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jsnews.co.kr/news/read.php?idxno=3832
수련산(水蓮山,541m)의 한 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배금산(169m)을 만들고 배금산의 한 자락이 낮은 야산으로 변해 가정 마을 뒷산인 뒤밑재를 만든다. 마을 동쪽은 황룡면 원황룡과 가까이 닿아있고, 수련산 계곡의 서양제(西陽堤)에서 흐르는 물은 마을 서쪽 들을 적시고, 배금산 쪽에서 흐르는 물은 마을 동쪽을 적시며 두 물줄기가 마을 앞으로 흘러 황룡강으로 합류된다.
가정은 행정구역으로 원래 영광군 외동면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장성군 동화면으로 편입되었다. 가정마을에 맨 처음 들어온 성씨는 여양 진씨였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여양 진씨와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는 광산김씨다. 원황룡(가정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김충손(金衷孫)의 장자인 김숭조(김숭조)로, 자를 희지(禧之) 호를 서청자(西淸子)라 하며 김굉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연산군 1년(1495)에 문과에 급제하여 숭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김숭조는 그 후 사간원 정언, 사건부 지평 등으로 있으면서 민폐를 없애고 근검절약을 적극 주장하다가 유자광등의 미움을 사서 갑자사화 때는 사림파들과 유배에 처해졌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자 그는 성균관 전적으로 복직하여 사간원헌납, 사간으로 있으면서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동참했다.
김숭조의 아들인 김기는 자암 김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세에 참봉 진삼의 딸과 결혼했으며 중종 14년(1519)에 문고 별시에 뽑혀 한림으로 발령받았다. 기묘사화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그 후 홍문관 교리, 수찬을 거쳐 의정부 사인이 되었으며 경상도 어사로 활약했으나 병을 얻어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참봉 진삼이 바로 가정마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기의 아들인 김경우는 벼슬이 정3품인 퉁훈대부로 공조좌랑을 역임했으나 일찍이 낙향하여 황룡마을에 요월정(邀月亭)을 짓고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 송천 양응정과 더불어 시문을 짓고 자연을 벗 삼으면서 살았다. 요월정 김경우의 손자인 김우급(金友伋, 1574-1634)은 호가 추담으로 황룡에서 출생하여 왜란을 당했을 때 명의 원군이 이곳에 이르러 행패하니 진중으로 장수를 찾아 항의하여 중지시켰다. 그의 형제는 모두 6명으로 모두 학문에 뛰어나고 덕행이 모범되어 황룡 6룡으로 불려졌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다.
김우급의 아들인 김여옥(金汝鈺, 1596-1662)은 자가 군수요 아호는 미산(薇山)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 28세 때 진사가 되어 성균관학유, 봉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형조참판, 경주부윤, 강화유수를 거쳐 장예원 판사로 있다가 67세로 운명하였으며 현종(顯宗)은 제문에서 그를 가장 청백한 신하였다고 했다.
1520년경에 신평송씨 온(溫)이 기묘사화로 인해 삼계면 주산리에서 이곳 가정마을로 옮겨 왔다고 한다. (참조, 본지 87호 ‘청백리 송흠 선생의 태생지 정각마을’)
함평이씨(함풍이씨)는 이익빈(益彬, 1624-1692)영광 남산에서 옮겨 왔다고 전한다. 함평이씨는 고려 충숙왕때 함평부원군에 봉해진 이광봉의 후손들이다. 함평군 초포리는 마을전체 1백여 가구 500여명이 모두 함평이씨이었다고 한다. 초포리에 처음 뿌리를 내린 조상은 수사(水使)를 지냈던 이춘수(李春秀)로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평에 정착하여 후학들을 양성했고, 세종 때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긍(李兢)이 그의 아들이다.
영월신(寧越辛)씨는 경(檠, 1774-1849)이 영광 입석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영월신씨의 시조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鏡)이며, 그의 선대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현종(玄宗) 천보연간, 즉 신라 경덕왕 때 신라에 귀화하였다. 신씨의 세계(世系)는 경의 8대 손에서 상장군파(上將軍派) ·덕재공파(德齋公派) ·초당공파(草堂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의 5파로 갈리는데, 앞의 3파는 영산신씨, 나머지 2파는 영월신씨며 가정마을 신씨들은 영월신씨 판서공파다. 판서공파는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지낸 한의 후손들이다.
이 밖에도 김해김씨와 회진임씨, 장흥고씨, 문경송씨, 수원백씨, 밀양박씨, 의령남씨 등이 근세에 마을로 들어왔다. 가정마을이란 이름은 마을의 형국이 배처럼 생겼다하여 가정(舸井)이라고 불렀는데 후에 가정(柯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가정마을 찬가 (동암 김병효 지음)
나지막한 뒤밑재 마을 감싸 안아
한 울안 한 집 식구 겨울에도 따습다.
가매봉에 비 오고 시냇가에 물안개
배 형국의 마을이라 큰 배 가득 채우리.
<후렴>
오른쪽은 호남고속 왼쪽은 서해고속
큰길 터져 삼천리가 지척이라 가정마을
등머리논 도내기 밭 땀방울은 그 얼마
바개보 새탑보 가뭄에도 넘치고
서답바위 맑은 물에 도청거리 마을쉼터
풍년준비 눈이 와도 쉴 틈이 없네.
<후렴>
오른쪽은 호남고속 왼쪽은 서해고속
큰길 터져 삼천리가 지척이라 가정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