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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12권을 차례로 요약 정리하여 올립니다. 고병권님의 글이 워낙 깔끔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시리즈를 요약한다는게 오히려 작가의 글을 더 어지럽게 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서 후 정리라는 저의 작업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우려를 무릅쓰고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7권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저자의 말-거인과 난쟁이
루소에 따르면 국가란 개인들의 연합으로 생겨난 ‘공적 인격’(personnepublique). 이 새로 생겨난 인격의 수동적이름이 ‘국가’(etat)이고 능동적이름이 ‘주권자’(souverain)
근대 정치학에는 이처럼 두 종류의 인간, 하나는 집합적 통일체로서 인간(인조인간, 공적 인격)이고 다른 하나는 그 구성원인 개별 인간들. 전자는 전체로서 주권자인 인민(국민)이고 후자는 주권자의 지배와 보호를 받는 개별 인민들(국민들)
이 두종류의 인간, 두종류의 인민은 동시에 만들어짐. 인구집단의 ‘전체화’와 ‘개별화’가 동시에 일어난 것. 한편으론 전통적 공동체(가문, 마을, 서약단체 등)를 깨뜨려 개인들을 만들고(개별화), 다른 한편으론 이 개인들을 묶어 국민을 만듦(전체화)
집합적 통일체로서 인간 즉 주권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 반면 공동체를 상실하고 개인으로 내던져진 인간은 군주나 정부의 돌봄이 없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참으로 나약한 존재. 이것이 근대적 인간, 근대적 인민의 두 가지 형상
그런데 이 두 형상은 매뉴팩처의 작업장에서도 나타남. 자본가에게 고용될 때 노동자들은 개인이지만, 작업이 시작되면 이들은 하나의 결합된 노동력을 이뤄 ‘전체노동자’라는 거인으로 변하고, 개별 노동자들은 이 거인 노동자의 특수한 기관으로 전락. 한 가지 작업에 특화된 ‘부분노동자’, ‘부분인간’이 되는 것
이 작업장에서 온전한 인격체는 거인노동자뿐. 그는 개별 노동자의 힘을 더한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녔고 작업속도도 빠름. 당연히 수백 배나 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냄
그러나 임금을 지급받을 때가 되면 일은 ‘함께’ 했는데 ‘함께’는 사라지고 자본가 앞에 서 있는 건 다시 왜소한 개인 노동자만 남음. 자본가는 개인 노동력의 가치에 대해서만 지불하고 결합된 노동력의 가치에 대해서는 지불하지 않음. 노동자들은 ‘함께’ 일했지만 이 ‘함께’는 자본가의 차지. 공동의 성과를 사적 소유물로 만드는 것. 이번에 마르크스가 추적하는 것은 바로 이 ‘거인 노동자’의 정체
홉스는, 만인이 자신의 목소리와 행동을 한 사람(혹은 한 집단)의 목소리와 행동에 일치시킬 때 국가가 탄생한다고 봄, “만인이 자신들의 의사를 그[군주]의 의사에 복종시키고, 자신들의 판단을 그의 판단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군주는 만인이 하나가 되었음을 표상하는 존재. 마치 서로 타인인 노동자들에게 공통성을 부여하는 것이 자본가의 동일성(동일한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것)인 것처럼
1. 착취의 진보
○ 상대적 잉여가치 - 잉여가치를 늘리는 또 하나의 천재적 방법
자본주의 하에서 강제노동은 자유의 겉모습을, 착취는 공정(公正)의 겉모습을 하고 있음;일을 시켜달라고 제 발로 찾아오며, 제값을 지불하고 잉여노동을 뽑아냈으니까
자본이 맞닥뜨린 한계;가치의 증식을 위해서는 잉여노동을 확보해야 하며, 자본가들은 이를 위해 노동일을 늘렸지만 여기에는 물리학적·생물학적·정치적 한계가 있음
노동력의 가치를 ‘불변량’으로 전제할 때 잉여가치를 얻는 방법은 더 많은 노동자를 더 오래 일 시키는 것 외에는 없음
그런데 노동력의 가치가 불변이라는 전제를 버리면, 필요노동시간을 단축하면 노동일을 늘리지 않아도 잉여노동시간이 늘어남, 전체 노동일은 그대로지만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분할 비율이 달라진것. 문제는 어떻게 필요노동시간을 줄이느냐 하는 것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지불하는 것, 즉 필요노동시간의 일부를 약탈하는 것-『자본』에서는 이를 상정하지 않음.“이런 방법이 임금의 현실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맞지만 여기서는 노동력을 포함해서 모든 상품들이 가치대로 매매된다는 것을 전제했기 때문에 이런 경우를 배제한다.”
그렇다면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관련 고려할 수 있는 경우는 실제로 ‘노동력의 가치가 하락하는’ 경우, 즉 실제로 필요노동이 감축되어 잉여노동이 증대하는 경우뿐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 그렇다면 생활수단의 가치가 떨어지면 노동력의 가치도 떨어질 것임, 노동자들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산업부문에서 노동생산력이 증대하면 노동력 일반의 가치는 하락,
현재 한국에서 최저생계비를 책정할 때 식료품비,주거비,교통통신비,교양오락비 등 372개 품목을 조사, 이런 상품들의 가치 변동이 노동력의 가치에 영향을 미침
노동력 재생산에 관여하는 상품들의 전체 가치가 10퍼센트 하락하면 노동력의 가치도 10퍼센트 하락, 그럼 전체 자본가들은 1노동일의 길이를 연장하지 않은 채로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대로 지불하고서도 잉여노동시간을 1시간 늘릴 수 있음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려면 노동자들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다양한 산업부문(원료와 기계 등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문까지 포함)에서 생산력이 크게 증대해야 함, 즉 “노동이 수행되는 생산조건들, 다시 말해 생산방식, 노동과정 자체에서 하나의 혁명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 작업방식도 노동수단도 근본적으로 변해야 함. 그것도 한 공장, 한 생산부문에서가 아닌 여러 공장, 여러 부문에서 전반적 혁명이 일어나야 함. 노동일을 연장하지 않고, 다만 노동력의 가치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시간을 단축할 뿐, 그렇게 해서 노동일 중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비율을 바꿈
마르크스는 앞의 방식으로 생산된 잉여가치를‘절대적잉여가치’(absolutenMehrwert), 후자의 방식으로 생산된 잉여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relativen Mehrwert)라고 부름
두 잉여가치의 생산방식은 매우 다름에도 모든 잉여가치는 잉여노동, 즉 필요노동 이상의 노동을 의미함. 12시간을 14시간으로 늘리는 것도, 12시간을 그대로 둔 채 필요노동시간을 10시간에서 8시간으로 단축하는 것도 노동자들로서는 자신이 지불받은 가치 이상의 노동을 한다는 뜻. 자본가를 위해 짜 넣는 생명력의 크기, 즉 착취도가 두 배로 늘어난 것임
○ 경쟁의 강제법칙
1840년대영국에서 곡물은 노동력의 가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곡물수입을 자유화하면 곡물 가격이 떨어질 것이므로 지주에게는 타격을 입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이익. 면화 등의 원료도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림. “물론 한 개별 자본가가 노동생산성(노동생산력)을 향상함으로써 이를테면 셔츠의 가격을 떨어뜨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가 그만큼의 노동력의 가치 즉 그만큼의 필요노동시간을 줄이려는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결과에 기여한 셈이며 그런 한에서 그는 전반적인 잉여가치율의 상승에 기여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일반적 등가물이 ‘사회적’ ‘행동’의 결과로서, 개인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게 아님을 주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가능케 한 자본가들의 행동에도 비슷한 면모가 있음. 개인으로서 자본가는 전체적 결과를 알지 못한 채로 행동함
자본주의적 생산의 법칙은 개별 자본가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의 경쟁을 통해 관철됨. 이것이 ‘경쟁의 강제법칙’(Zwangsgesetze der Konkurrenz)
경쟁에서 살아남고 더 나아가 승리하려고 필사적인 것뿐, 그런데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이 관철됨.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생산력 증대에 나서게 하는 적극적 유인은, 자본가는 노동생산력을 높이면 경쟁에 유리하고 직접적 이익이 발생한다는 걸 앎. 이 이익은 눈앞에 있는 이익
○ 추가 잉여가치
생산방식의 혁신을 통해 사회적 평균보다 높은 노동생산성을 달성할 경우 그는 다른 자본가들은 누리지 못하는 별도의 이익을 누리게 됨. 마르크스는 이것을 ‘특별 잉여가치’(Extramehrwert)라고 부름
‘Extramehrwert’는 자본가들이 얻고자 하는 ‘별도의 잉여가치’ 내지 ‘추가 잉여가치’. 자본가로서는 노동생산력을 높여 제품의 단가를 낮출 수만 있다면 이런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노동생산력 증대에 나설 수밖에 없음.
