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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高麗史節要 - 武臣의 亂(2)
임광자 추천 0 조회 44 08.06.13 06: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高麗史節要 - 武臣의 亂(2)

高麗史節要 - 武臣의 亂(2)

라. 고려 사회의 동요(動搖)

(1) 무신정권의 수립과 혼란

고구려 무용총에 나타난 수박도의종의 보현원 행차를계기로 쿠데타에 성공한 정중부 일파가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것을 경인(庚寅)의난(亂)이라 한다. 1170년의 간지(干支)가 경인(庚寅)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도둑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기 마련이다.경인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은 모두 의종(毅宗)의총애를 받고 왕이 가는 곳이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던 인물들이다.

정중부는 금군(禁軍)의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이의방과이고의 직급은 견룡행수(牽龍行首), 계급은 산원(散員/ 정 8품), 요즘 말로하면 국왕의경호 책임자 내지는 실무자들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불학무식(不學無識) 했던 반면 격구(擊毬)나수박(手搏)을 잘해서 이에 몰입하였던 의종으로부터 총애(寵愛)를 받았고, 그 덕택에다른 무인들보다는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격구나 수박 놀이를 좋아했던 의종이 점차술과 시(詩)를 즐기면서 내시(內侍), 승선(承宣), 기거주(起居注) 등 역시 왕을 측근에서모셨던 문신들을 가까이 하게 되자 이들은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그 도가 지나치게되자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의종으로서는 믿은 도끼에 발등이 찍힌 셈이지만,그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물리적인 힘을 가진 무신(武臣)들이나약한 문신(文臣)들을 제거하기란 허술한 초가(草家)를 태우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다고당시의 사관(史官)은 기록하고 있다.

불과 몇 명의 무신들이 단합해서 수하의 부하들을동원하여 수백 명의 문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인흐름이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헌집을 허물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새집을지어야 되는데, 무신들에게는 그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도 않았고 그럴 역량도생각도 없었으며, 다만 이권(利權) 챙기는데 몰두하였다.

1170년 9월,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세 사람은 의종이평소에 관북댁(館北宅), 천동댁(泉洞宅), 곽정댁(藿井宅)이라는 이름으로 사저(私邸)를지어 많은 재물을 쌓아둔 것을 알고 이곳을 세 사람이 나누어 점령하여 차지하였고,그들에 의해서 몰락한 문신들의 가산도 모조리 빼앗아 차지 하였다.

정중부는 중서문하성의 종 2품 벼슬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임명되어 한 계급 올랐고, 이의방과 이고는 무려 9홉 단계를 뛰어 올라 대장군(大將軍)으로승차하고, 다시 전중감(殿重監)에 임명되어 무반(武班) 직(職)뿐만 아니라 문반(文班)의직위도 동시에 갖게 되었고, 다른 무신들도 한 계급씩 오르고 문관직위도 차지하게되었다.

정중부는 서해도 군(郡), 현(縣)을 모두 그의 고향인해주(海州)에 속하게 하였고, 이의방은 그의 외가 고을인 금구(金溝)를 현령관(縣令官)으로승격시켰다.

글을 모르는 무신들이 교지(敎旨)를 쓸 수 없어 문신문극겸(文克謙 / 1122 ~ 1189)에게 일종의 관리 추천 명단인 비목(批目)을 쓰게 했는데,문극겸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으로 있을 때인 의종 17년 (1163) 8월,왕의 총희(寵姬) 무비(無比), 환관(宦官) 백선연(白善淵), 술객(術客) 영의(榮儀)등의 잘못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왕으로부터 노여움을 받고 황주 판관으로 밀려났으나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곧은 선비라는 칭송을 받아 더욱 유명해 졌다.

경인의 난이 있었던 1170년 8월 30일, 문극겸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관아에서 숙직하고 있었다. 난이 일어났음을 듣고 그도 도망해 숨었으나 추적해 온군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극겸이 말하기를 "나는 전(前) 정언(正言) 문극겸이다.주상께서 내 말을 좇으셨다면 어찌 오늘의 난이 있었겠는가. 원컨데, 예리한 칼로내 목을 베어다오"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이름을 알고 죽이지 않고 궁성에 가두어두었다가 이때 다시 불러내어 그에게 비목을 쓰게 했고 그 자신도 승선(承宣)으로임명되고 동시에 무관직인 용호군의 대장군을 겸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천거로많은 문신들이 살아 남아 다시 기용될 수 있었다.

