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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최근 몇 년간, 많은 사람들은 세련된 양복과 헤어스타일 대신 깨끗이 삭발한 머리에 불교식 전통 법복(法服)을 입고 있는, 변화된 나의 모습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저 “세상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갑자기 스님이 되었네” 라든가, “방해하지 말자. 무술을 너무 좋아할 뿐이야, 그저 또 다른 변화이겠지”라는 말들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동안 나는 내게 도전해오는 수많은 어두운 순간들을 묵묵히 통과해오고 있었다. 나의 바로 위 형님인 영진 형 ㅡ나는 그에게 영원한 빚을 졌으며 참회하고 있다 ㅡ의 죽음은 내 인생에 있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형의 죽음으로부터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가 했던 말들이 내 마음에 공명되어 울리고 있다. 그것이 나를 참회와 고행 그리고 수행의 길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나는 형을 위해서라도 이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나 자신은 물론이요, 내가 살고 있는 '카티지 하우스'(이스트 가든 안에 있음)에 변화를 가져다 준 이유이다. 쓰레기 더미가 썩고 있던 곳에서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 황량했던 오솔길 위로는 풍성한 샘물이 솟구쳐 흐르고 있다. 이스트 가든을 걷노라면 모든 종교와 영적인 전통을 상징하는 성인과 현자들의 조상(彫像)을 만날 수 있을 것인데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놀라울 뿐이리라.
이런 일련의 외적인 변화(법복을 입는다던가, 내 허영심을 머리카락과 함께 면도해버린다던가, 몸을 수련하고 집을 새로 변화시키는 등)는 내가 했던 내적인 언약과 맹세를 일깨워준다.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나의 이야기를 어떤 공적인 자리에서도 한 적이 없었는데, 금년 가을 학기부터 시작될 하바드 신학대학원에서의 '세계종교' 수업을 앞두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 자신과 내가 주장하는 것들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의 손 위에 올려놓는다.
여기에 펼쳐지는 것은 나의 고백이며, 간증이요, 이야기이며, 또한 삶이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페어필드 대학에서 니체, 마르크스, 헤겔, 포이엘바흐 등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면서 나는 신(神)의 실존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사회적·문화적 존재이며 한계를 지닌 인간들이, 그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어떤 것들을 반영하여 신으로 명명하고 숭배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동안 아빠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너무 많이 들어왔으며(한국어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해석할 때 하나인 존재가 된다) 솔직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한번은 예수회 신부이며 철학을 담당하는 교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교수님, 당신이 지닌 니체나 헤겔 등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모두 동원하여 생각할 때 진실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까?” 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창 밖의 자연 속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그저 어쩌다 생겨나 마구잡이로 살며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없다. 내가 보는 것은 질서와 아름다움의 운영자이다.” 나는 이 답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내 방에 앉아있는데 어머님께서 급히 찾으셨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왜 그리 급하게 찾으실까? 나는 노크하고 어머니를 부르며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방은 어두웠고 작은 벽전등만이 구석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어머님은 창 밖 어두운 밖 하늘을 응시하고 계셨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야 나는 어머님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보았다. 어머님은 내가 왔음을 아시고 재빨리 눈물을 닦으시면서 내 두 손을 꼭 잡으셨다. 나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여쭈었다.
“어머님, 괜찮으셔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어머님은 잠시 눈을 뜨시는 듯 했으나, 나를 쳐다보시는 순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신 채 다시 눈물을 쏟아내셨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신 어머님의 대답은 나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버렸다.
“네 형, 영진이가 승화했단다.”
어머님은 중얼거리듯 말씀하셨다.
“사고를 당했단다.”
나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며 반항을 하듯 대꾸했다.
“뭐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영진 형의 방으로 급히 달려 들어가며 소리쳤다. “형, 어디 있어?” 주먹이 부서질 정도로 벽에 주먹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지쳐 바닥에 쓰러졌다. 손엔 피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영진 형은 나보다 한 살 위였다. 우리는 함께 자랐다. 대부분 같은 방에서 생활했으며, 함께 도리토 칩을 먹으며 비디오 게임을 하곤 했었다. 마당을 뛰어다니며 괴물과 싸우기도 하고, 외계인을 막아내기도 했으며, 상어가 우글거리는 음침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괴물 오크로부터 마을을 지키기도 하고, 그네 뒤에 숨어 있는 장난꾸러기 요정을 잡아내기도 했었다. 우리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스크램블 에그에치즈, 사워 크림과 베이컨을 올린 구운 감자를 찾아 부엌으로 내려가곤 했다. 나른한 여름 일요일이면 영웅과 악당들의 그림을 그리며 함께 ‘던전과 드래곤’ 게임을 하곤 했으며, ‘엑스맨’ 만화의 최신 TV 프로를 보기도 했다. 우리는 이것 저것에 관해 논쟁했으며,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풋볼게임을 보면서 베리 센더스가 2천 야드를 돌파했을 땐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며 주위의 관중들 모두와 포옹하며 하이 파이브를 했었다. 심지어 우리는 같은 날 결혼식을 올리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모두 끝난 일이다.