○ 마르크스가 일일이 계산하는 이유
노동생산력 향상으로 제품의 단가를 크게 낮출 수 있다면 돈을 벌 수 있음. 그런데 자본가의 눈에 나타나는 것은 ‘잉여가치’가 아닌 ‘이윤’이고, ‘잉여가치율’이 아닌 ‘이윤율’. 그가 볼 때 이윤이란 비용과 매출의 차이 즉, ‘비용가격’과 ‘판매가격’의 차이. 그리고 이윤율이란 총투자액에 대한 이윤의 비율. 얼마를 투자해서 얼마를 챙겼는가 하는 것. 자본가에게는 이게 중요. 자본은 이윤과 이윤율이 높은 쪽으로 이동
마르크스는 『자본』 Ⅲ권에서 자본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이 현상을 해명
최종 생산물의 가치(W)는 ‘생산수단의 가치+노동력의 가치+잉여가치’(c+v+m)
‘생산수단의 가치’(c)와 ‘노동력의 가치’(v)는 자본가가 지불하는 비용
W=c+v+m=k+m (k는 비용가격)
이윤은 상품 판매가격에서 비용가격을 빼면 됨(m=W−k)
잉여가치와 이윤은 똑같은 것을 형태만 달리해 표현(전자는 가치형태, 후자는 가격형태). 하지만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은 아예 값이 다름. 잉여가치율은 ‘잉여가치와 노동력 가치의 비율’(m/v)로, 자본가가 챙겨간 부분과 노동자에게 지급한 부분간의 비율. 반면 이윤율은 총투자액(생산수단 가치+노동력 가치) 대비 이윤(잉여가치)의 비율
상품의 가치(판매가격)를 생산수단의 가치, 노동력의 가치, 잉여가치의 합으로 적는 것과 비용가격, 이윤의 합으로 적는 것 사이의 차이
자본가는 이윤을 비용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비용 대비 이윤이 어떻게 되느냐에 민감하게 반응
마르크스는 노동생산력을 높이면 비용이 줄어들고 이윤이 올라간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생산수단의 가치(불변자본)와 노동력의 가치(가변자본)를 일일이 구별하고 노동생산력의 상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어떤 값을 변화시키는지 따짐. 그리고 여기에 입각해 특별 잉여가치량을 계산하는데, 바로 ‘그릇된 외관’(falschen Schein)에서 생겨날 수 있는 신비화를 막기 위해서임
자본가의 눈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비용’이라는 범주는 상품의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가치증식이 일어나는지를 가려버리고, 그저 자본가가 들인 ‘비용’만 나타나기 때문에, 비용가격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 이윤이 생겨났다거나, 자본가의 절제나 금욕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는 환상이 생김
이윤율도 마찬가지로, 잉여가치율은‘노동력의 가치’에 대한‘잉여가치’의 비율이므로 잉여가치가 어디서 왔으며 노동력을 얼마나 착취하는지를 곧바로 보여 주는데 비해, 이윤율은 자본의 ‘총투자액’에 대한 ‘이윤’의 비율로, ‘자본’과 ‘자본의 자식’이 맺는 한 몸이 되는 일종의 자기관계가 되는 것일 뿐 노동과의 관계는 드러나지 않음. 이렇게 되면 이윤(잉여가치)이 자본 스스로의 운동으로 창조된 것이라는 환상이 생겨남
마르크스가 특별 잉여가치량을 일일이 계산한 이유가 여기 있음. 노동생산력이 두 배 향상될 때 생산물에 새로 들어가는 노동량은 반으로 줄어들지만 생산물로 이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실제로 상품의 가치가 반값이 되지는 않음, 비용에 들어가는 항목이 모두 줄어드는 것은 아니고 그중 노동력의 가치에 해당하는 부분만 줄어드는 것. 그런데 생산성이 높아져 비용이 줄어들었다고만 말하면 이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음. 특별 잉여가치에 대한 진정한 공로자가 드러나지 않으니 자본의 신비한 힘이나 자본가의 절제 같은 가짜들이 공로자 행세를 하는 것
○ 노동생산력 증대와 노동 단축은 별개
특별 잉여가치(추가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노동생산력을 높이려는 강력한 동기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가 하락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지만 크게 보면 특별 잉여가치도 상대적 잉여가치의 일종. 이 경우에도 노동일의 연장 없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이 변함
노동력의 가치가 하락함으로써 생겨난 상대적 잉여가치; 노동력의 가치하락은 여러 산업부문에서 노동생산력이 상승할 것을 전제하고, 그 효과도 모든 자본가들이 함께 누림. 마르크스는 특별 잉여가치를 얻은 개별 자본가에 대해 “자본이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전반적이고 전체적으로 행하는 일을 그는 개별적으로 행한 것이다.”
개별 자본가들은 특별 잉여가치를 얻어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노동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이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일어남.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노동자들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업종도 포함된다는 뜻. 노동자들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업종에서 노동생산력이 증대하면 노동력 일반의 가치가 하락.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리고 그럼으로써 노동자 자체의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자 끊임없이 지속되는 경향이다.”
왜 자본가는 자기 상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가. 그것이 돈을 버는 길이기 때문.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비싼 상품이 아니라 많은 이윤. 상품이 고가(高價)인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고부가가치, 더 엄밀히 하자면 고잉여가치인 게 중요
자본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잉여가치이고 노동이 아니라 잉여노동이라는 것. 그가 가치의 생산, 즉 상품의 생산에 나선 것은 잉여가치를 위해서이고, 노동자를 고용한 것은 잉여노동을 위해서임
노동생산력이 늘어난다고 노동일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점, 줄어드는 것은 필요노동시간이지 노동일이 아님
○ 추가 잉여가치는 어디서 왔는가
상대적 잉여가치가 전체 가치생산물 중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몫의 비율을 바꾼 것이라면, 특별 잉여가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익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것
물론 이 둘이 별개는 아님, 자본가로서는 그저 노동생산력만 높이면 됨. 그 결과가 직접적으로 특별 잉여가치를 낳는지 간접적으로 상대적 잉여가치를 낳는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님. 그리고 크게 보면 특별 잉여가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일종
어떻든 자본은 절대적 의미에서 노동량의 추가 투입 없이도 잉여가치를 늘릴 방법을 찾았으니까 노동일을 더는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출구를 찾은 셈
그런데 데이비드 하비(D. Harvey)는 『자본』을 해설하면서 상대적 잉여가치와 특별 잉여가치의 생산이 잉여가치에 대한 자본가들의 욕구만 충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함
상대적 잉여가치의 경우 노동력의 가치 하락이 곧바로 노동자의 생활수준의 하락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사용가치 즉 물자 기준으로 보면 더 풍족해질 수도 있음
특별 잉여가치의 경우도, 자본가가 얻는 추가 잉여가치의 일부를 분배해줄 수 있으니까 노동조합이 생산성 상승에 협조하는 대신 임금 인상을 얻어낼 수 있음
그는 이것이 상대적 잉여가치와 특별 잉여가치의 생산에 노동자들이 저항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준다고 함
하비의 설명은 노동생산력 증대가 착취율 증대로 이어져 이로 인해 계급투쟁이 격화할 것이라는 단순한 사고를 경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며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
○ 강화된 노동
하비는“기계는 가치의 원천이 될 수 없지만 잉여가치의 원천은 될수있다.”고 말함
마르크스는 “예외적으로 생산력이 높은 노동은 강화된 노동(potenzierte Arbeit)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같은 시간에 같은 종류의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höhere Werte)를 창출한다.” ‘potenzieren’은 ‘강화하다’라는 뜻과 함께 수학적으로 ‘제곱하다’라는 뜻. 마르크스가 ‘복잡노동’(kompliziertere Arbeit)과 ‘고급노동’(höhere Arbeit)에 대해 말한 바를 떠올리게 함. “복잡노동은 단지 ‘강화된’(potenzierte) 단순노동 혹은 더욱 ‘배가된’(multiplizierte) 단순노동으로 간주될 수 있어서, 적은 양의 복잡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노동과 같다.”
마르크스는 고급노동에 대해 ‘하루치의 고급노동은 X일의 단순노동’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함. 고급의 경우에도, 즉 노동자가 더 고급의 능력을 발휘한 경우에도 더 많은 노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 것
그런데 노동생산력의 증대를 통한 추가 잉여가치를 설명하면서 마르크스는 복잡노동과 고급노동을 설명할 때 사용한 표현을 다시 쓰고 있음. 이것은 그가 노동생산력의 증대를 복잡노동이나 고급노동의 경우처럼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더 많은 노동이 투입되었다고 본다는 뜻. 마르크스가 생산력이 높은 노동을 ‘강화된 노동’이라 부른다는 것은 노동의 추가 투입이 있다고 보는 것. 마르크스가 특별 잉여가치를 설명하면서 가치량을 노동시간이 아니라 화폐로 나타낸 것은 이런 이유. 노동시간으로는 노동자들이 동일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투입했다는 사실을 표현할 수 없으니까.