여러 무신들이 중방에 모여 문신으로서 남아 있는자를 모두 불렀는데, 이고가 모두 죽이려고 하니 정중부가 말려서 그만두었다. 그러나병부낭중으로 있던 진윤승(陳允升)이란 자는 큰 돌을 안겨 죽게 만들었는데, 그것은그 전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당(祠堂)을 지을 때 공사를 감독하면서 군사들이가지고 온 돌을 일일이 저울에 달아서 받았기 때문에 군사들은 심하게 골탕을 먹였고그 보복을 당한 것이다. 원칙에 엄격했던 것이 이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화근이 되었던것이다.

1170년 10월, 새로운 왕 명종은 크게 사면령(赦免令)을내리고, 동시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를 벽상(壁上)공신(功臣)으로 삼고 공신각(功臣閣)에화상을 그리게 했다. 이 때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작가로 더 알려진 정서(鄭敍)도귀양에서 풀려나 직전(職田)이 회복되었다.

금(金) 나라 황제에게 공부낭중 유응규(庾應圭)를보내어 의종이 물러나고 그 동생인 명종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글로서(表文) 알렸다.

그 내용은 의종이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볼 수 없으므로스스로 동생에게 양위했다는 것과 새로운 왕이 된 명종은 직접 찾아가 뵈옵고 사실을주달(奏達)해야 마땅하나 길이 멀고 험해서 우선 글로서 알린다는 것이었다.

의종과 명종이 각기 작성한 것으로 된 두 개의 표(表)를받은 금 나라에서는 이를 의심하여 선 듯 답을 내리자 않게 되자 표문을 가지고 갔던유응규는 7일간을 단식하면서 계속 주청(奏請)하여 몸이 야위고 곧 쓰러질 듯하게되자 금 나라에서는 유응규의 충성에 감복하여 이를 승인하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1171년 5월, 금 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은 유응규가돌아왔고, 그는 이런 공으로 군기감겸태자중사인(軍器監兼太子中舍人)이라는 직함을제수 받고 그 자손들 역시 관직에 채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외견상 국제문제도 해결되었다.그러나 아직도 국내 문제는 첩첩이 쌓인 산이었다.

(2) 집권층의 분열

1171년(명종 원년) 정월, 욕심 많은 이고(李高)는모든 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불량한 소년들과 중들을 모아 밤낮으로 잔치를 열고 이들을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가짜 왕명을 만들어 반란을 꾸몄다.

명종의 원자(元子) 숙(璹)의 관례(冠禮)에 즈음하여이고가 선화사(宣花使)가 되어 연회(宴會)에 관여하게 됨에, 비밀히 불량소년들과중들의 소매에 칼을 감추고 담장 사이에 숨었다가 조신(朝臣)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반역에 겁을 먹은 교위(校尉)김대용(金大用)이란 자의 아들이 사실을 알림에 따라 일은 사전에 탈로 났고, 이고의무례한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이의방이 미리 행사장에 기다렸다가 들어오는이고를 쇠방망이로 쳐서 죽이고 순검군을 시켜 그의 모(母)와 도당(徒黨)들을 잡아목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이고의 아버지만은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다니는아들 이고와 의절하여 일찍부터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유배(流配)에그치게 되었다.

1173년(명종 3년) 가을 8월,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諫議大夫)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 등을 없애고 다시 의종을 세우기 위해서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및 장순석(張純錫)과 모의하여 동계(東界)에서 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김보당의난(金甫當의 亂)이라 한다.

김보당은 사람을 거제현에 보내어 그곳에 유배 중인의종을 동경(東京)인 경주(慶州)로 모시게 하였다. 이런 소식을 접한 정중부와 이의방은즉시 장군 이의민(李義旼)과 산원(散員) 박존위(朴存威)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남으로 향하게 하고, 또 군사를 서해도로 보내어 이들의 토벌케 하였다.