여러 날을 나는 침대에서 자신을 책망하며 누워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형을 이해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나은 동생이었다면... 내가 거기에 같이 있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내 학교에, 형은 또 그의 학교에... 대학을 잘못 선택한 걸까? 우리가 같은 학교에 다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왜 내가 아닌 그에게...”
영진 형은 언제나 착했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항상 순종했으며 학교 공부는 물론 모든 일에 성공적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게으른 놈이었다. 학교생활에 충실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내 멋대로였다. ‘못난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놀림을 당하던 사람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내가 아닌 그를 데려가셨는가? 내가 갔었어야 했는데! 바로 나였어야 했는데, 나였어야!” 나는 중얼거리며 어느새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흥진 형님과 할머님(대모님)을 잃었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몰고 오는 깊은 상실감과 절망감,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상처를 잘 알지 못하였었는데, 영진 형의 죽음을 통해 나는 모든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나는 많은 의문을 새롭게 품게 되었고, 인생에 새로운 우선순위를 매기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한순간 한순간을 최대한 충실히 살자.’ 이것이 첫 번째 우선순위다. 나는 좋은 옷과 좋은 차, 소위 화려한 생활 속에 기쁨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멋진 외모와 패션에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큰 집에서 큰 규모로 살며, 인기와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생활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이런 것들이 모두 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제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차례
책머리에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첫째 이야기
다락방
딸기 이야기
당신은 누구인가?
둘째 이야기
원수들
제발 그만 쳐다보세요
내 생각에 아버님은···
하와이에서의 보석
셋째 이야기
탐구
자신을 계발하기
저 문 뒤에 있는 사탄
자아 성찰
이기적 자아
종교를 공부하면서
넷째 이야기
흩어진 다이아몬드 이야기
하나님과 전화로 대화하기?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
축복
연못
수련장
이 명상법을 한번 시도해보라
위하여 살기
다섯째 이야기
완성의 8단계
1,000억 원
영광의 왕관
다락방
거미줄로 가득 찬 다락방에 올라가는 것은 언제나 섬뜩한 일이다. 그 곳에 가기위해서는 어지간한 모험을 무릅쓸 용기가 있어야 한다. 소위 용감하다는 사람들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나무 계단에 맞닿아 있는 천장의 음침한 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움츠리게 하고 만다. 다락문이 삐걱거린다.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한다. “지금 당장 올라갈 필요는 없지. 내일 다시 한번 봐야 겠어”라고 말하며 그냥 잠자리에 들고 만다.
아침이다. 자명종 시계가 울렸으나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불평을 하고 만다. “이건 너무 이르군. 충분히 쉬지도 못했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서 이 시각에는 못 일어나겠어.” 눈을 비비면서 비틀거리며 기지개를 켤 때 진주빛의 영롱한 조각들은 한 줄기 아침 햇살에 할 일 없이 떠다니고 있다. 하품하며 비실거리는 걸음으로 양치질을 하러 간다. “닦자, 닦자, 깨끗이 닦자. 그래야 충치가 안 생기지.”
양치질하는 친근한 소리와 입에서 풍겨나오는 민트 향기, 그 개,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거야. 이제 준비가 다 되었다. 우리는 아직 젊고 건강하고 앞날은 무궁무진하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라고 말하며 반짝이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본다. 그러나 거울 속에 보이는 것은 세상의 때로 찌들어가는 백발의 음흉한 얼굴! “저건 누구지?” 뜻밖의 침입자에 놀라며 묻는다. 우리는 믿을 수 없기에 “이 거울이 흐릿하군” 하며 더 선명히 보고자 거울을 열심히 문지른다. 심지어 얼굴을 더 세게 닦는다.
한때 활기 넘치던 젊음과 생기발랄함은 험상궂게 늙어가는 얼굴과 말라 비틀어져 툭 튀어나온 뼈 위에 슬프게 걸려있는 늘어진 피부로 바뀌었다. 희미한 목소리를 듣는디. “너는 네 인생을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다.” 고개를 돌려보면 병원이다. 우리 모두에게 너무 익숙한 병원 냄새,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소독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나?” 그러나 침묵은 허공으로 올라가 기묘한 형태로 퍼져버리고 만다.“
침대에 앉아 깜박거리는 형광등 불빛의 냉랭함과 그것이 내는 윙윙거리는 잡음에 몸을 떨고 있다. 믿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후회하며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났다가는 다시 앉아 후회하고, 일어났다가는 또다시 앉아 후회하다 보니 집 꼭대기 다락이 생각났다. “저 계단을 올라갔었어야 했는데, 그냥 잠자리에 드는게 아니었는데.” 이런저런 후회를 하는 중에 다락문이 영화와도 같이 분명한 이미지가 되어 떠오른다.
