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세 (世) | 현조 (玄祖) | 5대조(五代祖) |
2세 (世) | 고조 (高祖) | 4대조(四代祖) |
3세 (世) | 증조 (曾祖) | 3대조(三代祖) |
4세 (世) | 할아버지(祖) | 2대(二) |
5세 (世) | 아버지 (父) | 1대(一) |
6세 (世) | 자기 (己) | 1세 (一世) 0 |
7세 (世) | 아들 (子) | 2세손(二世孫) 1대손(一代孫) |
8세 (世) | 손자 (孫) | 3세손(三世孫) 2대손(二代孫) |
9세 (世) | 증손 (曾孫) | 4세손(四世孫) 3대손(三代孫) |
10세 (世) | 현손 (玄孫) | 5세손(五世孫) 4대손(四代孫) |
11세 (世) | 래손 (來孫) | 6세손(六世孫) 5대손(五代孫) |
12세 (世) | 곤손 (昆孫) | 7세손(七世孫) 6대손(六代孫) |
13세 (世) | 잉손 (仍孫) | 8세손(八世孫) 7대손(七代孫) |
14세 (世) | 운손 (雲孫) | 9세손(九世孫) 8대손(八代孫) |
☞공민왕 초기 문과에 급제한 사렴(士廉)은 벼슬 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 말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절의(節義)를 지켜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 오창면
(梧倉面)모정리(慕亭里) 도산(陶山)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평소에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으며 수차에 걸쳐 이성계(李成桂)가 좌사간(左司諫)의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불응하며 "고려 신하로서 사직을 보존치 못한 천하의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왕과 조상을 뵈이랴"고 탄식하였으며 임종때 자손들에게 "내가 죽거든 심산(深山)에 묻어주고 묘(墓)도 쓰지말고 비석(碑石)도 세우지 말며 후일에 누구의 묘라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후일 숙종(肅宗)은 그의 충절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다 죽었다는 충절(忠節)에 비유하여 <일편도산 만고수양(一片陶山萬古首陽)>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옛 친구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창업에 공을 세운 사형(士衡)은
개국정사일등공신(開國定社一等功臣)으로 상락백부원군(上洛伯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받은 일이 없었다.
학당공(學堂公) 휴(休)의 아들 익정(益精)과 익렴(益廉)의 형제는 학행으로 이름을 떨쳤고 효행이 뛰어나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자 3년 동안이나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사액정려(賜額旌閭)를 하였으며, 익정의 손자 수녕(壽寧)은 성종(成宗)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으니 대사간(大司諫)으로 글을 올려 아뢰기를 "학문을 한다는 것은 배가 물 위에 뜬것과 같으니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마다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하며 매일 경연(經筵)에 나와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라고 자성(自省)을 촉구하였다.
세조(世祖)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이전(吏典)>을 수교한 뉴(紐)는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지평(持平)을 지내고 좌찬성(左 贊成)에 추증된 충갑(忠甲)은 윤 임(尹 任)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유배(流配) 당했으며,제갑(悌甲)은 임진왜란 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싸움에서 전사하자 아들 시백(時伯)과 부인 이씨도 따라 순절하여 충절로 가문을 빛냈다.연산군의 폭정 때 뛰어난 재치로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했던 수동(壽童)은 상락부원군 사형(士衡)의 현손(玄孫)이며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 적의 아들이다. 그는 일곱 살 때 시(詩)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글씨에도 뛰어나 특히 예서(隸書)에 능했으며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아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를 시비하지 못했다. 수동의 아우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진 수경(壽卿)이며, 명종조(明宗朝)의 명신 충갑(忠甲)의 아들 시민(時敏)은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명장(名將) 응하(應河)와 함께 구국(救國)의 충절로 가문의 기백을 살린 인물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한 시민은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자 그 면전에서 군모를 벗어 땅에 짓밟고 벼슬을 사임한 기백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죽은 목사 (牧使)를 대신하여 성(城)을 구축하고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금산(金山) 등지의 싸움에 크게 이겼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혈전인 진주성(晋州城)의 싸움에서 불과 3천 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별여 3만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을 격퇴했으나 소탕한 적병을 순찰하던 중 시체 속에 숨었던 적의 저격으로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은 적탄을 맞은 뒤에도 몸을 돌보지 않고 북쪽을 향해 눈물을 흘리다가 이 달에 마침내 숨을 거두자 진중에서는 적이 알까 해서 발상(發喪)을 하지 못하였다.