○ 잉여노동은 기계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노동생산력의 증대가 ‘강화된 노동’의 결과임에도 “우리의 자본가는 노동력의 하루 가치에 대하여 여전히 종전과 마찬가지로 … 지불한다” 이는 자본가가 얻은 추가 잉여가치가 단지 생산성 낮은 다른 기업의 자본가만이 아니라 자기 공장의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적 착취에서도 온 것임을 말함
○ 착취의 진보
새로운 잉여가치의 생산이란 잉여노동의 새로운 추출법이자, 잉여노동에 대한 자본의 갈망을 실현하는 새로운 방법
노동시간을 늘리거나 노동강도를 높이거나, 이것은 노동자 입장에서는 과로의 두 가지 기본 형태. 과로란 ‘장시간 노동’이거나 ‘고강도 노동’
작업방식이나 기계의 의미는 그것을 고안한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지 않고, 마르크스가 여러 번 강조하듯 그것은 사회적 조건이나 배치에 달려 있음
자본주의에서 면방적기는 현물인 실만이 아니라 가치의 생산수단이기도함. 가치 생산수단으로서 방적기의 성능은 인간노동을 얼마나 잘 흡수하느냐에 달려 있음. 노동을 줄여주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을 더 잘 빨아들이는 수단’으로 부각되는 것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복리가 아니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체제. 생산의 필요노동시간을 줄이는 이유는 잉여노동시간을 늘리기 위해서이지 노동시간 자체를 줄이기 위해서가 아님.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성 향상과 노동일 단축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음. 그래서 기술혁신이 일어나고 생산성의 비약적 성장이 일어남에도 노동일은 좀처럼 줄지 않으며 노동은 오히려 강화되는 경향
○ 더 문명화하고 더 세련된 착취
설령 노동자들의 작업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기계가 나와도 과로가 사라지지는 않음. 새로운 기계를 가지고 더 빨리 더 많이 일하면 생산성은 더더욱 높아질 테니까. 착취 사회에서는 진보도 ‘착취의 진보’가 되고 맘. 야만적 착취의 자리를 문명화된 착취, 세련된 착취가 차지할 뿐.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생산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를 위한 것이다. … 그것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새로운 지배 조건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것은 한편에서는 역사적 진보이자 사회의 경제적 형성 과정의 필연적 발전 계기로 나타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문명화되고 세련된 착취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2. ‘함께’의 착취
○ 생산력을 높이는 두 가지 방법
노동생산력의 증대가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와 관련하여, 하나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수단 특히 기계에서 일어난 변화와 관련된 것
○ 작업방식과 기계의 변화
○ ‘함께’의 효과 ① 평균노동의 실현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일정 규모 이상의 돈을 생산에 투자할 수 있을 때 시작됨, 그래서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자본은 일정 규모의 화폐 축적을 전제
생산과정에 동원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규모가 일정 수가 넘으면 통계적 의미를 가짐.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으로 결정된다고 할 때 ‘사회적으로’라는 말에는 ‘평균’의 의미가 담김
상품생산이 평균적 노동조건에서 평균적 질을 가진 노동력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뜻
요컨대 일정 규모 이상의 노동자가 모이면 ‘평균 노동자’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음, 사회 전체의 평균이 공장에서도 나타나는 것
“가치증식의 일반법칙은 개별 생산자들에게는 그가 자본가로서 생산할 때, 즉 많은 수의 노동자를 동시에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처음부터 사회적 평균노동을 사용할 때 비로소 완전히 실현된다.”
○ ‘함께’의 효과 ② 생산수단의 절약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면 실제로 이윤이 늘어남
먼저 ‘소극적으로’ 기여하는 것들로, (생산수단의) ‘절약’을 통한 이윤, 노동자들을 한곳에 모으면 생산수단에 대한 효율적 이용이 가능해짐. 생산수단을 알뜰하게 사용했다는 것은 생산물로 이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량이 그만큼 작아진다는 뜻
생산수단 절약을 통한 이윤의 증대는 노동생산력과는 무관한 문제, 노동자의 역량이 아니라 자본가의 역량이 발휘되는 문제로 보일 수 있음
마르크스는 이것이 전도된 이미지라는 것을 지적해두고 싶었던 것, 생산수단 절약을 통한 이윤의 증대가 자본의 신비한 생산력에서 나온 게 아니고 노동력의 가치하락을 통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관련된 것, 생산수단 절약은 노동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단 지적해두고, 순서를 밟아서 결국에는 자본의 생산력의 정체, 자본의 모든 이윤의 원천을 철저히 밝혀내겠다는 것
○ ‘함께’의 효과 ③ 추가 생산력의 창출
힘을 합쳐 함께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걸 협업, 이렇게 하면 노동생산력이 늘어남
생산수단 절약이 협업의 소극적 효과였다면 이것은 실제로 노동생산력을 증대시키니까 적극적 효과라고 할 수 있음
우선, ‘함께’ 하면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힘이 생겨남, 마르크스는 군대에 비유
‘결합노동’(kombinierten Arbeit)은 개인 노동의 단순한 합계가 아님, 개인 노동자 한 사람이 천 번 시도해도 할 수 없는 일을 천 사람이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음
노동의 대상이가진 크기 자체가 개인을 넘어서는 경우도 많음, 이때는 거인이 필요
다수 노동자의 결합노동은 그런 거인의 힘을 창출. 노동의 범위를 개인이 미칠 수 없는 곳까지 확장하는 것
또한 ‘함께’ 하면 정서적 자극이 일어나기 때문에 개인의 힘도 더 크게 발휘됨, ‘함께’ 하면 ‘활기’가 생겨나고 때로는 ‘경쟁심’까지 생김
모두가 똑같은 일을 할 때도 작업을 더 작게 나누면 움직임의 크기나 이동해야 하는 거리를 줄일 수 있어서 생산량이 늘어남, 한마디로 작업속도가 빨라진다는 뜻
똑같은 노동을 여러 ‘부분노동’으로 나누어 수행하는 경우와 상호 연계된 노동들을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 즉 분할된 형태로 하나를 이루게 하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가 본격화했을 때 작업장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작업방식임
정리하자면, ‘함께’에는 개인으로 분해하고 나면 사라지는 어떤 잉여의 것, ‘초과’가 존재함. 결합노동은 개별노동이 가질 수 없는 힘을 창출
마르크스는 이 ‘특수한 생산력’을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gesellschaftliche Produktivkraft der Arbeit) 혹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Produktivkraft gesellschaftlicher Arbeit)이라고 부름
○ 24개의 손을 가진 인간, 거인 노동자의 생산력
‘결합노동자’(kombinierte Arbeiter) 혹은 ‘전체노동자’(Gesamtarbeiter)라는 표현은 단지 노동자들의 무리를 지칭한 게 아니라 거대한 한 사람의 노동자를 떠올린 것, 거인 한 명이 일하는 것, 『자본』의 영어판에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신체’(a body of men working together)로 표현
이질적 개인들의 합체로 탄생한 거인은 매뉴팩처 시대(17~18세기) 국가나 사회의 기본 이미지, 마르크스는 12명이 한 줄로 늘어서 벽돌을 나르는 모습을 24개의 손을 가진 거인이 일하는 것처럼 말함. 이 거인 노동자는 똑같은 시간에, 12명의 노동자가 개별적으로 12시간 동안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
“다른 노동자들과 계획적으로 함께 일할 때 노동자는 자신의 개별적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유적 능력(Gattungsvermögen)을 펼친다.”
○ 협업과 인간의 ‘유적 능력’
한자로 ‘종’은 씨앗을 의미. 씨앗들은 저마다 다름. 반면 ‘유’는 비슷한 것들이 모였다는 뜻. ‘종’이 낱낱의 차이를 의미한다면 ‘유’는 비슷한 것들의 묶음. ‘종’이 개별성을 뜻한다면 ‘유’는 일반성을 뜻. 이를테면 동물을 7단계로 분류할 때(종-속-과-목-강-문-계), ‘종’의 상위 단계인 ‘속’을 독일어로 ‘Gattung’, 영어로는 ‘genus’
‘특수한’(specific)이라는 단어가 ‘종’(species)에서 파생한 것이라면, ‘일반적’(general)이라는 단어는 ‘유’(속, genus)에서 파생한 것. ‘종’이 특수성, 개별성과 관계한다면 ‘유’는 일반성, 보편성과 관계. ‘종’이 원소라면 ‘유’는 집합
청년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자신이 속해 있는 집합 즉 ‘유’(類)도 실천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적 존재’라고 봄. 인간은 자연 전체와 관계하면서 생존하고 자기 자신을 가꾸고 변용해감. 자연의일부이면서 동시에 자연 전체와 관계하는 존재, 자연 전체를 생산하면서 자기 자신을 생산하고, 자연 전체를 인식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존재. 이것이 청년 마르크스가 생각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이런 유적 존재의 성격을 잃어버림. 인간은 개별적 한계를 넘어선 유적 존재이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이것이 개별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됨. 실천이든 이론이든 간에 자연과 관계하는 모든 행위가 먹고사는 문제로 축소되는 것. 오로지 생존만 따지고 상품성만 따지고 돈만 따짐
이런 게 소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노동의 매우 중요한 측면 중 하나가 바로 ‘유적 존재의 소외’라고 봄. 그에 따르면 ‘유적 존재’는 인간의 본질인데,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인간 본질의 소외라고도 할 수 있음. 인간은 자연의 온갖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적 존재이나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 아래서는 그럴 수가 없음. 소유할 수 없으면 향유할 수도 없음. 사물과의 관계가 제한되는 것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인간 대신 인간존재의 유적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화폐
마르크스는 화폐를 인간과 인간이 갈망하는 사물 사이에 놓여 있는‘뚜쟁이’로 표현, 인간은 힘이 없지만 돈은 힘이 있고, 인간은 무능하지만 돈은 전능
마르크스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 “내가 육두마(六頭馬)의 돈을 지불할 수 있다면 그 말의 능력은 곧 나의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힘차게 뛰어가네, 나는 정상인일세. 마치 24개의 다리를 가진 사람처럼 말일세.”