우리의 본심이 살고 있는 다락에 올라가는 것은 불행히도 첫 단계에 불과하다. 허리 아픈 것을 참고 힘겹게 올라간 대가로 우리는 어두운 구석에서 벗어나 보물상자가 놓여있는 곳으로 인도된다.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저 큰 상자가 그것일까? 그렇다. 바로 그것, 그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들어있는 바로 그 상자 말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상자의 안쪽에서 혹은 바깥쪽에서.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아빠와의 관계에 있어서 굉장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데 인생에 더 깊은 만족과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사회는 우리의 인식을 조정한다. 사회는 우리의 인식을 좋지 않은 먼지와 때로 물들이는데, 우리는 성장하면서 불가피하게 이것을 자신의 도덕적 타락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설득하며 감금하고 있는데, 침묵 속에 서서히 자라나 갑자기 강렬한 소리를 내는 종양과도 같다. 우리는 선과 악이라 간주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성공과 실패, 정상과 비정상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대로 받아들인다. 열거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그에 상반되는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나는 가족 중 막내 아들이었으며 가장 장난꾸러기였다. 알다시피 막내들은 대부분 사랑에 목말라하며 가능한 한 많은 관심을 받고 주의를 끌려고 한다. 여러분이 흔히 생각하는 막내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부모님께서 여행에 돌아오시면 잠시 몇 분(分)이라도 함께 있어야 마음이 채워지곤 했다. 엄마와는 이것 저것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항상 ‘너무 바쁘거나’, ‘생각할 것이 많은’ 분이었다. 나는 감히 ‘하찮은 질문’으로 아빠를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 ‘높았으며’ 나는 너무 ‘낮았다’ (그때는 물론 지금은 더욱더 절실히 느낀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분이라는 것을.) 나는 별 생각 없이 아빠에 대해 듣는 바를 인정하였으나 동시에 무관심한 아빠라고 불만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아빠와 의미있는 대화를 가지지 못했던 진정한 이유는 단순하게도 내가 그것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대화를 시작하니까,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이 완전히 바뀌어감을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부모님이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다와 같은 지혜, 사랑, 진심, 그리고 진정한 관심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 속에는 여전히 뭐라 말할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내게 말씀을 하시는 동안 가끔 트림을 하거나 가래를 뱉거나 하시는 것인데, 더욱이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양 매우 태연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건대 이러한 독특한 장면들이 아빠로부터의 깨달음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트림 냄새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아빠와 가깝게 지내면서 놀랄 만한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는데, 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무엇이 나의 머리를 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빠 엄마는 물론 가까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영원히 변화시킬 만한 이러한 통찰의 순간은 이상하게도 부모님께서 멀리 떠나 계실 때 오곤 했다. 부모님께서 안 계실 때,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훈독회 시간도, 아빠를 수행하여 따르는 많은 사람들도 아닌 사뭇 다른 무엇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아빠가 심각한 묵상을 하실 때 고개를 숙여 턱에 호두 모양을 만드시는 것이라든가 목에서 가래를 뱉어낼 때나 기침을 할 때 혀를 빼는 모습 등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한국 비디오를 보시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아무 부끄럼 없이 방귀를 뀌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한국 드라마에서 애정 어린 장면이 나올 때면 “엄마, 당신은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에요”라고 말하듯 엄마를 향해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으로 지긋한 웃음을 지으시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코속에서 (삐어져) 나와 있는 코털을 잡아 뽑으며 순간 따끔함으로 온몸을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를 향해 화를 내시는 모습도 그리웠다. 많은 식구들 앞에서 우리의 무능력함을 나무라시던 모습, 우리 모두를 집에서 내쫓아버리겠다고 윽박지르시던 모습이 그리웠다. 기뻐하실 때와 기분이 상해 계실 때, 방으로 들어가실 때의 걸음 걸이, 흥분하실 때면 손을 컵 모양으로 만들어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시는 모습 등이 그리웠다. 그리고 심지어 나에게 말씀을 주시던 중에 하시던 트림까지, 모든 모습이 그리웠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좀더 심오한 어떤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자유요, 해방에 관한 것이었다.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어떤 모든 경험,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 다른 사람을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인정하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좋은 것’과 모든 ‘나쁜 것’이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즉 삶을 만드는 것이다.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 삶 자체를 만드는 것은 감정⋅생각⋅정서⋅의지⋅시련⋅변화⋅자취⋅고난⋅노력⋅경험⋅슬픔⋅행복⋅분노⋅만족⋅침체⋅동정⋅용서⋅고통⋅사랑⋅기쁨 등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이다.
딸기 이야기
옛날 옛적에 하루 종일 농사일에 매달려 사는 가난한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일을 하다가 깜박 졸았나 싶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덧 밤이 되어 있었다. 농부는 벌떡 일어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집에 돌아가려고 그는 숲을 가로질러 가기로 결심했다. 컴컴한 한밤중에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만이 그의 걸음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무엇인가 그를 무섭게 만들었다.
