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소리들
- 김혜영·김이듬·김윤이의 시집들
정훈(문학평론가)
속악함은 역설과 아이러니를 낳는다. 최근 우리 시는 출구 없는 길속에서 제각각 자신만이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면서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오솔길이거나 소로(小路)는 시인 저마다가 험난하게 세상과 현실을 통과하면서 이룩한 예술의 숨구멍이다. 이들에게 언어는 더 이상 날렵한 시적 무기가 아니라 무의식의 무겁고도 가련한 방편이 된 감이 없지 않다. 시인은 현실을 육화해서 이를 언어로 웅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일체의 현실 세계를 나름으로 증류해서 언어로 비전을 새겨놓는 자라고 할 때, 최근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 시인들에게서 더욱 그렇다. ‘여성 시인’이란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소지가 충분한데도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여성’ 특히 시를 쓰는 여성이 내는 목소리들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문학의 ‘정전’에 구멍을 내고, 구멍을 낸 자리에 세심한 감성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역사를 대신하는 신화와 전설이기도 하고 체제와 질서를 대신한 혼란과 무의식의 자리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사물의 존재 뒤편에 수런대는 또 다른 세계의 표정을 알려주는 일이 이들에겐 긴요한 작업이었다. 이를테면 우주에 틈을 내는 일을 감당하고, 이 틈으로부터 차츰 번져오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틈이 내는 숨소리는 인식·존재론적으로는 결코 소급할 수 없는 영역이다. 논리나 이성이 지금까지 놓쳐왔던 소리이자 원근법의 경계에서 벗어나 있던 사각지대이다. 손쉽게 구획 짓고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진실들이 쏟아져 나오듯 언뜻 어지럽게 나열되는 말들의 방향 속에서 최근의 시 경향의 추이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김혜영 시집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지혜, 2011), 김이듬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 지성, 2011), 그리고 김윤이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창비, 2011)을 대상으로 이들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지 않을까.
1. 말과 의미의 사이
- 김혜영 시집,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김혜영의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말과 의미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서로 배반하는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 독법이 까다롭다는 얘기다. 정신분석적인 틀과 여성, 그리고 신화적 요소들로 크게 나눌 수 있는 작품들에서 시인은 언어의 명백한 뜻을 파헤쳐놓음으로써 다양한 독해를 향한 길을 열어놓는다. 이 점에서 볼라치면 시집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독자에게 친절하면서도 그들을 조롱한다. 독자에 대한 ‘친절’은 시 의미의 맥락을 넓혀준다는 뜻에서 쓴 표현이고, ‘조롱한다’는 표현은 독자에게 뿌리박혀 있는 기존 정신의 관성을 건드린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혜영의 시는 현대시의 특징을 이루는 분열과 관습 파괴, 그리고 무의식의 단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최근 시의 징후와도 같은 이미지의 파괴나 의미의 균열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상징들은 주로 현대사상의 전위에 맞닿아 있다. 김혜영 또한 현대사상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의 사유와 사상은 시와 별개의 것이다. 시는 사상 이전의 것이고 이성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그 무엇이라 할 때 김혜영의 시가 보여주는 표정을 훑어보는 일이 유의미성을 띨 것이다. 그는 언어를 다루되 심각하지 않고 가벼운 터치로 일관한다. 현대시의 언어가 가끔 가볍다는 인상울 주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엔 거대서사가 미시서사로 대신하는 현대인의 분위기와 관련 있다. 