응하(應河)는 8척 장사로 소의 뒷다리 하나를 먹었다고 하며 활솜씨와 승마술이 뛰어났다.
1604년(선조 37) 무과에 급제하고 광해군(光海君) 때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만주 요동의 청(淸)의 세력을 제압하여 압록강을 건너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3천 군사를 이끌고 적과 대전하다가 중영(中營)의 고지에 있던 강홍립이 적에게 투항하므로 작전이 무너져 혈전 끝에 패하자 응하는 말을 잃고 걸어서 큰 버드나무를 방패로 활을 쏘아 적병을 무더기로 죽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적을 베며 적진을 향해 투항한 강홍립을 크게 꾸짖었다. 칼 한 자루로 사방에서 달려드는 오랑캐를 혼자 감당하다가 칼 마저 부러지자 빈주먹으로 육박하며 버티다가 뒤로 숨어들어온 적병의 창에 맞아 쓰러졌다.
명(明)나라 신종(神宗)은 조서(詔書)로 응하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처자에게는 백금(白金)을 내리는 한편 차관(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나라에서는 용만(龍灣)에다 사당(祠堂)을 세우고 응하의 화상을 그려 충절을 기렸고 그의 행적과 만사(挽詞)를 기록하여
[충열록(忠烈錄)]을 간행하였다.
문신(文臣) 박정길(朴鼎吉)은 시(詩)를 짓기를 <백길의 심하(深河)와 만길의 산에는 지금까지 모래밭에 피 흔적이 얼룩졌네. 강 위에서 초혼(招魂)하지 말아라. 오랑캐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리> 응하의 아우 응해(應海)도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심하(深河)에 형과 함께 나설 것을 청했으나 응하의 만류로 가지못한 것을 애통해 하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스스로 목을 찌르고 쓰러졌다가 비장의 도움으로 다시 소생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의 충절은 곧 그의 형 응하에 못지않다"고 칭찬하였다.
시양(時讓)은 현감(縣監) 인갑(仁甲)의 아들로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 (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에 올라 향시(鄕試)를 주관하며 시제(詩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풍자한 문제를 출제했다고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좌의정(左議政) 질의 현손 청백리(淸白吏) 자점(自點)은 광해군(光海君)말년에 병조 좌랑
(兵曹佐郞)으로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
(領議政)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를 다녀왔다.
그밖에 조선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관찰사 자행(自行)의 손자 희수(希壽)가 김종직(金宗直)의 신원(伸寃)을 상소하고 그림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해서(楷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중종조(中宗朝)에 저작(著作)으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비리를 논핵하다가 문의(文義)로 귀양갔던 노(魯)는 조광조(趙光祖)의 구제를 상소하여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명종(明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던 홍도(弘度)는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 중에서도 정치의 폐단을 강력히 간(諫)했고, 김일손(金馹孫)·박 은(朴 誾)과 함게 <삼대문장>으로 일컬어졌다. 한편 홍도(弘度)의 아들 첨(瞻 : 호당에 뽑히고 도승지를 역임)과 수(粹 : 호조 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오름)도 가문의 문맥(文脈)을 이었고, 첨(瞻)의 아들 성립(誠立)은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남편으로 임진왜란 때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그외 고려가 망하자 경북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사촌동(沙村洞)에 은거(隱居)했던 자첨(子瞻)의 증손 광수(光粹)가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빈한 학자로 여생을 마쳤으며, 한말에 와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수도방위를 담당했던 선필(善弼)이 유명했다.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고타야국(古陀倻國)·고창군(古昌郡)으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太祖)가 견 훤(甄 萱)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永嘉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김구와이승만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민권투쟁(民權鬪爭)의 선봉장이었던 백범(白凡) 구(九)는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순영(淳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93년(고종 30)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했으며 명성황후(明星皇后)의 원수를 갚기위해 일본군 중위(中尉)를 때려 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탈옥하여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되기도 하였다. 그후 임시정부 주석
(主席)에 선임되어 민족분단의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서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했고
한독당(韓獨黨) 당수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葬)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쓰러져 1949년 6월 74세의 생애를 마침으로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맥(家脈)을 이어온 명문 안동 김씨의
전통을 빛냈다.
