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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배경
요한복음 6장에는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행구절 :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사복음서 다 기록되어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랐고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3,15절에서는 “빈들”이라고 했습니다.
※ 산 (헬, 오로스, 산, 산맥, 산악지역), 빈들 (헬, 에레모스 토포스, 버림받은 땅, 황량한 황폐한 땅)
날이 저물고 저녁이 되니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필요했습니다. (마 14:15, 눅 9:12)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면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5절) 물으셨습니다.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7절)라고 대답을 합니다. 빌립의 현실적인 계산에 의한 대답이었습니다. 아직 하나님으로 신성을 가지신 주님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200일치 임금입니다. 이 돈으로 빵을 사서 먹여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수님은 한 아이에게서 받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셔서 오천명 쯤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9-13절)
2. 왜, 유대인의 멸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사역에서 내용이 가장 중요할 수 있지만 장소, 때, 대상, 방법 등도 항상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월절 가까운 때”의 일이라고 기록한 것은 요한복음 뿐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복음서이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월절(逾越節)은 어떤 절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마지막 열 재앙으로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집의 장자들은 죽음이 넘어간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해진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23]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애굽기 12: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 유월절 (히, 페사흐) / 영어 PASS OVER / 넘어시고, 넘어사 (히, 파사흐) /
(逾(넘을 유), 越(넘을 월), 마디절(節)
그래서 유월절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①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②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자가 사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떡은 예수님의 살, 물고기는 피가 있는 생선이므로 예수님의 피를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여온 그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는 것은 영적으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어 먹는 모습인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내가 너희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살이 찢겨지고 피를 흘리게 되는데 이 대속적인 죽음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 15:32-39)
참고로 종교별로 의미하는 숫자가 다르지만 우리들은 5는 고통의수입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2는 증인수입니다. 이들의 숫자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수학에서는 완전수가 6입니다).
5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 7은 그 고통을 통하여 자기를 믿는 자들을 완전하게 재창조하여 구원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2는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으로 사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 3:14)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남을 정도의 떡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온 모든 자들을 구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는 자는 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능력이 없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열 두 바구니에 남은 떡은 열 두 제자들이 또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나누어 주어야 하는 떡입니다.
3.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는 빈들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을 볼 때에 그야말로 진정한 세상의 왕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게 했던 모세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 6:30-32)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옷을 입혀줄 수 있는 왕이 그들에게는 가장 최고의 왕이요 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는 빈들에서 기적을 베풀어 배불리 먹여 주시는 예수님은 당장 왕의 자라에 올라야 할 분이었습니다. 당장 모세의 자리로 가야 할 분이었습니다.
신 18:15절에서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14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영락없이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의 모습인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메시야는 맞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메시야관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잘못된 정치적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오늘도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오로지 부자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육적인 모습을 보고,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하셨습니다.
당시에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시대이므로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야가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고 백성들을 잘 먹이고 입힐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 삼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15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붙들려 임금의 자리로 가지 않고 그들의 기대와 달리 혼자서 산으로 떠나가신 것입니다(15절)
▶ 여기서 먼저 한 가지 언급하고 갈 것은 “표적신앙”의 위험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을 공급해 주는 예수님의 표적 만을 쫓는 신앙입니다.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마지막 때 두 뿔 가진 짐승도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려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되는데,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분명히 성경은 표적을 말씀하고 있지만 표적 만을 바라며 세상의 것들을 채우길 원한다면 사탄의 유혹에 다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계 13:13-14).
말씀을 통하여 에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표적신앙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표적을 구할 때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마 12:39),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으며 (마 16:4), 이 세대에 표적을 보여주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막 8:12)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놓치는 표적신앙은 위험한 것입니다.
4. 왜,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갔을까요?
마 14:23절, 막 6:46절을 보면 왜 산으로 가셨는지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가복음 6:46]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배울 것이 있습니다.
① 남들이 우리를 임금 삼으려 할 때에 그 임금의 자리가 사명을 벗어날 때에는 기도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임금까지 높임을 받지 아니하더라도 남들이 우리를 높여 주면서 자꾸 세상으로 가라고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기도의 자리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남들이 조금만 높여주고 칭찬을 하면 바로 임금의 자리,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만약 그들의 뜻대로 임금의 자리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황제에게 반역한 죄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유대 땅 임금은 로마 황제가 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을 때에 예수님을 세상 왕으로 몰아세워 반역죄로 처형하고자 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지만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께서 임금의 자리로 가서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했다면 생명이 없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의 화려한 교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유대인 만의 왕이 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계 17:14, 19:16)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온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의 사명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자꾸 명예욕에 빠져 사람들에게 떠밀려 이상한 곳으로 가면 안됩니다. 높은 곳으로 떠 밀려 가면 안됩니다.
조금 유명세가 다가온다고 할찌라도 높은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로 가야 합니다. 교만해지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청함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눅 14: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높여 준다고 그냥 올라가면 안됩니다. 그때에는 기도의 자리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항상 기도의 자리로 갔습니다.
새벽기도, 밤 기도, 사역 중에도 항상 기도의 자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35]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누가복음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도 하나님 임에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의 자리에 가야 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 기도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도 기도의 자리에 들어가시는데 하물며 연약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은 날마다 시간마다 기도의 자리에 가야 할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눅 21:36),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고 하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시간”을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잡히시던 때에 다 도망을 갔고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세 번의 부인은 완전한 부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을 받고 기도하기 전에는 더러운 귀신이 잘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신자라면 누구나 “한 시간”이상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량이 차야 더러운 귀신이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귀신은 귀신같이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우리들을 가지고 놉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임금의 자리에, 교만한 자리에, 사명을 벗어난 자리에 앉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유익은 너무 많습니다. 영적인 호흡인 것입니다., 영이 살고 죽는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해 질 뿐만 아니라 능력도 받습니다. 응답도 받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지 않다면, 교만한 자리로 가게 되는 것 외에도 사탄에게 완전히 잡혀버리게 됩니다. 패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도의 자리를 항상 사모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자신 만의 기도의 방, 기도의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추락하는 것은 높은 데 있을 때 추락을 하는 것입니다. 높이 띄워줄 때 아무 분별없이 그냥 올라가시면 추락할 수 있습니다.
높이 띄워주는 인간들이 다가올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건지 아니면 사탄이 그렇게 하는 건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에 높은 성전 꼭대기,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려 갔습니다. 동일하게 높은 곳입니다. 유혹할 만한 것들이 보이고 주어지는 곳입니다.
그때가 위험합니다. 마귀의 시험, 유혹이 다가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즉시 말씀을 깨닫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세상 사람들의 스타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준 지극히 높은 산에서도 엄청난 유혹으로 다가왔지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다 높은 곳이며 높은 곳으로 데려가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되는 분이며 또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약하므로 그 높은 곳에서 주어지는 달콤함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아예 올라가지 않는 길이 최상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높은 곳에 오르기 보다는 기도의 자리에 가셔서 기도로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