시어의 내밀함은 언어와 언어가 구성하는 관계로 대치된다. ‘진리’나 ‘진실’의 문제를 떠나 ‘말’의 배치에 방점을 두는 듯 보인다. ‘진리’의 배반이 현대시의 주조 음을 이루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가령 「재판장과 양 두 마리」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구절을 보자. “하느님은 벌겋게 녹이 슨 열쇠로/천국의 문을 잠갔다 열었다 빈둥거리며/자라는 발톱을 깎고 있을 뿐인데”처럼 ‘하느님’, 즉 ‘절대자’나 ‘절대 진리’에 대한 관습을 완전히 뒤엎고 “빈둥거리며/자라난 발톱을 깎고”만 있는 존재로 격하시킨다. 이것은 진리의 부정이라기보다는 진리에 대한 조롱이요 협박이라 할 수 있다. 「행복한 나날들」은 또 어떤가. “당신은 까만 가죽 가방을 들고 출근한다/아이는 책가방을 등에 메고 현관문을 발로 찬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행복’이라는 말이 주는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의 현실로 달려가게끔 채찍질하는 기능을 가진다. 소극적인 뜻의 행복마저 지금 여기의 삶의 부정해야 하는 시·공간으로까지 여기게 한다. 그런데 시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행복한 날을 ‘정의한다.’ 이를테면 “지루한 식사, 지루한 저녁인사, 지루한 키스”(「행복한 나날들」)처럼 시인에게 ‘행복’은 ‘쟁취’가 아니라 ‘지속’에 대한 마음의 상태로 역전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는 삶의 의미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 삶이라는 게 얼마나 불가해한 것이며 폭력으로 둘러싸여 있는가. 이는 ‘신’이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공공연히 자행되어 오지 않았던가. 시인이 시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적나라하지 않다. 시인은 인류의 모순과 상처를 읽어내면서도 곧바로 발설하지 않고 언어의 미끄러짐을 통해 제시한다. 이 점이 어느 정도는 시인의 미의식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몇 편의 작품을 보면 수긍할 수 있다. 가령 완전한 타자이자 욕망의 화신인 프랑켄슈타인을 제재로 한 「프랑켄슈타인」의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구경꾼으로만 남을 지도 몰라. 더러운 예술이야”와 같은 진술이다. ‘프랑켄슈타인’을 하나의 미적 기호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시는 기호이고 의미이고 이미지라고 할 때, 김혜영 시인에게는 ‘기호’의 기능으로서 시를 바라본다. 기호는 언어와 욕망과 밀접하다. 그리고 무의식의 상징적 궤도이기도 하다. 신화적 상상은 시인에게 새로운 무의식의 회로 속에 유희하는 기호로 압축된다. 「아프로디테 신전」의 “예수란 남자”와 “여사제의 딸들”이 벌이는 말들의 동선(動線), 그리고 「세 여신의 가계도」에서 화자와 세 여신들인 이시스, 메두사, 마리아 사이에 새롭게 형성되는 언어적 배치 망들과 같은 부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대체로 신화와 현실과 언어의 삼각형을 질주하는 참신한 감각들 속에 놓여 있다. 신화·현실·언어의 세 꼭짓점을 이어주는 것은 욕망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혜영의 작품들 대부분이 연극을 보는 것처럼 역동적이란 점이다. 마치 등장인물이 무대에 올라와서 서로 대화를 주고받듯이 그의 시들을 추동하는 것은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말들이다. 여기엔 어떤 논리나 일관성이 없다. 자동기술법처럼 흘러나오는 언어들이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쳐내는 모습이 기괴하리만치 생생하다. 가령,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프로티트를 읽는 오전」과 「이상한 글쓰기」를 살펴보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바람을 눈 위에 쌓고/남자는 그녀의 침대를 뒤지네 겁에 질린 하녀는/긍정적인 대답만 하네 감자도 여물고 양배추도/다 자랐는데 남자는 말이 없네”(「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마치 표현주의 연극처럼 등장인물들의 낯선 행동을 연상하게 한다. “그녀를 거세하고픈 유혹이 바람을 불러온다. 드라마 대본에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인물을 데려와야 해. 독사에게 물리면서도 절정을 느끼는 치명적 사랑에 눈 먼 남자를 설정해봐. 벌써 마감 시간이잖아. 그녀를 미팅 장소로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휴대폰을 빨간 욕조에 담근 것 아니지? 그녀의 성격이 진화하는 플롯으로 상큼하게 구성해봐.”(「이상한 글쓰기」) 화자의 몸속에서 여러 인물이 제각각의 발화로 이루어진 듯한 구절이다. 톡톡 튀면서도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시적 구성으로 김혜영 시인은 ‘시적 한계선’을 염두에 둔다. 욕망은 뒤틀리며, 현실을 배반하는 언어가 내지르는 공간에 시인은 홀려있다. 이렇듯 극단적인 의미의 파괴에까지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안정된 시 형식을 유지하되 체제와 습속에 저항하는 시인의 작품에서 우리 시단의 활력을 기대해 본다.