●백범 선생 가계표
1세[士衡(익원공)]→2세[陞]→3세[宗浚]→4세[璜]→5세 계지. 귀지
[終智]→6세[軾], 륜→7세 [永遜]→8세 세달. [鼎]→9세 [璉厚]
→10세 [大忠]→11세 [以亨], 이정→12세 [潤昌]→13세 세온.[世寶]
→14세 언겸. 언성. 언근. [彦함(言+咸)]→15세 [尙寬]→16세 양수,
[精壽]→17세 유원. [福源(字明汝)]→18세 [榮元(字聖瑞)] . 영량
→19세 [萬默]. 일묵→20세 재진. [在夏]→21세 [九(白凡)]
→22세 仁. 信→23세 振. 揚. 揮→24세 容正. 容萬
☞백범 김구선생(안동김씨) 손자 김양 전 보훈처장:
2005년부터 3년 동안 주 상하이 총영사를 지냈다.
●백범 선생 연보
1)1876(1세) :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기동(基洞 : 텃골,
뒤에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김순영(金淳永)
의 외아들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으로 당 27세. 어머니
는 곽양식(郭陽植)의 장녀로 곽낙원(郭樂圓) 당 17세.
아명은 창암(昌巖).
2) 1879(4세) : 천연두를 앓음.
3)1880(5세) : 집안이 강령(康翎) 삼거리로 이사하다.
4)1884(9세) : 조부상을 당하다.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5)1887(12세) :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 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하다.
6)1889(14세) : 통감, 사략 등의 병서(兵書)를 읽다.
7)1890(15세) : 학골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 통학하며 당시(唐詩),
대학, 과문(科文) 등을 배우다.
8)1892(17세) :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 매관매직(賣官賣職)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 그 후 풍수와 관상 공부 등을 했고, 병서를
탐독. 동학(東學)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라
개명.
9)1893(18세) :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
(報恩)에서 최시형(崔時亨) 대수주(大首主)를 만남.
10)1894(19세) : 팔봉 접주(八峰接主)로 동학군의 선봉이 되어 해주성
(海州城)을 공략했으나 실패.
11)1895(20세) : 신천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 그의
아들인 소년 안중근을 만남.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
(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를 받음. 압록
강 건너가 김이언(金利彦)이 지휘하는 의병단에 참가.
12)1896(21세) : 2월 안악군 치하포(安岳郡 치河浦)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죽여 국모(國母)의 원한을 풀다.
5월 2일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에 투옥됨.
감옥에서 태서신사 (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
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
13)1897(22세) : 7월에 사형이 확정되고, 고종(高宗)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14)1898(23세) : 3월 9일 밤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
(麻谷寺)의 중이 됨.
15)1899(24세) :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옴.
16)1900(25세) :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
17)1901(26세) : 엄친(嚴親) 김순영 씨 세상을 떠남(12월 9일).
18)1902(27세) : 장연(長淵) 친척집에서 여옥(如玉)이라는 처녀와
약혼함.
19)1903(28세) :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
안창호(安昌浩)의 영매(令妹) 신호(信浩)와
약혼했으나 또 파혼이 되다.
20)1904(29세) : 신천 사평동 최준례(崔遵禮 : 당시 18세)와 결혼함.
21)1905(30세) :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 준(李儁), 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 운동에 앞장섬.
22)1906(31세) : 해서 교육회 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
23)1907(32세) : 장녀 화경(化敬) 출생.