농부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점점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의 뒤에서 무엇인가가 그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 따라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뒤에서 육중한 걸음이 쿵쿵거리는 것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무엇인가가 따라오고 있었다. 배고픔에 군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는 무엇인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농부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전력을 다해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절벽이 나타났다. 뒤에서는 짐승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농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내렸다. 그는 굴러 떨어지며 운 좋게도 어떤 식물의 넝쿨 한 줄기를 움켜쥐어 죽음의 순간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절벽 위를 쳐다 보니 괴물 같은 호랑이 한 마리가 “이리 올라와라. 내 너를 먹어줄 테다”라며 으르렁거리고 있다. 아래를 보니 음침한 골짜기에 또 다른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이리 내려와라. 내 너를 잡아먹을 테니.”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농부 바로 위에서 검은색과 흰색의 생쥐 두 마리가 그의 생명을 지탱해주고 있는 그 넝쿨 한 줄기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명의 넝쿨을! 그런데 바로 이 절박한 순간, 농부는 눈앞에 탐스럽게 피어 있는 딸기 한 송이를 발견한다. 그는 그 딸기를 따서 입에 넣는다. “아, 이 달콤함이여!”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이 다소 비약적이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말하자면 현재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한 줄기 생명줄에 매달려 있다. 검은색과 흰색의 쥐는 밤과 낮의 시간이 우리를 피할 수 없는 죽음이나 고통(먼저 오는 어떤 것)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며(적어도 이것은 우리가 확실히 아는 바이다), 또한 여러 절박한 순간들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우리가 넝쿨 한 줄기에 매달려 있다고 해도 삶 속에서 ‘딸기들’을 인지하라는 것이다. 일요일 오후 해질녘 공원을 산책한다거나, 때론 친구와의 논쟁 속에서도 허전함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지금 이 순간 조그마한 관심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향기롭고, 아름답고 맛 좋은 딸기들로 얼마든지 가득 찰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기만 한다면 인생은 단지 경이롭다거나 그 밖의 많은 동의어를 더한다고 해도 모자랄 만큼 훨씬 더 경탄할 만한 순간들로 가득 찰 수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아빠에게 했을 때, 실로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아빠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자마자, “그래, 아들아. 그런데 그때 그 딸기를 그 쥐나 호랑이에게 주었어야 했단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것은 잠시 동안의 생각 후에 나온 답변이 아니라 반사적으로 하신 말씀으로 아빠의 존재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온 아빠의 심오한 동정심(同情心)의 승화, 인생의 ‘딸기’를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어떤 것에까지 주는 심정, 자신의 최대 적까지도 완전히 사랑하는 모습은 나를 날려보냈다. 나는 기절했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내 머리는 빡빡 깎여 있었다.
이러한 내 인생을 뒤흔드는 경험을 한 뒤에야 나는 솔직히 내 자신을 ‘통일교인’ 이라고 간주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아빠는 많은 것을 성취해 내신 존경하는 개인적 아버지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후 아버님은 나의 영적인 스승이요, 안내자가 되었다. 그는 동정(同情)에 대해 단지 말씀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과 완전 일체화되어 있어서 그분의 존재, 본질, 그리고 영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어떤 인위적 노력 없이도 그와 같이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다.
나는 성장하면서 우리 모두 참석해야만 하는 지루만 여름 수련회 내내 긴 원리강론을 수천 번이나 될 만큼 많이 들었다.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정과 고통 등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들었으나, 내 인생과 실질적으로 연관이 있다고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는, 또 내가 특별히 연관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어떤 이론에 불과했다. 나는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흥분보다는 그저 ‘의무감’으로 모임에 참석하였을 뿐이었다.
내가 종교적 전통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일이었다. 불교의 선(禪)전통에서 우연히 고대의 우화를 접하게 되었다. 나를 감동시킨 ‘진실된’ 선불교의 스님이 전해준 이 ‘딸기 이야기’를 나는 심오한 우화라고 믿게 되었다. 아버님과 나 사이에 진실된 관계가 시작된 것은 아버님께서 내 이야기에 그와 같이 반응하신 이후부터였다.
비록 내 아버지였지만, 보통 사람들은 각자의 아버지에 대해서 느끼는 그런 정다움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1년을 통틀어 1주 내지 2주 동안만 부모님을 볼 수 있었으며 그것도 아침 시간에 잠깐 인사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분들은 나같은 어린아이의 인생에 있어 결코 의미있고 재미있는 부분이 되지 못했다. 나는 여러 번 겁이 나기도 했고, 포기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무시된 느낌을 받곤 했었다.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에도 나는 결코 그분과 연결되지 못했었다. 나는 별 관심 없이 화내고 또 분개하고 종종 다음과 같이 되뇌곤 했다. “이런 것들은 나이 많고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의 몫이야.”
