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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속 스크랩 퐁파두르 후작부인
스카우트 추천 0 조회 25 08.12.16 20: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프랑스쪽 역사는 거의 모른답니다.

하여튼 모르는데.... 부셰그림을 찾아볼 일이 있었답니다.

부셰라는 화가가 있다는건 알았는데 사실 그림도 몰랐거든요.

그러다가....-0-;;;일디보때문에...쿨럭.....

일디보4집 표지 앨범에 들어간 배경 테피스트리가 부셰그림을 밑그림으로 했다고 하길래.....

그 그림 찾아볼려고 인터넷을 누비다가 어쨌든 테피스트리도 제대로 못찾았다죠..ㅠ.ㅠ

 

그러다가.....본것이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화였답니다.

진짜 예쁘시더군요...... 아하하하....

그래서 필받은 김에 마담 드 퐁파두르에 대해서 알아볼까합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

마담 드 퐁파두르

잔-앙투와네트 푸아송

Jeanne-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Madame de Pompadour

(December 29, 1721 ? April 15, 1764)

부셰작품 (1759)

푸아송은 물고기라는 뜻이라고 하더라구요.(맞게 읽었나..) 제가 봤던 정부들에 대한 책에서는 어부의 딸이라는 챕터로 퐁파두르 후작부인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더군요. 

 

잔느 앙투와네트 푸아송은 1721년 12월에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푸아송은 1725년 투기 때문에 스캔들에 연루되어 국외로 떠나라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해외에서 사망했습니다. 프랑수아 푸아송이 법적인 아버지였지만, 아마도 잔느 앙투와네트의 친 아버지는 프랑수아 푸아송이 사망한후 그녀의 법적 후견인이 된 부유한 파리의 은행가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잔느-앙투아네트는 8살이 되어서야 프랑스로 돌아올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똑똑했으며 춤과 노래,연극등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합니다.

9살이 되었을때, 한 점장이가 그녀가 왕의 마음을 사로잡을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 자신이 그것을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그걸 굳게 믿었다고합니다.그녀는 일년간 수녀원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어머니와 친했던 파리의 부유한 은행가인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의 후원으로 유명한 배우나 가수들에게서 노래와 연기를 교육받았으며, 식물학등 전문분야와 남자를 사로잡고 유혹하는법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런 후원관계때문에 후원자였던 은행가가 잔느-앙투와네트의 친아버지라는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1741년 잔느-앙투와네트는 후원자인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의 조카와 결혼하는데,그는 엄청난 경제적 수익때문에 이 결혼을 승락했다고 합니다. 둘은 결혼후 두 아이를 두었는데 아들은 일찍 사망했고, 딸은 알렉산드린-잔느였습니다.

노르망 부인이 된 잔느-앙투와네트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파리에서 패션리더가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살롱을 열었고, 볼테르같은 유명한 사람들도 그녀의 살롱을 출입했죠.

 

아름다운 퐁파두르 후작부인 

부셰작품

 

노르망 부인의 살롱이 유명해지자, 당시 프랑스 국왕이던 루이 15세는 이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길 원합니다. 이에 딸이 왕과 연결될것이라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어머니 푸아송 부인이 우연을 가장한 왕과의 만남을 꾸밉니다. 1745년 그녀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국왕에게 그녀를 소개시킬 기회를 잡게 됩니다. 루이15세는  친척인 콩데공비로부터 그녀를 소개 받았고, 그녀를 아들의 결혼식의 가면 무도회에 초대합니다. 가면무도회에서 사냥의 여신인 다이아나로 분장한 그녀를 보고 국왕은 반했고, 노르망 부인은 정기적으로 궁정을 출입했으며 결국 베르사이유궁에 왕의 정부로 자리를 잡습니다.

 

 

루이 15세 

 

국왕은 그녀에게 퐁파두르 후작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려주었는데, 그녀를 국왕의 정부로 만드는데 그녀의 시아버지도 한몫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국왕의 정부가 된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터키 대사로 임명하겠다는 국왕의 이야기를 거절하고는 파리로 돌아가서 살았다고 합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남편 

 

베르사유에서 궁정예법을 재빨리 터득한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곧 궁정을 장악하고 정치에까지 관여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왕의 신하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궁정에서 자신을 몰아내려하는 음모에대해서는 철저하게 응징을 했고, 궁정에서 권력을 항상 유지했다고 합니다.

궁정에서 퐁파두르 후작 부인에대해 적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평민출신이었기 때문인데, 그녀의 성이 푸아송이었던것을 빗대어서 그녀를 'poissonnades'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에 친한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고, 1756년 베르사유조약을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이때문에 프랑스는 7년전쟁에 참여했고, 프로이센과 연합한 영국에 패배하면서 식민지 경영에 타격을 입게됩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적들중 한명이었던 루이 15세의 딸 빅투아르

마담 빅투아르

루이15세는 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는데, 딸들은 어머니와 무척이나 친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어머니를 버림받게 만든 (--;;) 아버지의 정부들에게 늘 적개심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국왕의 결혼한 딸인 파르마 공작부인이 퐁파두르 후작부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자 마담 빅투아르는 언니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궁정에서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였습니다. 로코코 스타일을 발전시켰으며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했습니다. 또 콩코르드 광장과 쁘티 트리농 같은 곳들의 건축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동양풍의 퐁파두르 후작부인 (1747)

  

1746년과 1749년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두번 유산했는데, 왕의 정부 지위를 잃을 것을 두려워했기에 일부러 유산한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750년 이후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더이상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왕의 가까운 친구로 남았고, 그녀의 지위나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고합니다. 42살의 나이로 그녀가 사망하자,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적들은 퐁파두르 후작부인때문에 7년전쟁에 관여했고,그 때문에 프랑스에 큰 손실을 입었다고 엄청나게 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비오는 와중에 그녀의 관이 궁을 떠날때 루이 15세는 '후작부인이 떠나기에는 좋지 않은 날씨군'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1764년의 퐁파두르 후작부인 

 

젊은 나이에 왕의 정부가 되어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만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언제나 행복했던것은 아니었습니다. 루이15세는 죽음이나 이런 우울한것들을 싫어해서 내색할수가 없었는데, 특히 어려서부터 떨어져 지냈던 외동딸의 죽음을 전해들었을때조차도 왕을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고 웃고있어야했다고 합니다.

 

 

1750년의 퐁파두르 후작부인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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