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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도시 춘천에서 ‘강의 연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영춘 시인
인터뷰: 김정수(시인, 사이펀 편집위원)|사진: 이성수(시인)
계간 《사이펀》 ‘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는 강원도 춘천에 사는 이영춘 시인을 찾았다.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종점에서』 이후 『시시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 놓고』, 『네 살던 날의 흔적』, 『점 하나로 남기고 싶다』,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 『난 자꾸 눈물이 난다』, 『슬픈 도시락』, 『꽃 속에는 신의 속눈썹이 보인다』, 『시간의 옆구리』, 『봉평 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 『따뜻한 편지』, 『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를 냈으며, 윤동주문학상·고산문학대상·인산문학상·유심작품상특별상·난설헌문학상·한국여성문학상·천상병귀천문학대상·김삿갓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원주여고 교장과 한림성심대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림대 커뮤니티교육원 시창작반 강의를 맡고 있다.
김정수 제가 좋아하는 춘천에서 선생님을 직접 뵈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춘천에는 지인이 많이 살고 있어 더 정감이 가는 곳이지요. 저는 ‘춘천’ 하면 안개가 먼저 떠오릅니다. 선생님에게 춘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영춘 춘천은 제 문학의 자양분 같은 곳입니다.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강원일보에 취직하면서 춘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50여 년을 춘천에서 살다 보니 골목마다, 거리마다 정이 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곳은 강江이 많은데 그 강이 연인이 되었습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나 슬플 때, 운동할 때도 강물을 따라 걷습니다.
김정수 ‘강의 연인’이라니요, 참 멋진 표현입니다. 그 강을 대상으로 쓴 시도 많은 것으로 압니다.
이영춘 그래서 제 시에는 유독 강을 제재로 한 작품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저 강, 붓다의 침묵」, 「저문 강, 하늘 문」, 「미스타 페오」, 「다시 미스타 페오에 와서」, 「길을 묻다 1·2」, 「어느 날 강가에서」, 「강물을 보면서」, 「강 하구에 잠든 것들을 위하여」, 「침묵의 도시, 침묵의 강」 등이 있지요.
김정수 열다섯 번째 시집 『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천년의시작, 2020) ‘시인의 말’에서 ‘오늘도 나는 강가에서 길을 묻는다’고 했습니다. 여는 시가 「때로는 물길도 운다」, 그다음 시가 「길을 묻다 2」이고요. 전기철 시인은 ‘이영춘 시인이 절망을 극복하는 방식은 길이다. 그 길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강’이라도 했습니다.
이영춘 시간이 날 때마다 강가를 걸으며 시를 구상하고 사색에 잠깁니다. 강이 말을 걸어오면 시가 대답하듯 찾아오지요.
저 강물에도 욕심이란 게 있을까
무엇이든 버리고서야 가벼워지는 몸,
가벼워져 흐를 수 있는 몸,
나는 하늘처럼 호수를 다 마시고도 늘 배가 고프다
셀로판지처럼 반짝이는 물결무늬 끝자락에 눈을 맞추고
오래오래 강가를 서성거린다
어쩌면 저 물결무늬는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난 이의 눈물이거나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어느 별의 반쪽이거나
오랜 침묵이 눈 뜨고 일어서는 발자국 소리 같은 것,
나는 오늘도 싯다르타처럼 강가에 앉아
돌아올 수 없는 그 누군가를, 그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물결무늬 결 따라 강 하류에 이르면
누대에 세우지 못한 집 한 채 세우듯
조약돌 울음소리 가득 차 흐르는 강변에서
나는 싯다르타처럼 혼자 가는 법을 배운다
바라문을 뛰쳐나온 그의 황량한 발자국에 꾹꾹 찍힌
화인 같은,
세상 그림자를 지우며 가는 법을 배운다
- 「어느 날 강가에서」 전문
김정수 열세 번째 시집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시와표현, 2015)에 수록된 「춘천」이라는 시에서는 춘천의 명물 닭갈비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저도 춘천에 올 때마다 닭갈비를 즐겨 먹습니다.
이영춘 춘천사람치고 닭갈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요. 하루 일을 끝내고 닭갈비에 술 한잔하면 피로가 풀리지요. 닭갈비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삶의 일부입니다.
