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는 수신(修身)이다
................이처럼 글씨는 그 사람을 대변한다. 어떤 사람의 글씨는 속스럽고 어떤 사람의 글씨는 야비하고 또 어떤 사람의 글씨는 무식해 보이고 어떤 사람의 글씨는 침착하고 어떤 사람의 글씨는 경솔하고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의 글씨는 그야말로 봄바람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지조와 절개를 갖춰서 우러러 볼수록 좋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글씨를 다스리면 바로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서예는 어떤 예술보다도 수신성(修身性)이 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수신한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중국이나 한국의 고대 서론(書論;서예에 관한 담론)을 보면 서예를 사람과 연결시켜 풀이한 문장을 무척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중국 서예사상 최초로 서예를 하나의 예술로 보기 시작한 견해라는 평을 받고 있는 한나라 때 사람인 채옹(蔡邕)의 서론(書論) 한 구절을 보기로 하자.
서예는 '풀어놓는 것이다. 글을 쓰고자 한다면 우선 그 회포(마음)를 풀어놓음으로써 감정에 맡기고 성품에 의지하여 글씨를 써야 한다. 만약 일에 쫒겨 마음을 풀어 놓을 여유가 없으면 중산의 토끼털로 만든 붓과 같은 좋은 붓으로 글씨를 쓴다 해도 좋은 글씨를 쓸 수 없다. 먼저 조용히 앉아 생각을 고요하게 하여 자신의 뜻을 따라 움직이되 입으로는 말을 하지 않고 숨도 가득 차게 쉬지 않으며 정신을 안정되고 주밀하게 가짐으로써 마치 至尊을 대한 듯이 경건한 자세로 글씨를 쓰면 글씨가 잘 써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장의 요점을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서예는 다름이 아니라, 마음을 풀어 놓고서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이고 두번째는 내면적인 정신은 물론 외적인 자세에 있어서도 호흡마저도 고르게 조절해야 할 정도로 경건한 자세로 써야 하는 게 바로 서예라는 점이다. 이 두가지 요점을 종합하여 보면 서예란 '생각을 고요히 가라 앉히고 몸을 경건히 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과 성품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서 예술의 길로 들어선 서예는 후대에 이르러서는 성정의 표현이자 수양된 인품의 표현이라는 정의를 그대로 유지하며 발전한다. 당나라 때의 문호인 한유(韓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욱(張旭)이라는 사람은 초서를 잘 썼다. 그가 초서를 잘 쓰게 된 이유는 특별히 다른 기술을 연마한 데에 있는 게 아니라, 기쁨과 노여움, 군색함과 곤궁함,근심과 슬픔과 유쾌함, 원한과 사모, 술에 취한 취기와 무료함과 불평 불만 등 각종 감정이 마음 안에서 발동하면 반드시 초서로 그것을 발산해 낸 데에 있다. 산과 물, 절벽과 골짜기,새,짐승,벌레,풀과 나무,꽃과 열매,해와 달과 별,바람과 비와 물과 불,천둥과 번개, 노래와 춤과 전쟁 등 천지 사물의 변화를 볼 때마다 사람은 기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는 법인데 장욱은 바로 그러한 기쁨과 놀람과 슬픔과 즐거움 등을 다 글씨(서예)에 의탁해 표현해 내었다.
여기서 한유는 '서예는 서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예술이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 폭의 서예작품 안에는 쓴 사람의 성품과 함께 매 순간 변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씨를 통하여 우리는 쓴 사람의 성품과 감정의 변화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이처럼 그대로 읽어진 성품과 감정의 변화 중에 만약 바람직하지 못한 성향의 성격과 감정의 굴곡이 있을 때 그것을 고쳐나간다면 그게 바로 수신이다. 그래서 서예는 수신이 강조되고 또 수신이 필요한 예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 한유의 글은 서예가 발산의 기능도 탁월함을 설파하고 있다. 서예(특히 초서체)가 가지고 있는 이 탁월한 발산성은 서자의 성품을 측정하는 역할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발산을 통한 '해소'를 이용하여 서자의 성격을 교정하는 기능도 한다. 서예는 심리측정의 시험지이자,'수신'의 지침이자,심리치료의 도구인 것이다.
중국 고전서예미학의 완성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인 <<서개(書槪)>>의 저자인 청나라 사람 유희재(劉熙載)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예는 '같은 것'이다(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배움을 그대로 반영하고, 그 사람의 타고난 재능을 그대로 반영하고, 그 사람의 성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결론지어 말한다면 서예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서예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고 직접적으로 천명하는 유희재의 정의 앞에서 우리는 더 할 말이 없다. 유희재의 이 결론은 서예의 예술적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며, 또 서예가 한자문화권 문화의 精髓가 될 수 있는 이유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서예는 곧 사람이다. 그래서 서예는 수신성이 가장 강한 예술이다. 그런데 진정한 웰빙은 다음이 아니라 나를 다스리고 나를 가꾸는 것 즉 '수신'에 있다. 따라서 서예야 말로 진정한 웰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역시 김병기교수님의 책 내용을 그대로 베낀 것입니다. 김병기교수님의 글은 언제나 평이한 문장을 사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글을 읽게 하고 이해가 빠르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한편 두려움과 한편 자긍심을 느끼며 비록 연습이라고 할지라도 진지한 자세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행초서 연습을 시작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수개월) 연습도 했고 내용도 1/2지에 쓰는 간단한 내용이라 어느날 저녁 학원에 앉아 마음 먹고 작품 한장을 완성해 놓고서는 내심 잘 된 작품이라고 뿌듯해 하면서 review를 하고 있는데 원장님께서 '글씨가 움츠려들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표현되고 느끼는 것이 서예인 것인가. 차분히 생각해 보니 과연 잘 쓰려는 욕심이 앞서 찰라적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서리면서 행초서의 활달한 맛이 없어지고 너무 기교적으로 되어 필을 잡은 손의 떨림이 그대로 글씨에 나타났었지 않았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