 내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 보려는 교만한 행동이다. 제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정죄되지 않는데 왜 그리 힘들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가? 라고 한다.
◣<비판>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없다. 구원은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다. 구원은 예수께서 완성하셨지만, 구원받은 자가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고, 져야 할 십자가가 존재한다. 또한 선교를 위한 고난과 희생, 섬김을 피할 수가 없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범해도 정죄되지 않으므로 애써 십자가를 지는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유혹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엄히 경고하고 있다(빌2:12, 갈5:13). 구원파의 주장은 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육신의 편안함을 따라 살려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다.
(2) 비성경적인 교회, 예배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에 어떤 형식을 갖추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교인들끼리 서로 교제하는 것 자체가 예배라고 주장한다.
기도에 대해서도 (말3:16)을 문맥과 상관없이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일을 의논하는 성도의 교제는 참으로 중요한 기도’라고 한다.
때문에 개인적인 기도는 필요 없고 구원파 교인들끼리 사업과 교회 일을 논하는 교제가 기도를 대신한다는 해석이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 중 기도의 모습(대표기도, 합심기도, 중보기도 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판> •구원은 믿음으로 값없이 얻는 은총이므로 구원 얻는 조건으로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 되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 교회의 제도가 필요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구원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의 질서를 지켜야 하며, 교회의 제도와 법을 더욱 존중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행2:46). 교회는 신앙성장과 교제를 위한 것이다.
주일 성수, 새벽 기도, 십일조 등은 축복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땅한 생활이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예수님이 주신 안식을 누리는 날이다. 십일조는 내 삶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고, 새벽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으로서 가장 좋은 시간이다. 이 시간이 아니고 언제 또 따로 기도하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이것들을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더욱 이를 힘써 행해야 한다.
•구원파는 자신들 역시 여러 가지 제도들을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그 결과 종파 싸움으로 여러 파벌이 생겼고, 서로 자신의 단체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독단을 내세우며,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고 다른 곳에는 없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신앙생활의 책임을 교회에 전가시킴으로써 사실상 개인적 성화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다.
“개인은 죄사함 받은 경험이 있을 뿐 성령이 계신 곳은 교회다”(유병언),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 예정은 전적으로 (구원파) 교회를 목표로 한 것이지 개인의 구원문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권신찬)고 주장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빌2:12)는 의미에서의 성장과정은 “성도의 교제(교회)”에서 하는 것이지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세대주의적인 종말관.
역사적 사건들 즉, 1948년5월14일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로 출발했고, 1967년 6일간의 중동전쟁으로 예루살렘을 회복한 것과 세계정부의 출현 가능성(EC=유럽연합)과 적그리스도 666의 출현 징조 등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재림이 1980년대에 있을 것이라고 했으며, 이런 비밀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으려고 철저히 세뇌되어진 사람에게만 재림의 시기를 가르쳐 왔다.
그러다가 1989년 32명의 집단적 생명을 앗아간 '오대양사건'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종말론은 절박한 말세심판에 대한 위기의식을 신도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치는 다른 이단들과 유사하다.
•그들은 설교 때 마다 이스라엘의 회복 및 적그리스도 666출현, E.C.유럽 연합 등을 수시로 언급하면서 구약 에스겔, 예레미야, 아모스, 스가랴, 다니엘, 그리고 복음서의 마지막 때에 관한 부분(마24장), 데살로니가 전.후서, 계시록 등을 인용하면서 재림이 임박했음을 강조하고, 7년 대 환란이 있기 전 땅에 있는 몸(구원파 소속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지칭함)만 들림 받는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만이 구원의 유일한 대상이고, 또 재림 때 휴거될 수 있는 집단이기에 구별하여 살아야 된다는 미명하에 기업을 사칭한 오대양사건, 속세를 떠난 집단농장 등을 운영하면서 기업의 간부들 내지는 직원들(예:(주)삼우, 세모, 오대양, 경기도 안성의 한스농장 등)은 어떻게 하던 집단적 생활을 통해 세상과 격리시켜 살아왔던 것이다.
•또 성경을 신문(新聞)이라 부르고, 일간지와 잡지를 구문(舊聞)이라 부르면서 성경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의미에서는 신문을 비롯한 세속사를 성경보다 우위에 놓고 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독립이후의 중동사태나 세계적인 위기에 대해서 신문이나 잡지를 스크랩북으로 만들어서 ‘임박한 대환란’을 강조하면서 공포심을 조성하고 전도용지로 사용한다.
3. 결론
믿음의 한 가지 기능인 깨달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이다.
또 구원의 확신이 곧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고,
또 칭의 구원과 성화 구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일회적인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자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명백한 이단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구원파에 빠지는가?
처음 믿을 때 받은 은혜와 평안과 기쁨이 사라지고, 죄의식이 찾아올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면서 생긴다.
특히 반복해서 죄를 짓고, 회개해도 현재 상태가 별로 달라지지 않을 때, ‘내가 구원받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게 되는데, 이때 깨달음의 구원을 들으면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구원은 즉각성과 점진성 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구원의 즉각성(일회성, 영원성)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고(칭의), 요3장이 말하는 거듭남이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누구나 이런 은혜가 있고, 체험이 있다.
반면 구원의 점진성은 우리가 성화되는 것이다(빌1:19, 빌2:12). 그렇기에 완전 성화가 될 때까지 이 땅에서는 죄악과 허물을 자백하면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겪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해서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연약해서 죄에 넘어질 때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하고, 이렇게 연약하고 허물진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께 감사하면 된다. 이때 은혜의 세계를 깊이 체험케 되며 구원을 더욱 확신케 된다. 그리고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자 죄를 멀리하며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