김정수 오늘도 춘천닭갈비 좀 먹고 가야겠습니다(웃음). 선생님은 춘천·강릉 등 강원도 일대에서 오래 교직 생활을 하셨습니다. ‘교사’란 직업이 선생님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영춘 맹자의 군자삼락 중에 이런 덕목이 있지요. 천하에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두 번째 낙이다得 天下 英才 而敎育之 二樂也. 가르치는 일은 곧 제자도 길러내는 일이지만 자신도 배우는 일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문득 생각해 봤어요. 내가 다시 태어나서 직업을 갖는다면 어떤 일을 할까? 역시 ‘교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자신이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 훌륭한 인물이 된 제자들을 만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저를 찾아 줄 때면 더욱 뿌듯합니다. 엊그제도 사회 초년생일 때 가르친 제자들이 자리를 마련하여 초대해 주었어요. 그럴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김정수 성공한 제자들이 찾아오면 뿌듯할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제자’라고 하면 차별인가요(웃음). 그래도 그런 제자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이영춘 기억에 남는 일이 하도 많아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지네요. 모 고등학교에 재직할 때 담임을 맡았던 반의 반장 녀석이 어떤 여학생에게 빠져서 공부는 물론 방황을 많이 했어요. 반장 역할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요, 어느 날은 수업 시간도 빼먹을 정도였어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그런 애증으로 몇 대 맞겠느냐고 묻고는 그가 말한 만큼 열 대 정도를 회초리로 때렸습니다.
김정수 저도 학생 때 맞기는 했는데, 그 당시는 체벌이 좀 심했잖아요. 지금 같으면 당장 교단에서 쫓겨나고 고소를 당하겠지요.
이영춘 요즘 교권은 말이 아닙니다. 그날 이 맞은 학생이 홧김에 어디 다른 곳으로 튈까 봐 십 리 길이나 되는 학생의 집에까지 데리고 가서 이실직고했지요. 때렸다고요. 그랬더니 그의 아버지 말씀이, 참 잘하셨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한숨 놓았지요. 그 후 그 학생은 어떻게 마음을 잡았는지 마음을 잡고 공부해서 대학에도 갔어요.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후에 찾아와서는 결혼한다고 주례를 서달라는 거예요. 1980년대 초 당시만 해도 여자가 주례를 서는 예는 없었거든요.
김정수 거의 남자만 주례를 서던 시절이었잖아요.
이영춘 맞아요.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고 한다.’, ‘당장 우리 남편도 허락 안 할 거고 너희 부모님도 허락 안 하실 거다’라며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더군요. 그때 이미 그 제자는 나의 세대보다 진일보한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나이 40세도 안 되었던 1984년 10월에 주례를 섰던 일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이자 보람입니다. 제자가 제2의 인생길을 가는데 그 새 길을 어떻게 가야 한다고 당부하는 마음으로 주례사를 하니까 떨리지도 않고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김정수 저는 아직도 주례를 못 서 봤습니다. 인생을 잘못 산 것 같습니다(웃음). 선생님은 누군가에겐 좋은 선생님이셨는데, 공부를 하기 위해 평창군 봉평에서 원주로,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한 것으로 압니다.
이영춘 이사를 한 것은 아니고 저만 원주로, 서울로 유학遊學을 한 것이지요. 할아버지가 완고해 여자는 공부시킬 엄두도 안 내셨지요. 다행히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기에 봉평중학교 원서를 사와 중학교만 졸업하라고 하셨어요. 중학교를 마칠 때가 되니까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참에 친한 선배뻘 되는 친구가 원주에 시험을 치러 가자고 하더군요. 집에서 고교진학을 반대하니까 몰래 쌀 3되를 훔쳐서 감자구덩이에 숨겨놓았다가 그걸 들고 선배를 따라 선배의 언니가 살고 있는 원주로 시험을 치러 갔던 것이지요. 쌀 3되의 의미는 하루 한 되씩 3일간이면 되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얼마나 철이 없고 어리석었는지 그 친구의 언니께 평생 미안하고 죄스러웠습니다. 제 문학은 쌀 3되로부터 출발했습니다(웃음).
김정수 고교진학을 위해 가출을 감행한 거네요.
이영춘 그런 셈이지요. 3일 후 합격증을 들고 집에 돌아와 사랑방에 몰래 숨어 있는데, 퇴근한 아버지가 나오라고 한다면서 어머니가 불렀습니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는 ‘너 고등학교만 가르쳐 주면 네 동생 하나는 맡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당연히 그러겠다고 하여 고교에 진학하게 되었답니다.
