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서울 중구정동 덕수궁 대한문 답사 및 Monitoring!
●. 개 설.
▲. 일 자 : 2012년 03월 21일.
▲. 장 소 : 덕수궁 대한문.
▲. 주 최 : 독립기념관.
▲. 주 관 : 독립기념관.
▲. 목 적 : 독립기념관 현충시설 해설사 현장교육.
▲. 인 원 : 40명.
▲. 사 진 : 첨부 하였습니다.
●. 개 요.
2012년 03월 21일 오늘은 독립기념관 현충시설 해설사 현장교육 시간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번지에 위치한 덕수궁 대한문을 답사하였습니다. 조
선시대 궁궐의 정전인 중화전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인화문을 사용했으나
1902년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중화전과 중화문 그리고 외삼문인 조원문을
세워 법전의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인화문의 자리에는 건극문을 세우
고 조원문 동쪽에 대안문을 세워 정문으로 사용했습니다.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6년(광무 10) 재건하면서 대한문으로 고쳐 불렀습니
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계 우진각지붕으로 1914년 도로확장 공사 때
문에 궁 안쪽으로 옮겨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겹처마에 단청을 했
으며 각 마루에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상을 얹었습니다. 현판은 당시 궁
정대신 남정철이 썼습니다. 정전인 중화전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인화문을 사
용했으나 1902년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중화전과 중화문 그리고 외삼문인
조원문을 세워 법전의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인화문의 자리에는 건극
문을 세우고 조원문 동쪽에 대안문을 세워 정문으로 사용했습니다.
●. 내 용.
▲. 덕수궁 대한문은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6년(광무 10)
재건하면서 대한문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계 우진
각지붕으로 1914년 도로확장 공사 때문에 궁 안쪽으로 옮겨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겹처마에 단청을 했으며 각 마루에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
상을 얹었습니다. 현판은 당시 궁정대신 남정철이 썼습니다. 사적 제 124호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 말 고종이 살던 곳
으로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
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이 되었으며 광해군은 이곳에
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615년(광해
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으로 불렸습니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습니다. 창덕궁은 서
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로서 사적 제122호 1405년
(태종 5)에 이궁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
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공되었으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
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며 특히 1833년(순조
33)의 큰 화재 때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탔으나 곧 다시 중건되었습니다.
▲.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
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
들을 헐어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복
구했습니다.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습
니다.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간 정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궁
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
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 인 곳에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과 그 양옆에 월랑
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이것을 모두 헐어버려 지금은 볼 수 없습
니다. 인정문은 정전의 정문이며 그 양쪽에 있는 월랑은 'ㄷ'자형으로 인정전
을 감싸고 있으며 ㄷ자형의 마당 안에는 인정문 으로부터 시작된 어도가 있
고 그 북쪽 끝에 있는 중앙의 높은 월대 위에는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정전 월랑의 동북쪽에는 편전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습니다. 선
정전의 주위에는 여러 행각이 있는데 그 남쪽에 있던 여러 칸의 행각들은
일본인들이 모두 헐어버렸고 뒤쪽에 있는 행각만 남아 있습니다. 동북쪽에는
희정당과 내전인 대조전 영역이 서남향으로 지세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습니
다. 궁궐지에 희정당은 편전으로 또 동궐도에는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현
재의 모습과 다르며 희정당 으로부터 구름다리 모양의 행각이 북쪽으로 뻗
어 희정당 자리보다 높게 자리 잡은 대조전은 침전으로 장방형의 행각이 둘
러싸고 있고 이 뒤쪽으로는 아름다운 후정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대조전 영
역의 동남쪽에 내의원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낙선재, 승화루, 백칸 안쪽에
이르는 행각들만 남아 있습니다.
▲. 창덕궁의 북쪽에 있는 넓은 터에는 금원이라고 부르던 후원이 있습니다.
현재 이 궁궐 안에는 건물 13동과 후원의 건물 28동 등 모두 41동의 건물
이 남아 있습니다. 그中에서 인정전(국보 제225호)·돈화문(보물 제385호)·인
정문(보물 제813호)·선정전(보물 제814호)·희정당(보물 제815호)·대조전(보
물 제816호)·선원전(보물 제817호) 등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Russia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
궐건물의 건立이 이루어졌습니다. 그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
침전인 함녕전 보문각 등이 지어졌으며 0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
고 소공동의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이 되었습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 및 돈례문·회극문·영
성문 등의 전문이 완성되었습니다.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습니다. 1902년 정
전인 중화전과 관명전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
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석어당·함녕전 등이 중건되었습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이라 했습니다.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습
니다. 1907年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
인 덕수궁으로 바꾸었습니다.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
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
의 대규모 석조전이 건립되고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하셨습니다.
●. 결 론.
▲.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
에 이르고 있습니다. 건물의 배치는 중앙에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전의 뒷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으며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습니다.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이 있으며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靜觀軒)이 있습니다. 정문인 대한문은 궁궐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전
인 중화전의 주위에 회랑이 없어 다른 궁궐에 비해 격이 떨어지며 현재 정
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중화문·함녕전·즉조당·준명당·석어
당·덕홍전과 근대식 건물인 석조전과 정관헌 등이 남아 있습니다. 서양식으
로 세워진 석조전과 정관헌은 주변의 한식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건
축양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특히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
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궐의 본래 모습이 상당히 손
상되었습니다.
▲.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로 본래
일반사가의 집을 궁궐로 꾸몄기 때문에 규모도 가장 작고 전체배치가 정연
하지 못합니다.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
산대군의 저택이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
지자 1593년(선조 26)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
년(광해군 3)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 후 광해군은 1615년(광해 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
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으며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
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의 미국 대사관저 건너편 서쪽에는 중
명전을 비롯해 황실 생활을 위한 전각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 지내는 선원전이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을 설
치하여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했으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
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
뀌었습니다. 이후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이 철거되었고 이 지역은 대한제국
의 상징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고종이 승하한 뒤 1920년부
터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하여 궁역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1933年에는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했습니
다. 이처럼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
도로 훼손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中心이었습니다. 感謝 합니다!
●. 2012年 03月 24日. 獨立紀念館 顯忠施設 解說士 龍湖 宋 哲 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