내가 아빠께 딸기 이야기를 했던 무렵 내 삶은 결정적인 순간을 맞고 있었다. 당시 나는 나름대로 인생에 있어 가치있는 종교적 전통이랄까 영적인 삶으로 인도해주는, 이슈가 될 만한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내 ‘딸기 이야기’에 그런 식으로 반응하신 이후로 그 모든 것이 아빠에게는 단지 신학 이론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빠가 하시는 말씀은 그 자신의 삶 속에 깊이 녹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렇게도 자연스럽고 확고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불교 스승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이 날 이후 나는 모임 때나, 말씀하실 때나, 또 일상의 대화 중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종교적⋅영적 스승으로서 아버님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훈독회에서 사용되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으며 전에는 밀접하게 연관되지 못한 것은 물론 들어보지도 못했던 측면들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읽은 아버님 말씀 중에 “나뭇잎들을 자녀들이라 생각하고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다. 알겠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냐.” 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아버님의 전체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던 통일원리가 실은 표면을 긁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통일사상과 창시자의 광대한 가르침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더 크게 갖게 되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막내 아들로서 아빠께 심도 있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지면서 내 자신이 아빠의 심정을 깊이 깨달으려 노력했다. 어떤 것을 기대하고, 심판하고, 원한을 품는 것 대신 객관적으로 듣고, 학자들을 좋아하며, 특정 종교적 전통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내게 있을지도 모르는 잠재된 감정과 경험의 선입관을 최소 한도로 줄이도록 도와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많은 종교적 전통의 가르침을 더 세밀히 비교할 수 있었으며 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세상의 여러 종교가 지닌 유사점이나 일치점들을 볼 수 있어 우리의 운동이 충분하고도 명백하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공부와 호기심을 통하여 아버님의 말씀과 활동이 진실로 종교간, 국가간, 인종간에 상호이해와 관용과 서로에 대한 존경(초종교, 초국가, 초인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영진 형의 승화 이후, 나는 그의 책들을 정리했었는데(당시 형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동아시아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새롭게 그리고 깊숙이 동양의 고대로부터 내려온 종교적 지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유교⋅불교⋅도교에 대해 공부했는데, 그 심오한 종교세계와 철학사상에 깊이 매료되었다.
우리가 논쟁할 때마다 영진 형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위선자가 가장 나쁜 거야! 위선의 탈을 벗어. 부모님을 보다 잘 섬겨야 해. 효자가 되어야지. 더 잘하란 말이야. 아버님께 변화를 요구할 수는 없어. 아버님은 벌써 80세가 넘으셨다구! 그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해. 네가 변하는 것이 더 가능한 거라구.”
그가 승화하기 전에는 이런 그의 말에 반항하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말들이 오늘날까지 내 귓가에 맴돌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가끔은 그러하듯이 내가 위선의 모습을 보일 때마다 자신을 보다 정직한 자리로 되돌려놓곤 한다. 그의 말을 통해 내 나약함과 부족함을 더 잘 느끼게 되며, 또한 그렇기에 변화란 계속되는 선택의 과정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지혜의 단어가 나와 함께 있어 내가 겪는 어려움과 시험을 견디게 해줌에 감사하고 있다.
마침내 나는 진실되고 깊은 관계에서 소위 말하는 ‘단점’ ‘기벽’ 또는 ‘괴팍함’ 등 잘 이해되지 않는 특유의 행동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런 것들을 우리가 그리워하며 또한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인데, 왜냐하면 오직 당신만이(혹은 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사람의 작은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그 작은 광적(狂的)인 장소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참된 자유이다. 그것은 부담 없이 다락으로 뛰어올라가 성심 성의껏 그 보물 상자를 여는 것이다! 그 상자가 열리며 자유스러워지는 것은 실로 기쁨이며 만족이다. 그것은 영혼이 친밀하고도 감사로 가득 찬 영광된 새 세계를 향해 높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다. 머리카락 사이로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지금도 가끔 짐들이 가득 들어찬 다락방을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제 그 곳에서 전등불이 나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다른 장면이나 결말 등은 더 이상 상상하지 않으며, 더 이상 후회하며 앉아 있는 일도 없다. 대신 나는 좀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딸기를 발견하여 쥐나 호랑이에게 주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다시 쓰거나 미래에 대해 쓸 수는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재에 대해서는 쓸 수 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인생이라 불리는 모래책을 넘기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으며, 이곳 지상에서 사는 특권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열쇠는? 다락 속 보물상자에 있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열쇠 말이다.
나는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열쇠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그 열쇠는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 열쇠가 보물로 인도해주는 것이 아니라, 열쇠 자체가 보물이기 때문이다.
- 지금 당신 주위에 있는 보물, 때가 되어서야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그 보물이었음을.
원수들
“아빠, 아빠가 감옥에 계셨을 때, 간수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뜻이지?”
“고문을 당하시면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지.”
아빠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본능적으로 피 묻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렸다.카메라에 잡힌 이 사람은 “에라, 너를 죽이고 말 테다”라고 말하듯 사악한 웃음을 띠고 있다. 그 사람의 손이 한 번, 두 번, 세 번 카메라에 번쩍이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나는 눈을 감았다.내게 들리는 것이라곤 욕지거리, “쿵” 하고 몸뚱이를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쓰러지는 소리뿐이다. 나는 상상되는 고통에 몸을 움츠렸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검붉은 핏방울이 침묵의 공포와 함께 떨어져, 흩뿌리는 예술 작품 마냥 초라한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님께서 견디어야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느끼는 어떤 어려움과 장애물이란 기껏해야 아주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겸허해진다. 아버님께서 당시 어떻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에게 살의를 가지고 욕설을 퍼붓던 사람, 문자 그대로 늘씬하게 때려 남은 음식 버리듯 그를 내동댕이쳤던 사람들에 대해 어떤 용서와 동정의 ‘반응’을 나타내셨는지는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그분이 겪으신 인생 역경(逆境)은 실로 주목할 만하다. 나는 때때로 아버님께서 지압이나 치료 등을 받으실 때에 몸에 나 있는 상처들을 힐끗 보곤 한다(알다시피 아빠는 그 상처로 인해 동정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방으로 걸어 들어가실 때면 그 빛나는 상처와 흠들은 불빛 아래에서 반짝이곤 한다.