김정수 그러면 대학은 또 어찌 가셨어요. 아버님이 허락 안 해주셨을 것 같은데요. 사회 분위기상 그 당시 여성으로서 대학까지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던 건가요.
이영춘 아버지가 원주에 집을 하나 장만하려고 마련해 놓은 돈을 훔쳐 들고 서울로 튀었습니다. 그것도 전기 대학에는 떨어지고 당시는 후기 대학이었던 경희대학으로 진학하게 된 것입니다.
김정수 선생님 되게 용감하시네요.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영춘 대학 진학 후 가정교사도 하고, 장학금도 받으면서 겨우 졸업했습니다.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대학까지 졸업이 어렵지 않냐는 말, 맞습니다. 1980년대 초까지도 강원도 봉평에는 대학을 나온 여성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니 다소 제가 괴짜인 것 같기도 하고 배짱이 두둑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김정수 강원도 평창하고도 봉평 출신이신데, 평창 출신 시인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권혁소 시인의 고향이 평창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영춘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몇 세기에 걸쳐 ‘시인’이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 한국 문단은 ‘시인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지요. 평창에도 ‘평창문학회’ 회원들을 비롯해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장을 역임하시고 평창군 대화면에 둥지를 트신 김시철 선생님이 이효석의 후예들을 길러낸다는 정신으로 세운 ‘하서문학회’에서 많은 문인을 배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중앙문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인은 권혁소·김남권을 비롯하여 《유심》으로 등단한 김남극 시인, 《심상》으로 등단한 김창균 시인이 있습니다. 각 지방 신문사 신춘문예를 4~5곳 휩쓴 평창 출신 이우식 시인은 지금 제천에 살고 있고요. 그리고 중앙일보에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소설로 당선된 김도연 소설가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정수 아, 김도연 작가도 평창 출신이군요. 2017년도에 춘천 시내 중학교를 순회하며 ‘시·소설의 창작과정 이해’를 주제로 찾아가는 문학수업을 같이했지요. 끝나고 같이 탁구도 쳤고요. ‘봉평’ 하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문학에 영향이 있을까요.
이영춘 네. 이효석 작가는 저의 증조할아버지 이효원과 사촌 간이십니다. 그러니까 저에게도 이효석은 할아버지가 되시죠. 봉평중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진부에 사시던 이효석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며칠씩 묵어가곤 하셨습니다. 가을이면 고추와 배추를 다듬어 주시던 모습이 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뵈었던 기억입니다.
김정수 이효석 작가와 친척 간이군요. 부러운 가계입니다.
이영춘 이효석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적인 영향은 못 받았지만, 은근히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그분의 예술적인 피가 제 몸에도 은근히 흐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제 문학의 길은 객지 생활에서의 외로움과 열등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촌에서만 살다가 도시에서 난생처음으로 맞닥뜨린 세상은 나를 주눅 들게 했습니다. 도시 아이들에 비해 공부도 떨어지고 혼자 자취하면서 사니까 외로워 고1 때는 엄청 많이 울었습니다. 교사校舍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수落水를 보면서도 울고 어스름 저녁때 혼자 밥을 먹을 때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일기장에다가 무엇인가를 끼적이었던 것이 글쓰기의 단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정수 이효석 작가의 피를 물려받고, 고등학교 때의 외로움과 열등감 그리고 당시 쓴 일기가 경희대 국문학과 입학이나 ‘시인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을까요.
이영춘 고등학교 때 제일 많이 읽었던 작품이 김소월과 조병화 선생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 당시 소월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저는 조병화 선생님의 「사랑이 가기 전에」, 「소라」, 「하루만의 위안」 등이 그렇게 감정을 녹일 수가 없었습니다. 전기 대학에 떨어지고 당시엔 후기 대학이었던 경희대를 택한 것은 순전히 조병화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문학을 하려면 경희대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수진이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정말 기라성 같은 교수님들이 다 모여 계셨어요. 황순원 교수님, 조병화 교수님, 김광섭 교수님, 주요섭 교수님, 서정범 교수님, 김진수 교수님(희곡) 등이 계셨습니다. 게다가 외래교수로 양주동, 유창돈(국어학), 김동리 교수님 등 유명한 분들을 ‘문화 세계의 창조’라는 기치를 내세운 조영식 총장님이 다 모셔 왔기 때문에 정말로 좋았습니다. 문단에 나오니까 전기 대학을 나온 모 여성 시인이 ‘경희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경희대 출신 문인들이 문명을 떨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정수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조병화 선생님은 퇴임하셨고, 서정범·황순원 교수님은 계셨지요. 황순원 교수님께는 한 학기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다닐 때도 경희대 국문학과에는 문예 장학생으로 들어와 등단한 시인과 작가가 많지요.