2. 소음에서 침묵으로
- 김이듬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
김이듬의 시는 총알이 불완전하고 엉성하게 장전된 M60 기관총의 연발 사격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언어들로 가득하다. 그는 지금 불안한가. 아니다. “내 안에 침묵한 당신은 내 말의 시작/이 시의 끝이고 한계”(「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라 내뱉는 진술에서 자만에 가까운 자학성을 드러내며, 또한 「아케이드」에서 “나는 글쓰기를 멈추고 싶다”나 “왜 나는 닥치는 대로 쓰고, 써지는 대로 살아갈 수 없는가”란 말을 통해 감정의 직접적인 노출을 꺼려하지 않는 부분들에서 그렇다. 잘 정돈된 시적 사유를 보여주면서도 갑작스럽게 박자가 틀린 탱고춤을 보듯 ‘불안함’을 느끼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은 시인의 내면과 현실의 속악함이 마찰하는 지점에서 터져 나온 언어의 비명이다. 그 소리는 환멸과 증오와 무기력의 껍질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시, 그런 건 갈수록 몰라/헌사와 찬미, 무엇에게 뭘 바쳐/슬픔에게 삥 뜯어 당신에게 기부할까/웩 당신이라니/푸닥거리, 뭘 세워야 한다면 좆”(「등단 7년」), “우리는 충분치 않은 과오를 나누고/끝내 나아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을 믿는다”(「나는 세상을 믿는다」), “나는 프티부르주아 새끼들과 연합하여 문학/아니다/문학 비슷한 걸로 심포지엄/아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릴 지껄였다/확실한 건 늙은 개털들에게 대가리를 주억거리는 개년이 되었다는 거다”(「저물녘 조언」) 따위처럼 텅빈 내면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자괴로 채색해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애인』은 이처럼 어딘가 모르게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 시인이 주로 사용하는 말들과 문맥들은 한편으로 시인 자신의 어두운 현실관을 폭로하는 데 쓰이며, 역으로 시에 쓰인 언어 맥락들이 시인의 흐트러진 내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더욱더 황폐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시적 현실은 시인이 창조해 낸 미적 현실이다. 김이듬의 시에서 그 공간은 “불연속의 의미 없는 우연”(「호수의 백일몽」)이 다발 째로, 때로는 산발적으로 생겨났다 스러지는 세계다. 불연속의 공간이나 무의미한 우연으로 점철된 시적 세계는 시인의 현실인식과 상관없이 놓여 있다. 이는 시인의 자의식에서 출발한 자아와 세계의 대결 양상이 그로테스크한 시·공간으로 변모했음을 일러주는 표지다.