화폐야말로 “모든 끈들의 끈”이고 “진정한 창조적 힘”임, 신과 같음. 일종의 물신. 본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었는데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인간은 무력하고 돈이 전능
본래 ‘유적 존재’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 Feurbach)가 썼던 말, 그는 인간이란 개별적 의식만이 아니라 자신의 ‘유’에 대한 인식을 가진 보편적 존재라고 했음. 그에 따르면 보편적 존재로서 인간의 유적 본질이 하나의 대상으로, 그것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나타난 것이 ‘신’임. 성경에서는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빚었다고 했는데, 실은 그 반대. 신이 인간의 창조주인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의 창조주인 것
마르크스는 군주제와 민주제의 관계를 포이어바흐가 말한 신과 인간의 관계처럼 생각. 신이 유적 존재로서 인간의 소외된 형태이듯 군주제는 유적 체제인 민주제의 소외된 형태. 군주가 민중의 힘 덕분에 존재함에도, 소외된 체제인 군주제에서는 민중이 군주의 힘 덕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임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주장을 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적 존재’(유적 본질)라는 개념을 버림. 그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생각이 사회성과 역사성이 전혀 없는, 매우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 포이어바흐는 단지 개별 인간들을 묶어 추상한 뒤 하나의 ‘유’로서 파악할 뿐, 모든 인간이 역사적으로 매우 특정한 사회형태에 속해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음
모든 인간들은 저마다 특정한 사회형태에 속해 있으며, 그에 따라 다른 규정을 받고 다른 형태의 억압을 받고 다른 형태의 자유를 꿈꿈. 따라서 ‘본래 인간은 이런데’ 하는 식으로는 문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음.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는 ‘유적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떠남
그런데 ‘유적 존재’(유적 본질)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단어가 『자본』에 나타난 것. ‘다른 노동자들과 계획적으로 함께 일할 때’(im planmäßigen Zusammenwirken mit andern)‘자신의 개별적 한계(individuellen Schranken)를 벗어던지고(abstreifen)’ ‘유적 능력’을 발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 능력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보임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협력하며 이를 통해 개인의 제한된 능력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훌륭한 자질. 마르크스는 인간의 중요한 자질이 오히려 인간의 착취에 이용된다고 생각했을 것. 하지만 포이어바흐적 인간 개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음. 그는 본래적 인간, 비역사적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 같은 것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는 ‘Gattungswesen’이라고 쓰지 않고 ‘Gattungsmögen’이라고 씀. ‘Wesen’은 ‘본질’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를 버린 것. 그 대신 잠재적 능력을 뜻하는 ‘mögen’을 씀
화폐자산가와 노동력소유자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노동능력’(Arbeitsvermögen)이라는 말을 썼음. 인간의 ‘노동능력’이 ‘노동력’(Arbeitskraft)으로 바뀌던 시점. 이처럼 ‘mögen’은 상품으로 판매되기 이전의 인간이 지닌 잠재적 능력을 지칭
협업을 통해 표현된 인간의 ‘유적 능력’은 마치 ‘노동력’으로의 전환을 앞둔 ‘노동능력’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에 고유한 작업형태로의 전환을 앞둔(그러나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다른 식으로 그 역량을 발휘할) 인간노동의 어떤 자질이라 할 수 있음
자본주의는 노동의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협력적 작업형태를 발전시키는데, 그 바탕에 인간의 유적 능력이 있는 것
“협업의 단순한 형태가 한층 더 발전한 다른 형태들과 나란히 특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협업은 언제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 형태를 이룬다.”
○ 지휘자로서 자본가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함께’ 일하지만 우리가 협업을 이야기하는 장소는 자본주의 작업장. 공장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일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 자신의 의지로 모인 사람들도 아님. 이들을 한데 모은 것은 자본가. 자본가가 동시에 고용했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성은 자본가의 동일성, 자본의 동일성
노동자들이 협업을 하면 추가 생산력이 나온다는 것은 말하자면 다수의 난쟁이 노동자들이 사라지고 한 사람의 거인 노동자가 출현하는 것. 추가 생산력의 크기는 이 거인 노동자가 얼마나 온전한 형태로 출현하느냐, 즉 노동자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하느냐에 좌우됨
자본주의 공장의 협업도 마찬가지. 협업의 규모가 커지면 별도의 지휘자가 필요. 길드의 장인은 그 자신도 일하는 사람이지만 자본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직접 연주하지 않는 것처럼 육체노동을 하지 않음. 자본가는 전적으로 지휘자 역할만 맡음
자본가의 지휘는 생산과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조차 직접 생산력을 구성하는 것은 아님. 노동자들로 하여금 생산력을 더 크게 발휘하도록 하는 요인일 뿐
협업은 어디서나 노동생산력을 증대시지만 어디서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님. 협업으로 더 많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서 협업이 이뤄질 때
자본가가 생산과정을 지휘하는 것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 노동자들로부터 능력을 최대한 뽑아 가기 위해서임. 산란계 양계장에서 암탉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은 암탉을 최대한 착취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생산과정에 대한 지휘는 그가 착취자라는 사실 때문에 필요한 기능이기도 한 것
이런 면모 때문에 자본가의 지휘와 감독은 억압성을 띨 수밖에 없음. 그리고 억압과 착취에는 저항이 따르기 마련. 이것을 막으려면 평소 주도면밀한 관리가 필요
그래서 공장의 자본가는 한편으로는 지휘봉을 든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압봉을 든 경찰
협업을 통해 더 큰 생산력을 발휘하는 것은 노동자들이지만 노동자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가의 계획과 의지, 힘. 자본가는 생산과정의 모든 것을 잉여가치의 최대화에 맞추고 이것을 위해 전권을 행사함. 그의 지휘는 내용과 상관없이 형태상으로는 언제나 ‘전제적’(despotisch)임
협업의 규모가 더 커지면 자본가 혼자서 생산과정을 지휘하고 감독할 수 없고, 통치를 보필할 사람들을 필요로 함. 노무관리를 맡을 사람들을 고용. 자본가가 그랬듯이 이들도 직접적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 임금노동자이기는 한데 ‘생산노동’이 아니라 ‘감독노동’(Arbeit der Oberaufsicht)을 수행하는 사람들
정치경제학자들도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다룰 때 감독노동이 생산력 증대에 크게 기여한다고 봄. 불가피한 비용이라기보다 이윤증대에 기여하는 생산적 노동으로 본것
감독노동이 생산력 증대에 기여하는 것은 협업의 본성에서 요청되는 기능을 수행할 때.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는 무관한 것.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그 착취적 성격 때문에 감독노동에 낭비적 요소, 그러니까 다른 생산양식에서는 불필요할 수도 있는 요소가 들어감. 정치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적 감독노동을 생산적으로 본 것은 이 두 가지를 뒤섞고 심지어 동일시하기 때문
마르크스는 주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 밀(J. S. Mill)을 인용. 밀은 거대 매뉴팩처 기업이 가내수공업을 절멸시킨 비결은 노예노동, 즉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린 것에 있다고 했음. 마르크스가 이 말을 인용한 것은 자본주의 공장의 감독노동이 식민지 농장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정리하자면 생산의 지휘자는 꼭 자본가가 아니어도 됨. 협업에 지휘자가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가 자본가일 필요는 없음.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는 자본가이기 때문에 생산의 지휘자가 됨.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가는 산업의 지휘자인 까닭에 자본가인 것이 아니라, 자본가이기 때문에 산업의 사령관이 되는 것”
○ 위험한 진실
근대 협동조합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성공을 거두자 영국 전역에 비슷한 조합이 많이 생겨났고, 위기의식을 느낀 기존의 도매업자들이 결탁해 이들을 방해. 그러자 지역 협동조합들이 연대하여 1860년대에는 도매업 협동조합까지 만들었음. 나중에는 생산영역까지 진출해 일부 물품을 자체 생산하기도 함
‘영국의 속류 신문’ 『스펙테이터』는 로치데일의 실험에 대해서 “이들의 실험은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이 매점과 공장 그리고 거의 모든 형태의 산업을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노동자의 상태를 크게 개선하기도 했지만, 고용주들(masters)을 위해서는 어떤 빈자리도 남겨놓지 않았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부르주아지가 원하지 않는 진실
이 신문이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실험을 끔찍하게 생각한 이유는 혹시 자본가란 없어도 되는 존재, 생산에 불필요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자본가들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 아닐까.
더 두려운 것은 자본가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진실인지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날이 온다면, 더나아가 자신들을 통치자로 그린다면, 즉 자신의 거번먼트를 상상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야말로 부르주아들로서는 끔찍한 일
○ ‘함께’에 대한 배신
기업도 애초엔 조합이고 공동체였음.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영어로 ‘The Rochdale Society’. ‘협동조합’이라고 옮긴 단어가‘Society’. 우리가 통상‘사회’라고 옮기는 말
소키에타스 중 규모가 큰 것을 ‘콤파니아’(compagnia)라고 불렀는데, 동료라는 뜻도 있고 회사라는 뜻도 있음. 글자 그대로는 ‘빵(panis)을 함께(com-) 나눈다’라는 뜻.
오늘날의 자본주의 기업은, 노동자와 자본가는 빵을 만들 때도, 그것을 나눌 때도 동료가 아님. ‘생산과정’에 관한 한 자본가는 전권을 쥔 전제군주이고, 협업을 통해 생산된 초과분은 온전히 그의 것이니까.
기업은 공동체이지만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기도 함. 공장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곳이지만 적어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는 ‘함께’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는 곳. 마르크스가 자본가적 지휘의 이중성이라는 말로 지적했던 것이 바로 이것.
‘함께’의 이유가 ‘착취’에 있는 한에서는 ‘함께’가 불가능. 사회적 생산, 공동의 생산이 사적 소유를 위한 것인 한에서는 공동체가 성립할 수 없음. 노동자들의 노동을 자본가가 구매한 상품의 소비과정으로 보는 한에서는 코뮨이 될수 없음. 가축에게 사료를 주는 것과 동료와 빵을 나누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
‘함께’를 제공하고 ‘함께’ 생산하지만 ‘함께’를 수탈하는 이것은 ‘함께’에 대한 배신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함께’를 무상으로 취한다는 점을 지적, 자본가는 “노동자가 사회적 노동자로서 발휘하는 생산력”에 대해서는 지불하지 않음
이 생산력은 노동자가 개인일 때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자본가가 이들을 모아 조직하고 배치할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니, 사람들 눈에는 그리고 누구보다 자본가의 눈에는 이것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에 내재하는 생산력”으로 나타남
○ 거인 노동자의 몫은 어디에?