이의민(李義旼 / ? ~ 1197)은 경주의 천민 출신으로키가 8척이나 되었고, 힘이 세고 무지막지(無知莫知)하여 두 형과 함께 시골에서횡포하게 구니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안렴사(按렴使) 김자양(金子陽)이 잡아다가 매질하고고문하였더니 두 형은 감옥에서 죽고 의민 홀로 죽지 않았는데, 김자양이 그를 뽑아경군(京軍)에 편입시켰다. 수박(手搏)을 잘 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되었고,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이되고 이어 장군에 승진하였다.

이의민 등이 경주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말하기를 "전왕(의종)이 이곳에 온 것은 고을 사람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없습니다..... 이제 그 무리들을 보니 수백 명에 불과하며 오합지중(烏合之衆)이나다름없습니다. 우리들이 잡아서 보내겠으니 고을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기를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경주 사람들이 단합하여 밤중에 반군(叛軍)을 소탕하고의종을 객사에 감금한 후, 10월 1일 이의민 일행을 성안으로 불러 들였다.

이의민은 의종을 끌어내어 곤원사(坤元寺)의 북쪽못(淵) 위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웃으면서 등골뼈를 부러뜨리니 뼈가 부러지는소리에 사람들은 놀라 흩어졌고, 같이 갔던 산원 박준위는 의종을 요(褥)로 싸서두 개의 가마솥을 포개어 그 속에 넣고 물에 던져 버렸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 물 속으로들어가 솥을 건져내어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그대로 버렸다. 임금의 시신보다는솥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 후 전 부호장 필인(弼仁)이란 자가 있어 시신을 거두어매장하였다.

한편 안북도호부에서는 이보다 앞서 9월에 김보당과이경직을 잡아 서울(개경)로 압송하였는데, 이의방이 이들을 심문하고 저자에서 목 베어죽였다. 김보당이 모진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 거짓으로 말하기를 "모든문신(文臣)들이 같이 모의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하니 다시 많은 문신들이화를 입었다. 이것을 계사(癸巳)의 변(變)이라 한다.

계사의 변으로 안팎의 인심이 매우 흉흉하여 금방어찌 될지 모를 지경이었다. 낭장 김부(金富)가 말하기를 힘만 믿고 풀 베듯 문신들을죽인다면 어찌 김보당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오지 않겠는가? 마땅히 무신들 중 아들과딸이 있는 자는 문신들과 혼인을 맺어 화합을 해야 한다고 하였고, 여러 장수들이그 말을 따랐다.

1174년(명종 4년) 봄 정월, 귀법사의 중 백여 명이성의 북문을 침범하고 들어와 선유승록(宣諭僧錄) 언선(彦宣)이란 자를 잡아 죽였다.소위 무신들의 신정부가 승려들을 외면하고 홀대한데 대한 앙갚음을 한 것이다.

이의방이 그의 형 이준의와 함께 부병(府兵)을 이끌고나가 여러 절의 중들과 일대 난투(亂鬪) 전을 벌려 서로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고,3월에는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

9월에는 서경유수로서 병부상서를 겸하고 있던 조위총(趙位寵/ ? ~ 1176)이 서북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이르기를 "소문을 들으니 서울의중방에서 결의하기를 북계에 가까운 여러 성에는 대체로 거세고 나쁜 사람이 많아서토벌해야 한다. 하고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다고 하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당하겠는가? 병마를 규합하여 속히 서경으로 나오라"하였다.

이런 조위총의 격문이 돌자 절령(절嶺) 이북 40여성이 이에 호응하였고, 이에 중앙에서 평장사(平章事) 윤인첨(尹鱗瞻)이 3군을 이끌고진격케 했으나 조위총은 이를 절령에서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추격하여 개경(開京)근교에 이르렀으나, 이의방군의 반격을 받아 후퇴하여 서경(西京)에 진을 치고 방어에진력하였다.

그 해 11월, 대동강까지 진격해 간 이의방은 추위에견디지 못하고 패전하여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에 정부에서는 새로이 토벌군을 편성하고군졸들을 조련하였는데, 다음달인 12월, 이의방이 우연히 선의문밖에 나갔다가 정균(鄭筠- 정중부의 아들)을 종군하고 있던 중 종참(宗참) 등에게 그의 형 준의와 함께 그일당이 모두 참살 당하였다.