현대시는 분열되고 이중, 삼중으로 뻗쳐가는 인간 심리의 복합성을 드러내는데 그 특징을 잡을 수 있다고 할 때, 김이듬의 시는 이런 점에서 지난날의 시와 최근 시가 보여주는 언어파괴 시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은 듯 보인다. 결국에는 ‘시 쓰기’라는 행위가 시인에게는 가장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자기모멸과 황폐한 내면 심리의 일그러진 언어표출은 시에서 이중의 포즈로 나타난다. 먼저 시인으로서 자기 방관이다. “나는 내가 시적이지 않은 시를 쓰며/시인답지 못하게 살다/문학적이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되길 빈다”(「문학적인 선언문」)나 “연애는 없고 사랑만 있다/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조용히 그리고 매우 빠르게/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와 같은 표현이 그렇다. 두 번째로는 시의 서사화이다. 「호수의 백일몽」「질&짐」「오빠가 왔다」「성으로 가는 길」「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와 같은 시편들이 서사화의 주축을 이루는 작품들이다. 자기 방관과 시의 서사화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 방관과 체념이 시인으로 하여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속엣 말을 쌓이게 하고, 이렇게 내면에 퇴적된 언어의 지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때 시는 길어지게 마련이다. ‘이야기’가 되어 나온다는 것은 시인이 특수한 관점으로 시인 자신이 체험한 시적 상상력을 배열하는 일과 같다. 일차적으로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발화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하나이다. 시인은 불안과 현기증을 견디면서 말의 꾸러미를 늘어놓는다. 극심한 상실감은 극도의 허사(虛辭)를 낳는다. 바람이 구멍들 사이로 헤집으면서 빠져나가는 곳은 결국 제가 온 곳이듯이 시인이 불규칙적으로 읊조리는 노랫가락은 마침내 자신에게 향할 게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모멸감에서 자기 환대로 되돌아옴이고, 자기 상실에서 자기 복원으로 형질 전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이듬의 시에서 그런 가능성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유보된 희망과 가능성은 사실 시에서 숨겨져 있으며 봉인되어 있다.「마임 모놀로그」의 다음 대목에서 김이듬 시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한밤의 카페 안에서 나는 자세를 고쳐 앉는다 창문에 연중무휴라고 씌어진 한밤의 카페에서 나는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인 채 저들의 들리지 않는 대화를 엿듣는다 저들의 말이 미친 말처럼 문을 부수고 비 내리는 밤거리고 달아날까 봐 저들의 노래로 귀가 먹을까 봐”(「마임 모놀로그」) 소음에서 침묵으로 가는 통로에 시인이 멈춰서 있지 않은가. 오랜 침묵 속에 비로소 말씀 한 줄기 나오는 진실을 어쩌면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겠다.
3. 환한 그을음
- 김윤이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시 속 공간의 소실점은 어디일까? 바꿔 말해서 시 세계를 지탱해주고 무게 중심이 되어주는 지점은 어디인가? 김윤이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은 이런 물음을 절로 하게끔 부추기는 ‘무엇’이 있다. 명절 날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골목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휑함과, 아주 출구가 막혀버린 세상이라는 장막 저편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을 듣는 것처럼 스산하다. 시를 읽을 때 어디에서부터 발부리 쪽으로 건드리는 어떤 존재의 성가심처럼 그의 시는 일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뻗쳐나가려 한다. 안주나 정착이 아닌 불규칙한 원심 운동처럼 사물과 사물 사이, 관념과 관념 사이를 헤집으며 탈주하려는 언어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김윤이의 시는 어떤 확정적인 진술을 거부하고, 늘 유보되면서 언어들을 온몸으로 스며들게 하는 특징이 있다.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의 시편들을 이루는 공간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몸에 오랫동안 깊게 배인 그을음처럼 눅진하다. 