이영춘 제가 다닐 때는 문예 장학생 선발제도는 없었어요, 그냥 장학생 선발 시험이 있었어요. 3학년 말경, 학점이 A학점 이상인 학생들이 모여 장학생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휴학계를 내고 낙향했지요. 그리고 그해 여름 오대산 기슭에 들어갔습니다. 소설을 써 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쓴 원고지 300매 정도가 지금도 벽장에 있습니다만 아주 무모한 도전이었지요. 제목은 「광녀狂女」였어요. 체험도 상상력도 아니고 막연히 어디선가 읽었던 아류로 쓴 것이지요. 이것을 어디에 투고했다가 떨어지면 신상옥 감독을 찾아가 영화를 만들자! 라는 치기였어요(웃음).
김정수 시가 아니라 소설을요. 하여간 선생님 배포만큼은 대단하시네요.
이영춘 그 이듬해, 그러니까 1962년 2월 원주에서 개인 시화전을 열었습니다. 찬조 작품으로 조병화 선생님은 「지금 너와 내가 살고 있는」이라는 작품을 주셨고, 윤영춘 교수님은 특별히 「출발-시화전에 즈음하여」란 시를 써서 주셨습니다. 그 작품들은 지금도 교수님들을 그리워하듯 책장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그때 김지하 시인이 어떻게 알고 오셔서 방명록에 ‘祝賀! 거듭 祝賀! 김지하’라고 남겨 놓으신 글씨는 정말 뜻밖에 횡재를 만난 듯 기뻤습니다.
김정수 1962년이면 등단 전인데 시화전을 열었다고요. 파격적인데요. 교수님들이 작품을 찬조하시고, 그 작품들을 아직도 간직하시고….
이영춘 또 하나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조병화 선생님이 1978년 나의 첫 시집 『종점에서』의 발문을 써 주셨어요. 그 원고를 받으러 학교로 찾아갔을 때 축하한다면서 ‘日月順天’이라는 휘호를 써 주셨어요. 선생님의 이 글씨는 제가 게으름으로 나태해질 때나 혹은 인생의 고뇌와 좌절로 헤매고 있을 때면 뭔가를 채근하시는 듯한 얼굴로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日月順天’으로 힘을 얻곤 합니다.
김정수 존경할 만한 스승이시네요. 경희대 이야기를 한 김에… 이번에 경인문인회 회장을 맡으셨지요.
이영춘 네. 경희문인회장으로 추대되어 맡기는 했습니다.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어깨가 무겁습니다. 경희문인회가 결성된 것은 1979년이었습니다. 초대 회장이셨던 수필가 서정범 교수님을 필두로 신봉승 극작가, 전상국·조해일·김용성·조세희 소설가, 박이도·이향아·조태일·이성부·박남철·안재찬(류시화) 시인 등 7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해 그해 5월에 첫 《경희 문집》을 발간하면서 출발했습니다. 타 대학에는 한동안 대학 이름을 딴 문학회란 단체가 없었던 시대라 ‘경희문인회’가 단연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훌륭한 작가가 많이 배출되어 뛰어난 작품 활동을 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수 회원이 얼마나 되나요.
이영춘 현재(2022년 말) 회원은 약 500명으로 한국 문단사에 경희의 이름으로 문명을 떨치고 있는 작가를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얼마 전 타계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소설가는 경희문인을 상징하는 대표적 작가지요. 근래에도 2015년 한 해에 중앙지 신춘문예에서 6명을 배출해 한 신문에 ‘신춘문예 휩쓴 경희문인 총 6명’이라는 타이틀로 기사화된 바도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멜로 영화」와 「홈커밍데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으로 당선된 이진우와 시조부문의 「백련의 기억」으로 당선된 유진수도 경희대 출신입니다. 이렇게 경희대 출신 문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좋은 작품 쓰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문학단체의 회장은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어떤 촉매제 역할을 해 드려야 하는데 제 역량이 못 미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어떻든 예전과 같이 경희문학상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신경을 쓰려고 합니다.