거인 노동자의 임금은 기본적으로는 자본가의 차지. 눈에 띄는 것은 ‘기능자본가’ 역할을 수행하는 최고경영자들의 연봉. CEO의 지휘 및 감독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지, 왜 그만큼의 급여를 받아야 하는지
실제로는 이사회에서 임의대로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 CEO 본인이 자기 임금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 게다가 대주주들로서는 잉여가치 생산, 다시 말해 수익을 내는 데 경영자가 얼마나 유능했는지, 또 주가 상승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볼 뿐. 생산력을 증대시켰든 비용을 절감했든 수익을 내는 데 기여했으면 그만
추가 생산력을 실제로 발휘한 것은 노동자들. 그들이 결합하면서 탄생한 거인 노동자의 노동. CEO에게 지급된 어마어마한 연봉은 이 거인 노동자가 받아야 할 몫, 다시 말해 다수의 노동자들이 거인 노동자로서 수행한 노동의 몫을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대신 CEO에게 지급한 것. 자본주의적 감독노동에 대한 대가로, 수익 창출에 대한 유능함을 보상하기 위해서
○ 왕의 사업과 자본가의 사업
마르크스는 협업 즉 “동일한 노동과정에 다수의 임금노동자를 동시에 고용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을 이룬다”라고 함
그런데 그는 여기서 주의를 촉구. 자본주의적 생산이 협업을 전제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협업의 발전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것. 자본주의적 협업은 전통적 협업의 발전된 형태가 아님. 오히려 전통적 협업을 가능케 한 사회질서가 해체되면서 자본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협업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함
왕의 사업과 자본가의 사업은 전혀 다른 사회형태 안에서 이루어짐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전통적 협업의 기초. 왜 사람들이 함께 일했는가. 서로가 타인이 아니었으니까. 같은 종족, 같은 공동체였으니까. ‘함께’가 전제되어 있음. 사람들을 묶고 있는 끈이 이미 존재.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 아니라 생산조건도 전통적 공동체의 생산수단들은 개인 재산이 아니라 공동체의 재산
전통적 협업은 생산자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것과 생산조건을 공유하는 것에 근거
이 두 가지가 자본주의적 협업에서는 존재하지 않음. 자본주의적 협업은 한편으로 ‘자유로운 임금노동자’ 즉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개인들을,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노동력을 구매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로서 자본가를 전제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협업은 과거 협업을 발전시키거나 극복하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소규모 농민경제(Bauernwirtschaft)와 독립수공업(길드 형태를 취하든 그렇지 않든)에 맞서 발전되어온” 것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에 협업을 놓기는 했지만 협업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초기 형태라고 말하기보다는 기본 형태라고 말함
협업은 분업이나 기계제 대공업이 발전하지 않았을 때의 생산형태이기도 하지만, 분업이나 기계제 대공업이 발전했을 때에도 기본이 되는 생산형태이기 때문
“협업은 언제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 형태”
3. 손이 된 인간-매뉴팩처의 노동자들
○ 매뉴팩처, 손으로 하는 일
마르크스는 협업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정 단계를 특징짓는다고는 보지 않음
분업이나 기계가 발전하지 않았던 자본주의 초창기에 협업은 지배적 생산형태였지만, 분업이나 기계가 충분히 발전한 경우에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은 협업이니까
매뉴팩처는 주요한 노동수단이 사람의 손이라는 점에서 단순협업과 차이가 없음
기술적으로도 별로 달라진 게 없음. 규모가 커졌을 뿐 길드와도 크게 다르지 않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함께 일하게 하면 곧이어 어떤 변화가 생겨남
분업은 생산과정에 투입된 다수의 노동자가 똑같은 일을 하지 않고, 일을 나누어 맡는 것, 이 점이 본격적 의미의 매뉴팩처와 단순협업의 차이
본격적 의미에서 매뉴팩처는 ‘분업에 기초한 협업’
○ 매뉴팩처의 두 가지 기본 형태
마르크스에 따르면 매뉴팩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생겨남
하나는 서로 독립된 수공업 부문의 노동자들을 하나의 작업장에 모은 경우
마르크스는 마차를 생산하는 매뉴팩처를 예로 듦, 작업을 분리하고 순차적으로 배열하고 작업대마다 사람들을 배치해 일하는 것이 효과적, 작업공간이나 조명 등 생산수단의 절약 효과도 크고, 부품들의 이동거리가 줄기 때문에 시간이 줄고 이동에 필요한 노동력도 아낄 수 있음
매뉴팩처가 생겨나는 또 다른 방식은 동일한 업종의 수공업자들을 한데 모은 경우
마르크스가 든 예는 바늘 제조업, 생산수단의 절약은 물론 한 가지 작업만 특화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최소화되고 무엇보다 경험 축적으로 숙련이 생김
마르크스는 전자를 ‘이종적 매뉴팩처’(heterogene Manufaktur), 후자를 ‘유기적 매뉴팩처’(organische Manufaktur)라 부름
이종적 매뉴팩처와 유기적 매뉴팩처는 기계제 대공업으로 전환 과정이 아주 다름
바늘 제조업처럼 밀접히 연관된 일련의 작업들을 순차 진행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움
시계 제조업처럼 공정이 다른 수십 가지 부품을 생산한다면 이것을 하나의 기계 시스템에 통합하기가 어려움, 때문에 오랫동안 기계제 대공업으로 전환될 수 없었음
전체적으로 보면 두 경우 모두 저마다의 경로를 거쳐 기계제 대공업으로 전환됨
○ 부분노동자, 손이 된 인간
매뉴팩처에는 단순협업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있음, 바로 노동자들의 변형
매뉴팩처에서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자의 죽음과 전체적인 거인 노동자의 탄생이 실재적이고 항구적인 의미를 갖게 됨
분업 체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이 ‘부분노동’이 된다는 뜻,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매뉴팩처의 노동자를 ‘부분노동자’(Teilarbeiter)라고 부름
노동은 이웃 노동자의 노동과 더해질 때만 의미가 있고, 생산물은 이웃 노동자의 생산물과 더해질 때만 의미가 있음. 노동도 노동생산물도 독립해서는 의미가 없음
이것은 노동자의 성격에도 그대로 들어맞음, ‘부분노동자’는 온전한 노동자가 아님, 그는 노동자라기보다는 노동자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음
“다양한 세부노동자들(Detailarbeiten)이 결합된 전체노동자(Gesamtarbeiter)는 도구로 무장한 자신의 많은 손들 가운데 한 손으로는 철사를 만들고, 동시에 다른 손이나 도구로는 철사를 똑바로 펴며, 또 다른 손으로는 그것을 자르거나 뾰족하게 한다.”
부분노동자가 되는 순간 이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일할 수 없음, 전체 리듬에 맞게 부분노동이 조절되어야 함. 뿐만 아니라,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아주 일면적 존재가 되고 맘.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생각하며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만 생각, 그냥 눈앞의 일을 주어진 시간 안에 처리하는 것에만 최적화
노동자는 이렇게 독립성을 잃어가는 만큼 유능한 매뉴팩처 노동자가 됨, “그 출발점이 어떤 것이든 마지막 모습은 똑같은 것, 즉 기관(Organe)이 인간인 하나의 생산 메커니즘”으로 귀착, 매뉴팩처에서 노동자는 전체 생산 메커니즘의 한 기관일 뿐
다른 기관, 다른 기능은 방해만 될 뿐, 괜히 머리가 달려서 딴 생각을 하게 하고, 괜히 위장이 달려서 배고프게 하고, 괜히 생식기관이 달려서 화장실에 가야 함
반면 손은 엄청 발전 소위 달인의 경지에 이름, 그는 이제 손으로 존재하는 인간임, 전체 인격이 손 하나로 축소됨, 이것이 바로 ‘기관’이 된 부분노동자의 모습
○ 500개의 망치-생산성 증대의 비밀
매뉴팩처 노동자는 유적 능력은 잃지만 특화된 전문 능력을 가짐, 동일한 단순작업을 평생 수행함으로써 “일면적이고(einseitiges) 자동화된(automatische)기관”으로 변형됨
매뉴팩처의 전체 공정은 이런 달인들의 노동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동생산력이 단순협업의 생산력보다 높음
이런 부분노동자들의 결합으로 탄생한 전체노동자는 모든 부분노동에 정통한 ‘거대 장인’과 같음. 살아 있는 기관들(부분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인조인간. 마르크스는 이 거대 존재를 “살아 있는 메커니즘”(lebendigen Mechanismus)이라고 부름
여기에 생산성을 높이는 한 가지 요소가 더해지는데, 바로 도구. 부분노동이 특화되고 전문화되는 만큼 도구들도 분화됨. 해당 노동에 최적화된 도구가 개발되는 것
이와 관련해 마르크스는 주석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인용했는데, 다윈에 따르면 여러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관은 변이가 적음, 그러나 특정 기능에 최적화된 경우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가 없음
매뉴팩처 시대에는 각각의 부분노동에 최적화된 도구들이 많이 개발됨, 마르크스에 따르면 당시 버밍엄에서만 약 500종에 달하는 망치가 생산됨, 망치로 두드리는 일만 해도 얼마나 여러 가지로 분화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음
○ 살아 있는 메커니즘
매뉴팩처 노동자들의 숙련은 도제가 장인이 되는 게 아닌 인간이 기계처럼 되는 것
노동과 노동이 서로 맞물려 있음, 노동의 이런 성격 때문에 매뉴팩처 노동자는 자기만의 스타일이나 속도를 고집할 수 없음, 이런 이유로 매뉴팩처에서는 “독립수공업이나 단순협업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노동의 연속성, 일률성(획일성), 규칙성, 질서(순차성), 그리고 특히 완전히 다른 노동강도가” 만들어짐, 완제품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부분노동의 양과 시간이 기술적으로 정해지는 것
매뉴팩처 생산공정에 대한 기술적 설계는 어떤 기능의 노동자를 얼마만큼 고용할지도 규정, “매뉴팩처적 분업은 사회적 노동과정의 질적 편제와 더불어 양적인 규칙과 비율까지 발전시킨다.”