가령 “대체 우린 목적지에 닿아 무얼 하고 있는 거지?”(「걸음 멈추는 일에 대해 생각하다」)나 “이층 여자가 잠잠할 때까지 평서문으로 끌고 갈 진술이 부족하다”(「지상생활자의 수기」)와 같은 구절들이 그렇다. 시 속의 화자와, 시를 쓰고 있는 시인, 그리고 독자의 눈까지 의식하는 듯한 어조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경험임에 틀림이 없다. 시 속의 공간은 곧잘 이미지로 변형된다. 시인은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자신이 구성해 놓은 세계 속으로 ‘내던져버린다.’ 시인의 자의식이 시 세계에 펼쳐져 있는 존재들을 삼켜버린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시어 하나하나가 점액질처럼 착착 달라붙게 하는 힘을 시인이 지니고 있는 것과 관계가 깊지 않을까. 가끔 문맥이 흐트러져 보이는 부분들이나 돌연한 이미지의 전환이 일어나는 부분들까지도 김윤이 시의 강점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그의 시에는 쓸쓸함이나 허무가 습자지에 밴 먹물처럼 완연하다. 그런데도 그것이 전면에 돌출되지 않고 숨어 있다. 오히려 활달한 언어 운용으로 독자들에게 운무 낀 세상을 제시하면서 숨은그림찾기라도 시키듯 짐짓 딴청을 부린다. 그의 시에 대한 독해가 까다로운 사실 이전에 시인이 사유하는 현실과 상상, 그리고 존재와 언어의 역학 관계가 간단치만은 않겠다는 사전 의식이 중요하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각기 다른 지점을 가리키듯이, 시인이 그려놓은 시의 풍경 또한 시인의 눈으로 헤아려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독해야말로 시 독법의 가장 무익한 방법이기는 하다.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을 떠받치는 힘은 시인의 자의식이나 점액질 같은 짜임보다도, 이미지를 창안해내는 능력에 있다. 그리고 이미지 또한 시인의 감성이 한껏 물들어서 박피로만 놓인 그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마침내 시집 전체로 하여금 조물조물 꿈틀거리게 하는 능력으로 자리잡는다. “빼도 박도 못하고 애옥한 살림에 입 하나 늘었지만, 막돌 위 저녁 햇살처럼 열기 빠지고 환하게 밝아지는 낯빛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겠지요 나이 터울의 노산으로 태어난 동생이 여태 잔병치레 없게 하는 어떤 힘 말입니다”(「막돌 위의 저녁 햇살처럼」)는 구절에서 ‘막돌 위 저녁 햇살처럼 열기 빠지고 환하게 밝아지는 낯빛’이란 표현은 이미지의 배합과 그것의 생동감이 어디까지 닿는지 보여주는 실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윤이의 시들이 뛰어난 이미지의 창조 능력과 함께 눅진한 슬픔이 스며있는 사실 자체가 실은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에 들어 있는 작품들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시가 어느 특별한 정황을 겨누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미지와 의미의 총체적 결합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이번 시집 곳곳에 보인다면 오해일까. 가령, “뚝뚝 수돗물 소리 밤을 흠뻑 적셔도 굽은 잠을 자는 식구들 애벌빨래처럼 하루의 노독을 꾸덕꾸덕 말린다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은 추위를 참으며 빨갛게 익어간다 맵찬 바람에 문설주가 한밤내 아근바근 벌어지고 있다”(「문씨네 가계 고뿔 걸린 문설주」)의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음과 의태어의 빈도수를 높임으로써 빠듯하게 살아가는 문씨네 식구들의 고달픈 생활을 넌지시 비추는 경우가 그렇다. 시집 맨처음에 실린 「오렌지는 파랗다」에서 “오렌지는 파랗네/슬픔은 여태 익지 않았네”도 마찬가지다. 어둑한 눈길로 잡혀들어 오는 세계는 마치 정화조를 거친 물처럼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김윤이의 첫 시집에서 보여주는 은근한 힘이 아닐까. 완전한 어둠도 아니고 대낮의 눈부심도 아닌 그을음으로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환하게 빛나는 그을음처럼 이 그윽한 세상사를 뒤집으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존재의 목소리들이었는지도. “즐비한 오후, 비끄러맨 빛들 흘러갑니다 건너오는 하나가 깜깜하게 반짝입니다 이제야 제가 보내드린 사진에 왜 그을음 가득한지 아실 겁니다”(「오후의 사진」 ‘건너오는 하나가 깜깜하게 반짝’거리는 한줄 의지의 힘으로 김윤이의 시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다./[시와정신] 2011년 가을호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