김정수 등단으로 이야기를 옮겨보겠습니다.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는데, 그 당시에는 《월간문학》·《현대문학》·《문학사상》·《심상》·《시문학》·《현대시학》 등이 있었지요. 문학잡지가 많지 않은 편입니다. 신춘문예도 도전하셨는지요. 등단에 대해 들려주세요.
이영춘 신춘문예에는 한 번도 도전을 못 했습니다. 재학시절에 치열하게 작품 활동으로 도전하지 못했던 것을 평생 후회합니다. 졸업 후에서야 겨우 눈을 돌려 여기저기에 투고했지요. 《현대문학》과 《월간문학》에 몇 번 투고했었고요. 《현대문학》은 그 당시는 3회 추천이라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어요. 그리고 1973년에 창간한 《심상》에 주로 투고했어요. 어느 해인가 《심상》에서는 박목월 선생님이 직접 엽서편지를 보내주셨어요. ‘관념어를 없애라’는 말씀이 오래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월간문학》으로부터 당선 통지문을 먼저 받게 되었습니다. 심사위원은 김규동 선생님과 이동주 선생님이셨습니다.
2년쯤 지났을 때 춘천에서 열린 모 문학 행사에서 전봉건 선생님을 뵈었는데 《현대시학》으로 재등단하지 않겠느냐고 하시어 그날 함께 오셨던 김규동 선생님과 상의를 했습니다. 김규동 선생님은 《월간문학》은 한국문협 기관지이기도 하지만 또다시 하게 되면 등단 연도가 뒤처지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그 당시는 문예지가 다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해도 대우를 받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김정수 등단 2년 후인 1978년 제1집 『종점에서』(월간문학)를 시작으로 2021년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실천문학)까지 16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2~3년마다 1권씩 낸 셈이니, 다작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영춘 네. 어쩌다가 그렇게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자비로 냈는데, 예전에 문예진흥원의 지원금을 받아 내기도 했습니다. 근간에는 각 시·도 지자체 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문이 좀 더 넓어진 관계로 예전보다 책 내기가 수월해졌습니다. 그러나 지원을 받는 것은 이차적 문제이고 우선 작품이 좋아야 하므로 때로 작품이 안 써질 때는 기도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는 가상 아래 마지막 유언, 유서라고 생각하면서 몰입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좋은 작품을 쓰려고 노력해 보지만 늘 요원하기만 합니다.
김정수 2019년부터는 매년 한 권씩 내고 있습니다. 한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못 읽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시집 4권 정도만 읽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작품의 큰 흐름을 짚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발간 시집을 기준으로 선생님 스스로 문학사를 정리한다면요.
이영춘 글쎄요? 제 작품이지만 참 어렵네요. 초기에는 주로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살아온 여성들의 한恨을 쓰려고 했습니다. 1978년에 나온 『종점에서』가 대표적일 것 같습니다. 2시집 『시시포스의 돌』과 3시집 『귀 하나만 열어 놓고』 등 초기 시집에서 주로 그런 주제를 다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가 부르시던 <정선 아리랑>이 생각납니다. ‘석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도 김도 잘 난다마는 이 내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김도 안 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귀청을 때립니다.
그리고 굳이 구분을 짓는다면 제2기에서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의 아픔과 슬픔 같은 애환을 주로 다루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집으로는 4집 『네 살던 날의 흔적』」과 시선집 『들풀』 그리고 제8집 『슬픈 도시락』 등이 이에 속할 것 같습니다.
12집 『노자의 무덤을 가다』와 13집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 등은 철학적 사유가 가미된 시집이란 평을 받기도 합니다. 장자莊子와 노자의 도덕경, 반야심경, 우파니샤드 등에서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04년 이후, 인도에 4번이나 갔는데 인도의 남부 첸나이에 머물면서 썼던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 등이 종교적 사유가 가미된 시집이 아닐까 구분해 봅니다.