마르크스는 매뉴팩처를 ‘하나의 생산 메커니즘’이라고 봄. 노동의 연속성, 일률성, 규칙성, 질서가 나타난다는 것은 부분노동들이 하나의 메커니즘을 이룬다는 뜻, 생산공정 전체가 수학적 비율과 기술적 법칙에 따라 구성된다는 말
매뉴팩처에서 생산은 인간적 부분노동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짐, 인간협업이 기본. 여기서 기계는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작업도구거나(망치보단 좀 크고 복잡하지만) 기껏해야 인간노동을 고려해 분할한 노동의 한 부분을 인간 대신 수행하는 장치였을 뿐
그러나 기계제 대공업에서의 기계는 정말 ‘기계’가 됨. 더 이상 인간 노동자의 작업에 동원되는 도구가 아니며 인간처럼 일하지도 않음. 기계는 기계식으로 일함
기계제 대공업에서 작업 분할, 작업량, 작업속도는 모두 기계적 고려를 바탕으로 정해짐. 작업의 연속성, 일률성, 규칙성, 질서를 보장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기계시스템
‘기계제’는 도구의 진화로 출현한 게 아님. 기계 시스템은 500개로 분화한 망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말.
기계제 대공장에서 쓰는 기계의 선행 형태인 기계는 매뉴팩처의 망치나 제분기가 아니라 ‘전체노동자’. 다시 말해 기계제 대공장의 기계는 제분기 같은 개별 기계가 변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메커니즘’으로서 ‘전체노동자’가 변형된 것
○ 노동의 등급화와 자본가가 얻는 이득
전체노동자가 살아 있는 기계라면 부분노동자는 살아 있는 부품, 각각의 부품이 다른 기능을 수행하듯 부분노동자들도 저마다 다른 능력을 발휘해야 함. 어떤 작업은 큰 물리적 힘을 필요로 하고 어떤 작업은 민첩성을 필요로 하며 어떤 작업은 고도의 정신적 집중을 필요로 함. 작업이 나뉘면 거기에 맞게 노동자들이 배치될 것임
한 사람을 온전한 인격체라는 시각에서 보면 부분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일면화된 존재,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지만, 전체노동자의 시각에서 보면 가장 효율적이고 유능한 기관을 갖게 되는 것. “부분노동자의 일면성과 불완전성조차 전체노동자의 사지로서는 그 완전성에 이르는 것”
그런데 부분노동자들이 수행하는 기능 중에는 쉽게 습득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있는가 하면 오랜 숙련을 거쳐야 하는 복잡한 것도 있음. 기계 부품으로 따지자면 쉽게 대체할 수 있는 단순 부품이 있는가 하면 구하기 어려운 고급 부품도 있음
매뉴팩처가 이런 구분을 촉진, 매뉴팩처는 노동의 종류만이 아니라 등급의 분화도 촉진. 고급노동, 복잡노동이 있는가 하면 저급노동, 단순노동이 있음(임금도 달라짐)
노동의 종류가 그렇듯 등급도 고착화되는 경향, 평생을 단순노동 종사자, 달리 말하면 평생을 미숙련공으로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 이는 과거 독립수공업자나 길드의 도제와는 다름. 평생을 도제로 살고자 하는 도제는 없을 것임
미숙련은 ‘아직’ 숙련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 일시적 상태이지 영구적 상태가 아님. 하지만 매뉴팩처에서는 미숙련공이 숙련공만큼이나 누군가의 배타적이고 항구적인 지위가 됨. 마치 값싼 소모품과 같음. 항상 필요하지만 중요한 부품은 아닌 것
자본가에게는 이런 ‘분할’이 큰 이득을 줌. 미숙련공의 경우에는 숙련에 필요한 교육비가 들지 않고, 숙련공의 경우에도 동일한 부분노동만 반복하기 때문에 여러 일을 해야 하는 독립수공업자에 비하면 교육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듬.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가 줄어듬. 이는 노동일 중 필요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잉여노동시간이 늘어난다는 의미, 상대적 잉여가치가 생겨나는 것임
4. 사회적 분업과 매뉴팩처 분업 그리고 자본주의
○ 매뉴팩처 시대의 학자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첫 문장 “노동생산력의 대단한 향상, 그리고 어떤 노동에서든 발휘되고 적용되는 대부분의 숙련과 기교, 판단은 분업의 효과인 듯하다.” 분업 덕분에 인간의 재능이 개발되었고 처분 가능한 생산물의 양이 크게 늘었다는 것, 스미스는 이 작은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회 전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 스미스는 사회 전체의 분업도 매뉴팩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것
스미스가 분업에 주목한 것은 생산력의 증대 때문만은 아님,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업이 ‘인간본성에 있는 어떤 성향(propensity)’, 즉 교환 성향의 산물이라는 점. 스미스에 따르면 교환 성향은 인간에게만 있고, 경제활동은 이 교환 성향에서 나옴, 인간만이 교환을 통해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
스미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인간의 교환 성향은 분업을 발전시켰고 분업은 인간의 재능과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음. 자본주의 매뉴팩처란,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인간본성에서, 특히 인간의 교환 성향에서 필연적으로 발전해 나올 수밖에 없는 분업형태임. 즉 매뉴팩처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분업이 발전한 결과. 인간은 여러 영역, 여러 차원에서 이런 분업을 발전시켜왔음. 개별 작업장에서도, 사회 전체에서도
정말 자본주의사회의 매뉴팩처 분업이나 사회적 분업이 자연발생적 분업의 발전 형태일까? 또 자본주의사회에서 매뉴팩처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과 동일한 것일까?
마르크스는 “그는 분업에 대해 단 하나의 새로운 명제도 내놓지 못했다.” 그럼에도 “분업을 강조했다는 점 때문에 매뉴팩처 시대를 총괄하는 정치경제학자로 불린다.”
마르크스는 교환을 통해 생존을 해결하는 개인이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것임을 지적, 스미스는 자기 시대의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함. 자본주의사회의 분업이 과거 형태의 발전이기는커녕 그것의 얼마나 철저한 해체인지를 이해하지 못함
○ ‘사회적 분업’의 두 가지 발생 형태
매뉴팩처 분업과 사회적 분업의 관계
사회적 분업의 발생과 관련해 두 가지 기본 형태,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분업이 확대되고 심화되는 경우, 또 다른 발생 형태는 다른 공동체와 만나 교역을 하는 경우
첫 번째 경우는 동일한 것에서 차이가 생겨난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차이 나는 것들 사이에 유대가 만들어진 것
사실 두 형태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 첫 번째 경우는 처음에는 단순한 기능 분화였던 것이 나중에 독립된 업종이 되고 생산물을 상품으로 교환하는 상태에 이른 것
그런데 교환은 공동체 성원들이 서로를 더는 한 몸으로 보지 않는 사태,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를 타인으로 보는 사태의 출현과 함께 일어남, 사람들이 서로를 타인으로, 마치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바라보듯 하는 것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교환관계가 공동체 안으로 파고들었기 때문, 즉 다른 공동체와의 상품교환이 공동체 내의 상품교환 그리고 생산의 사회적 분업을 자극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됨으로써 자본의 근대적 생활사가 시작된다”
마르크스는 이 역사의 기술에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을 간단히 언급
하나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 마르크스는 이를 “모든 발전한 분업 그리고 상품교환을 통해 매개되는 분업의 토대(Grundlage)”라고 말함. 일종의 기원적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사회의 경제사 전체를 이 둘의 대립 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봄
또 하나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인구의 크기와 밀도. 일정 수 이상의 노동자가 모여야 매뉴팩처의 분업이 가능한 것처럼, 상품교환이 매개하는 사회적 분업도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가 모여 살았을 때 가능함. 물론 이때의 인구밀도는 인구수에만 달린 게 아님. 교통이 발전하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더라도 밀도는 높아짐
서구에서 사회적 분업의 발전은 교통의 발전과 함께 고려되어야 함
○ 사회적 분업과 매뉴팩처의 분업
매뉴팩처는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의 하나
자본주의에서 둘은 긴밀히 연관됨. 서로가 서로의 발전을 전제하고 또 촉진
먼저 매뉴팩처는 상품교환이 매개하는 사회적 분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때 출현.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의 근대적 생활사”가 “16세기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의 형성”으로 시작됨
하지만 반대 방향도 성립. 매뉴팩처가 점차 발전할수록 그 때문에 사회적 분업도 촉진되니까. 특히 노동도구가 분화하면 그 도구를 생산하는 산업도 분화