그것을 볼 때면 ‘저 상처에는 어떤 이야기가 얽혀 있을까? 각기 다른 소름 끼치는 기억을 지니고 있겠지. 하나하나가 찢기는 육신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작은 소설이 될 거야. 아빠는 놀라운 사람이야’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든다. 나는 그 상처들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어떤 감상적인 내용들을 떠올리곤 했다.
아빠가 경험했던 심리 상태와 과정들은 알 수 없다. 계속되는 고문을 받으실 때마다 느꼈을 감정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어떤 단어들을 마음속으로 되새기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빠 마음속에 있는 진실성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
나는 아빠의 순진한 웃음과 아기의 눈빛 같은 미소를 보았다. 내 어린 아들을 품에 안으시고 잔잔히 앞뒤로 흔들어주실 때 그 부드러움을 보았다. 상처 입은 손을 뻗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을 향해 사랑이 가득한 동정을 보내실 때, 형제로서 품어 안으실 때 나는 그에게서 빛나는 광채를 보았다.
이것은 놀랄 만한 용서의 메시지이며, 문자 그대로 신성한 모습인 것이다. 자신을 살해하고자 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종교적⋅영적 수행과 성장 과정의 하나인 것이다. 변명과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고, 감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사랑이 미움과 원한보다 훨씬 더 힘 있고, 설득력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자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내게 묻는다. “어떤 종류의 미움과 원한을 품고 있는가”라고.
제발 그만 쳐다보세요
알다시피 나는 부모님을 항상 진지하게 존경하지는 못했다. 사실 사춘기 시절 대부분 나는 전형적인 화 잘내는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자기숭배나 자아도취 그리고 신성한 아이 신드롬으로 고생하였다. 나는 일곱 번째 아들이며 열한 번째 자식이었다. 나는 1979년 9월 26일 뉴욕의 웨스트 체스터에서 태어났다. 바로 그 날부터 나는 소위 내 위 형제들이 이미 경험하고 있는 세계로 들어갔다. 우리들은 계속하여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물 한 잔을 마시러 부엌으로 내려갈라치면 복도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마구 사진을 찍고 있다. 나는 이 침입자들을 공격하고 싶었으나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그들을 만족시켜주어야만 했다. “당신들은 누구야? 난 누구도 이곳에 초대한 적이 없는데. 누구에게도 이렇게 뻔뻔스럽게 다가와 자기들의 눈의 즐거움을 위해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 일이 없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치곤 했다. “우리에게 숨쉴 공간을 달란 말이야!”
어렸을 때에는 우리가 억지로라도 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공적인 생활이 그다지 거북한 것들은아니었다.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나는 좀더 민감해지기 시작했으며, 공적인 제스처를 취한다는 것에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스케이트 보드 타기를 좋아했고 긴머리에 헐렁한 큰 사이즈의 청바지를 입곤 했다. 항상 전통적인 정장만을 입는 대부분의 식구들과는 두드러지게 대조되었다. 우리는 온갖 행사 때에 단 위에 서있곤 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냉정하게 심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판단하고 착하거나 나쁘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었다(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나는 그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실제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에 석고칠을 한 듯 불경하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건방지고 참을성 없게 서 있곤 했다. 크고 작은 기대를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기에 오히려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통스런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식구(내게는 낯선 사람들이다)들을 볼 때마다 내 속에서 분노와 미움, 원한 등이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원인이 바로 저들에게 있다. 부모님이 항상 집에 안 계신 이유도 바로 저들 때문이라구. 저들이 우리에게서 부모님을 빼앗아가버렸어. 더군다나 우리 집에 함부로 들어와 우리가 저들에게, 또는 부모님께까지도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우리를 나쁜 아이들이라고 비난하겠지. 그러는 동안 우리는 내내 표정을 관리하며 웃음지어야 하고.”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여러 날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모임들이 싫었다. 이 집이 싫었고 공적(公的)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싫었다. 심지어 내 자신과 내 인생까지도.
대학에서의 첫 1년 동안 나는 독서를 많이 하였는데, 특히 보편적인 지성파 존재에 대한 주제나 토론에 관한 것이 많았다. 이 문제를 연구하면서, 현대 과학의 놀랄 만한 발견 중 하나인 양자(量子) 물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낮은 단계로 알았던 원자 아래에 그 원자를 구성하는 존재, 즉 양자(quanta: 라틴어의 양(量)에서 유래됨)라는 것이 있다. 이들 양자는 더 이상 쪼개질 수 없으며 모여서 하나의 원자를 이룬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원자는 분자를 만들게 된다. 이 분자들이 모여 공기, 나무 또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양자는 모든 존재의 기본 구성 단위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어떤 원소라기보다 진동에 가까운 것이다(초현 이론에 의함).