그 이후로의 작품을 뭉뚱그려 말씀드린다면 제 시는 서경시나 사물시라기보다 내면 의식의 어떤 흐름을 쓴 시가 주류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존재론적인 고뇌와 갈등, 삶과 죽음에 대한 상상 등 다양하게 주술呪術되고 있습니다. 시의 경지에 도달하기가 어렵듯이 저 자신의 시가 가는 길도 어렵기만 합니다.
김정수 <나의 시, 이렇게 쓴다>는 글에서 ‘나의 시 쓰기도 어머니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시, 이 시만큼은 다시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요.
이영춘 네. ‘이 세상 모든 길은 어머니로부터 출발한다’라는 산문을 어느 지방신문에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의 젖줄이었듯이 그래서 모국母國과 모국어母國語란 말도 탄생했듯이 글의 소재나 제재를 잡을 때 ‘어머니’와 연결하면 쉽게 시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우리의 목숨 줄(탯줄)이기 때문에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전율이 옵니다. 문하생들을 가르칠 때도 ‘시는 체험이다’라는 릴케의 말처럼 ‘손’이란 제목이 나왔을 때 ‘어머니’를 연상해 보라고 권유합니다. 내 육신부터 모든 삶의 근원은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에 해당하는 제 시로는 낭송가들이 가장 많이 낭송하는 「어머니의 강, 그 눈물」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제1회 인산문학상 수상작이었던 「시간의 저쪽 뒷문」과 「해, 저 붉은 얼굴」도 모두 탯줄에 관한 시입니다. 그 외에 「겨울 굴뚝새」, 「홀로 사는 집」, 「겨울 용달차」, 「홀로 떠가는 달」, 「보편성」,「사직지신」 등이 있습니다. 11집 『봉평 장날』에 실린 작품들이 주로 어머니를 주제로 쓴 시입니다.
올챙이국수를 파는 노점상에 쭈그리고 앉아
후루룩 후루룩 올챙이국수를
자시고 있는 노모를 본다
정지깐* 세간사 뒤로 하고
한 세기를 건너와 앉은
푸른 등걸의 배후,
저문 산 그림자 결 무늬로
국수 올들이 꿈틀꿈틀
노모의 깊은 주름살로 겹치는
허공,
붉은 한 점 허공의 무게가
깊은 허기로 내려앉는
한낮.
- 「봉평 장날」 전문
*부엌의 영동지방 사투리
김정수 그런 성과를 인정받아 상도 많이 받으셨지요.
이영춘 글쎄요. 상을 많이 받은 건가요? 2012년 10월 전남 해남군에서 주는 제12회 고산문학대상을 받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어요. 그해 8월 어느 날 그 상을 운영하는 《열린 시학》 이지엽 교수님에게 ‘축하합니다’라는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축하받을 일 없는데요’ 했지요. 그랬더니 그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큰 상으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척 기뻤습니다. 나중에 보니 조정권 선생님과 허영자 선생님이 최종 심사를 하셨더군요. 예심은 몇 개월을 걸쳐 방민호 교수 등이 하였다고 심사평에 있어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상시집 『봉평 장날』을 누가 추천했는지 지금까지도 몰라 결례를 범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계속 찜찜해 하고 있습니다. 아마 《서정시학」에서 출판했으니까 최동호 교수님이 추천하시지 않았을까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상은 누군가에 의해 추천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탈 때가 가장 기분이 좋더군요.
김정수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는 비극적인 역사 현장을 시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시집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이영춘 2021년 11월에 발간한 시집인데요, 사실은 시 전부가 그런 주제(테마)는 아니고 책 제목이 된 시가 그런 내용의 시입니다. 이 세상을 다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젊은이들을 뭉뚱그려 썼습니다. 어느 해인가 6·25전쟁 때 죽어간 학도병 기사를 읽다가 조시처럼 썼습니다. 책을 내면서 그 이후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젊은이로서 죽어간 모든 청년이 너무 아픈 전율로 다가왔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계모 학대로 매를 맞을 때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그 아이가 얼마나 아플까요. 아프다 못해 자지러지고 말잖아요. 그와 같이 총칼 앞에 죽어간 우리의 젊은이들의 뼈가 너무 아파 내 몸이 마구 아팠어요. 그리고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도 겨울 얼음 바닥(노천)에서 장사하는 서민들의 삶, 그리고 정치인들의 무관심과 싸움질하는 것 등이 용해된 시가 많아요. 현실 비판적 성격이겠죠. 그러면서도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뷔퐁의 말과 같이 나 자신의 내면 의식의 고통을 쓴 시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내 시가 좀 아픈 게 많아서 때로는 독자들에게 미안할 때도 있어요.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따뜻한 햇볕 같은 이미지를 드리지 못해서요.