1175년, 중앙군의 총 공세로 연주성(漣州城)이 함락되고,이어 여러 성이 중앙군에 항복하여 위기에 처하자, 금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전왕의종이 쫓겨나 죽게 된 사실을 알리고, 절령 이북 땅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병을요청했으나 실패하여, 1176년(명종 6) 말, 서경이 함락되고 조위총이 처형되어 난은끝났다.

1178년(명종 8년) 9월, 장군 경대승(慶大升 / 1154~ 1183)이 견룡(牽龍) 허승(許升)과 모의하여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을죽였다.

경대승은 평소에 정중부의 하는 행동을 분하게 여겼고임금 명종도 그의 아들 정균이 공주에게 장가 들기를 바랐으므로 이를 근심하고 있었는데,이를 알게 된 경대승이 제거코자 했으나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宋有仁)이 버티고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저런 사유로 송유인이 여러 신료들로부터 신망을잃게 되자, 경대승이 허승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를 따른다면 흉악한 무리들을제거할 수 있겠다"하니 허승이 마침내 경대승의 뜻에 따랐다.

장경회(藏經會)가 끝나는 밤, 경대승은 장정 30 여명을화의문밖에 매복시키고, 허승으로 하여금 안에서 정균을 죽이게 한 다음 휘파람을신호로 하여 용사들을 이끌고 궁에 들어가 일을 결행키로 약속하였다.

약속에 따라 허승이 밤 사경(四更)에 정균이 숙직하는곳에 들어가 그를 죽이고 곧 길게 휘파람을 부니, 경대승이 결사대를 거느리고 궁궐의담을 넘고 들어가 보이는 대로 죽인 후, 금군을 풀어서 정중부와 송유인을 잡아오게하였다.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정중부 등은 도망쳐민가에 숨을 것을 모조리 잡아다가 베어 죽이고 저자에 효시(梟示)하니 서울과 지방에서크게 기뻐하였다.

왕이 경대승 등을 불러 묻기를 "이제 정균이승선의 직임을 장군에게 제수하고 한다"하니 경대승이 아뢰기를 "신을글을 알지 못하오니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하였다.....

이로써 1170년 8월 말, 경인의 난을 주도했던 정중부와이의방, 그리고 이고 등은 이고를 필두로 모두 목숨을 잃게 되었다.

경대승은 청주사람으로 중서시랑 평장사 경진(慶珍)의아들인데, 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힘이 세었다.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집안 살림을몹시 등한히 하였다.

15세에 음직(蔭職 / 조상의 덕으로 관직에 오르는것)으로 교위(校尉)에 보직(補職)되어 차차로 올라서 장군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성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남의 전지를 많이 빼앗았는데 그가 죽은 뒤에 아들 대승은그 전지 문서를 모두 선군(選軍)에 바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의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개연히 복고의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기대어 존중히 여겼다. 또 의종을 시해한 자를 치고자했으나 그 일이 어렵고 크기 때문에 표면에 나타내지 못하더니, 정중부, 송유인 등을죽이자 왕이 속 마음으로는 꺼리나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보여서 모든 주청을 굽혀가며좇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붙었으나 학식과 용기와지략이 있는 자가 아니면 문득 거절하니 무관들이 두려워하고 꺼리어서 감히 방자하게굴지 못하였다.

정중부 등을 살해한 후 신변의 위험을 느껴 도방(都房)을차려 항상 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늘 불안한 가운데 지내다가 1183년 가을 7월 어느날 밤, 홀연히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고 병을 얻어 30세의나이로 그도 세상을 떠났다.

경대승이 죽자 도방(都房)에서는 돈을 모아 장사를마치고 각기 제 갈 곳을 찾아 돌아가게 되었는데, 임금 명종은 중방(重房)에 명하여이들을 전원 체포하여 치죄(治罪)한 후 먼 곳으로 귀양 보냈고, 고문이 혹독하여부처에 도착하기 전에 죽은 자도 많아 살아 남은 자는 4 ~ 5 명에 불과했다.

(세계사 이야기가 중간에 단절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다음 주 월요일, 136호로 무신의 난을 마무리하고,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사로 돌아가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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