그러나 매뉴팩처의 분업과 사회적 분업이 서로 긴밀히 연관된다고 해서 둘이 같은 것은 아님. 마르크스는 둘이 “정도의 차이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봄
우선 나뉜 일을 매개하는 것이 전혀 다름. 사회적 분업의 경우, 매개하는 것은 ‘상품’. 그러나 매뉴팩처에서 한 부분노동자가 다른 부분노동자에게 넘겨주는 것은 상품이 아닌, 원료에서 완제품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있는 ‘중간물’
상품으로 넘기는 것과 중간물로 넘기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 넘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 이 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등이 모두 달라짐
매뉴팩처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것 바로 자본가. 이들은 모두 동일한 자본가한테 고용된 사람들. 이들의 동일성은 자본가의 동일성, 더 엄밀하게 말하면 자본의 동일성. 이들은 모두 동일한 자본(그중에서도 가변자본)의 부분들임
상품이 매개하는 관계와 동일한 자본가에게 소속된 관계. 이 차이는 분업을 규제하는 법칙과 그 법칙이 관철되는 양상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듬
상품으로 매개되는 사회적 분업은 독립된 다수의 생산자를 전제, 이들은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음. 여기서 ‘사회적’은 서로를 독립된 타인으로 여긴다는 뜻
‘사회적 분업’하에서는 특정 업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사해야 하는지 미리 알 수가 없음, 우연과 자의성이 개입. 우연과 자의성이 개입한다고 해서 법칙이나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님. 각각의 영역이 적절한 균형을 찾아감. 이는 한편으로 제품마다 충족해야 할 사회적 욕구(수요)는 양적으로 다르지만 어떤 내적 유대가 그 상이한 욕구들을 하나의 체계에 묶어두기 때문
그런데 이 법칙, 이 결정은 사전에 알 수 있는 게 아님. 외적 경쟁을 통해 사후적으로 판명 나는 법칙임. ‘경쟁의 외적 강제법칙’과 같음. 사회적 차원에서 분업의 균형점, 업종이나 업체 간의 적절한 비율을 규정하는 법칙은, 마치 시장가격이 그런 것처럼 ‘사후적’으로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상당히 ‘폭력적’으로 관철됨
매뉴팩처 분업은 사회적 분업과 정반대.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 매뉴팩처 분업에서는 이것이 자본가의 계획 속에, 내적 ‘비례와 비율의 철칙(eherne Gesetz)’에 따라 사전에 정해져 있음. 분업 중인 노동자들은 사회적 분업의 독립된 생산자와는 지위가 완전히 다름.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철저히 예속된 존재
작업장 안에서 자본가는 자신만의 ‘독자적 형법’을 가지고 태만과 낭비의 범죄를 추궁하는 전제군주. 그러나 사회에서는 ‘뒷일은 난 몰라’ 하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행동하며 어떤 사회적 규제에도 반대하는 아나키스트
마르크스는 두 분업에 대해 부르주아가 보이는 상반된 태도를 “매뉴팩처의 분업, 즉 노동자들을 세부적 작업에 평생을 묶어두고, 이들 부분노동자들을 자본의 통제 아래 무조건적으로 예속시키는 것을 노동의 생산력을 높이는 노동의 조직화라며 찬미하는 부르주아적 의식은 사회적 생산과정에 대한 일체의 의식적·사회적 통제나 규제에 대해서는 개별 자본가의 신성불가침의 소유권과 자유, 자율적인 ‘독창성’에 대한 침해라고 목청 높여 비난한다.” “참 특이하다.”(sehr charakteristisch)고 꼬집음
한편으로는 공장 제도를 그렇게 찬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 노동을 사회적 차원에서 계획하고 분배하자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사회 전체를 집단 공장으로 만들려 하느냐고 게거품을 물면서 반대했으니까
○ 분업의 형태는 시대마다 다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매뉴팩처의 분업과 사회적 분업의 관계는 다른 사회형태에서는 보기 어려움.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형태들에서 사회적 분업과 작업장 분업이 맺는 관계는 자본주의에서 맺는 관계와 정반대. 사회적 분업의 조직과 관련해서는 강력한 권위가 행사되는 데 반해 작업장 분업의 조직에서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고 우연적이며 산발적이라는 것
작은 공동체에서도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지만 생산물을 상품 형태로 거래하지는 않음. 사회적 분업은 신분과 전통에 따라 엄격하게 결정되지만, 작업장에서는 각자 알아서 일하는 구조. 마르크스는 이를 “자족적 생산의 총체”(Produktionsganze)라고
이 ‘자족성’은 한편으로 ‘독립성’을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변성’을 나타냄. 자족적이라면 굳이 변할 이유가 없으니까. 마르크스는 소위 말하는 ‘아시아 사회의 불변성의 비밀을 풀 열쇠’가 여기에 있다고, 왕조가 바뀌고 정치체제가 바뀌어도 아시아 사회의 기본 단위인 촌락공동체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 이는 곧바로 아시아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음. 아시아 사회는 외적 강제가 없는 한 내적인 변화 동력이 없다는 식의 주장
자본 축적과 생산 확장의 계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중세 서구의 길드도 마찬가지. 중세에 서구의 도시는 사회적 분업을 관장하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음. 길드에 관한 법률(Zunftgesetze)에 장인이 고용할 수 있는 직인과 도제의 수가 규정되어 있었고, 생산규모를 함부로 키울 수가 없었음
작업형태에서도 길드는 매뉴팩처와 크게 다름. 길드의 직인이나 도제도 특정 시기에 특정한 일을 맡을 수 있지만, 도제는 제품의 생산에 관한 모든 일을 결국에는 다 익혀야 하고, 길드의 작업도구도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것. 길드에서 일하는 장인과 직인은 생산물만 상인들에게 팔 뿐 노동력은 팔지 않음.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길드에는 “매뉴팩처의 일차적 토대”(사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차적 토대’)가 결여
매뉴팩처는 길드의 발전 형태가 아니라 길드 체제의 해체로 성립한 생산형태
사회적 분업을 규정하는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었을 때 매뉴팩처 분업도 가능해짐
○ 자본의 부속물이 된 노동자
매뉴팩처 분업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특유의(spezifische) 창조물”
협업도 분업도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담고 있지 않음. 심지어 ‘분업에 기초한 협업’조차 처음에는 자본주의와의 관련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음
매뉴팩처가 자본주의적 생산형태로서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함(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의식적이고, 계획적이며, 체계적인 형태”가 된 것은 자본주의에 들어서면서임
자본주의적 생산형태로 등장했다는 것은 자본의 원리 내지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뜻, 즉 잉여가치 더 좁혀서는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방법인 것
잉여가치의 생산방법이라는 것은, 그걸 뭐라 부르든 상관없이, “노동자를 희생시켜 자본의 자기증식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뜻
○ 매뉴팩처 시대에 탄생한 학문 ① 산업보건학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과정
매뉴팩처는 노동자의 특수한 재능 한 가지만 집중 육성하고 평생 그 일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노동자를 ‘불구’ 내지 ‘기형’(Abnormität)으로 만듦, 이는 생명력의 질적 소진
매뉴팩처는 노동자의 한 기능을 얻기 위해 다른 기능들의 발전을 억누름으로써 정신과 신체의 다면적 발전을 가로막음. 가죽 하나 얻으려고 동물을 통째로 죽이는 꼴
뉴팩처에서 일하면 한편으로 노동자의 신체가 변형됨, 일을 오래하면 그렇게 됨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의 정신에도 문제가 생김. 매뉴팩처는 노동자들을 사유(思惟)할 수 없는 존재, 사유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듦
애덤 퍼거슨(A. Ferguson)에 따르면 “매뉴팩처는 사람이 정신을 가장 적게 쓸 때, 즉 작업장이 인간을 그 부품으로 하는 하나의 기계로 간주될 수 있을 때 가장 번창” 스미스도 비슷하게 말함, 매뉴팩처에서 단순노동으로 평생을 보내는 인간은 “지성을 사용할 기회가 없”기에 “한 인간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우둔하고 무지해진다”라고
매뉴팩처 시대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불구화는 사회 진보에 따른 부수적 손실이라 보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 “개인을 그 생명의 뿌리에서부터 움켜쥐었”음
이런 상황에서 바로 산업보건학(산업병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 직업과 질환의 연관이 이 시대 사람들의 눈에 비로소 들어온 것.