아인슈타인의 에너지는 물질과 똑같다는 상대성이론(E=mc²)은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이론은 기존의, 뉴턴이 ‘당구공’을 이용해 물리학 법칙을 설명해오던 체계를 재구성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들어온 아인슈타인이 스스로를 매우 영적인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자는 보편적인 인과관계를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종교적인 감성은 자연의 조화로운 법칙에 열광적으로 경탄하면서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지성-이것에 비교하면 인간의 체계적인 사고와 행위는 아주 미미한 반영에 불과하다-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것은 가장 잘 알려진 천재 과학자가 신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믿음을 드러낸 말이다! 고등학교 때 이것에 대해 들은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그 당시 알았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것은 내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학교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배운 것은 기초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진리의 표면만을 핥았을 뿐이었다. 물리학의 거장들은 한평생을 우리가 알고 있거나 혹은 모르고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데 헌신하였는데, 나보다 훨씬 많이 연구한 이 사람들은 깊고 심오한 영적인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 내가 정확히 보지 못했던 어떤 타당성이 있음에 틀림없어.’ 나는 이것에 대해, 그리고 물리학과 다른 여러 가지 요소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영적인 소생을 위해 많은 영감을 얻어가면서.
이 연구는 내게 전적으로 새롭게 이해의 수준을 높여주었다. 만약 양자물리학이 옳다면, 보편적 에너지(친숙하게 들리지 않는가?)는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결국 양자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생애를 통해 어느 곳에나 있는 보편적 만유원력에 대해서 들어왔는데, 그것은 모든 실재 속에 구체화되어 있고, 심지어 현실 자체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신에 대해 인식적이며 실체적인 증명을 본 셈이다. 나는 놀라는 한편 저항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라는 동안 들어왔던 편재(遍再)하는 존재는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적 문화와 학문적인 영향 속에서 과학의 타당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자라왔다. 그런데, 단지 믿고 싶지 않았던 어떤 존재-신(神)에 대한 증거를 준다는 이유만으로 과학에 대한 신뢰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릴 수 있을까?
과학에서는 편재한 양자라는 단계가 있다고 말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신에 대한 과학적 호칭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분하고 난처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만족감을 얻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종교를 향한 나의 미움, 원한, 분노 그리고 감정적 불안정서에 기인한다는 것과 동시에 내가 지닌 의식의 격자(현실을 보게 해주는 필터)가 흐리고 혼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정적이고 비참한 상태는 의식의 필터를 막히게 하고, 물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의 무지와 불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의식의 필터는 독극물 대신 정화장치로 바뀌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내 고통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내게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내게 책임이 있다니 그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껏 한번도 식구들에게 우리의 생활을 침해해달라거나 부모님을 나로부터 빼앗아가라고 부탁한 일이 없다. 내가 원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어항 속에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다. 행사 때마다 사진에 찍히길 원치 않았으며, 공적인 생활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부탁한 일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내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침착하게 그리고 조금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면서, 분노와 원한을 느끼던 매 순간마다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심하게 좌절하고 화내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런 감정들이 내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할 선택권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자신 스스로가 고생을 자처했던 것이다.
인도에서 부처의 가르침은 미움, 분노, 회한 등의 독 묻은 화살이 당신을 찌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떤 나무로 화살대를 만들었는지 그 깃털이 산비둘기의 것인지 집비둘기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자신 깊숙이 화살이 박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 화살이란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상태를 나타내며, 우리는 항상 이것 또는 저 사람 때문이라고 비난하거나 얼마나 우리가 화나 있는지를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화살은 내내 거기에 있다.
우리는 이 화살이 얼마나 독성이 강한지,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고 상하게 하는지 불평하는 것을 택할 뿐, 화살을 제거하는 것에 대한 선택은 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이 이 같은 원한과 분노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것이며, 나는 그 압력들을 감당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순간부터, 세상은 좀더 밝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곳엔 항상 붙어다니며 내 머리 위를 맴돌던 먹구름이 이젠 사라졌다. 삶에 대해서 보다 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보다 잘 대처하게 되었으며, 오히려 조금씩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즐기게 되었다.
내 생각에 아버님은···
나는 하버드로 전학을 하게 되었고 식구들이 전적으로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본 것은 아마 이 즈음일 것이다. 훈독회 참석을 위해 새벽 모임에 내려갔을 때, 나는 완전히 면도한 머리에, 발목까지 오는 긴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손목에는 묵주를 하고 있었다. 많은 식구들은 못 믿겠다는 듯이 입을 쩍 벌리고, 비난의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아버님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또는 “불교는 사탄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결코 세계에 도움이 되거나, 세상을 치유하지는(세계평화에 기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단지 분열되고, 분노를 사고, 미움을 전파하기만 할 것이다.