김정수 지난해 말에 시인 90여 명의 시 감상과 해설집 『시와 함께, 독자와 함께!』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첫 해설서 아닌가요.
이영춘 네. 그 책의 머리말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각 문예지서 청탁받아 쓴 계간 시평과 이곳 춘천에서 발행하는 MS투데이 Weekly 매거진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에 2년 반 동안 연재했던 글에서 선별해 낸 책입니다. 문학인은 물론 일반 독자들도 함께 정서를 공유하기 위하여 계절과 감성에 맞는 시를 주로 찾아서 해설을 썼습니다. 시인들은 물론 시가 게재된 출판사의 판권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서 아예 비매품으로 발간했습니다. 어떤 분은 구입하려 하는데 인터넷에 안 뜬다고 그 책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느냐고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소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 내용은 문예지에 썼던 몇 편을 제외하고는 이 책의 제목과 같이 주지시를 지양하고 독자들이 쉽게 공감, 공명할 수 있는 서정시를 주로 선별해 해설했습니다. 이 기회에 시를 허락해 주신 시인들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김정수 저도 읽으며 공부가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한림대학교 커뮤니티교육원 시창작반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지도에 대한 말씀 좀 들려주세요.
이영춘 현직에 있을 때인 2000년도 1학기부터 나갔는데 현재까지 하고 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생명이 이렇게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수강생들 덕분입니다. 시론 강의는 기본적이고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울러 전국단위의 각종 공모전이나 백일장에 나가 객관적 평가를 받아보라고 권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 결과 2016년에는 경북일보에서 주최하는 ‘경북대전’에서 「고물사古物寺」란 작품으로 1천만 원 고료,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대로 거기는 기성·신인 구분 없이 공모합니다.
그리고 불교신문, 강원일보, 전북도민일보, 경남신문 등 신춘문예 당선과 해마다 전국단위 각종 문예경연대회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아 오곤 합니다. 이렇게 전국단위에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독려하는 것은 결코 상賞에만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각자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아보라는 자극제로서의 지도 방법 중 하나입니다.
김정수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끝으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이영춘 글쎄요? 근래 우리나라는 ‘시인공화국’이라고 합니다. 한글만 알면 누구나 다 시인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시의 정수精髓에 이르려면 그 길은 요원합니다. 요원하기 때문에 시에는 완성이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속에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감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더욱 요원한 경지가 시의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만큼 시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 요원한 경지에 근접하려면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쓰는 길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변변치 못한 시인을 이렇게 먼 길 찾아오셔서 대담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낭만의 도시, 호수의 도시, 춘천에 오셨으니 맘껏 낭만을 마시고 좋은 시상 잉태하고 가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김정수 시인은 춘천에 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춘천 약사동에 있는 전망대 「망대」라는 작품을 썼는지요? 그 작품 참 좋아요, 그 시를 쓴 배경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김정수 제 이야기를 하려니 쑥스럽네요. 춘천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약사동 망대가 개발로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헐리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더군요. 사진으로도 남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 섞여 저도 같이 왔었습니다. 덕분에 시 한 편을 쓰게 되었지요.
이영춘 그랬군요. 그런 시상에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고,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봄의 문턱인 입춘 하루 전, 춘천 공지천은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공지천유원지 산책로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습니다. 이러다가 강물에 봄이 스며들면 안개를 풀어 근사한 풍경을 자아내겠지요. 공지천 산책로와 에티오피아 한국참전기념관 앞 카페 이디오피아집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에는 송애경·반혜지 시인이 함께해주었습니다. 춘천닭갈비를 먹는 저녁에는 유기택·조현정·탁운우 시인이 합류해 남은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습니다.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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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경수 시인님과 이성수 시인님! 춘천 호반에서 함께 하루를 숨 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배재경 주간님! 부산과 춘천, 끝에서 끝 동네에 살고 있는 저를 이렇게 불러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 문예지 [사이펀] 의 비상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좋은 시인을 만나는 것은 모든 독자분들에게 영광입니다. 추천의 상징인 선생님을 담은 <사이펀.이 복을 누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