24)1908(33세) : 신민회를 통한 구국 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안악에
양산 학교(楊山學校)를 세움.
25) 1909(34세) :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의
교장이 되다.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26) 1910(35세) :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 회의에 참석함.
27) 1911(36세) : 1월 5일 사내 총독(寺內總督)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
근(安明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너 17년형을 언도받음.
28) 1913(38세) : 옥중에서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고침.
29) 1914(39세) :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
30) 1916(41세) : 출옥 후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 관리
인으로 있으면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씀.
31) 1917(42세) : 장남 인(仁) 출생.
32) 1919(44세) :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초대 경무국
장이 됨.
33) 1922(47세) : 차남 신(信) 상해에서 태어남.
34) 1923(48세) : 임시 정부 내무국장에 취임.
35) 1924(49세) : 1월 1일 상해에서 부인 최 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
36) 1926(51세) : 12월 임시 정부의 원수(元首)인 국무령(國務領)에
취임.
37) 1927(52세) :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 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 위원에 취임.
38) 1928(53세) :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 상권의 집필을 시작하다.
3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함.
39) 1929(54세) : 5월 자서전 백범일지를 탈고하다.
재중(在中) 거류민 단장을 겸임.
40) 1931(56세) :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 그 단장이 되어
독립 투사를 양성함.
41) 1932(57세) : 1월 8일 이봉창(李奉昌) 일황(日皇) 저격에 실패.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로 하여금 상해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함.
42) 1933(58세) : 윤 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흥(江蘇
省 嘉興)으로 피신. 가흥에서는 주애보(朱愛寶)라는 여
자 사공에게 몸을 의탁함. 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 낙양 군관 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 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함.
43) 1934(59세) : 다시 임시 정부 국무령에 취임.
44) 1935(60세) : 11월 가흥에서 임시 의정원 비상 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
45) 1936(61세) : 이동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국민당을 창당.
46) 1937(62세) : 임시 정부를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로 옮김.
47) 1938(63세) : 민족주의 삼당(三黨) 통합 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
(南木廳)에서 조선 혁명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 가료함.
48) 1939(64세) : 장사가 위험해지자 다시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옮김. 다시 임시 정부
주석으로 취임. 어머니 곽씨 부인이 인후염으로 82세
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남.
49) 1940(65세) : 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 한국 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군사 특파단(軍事特派團)
을 섬서성 서안 (陝西省 西安)에 상주케 하여 무장
부대 편성에 노력함.
50) 1941(66세) : 12월 9일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함.
51) 1942(67세) : 7월 임정과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
이 체결 공포됨.광복군(光復軍)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
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하게 됨.
52) 1944(69세) :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섬서성 서안
과 안휘성 부양 (安徽省 阜陽)에 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 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키로 함.
53) 1945(70세) : 2월 임시 정부가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함. 장남 인이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 일본이
항복. 11월 23일 임시 정부 국무 위원 일동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의 결정을 보고 12월 28일 이후 반탁 국민 운동을
적극 추진함.
54) 1946(71세) : 2월 비상 국민 회의가 조직되어 그 총리에 취임.
인천, 마곡사 등 전국을 순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 의사의 유골을 효창 공원에 봉안.
55) 1947(72세) : 1월 비상 국민 회의가 국민 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주석
에 취임. 제2차 미소 공위(美蘇共委)가 열리자 반탁
투쟁 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 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안을 지지
하다.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 소원'을 발표.
56) 1948(73세) : 2월 2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발표.
4월 19일 남북 협상 참가차 평양으로 감. 5.10 선거 후
부터는 건국 실천원 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에
힘을 기울임.
57) 1949(74세) :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월 5일에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영면함.
58)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됨.
*김구 증손 김용만 “할아버지는 때론 두렵고
때론 자랑스러운 오묘한 존재”
https://blog.naver.com/jydecor/221443361025
●구(선)안동김씨의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구(선)안동김씨는
132,645가구 총 425,264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Ref.http://blog.daum.net/cozygarden/11774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