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답을 구해본 사람은 안다. 삶이 내미는 첫번째 답이 침묵이라는 것을. 침묵은 막막했으며, 그 조용함에 익숙해 지는 것이 성숙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런 엄살을 부끄럽게 만드는 친구들이 있다. 침묵 속에서 삶을 길어 올리고, 희망을 길어 올리는 아이들, 소리 없는 세상에 익숙한 아이들이다. <글러브>는 청각장애우들의 배움터인 충주성심학교 야구부 이야기다.
김상남(정재영)은 프로야구 선수다. 한때 최고의 투수였다. 그러나 음주폭행 사건이 반복된다. 전성기가 지나 투구력은 떨어졌고, 팬들은 등을 돌렸다. 상남은 선수 제명위기에 처하자 궁여지책으로 청각장애우 팀의 임시 코치가 된다.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마음이 딴 데 있으니, 그가 성심 야구부 팀원을 대하는 태도는 불량하기만 하다. 그런데 겉돌기만 하던 상남이 성심 야구부의 열정에 점차 동화된다. 이제 목표는 전국대회 1승이다. 청각장애우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상남의 가슴은 다시 야구로 뜨거워진다.
<글러브>는 상남의 재활 일지이면서, 성심야구부의 도전기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 상남의 상태는 심각하다. 야구 선수가 술을 먹고 사람을 향해 야구배트를 휘둘렀다는 것은 스포츠 정신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런 상남이 스포츠의 의미를 되새기게 도와주는 성심야구부원은 상남에게는 오히려 치료자 격이다. 상남의 심리적 변화는 스포츠 드라마에서 낯설지 않다. 그러나 성심야구부의 도전은 감동에도 불구하고, 물음표가 찍힌다. 야구를 하기에는 불리한 조건들이 많지 않은가? 교장 수녀의 대사는 이런 의문을 드러낸다. “아이들이 잘 할 수 있는 걸 시켜야지, 왜 하필 야구입니까?”
성심야구부원들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 타구 소리를 못 듣고, 말로 주고 받는 팀플레이도 안 된다는 의미다. 유리한 조건에서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과연 최선의 판단일까?
어떤 분야에 유리한 조건을 타고나는 것을 ‘재능과 소질’이라 부른다. 반면 특정 분야의 기본과 기술을 연마하는 것을 ‘훈련과 노력’이라 부른다. 스포츠에서 재능과 노력이 합쳐지면 가장 성공적이다. 그러나 드물다. 그렇다면 재능과 노력 중에 어느 쪽을 높이 사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제공한 사람은 <사고방식: 성공의 심리학>의 저자인 심리학자 캐롤 드웩(Carol Dweck)이다.
우선, 스포츠에서 소질을 강조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예를 들어보자. “운동 감각은 타고 났어. 태어날 때부터 야구 선수라니까. 야구 신동이야.” 이런 말은 얼핏 최고 야구선수가 될 거라는 칭찬처럼 들린다. 그런데 효과 면에서는 어떨까? 이 말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일단 재능을 타고났으니 연습이 의미 없어 보인다. 더 나아가서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은 재능이 없다는 방증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더 나쁜 결과는 실패나 실수를 거듭할 때 생긴다. 실패를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소질의 부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는 뻔하다. 못 타고 났으니 포기하자는 마음이 생긴다. 선수뿐 아니라, 코치의 입장에서도 결과는 부정적이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선수가 수행이 나쁘면 더 소질 있는 사람을 찾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대로라면 코치는 더 나은 소질을 타고난 선수를 찾는데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한마디로 탁월한 사람을 구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인재 중심주의다. 사람이 타고난 소질 안에서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고정형 사고방식의 전형이다.
이번에는 노력을 강조하는 경우를 보자.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다”는 표현에는 은근히 부정적 의미가 있다. 죽기 살기로 해 봤자 될 사람 되고 안될 사람 안 되는데, 무얼 그렇게 아등바등 하냐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영리하게 빨리 배우는 사람과 늦어도 곰 같은 사람이 출발선에서는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와 시련이 닥치면 달라진다. 노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실패를 노력의 부족이라고 여긴다. 노력하고 훈련하면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실패가 끝이 아니라 도전의 기회가 된다. 끈기가 있다. 결과나 성과가 아니라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코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수가 노력을 통해 하나라도 더 깨닫고 배우게 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선수의 소질이 아니라 선수의 변화에 기뻐하게 된다. 전형적인 성장형 사고 방식이다.
<글러브>는 스포츠에서 성장형 사고 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소질이 최고라는 인재중심주의라면, 청각장애우들에게 야구를 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남은 팀원들을 향해 소리친다. “너희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적이다. 지는 것이 슬픈 게 아니다. 안되면 더 훈련하고 구르고 땀 흘리면 된다. 이기고 싶다면, 가슴으로 소리질러라. 우리가 왔다.” 스포츠를 통해 얻은 성장형 사고는 그라운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전체 영역으로 퍼져나간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장애가 있어도, 원하는 것은 도전하고 노력해나간다는 의지다. 그래서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는 착하고 건강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