그 선구적 인물인 베르나르디노 라마치니(Bernardino Ramazzini)가 책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계기, 어느 날 하수구를 청소하러 온 노동자가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서둘러 일을 했는데, 왜 그렇게 서두르냐고 물으니 거기 오래 머물면 시력을 잃는다고 대답. 실제 조사해보니 하수구 청소 노동자 대부분이 눈이 충혈되고 그렇게 몇 년을 일한 다수가 실제 시력을 잃었음. 노동자의 직업과 병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드러난 것
○ 매뉴팩처 시대에 탄생한 학문 ② 정치경제학
정치경제학은 사회를 바라보는 특정한 눈,사회를 어떻게 편제해야 생산성을 높이고 가치의 생산과 자본 축적에 유리한지를 계산하고 평가하고 제안하는 과학적 눈의 탄생. 사회적 분업을 교환가치(가치)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것. 이런 시선은 사회적 분업에 대해 말한 근대 이전의 저술가들, 특히 고대 저술가들과는 완전히 다름
분업이 더 많은 물건을 더 훌륭하게 더 쉽게 만들게 해준다는 플라톤의 말이나, 분업이 생산자의 기술 수준을 높여주며 도시가 커지면 즉 시장이 커지면 분업이 더 촉진된다는 크세노폰의 말은 모두 ‘사용가치’에 대한 것. 분업을 통해 사용가치의 양과 질을 모두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 이것은 ‘교환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인 매뉴팩처에서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이유와는 전혀 다른 것
요컨대 고대 저술가들이 분업을 권장한 것은 더 좋은 물건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다는 이유였지 더 많은 돈을 벌려는 목적이 아니었음. 플라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돼지들의 나라”, “호사스러운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대 정치경제학자들이 하나로 다루는 가정관리술(oikonomikos)과 화폐증식술(재산증식술, chrēmastikē)을 엄격히 구분, 전자만을 ‘진정한 부’라고 했고, 후자에 대해서는 남을 희생시켜 무한한 부를 쌓으려는 자연에 반하는 짓이라고 비난
매뉴팩처 시대,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시대에 탄생한 정치경제학자들은 재산의 증식, 자본의 축적이라는 시각에서 물건을 어떻게 생산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고민, 매뉴팩처 분업과 사회적 분업의 바람직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 ‘학문’으로 제시
고대인들이 반자연적이고 부도덕하다고 보는 관점에 입각해 진리를 논하는 하나의 학문, 하나의 과학이 탄생한 것
○ 잉여가치 생산의 논리적 순서에 대한 오해
‘상대적 잉여가치’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부딪힌 한계에 대한 논리적 극복. 자본의논리전개과정상 ‘다음 단계’에 해당. 하지만 ‘역사적’으로도 그런 것은 아님
매뉴팩처 시대는 노동일 연장이 한계에 봉착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일이 한창 늘어나던 때. 자본의 논리 전개상으로는 절대적 잉여가치 다음에 상대적 잉여가치가 오지만 역사적으로는 두 가지가 함께 나타남. 자본가는 노동일 연장을 통해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늘리면서 동시에 매뉴팩처 분업을 통해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도 늘리고 있음. 상대적 잉여가치가 나타나면 절대적 잉여가치가 사라지는 게 아님. 지금도, 그리고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절대적 잉여가치는 존재할 것임
○ 공장 밖을 서성이는 그림자
매뉴팩처에서는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짐, 특히 숙련노동자들의 힘이 셌음
숙련노동자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자본가들의 조치에 강하게 저항
‘자본가들의 친구’ 앤드루 유어(A.Ure)의 말, “노동자는 숙련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제멋대로 되고 다루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매뉴팩처 시대 내내 노동자들의 규율 부족에 대한 불평이 끊이지 않음” 자본가들의 성에 찰 정도로 순종적이진 않았던 것.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따라야 하는데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때로는 은근히 저항하니까
구빈원은 노동자들의 심성을 뜯어고치는 윤리적 공간. 그런데 이 구빈원의 시대가 매뉴팩처의 시대. ‘구빈원’을 ‘공포의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커닝엄(J. Cunningham)이 이 시대 끝의 사람. 마르크스는 커닝엄의 책 『무역과 상업에 관한 에세이』(1770)를 인용 “어떻게 해서든 질서가 확립되어야만 한다.” 매뉴팩처에는 ‘질서’가 없다. 질서, 질서, 질서 … 이는 매뉴팩처 시대 자본가들의 마음속 슬로건
그런데 이 단어는 ‘1848년 혁명’과 관련해 마르크스가 가장 분개했던 단어 중 하나. ‘질서’는 1848년 프롤레타리아트의 6월 봉기를 진압하고, 곧이어 부르주아 공화파까지 몰락시키며, 강력한 부르주아 독재를 실시한 당파의 이름
마르크스는 ‘질서’에 대해 1848년 6월 부르주아 군대의 산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으며” 냈던 소리라고, 1789년 혁명 이래 어떤 혁명도 ‘질서’ 자체를 암살하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1848년 6월 혁명이 이 ‘질서’ 자체를 침범했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은 이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부르주아사회, 자본주의사회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가르치는 단어가 ‘질서’
자본가는 노동과정에서 노동자가 행사하는 한 방울의 권력도 용납하고 싶지 않을 것, 하지만 매뉴팩처의 생산형태에서는 이것이 어려움. 메커니즘 자체가 ‘살아 있는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 살아 있는 존재에게 절대적 복종은 불가능
연속성, 일률성, 규칙, 질서 등에 대한 요구는 사실상 죽은 존재에 대한 요구라고 할 수 있음. 그것을 살아 있는 존재, 특히 인간들로 구성된 생산 메커니즘에서 관철하려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덜컹거림이 생길 수밖에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는 과학적 관리를 통해 노동자들을 소위 ‘훈련된 원숭이’로 만들고자 했던 미국 기업가들이 실망스러운 결과에 대해 갖게 될 심정을 이렇게 표현, “‘재수 없게도’ 노동자는 여전히 인간이다.”
마르크스는 작업장에서 ‘질서’를 염원한 커닝엄의 외침이 있은지 66년 만에 유어의 입을 통해 그 염원의 성취가 선포되었다고, “아크라이트가 그 질서를 만들어냈다.”
매뉴팩처 작업장 안에는 신체가 뒤틀리고 정신이 창백해진, 아직은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음. 그런데 작업장 바깥에 서성이는 그림자, 새로운 노동자, 새로운 노예가 자본가에 이끌려 들어오는 중. 그는 말이 없는 ‘기계’
부록노트
Ⅰ. 도시와 농촌의 분리
마르크스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를 두고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이라고 함. 둘의 대립은 인류가 야만(Barbarei)에서 문명(Zivilisation)으로, 부족(Stammwesen)에서 국가(Staat)로, 지역(Lokalität)에서 전국(국민, Nation)으로 나아가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문명의 전 역사를 통해 나타난다고 봄. 특히 도시의 등장을 국가와 자본의 탄생을 가능케 한 기원적 사건처럼 적음
“도시와 농촌의 분리는 또한 자본과 토지 소유의 분리로서, 즉 오직 노동과 교환 속에서만 자신의 토대를 갖는, 토지 소유로부터 독립된 자본의 존재 및 발전의 출발점(Anfang)으로 파악”, 도시와 농촌의 대립 운동으로 서구의 경제사를 요약
마르크스에 따르면 ‘아시아적 형태’는 아직 도시와 농촌이 분리되지 않은 사회
고대 로마에서 볼 수 있는 ‘고대적 형태’는 도시 중심의 사회. 농촌을 영토로 삼았지만 삶은 도시에 집중. 도시의 시민들만 토지를 가질 수 있었고 또 토지를 가진 자가 시민. 전형적인 도시의 삶이지만 그 기반은 토지 소유와 농업에 두고 있는 형태
이와 달리 게르만 형태는 농촌에서 출발. 혈통, 언어, 역사 등에 따라 공동체를 유지하지만 국가를 이루진 않음. 토지 소유자들, 가족들, 가문들 사이의 회합이나 동맹 등이 있을 뿐. 이 게르만 형태가 중세 봉건사회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사회형태
마르크스에 따르면 서양의 중세도시들은 고대도시를 전승한 게 아님. 중세의 도시들을 만든 것은 농촌에서 온 신분이 해방된 농노들. 주로 수공업에 종사
중세도시들에도 자본이 생겨났지만 크게 성장하진 못함. 상업유통망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길드를 관장하는 규약 자체가 성장을 가로막음
그러다 교류(교통)가 확장되고 도시들 사이에 교류가 나타나면서, 생산과 유통이 도시를 넘어 세계적으로 교류가 확장되고 이로 인해 점차 대규모 생산이 요청되면서 중세 길드 체제와는 다른 생산형태가 나타남.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의 하나인 매뉴팩처. 매뉴팩처들은 길드의 규약에서 자유롭고 어느 정도 노동력이 모여 있는 농촌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고, 농민들 역시 매뉴팩처를 새로운 도피처로 삼음
최초의 매뉴팩처가 도시 길드의 업종이 아니라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틈틈이 부업으로 해오던 방적과 직조에서 시작, 매뉴팩처가 세워진 지역은 금세 번창한 도시가 됨. 마르크스가 근대의 역사(시작)를 ‘농촌의 도시화’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맥락
Ⅱ. 마르크스의 인도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후 인도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 하나는 “인도인 자신이 충분히 강해져서 영국의 멍에를 완전히 벗어던지게 되는” 것. 영국에서 받은 것을 영국을 향한 무기로 활용하는 것. 다른 하나는 “대영제국 자체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재의 지배계급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는 것”. 둘 모두 혁명이지만 그 결이 다름. 전자는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탈식민주의 혁명이고 후자는 식민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탈자본주의 혁명. 전자의 혁명에서는 식민지 인도인 모두가 해방의 주체인 반면 후자의 혁명에 대해서는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주체
마르크스는 분명히 서구 자본주의사회에서와는 다른 혁명의 주체를 본 셈. 그러나 세계혁명과 관련해 마르크스는 탈식민주의 투쟁의 비중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음. 즉 ‘인도인이 강해져서 영국의 멍에를 벗어던지는’ 일의 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바꿀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음. 그는 미래 혁명은 아무래도 “가장 선진적인 각국 인민의 공동관리” 형태로 이루어질 때 부르주아 시대와는 다른 세계질서가 가능하다고 봄. 인도가 아니라 영국 등 서구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
아시아적 형태, 로마적 형태, 게르만적 형태는 동시적으로 다른 지역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형태들
마르크스가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현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들’을 ‘진보하는(progressive) 단계들’로서 제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구의 역사에서 지배적 사회형태 내지 생산양식의 순서가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을 통해 보건대 이것이 필연적 경로일 수는 없음
마르크스는 ‘아시아적 형태’의 다양한 변형을 소개, 인도 공동체와 같은 부류로 동유럽의 슬라브족 공동체, 북유럽의 켈트족 공동체, 남미의 페루 공동체 등을 듦
마르크스는 역사적 구성체는 지질학적 지층들처럼 여러 유형으로 이루어진 계열이며, 서구 사회의 경험을 러시아의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