나는 심판 가득한 눈초리를 받았으며 심지어 아버님까지도 자식을 똑바로 세우지 못한 비판을받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반항하고 대항도 하고 싶었으나 곧 미움은 더 큰 오해만을 가져올 뿐임을 깨달았다. 타오르는 불에 불을 붙이는 것은 더 큰 불꽃을 일으킬 뿐이며, 오직 사랑하는 마음만이 미움의 불을 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될 때면, 집중하여 심호흡을 하며 그 사람을 위해 다음과 같이 되뇌곤 했다.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찾게 되기를! 어서 속히 고통에서 벗어나기를!편안한 마음으로 당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기를!” 그리고 미움에 반하는 관심 어린 마음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아버님께서 내게 한마디 비난의 말씀도 안 하셨다는 것을 들으면 아무도 상상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아버님은 잘했다고 하시며 종교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깊게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셨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99.999%의 식구들이, 심지어 아버님과 극히 가까운 식구들도 아버님께서 나의 이런 공부와 불교의 스님같은 모습에 심하게 반대했을 거라고 믿었다. 나는 아버님을 기독교만을 유일한 진리의 길로 생각하는 근본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불교와 도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아마도 나를 파문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는 내가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에 기뻐하셨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종교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아버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이해하기 힘들까?” 나는 아빠가 주신 자유로움, 즉 대단히 폭넓은 자유를 발견했다. 적어도 내가 참된 길을 발견하였음을 인정해주시고 대화 도중 깊은 우주적인 사랑을 보여주신 한 분, 아버님을 만나게 되었다. 어떤 한 종교를 공부함에 있어 종교 지도자의 이념적 발달 과정을 보는 것은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아버님께서 원리나 초창기 시절의 말씀을 넘어 살고 계시며, 계속 발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계심을 잊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종 지도자보다 따르는 이들이 훨씬 더 좁은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본다.아버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우리 식구들은 태양의 빛을 이용할 수 있는데도 랜턴 빛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동안 내가 만나 대화했던 통일교인들 중 대다수는 다른 일부 신앙자들이 사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타종교에 대해 깊은 이해와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심각한 독성이 있어서 살인, 침략, 종교전쟁 등 잔학한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근본주의의 핵심적 문제는 모든 인류를 공통의 신성한 원인자로부터 생겨난 한 형제자매로서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모든 것을 구원받거나 저주받는 것으로만 나눈다. 모독하는 자들은 영원히 지옥의 불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그 신은 어떤 종류의 신이 되겠는가? 분명 사악한 신일 것이다. 아버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은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인류 가족)과 더불어 들어가야만 하는 곳이다. 그분은 히틀러, 스탈린, 심지어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 안에서 용서받는 보편적 구원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사랑의 하나님, 동정의 하나님을 무시한다. 그들은 자신만을 정당화하며 옳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이교도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이고,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지금도 미워하고, 심판하며, 앙심을 품고, 그리고 복수심에 찬 채로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상상해보라. 이것은 우리가 있고자 하는 곳이 아니다. 나에게는 천국보다는 지옥의 비전으로 들린다.
하와이에서의 보석
이런 종류의 종교적 토론의 예로서 2003년 2월 하와이에서(참부모님의 성혼 재서약 후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가 떠나기 이틀 전, 아버님께서 훈독회에 나오셨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셨다. 지도자들에게 질책의 말씀을 하신 후 기분이 더욱 상하신 채로, 오른쪽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앉아 있는 나를 쳐다보셨다. 아버님은 “모자 벗어라” 하시고 내 삭발 머리를 보시자마자 즉각적으로 “이젠 머리 기를 때도 됐잖아?”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님께서 별 생각 없이 하신 말씀임을 알고 있었으나,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하셨으므로 내가 내 머리로 인하여 아버님과 모종의 마찰이 있다는 갖가지 소문이 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했다.
아침 식사 테이블에서 어머니께서는 미륵부처의 목걸이를 꺼내 보이셨다. 전날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내가 사다드린 것이었다. 테이블에 모인 지도자들은 숨을 죽였다. 아버님께서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웃으시면서 “형진이가 엄마 주려고 샀나? 얼마 줬나? 예쁜데”라고 말씀하셨다.
호텔로 돌아오면서(집이 좁아 우리 부부는 근처 호텔에서 지내야 했다) 내 아내는 내게 힘을 내라고 말했다. 나는 아빠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빠는 내 생각이 어디에까지 미치는지를 아시므로 단지 자연스레 말씀하신 것뿐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를 심판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면서 시내에 있는 피자 집에서 같이 식사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약간 의기소침해 있었으므로 아버님께서는 무슨 일인지 물으셨다. 나 대신 내 아내가 조심스럽게 훈독회 때 들은 말씀 때문에 오전 내내 걱정에 싸여 있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연이어서 “아빠, 저는 아빠처럼 슈퍼맨이 아니에요. 단지 인간일 뿐이지요. 머리를 깎는다거나 이런 옷을 입는 것은 ‘기억의 종’과 같아서 제가 한 각오를 상기시켜주며, 무의식 중에서 세속적인 길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도록 도와주지요. 이것이 저로 하여금 항상 영적인 수련의 길로 돌아가도록 채찍질해줍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아빠는 자랑스러워하시는 웃음을 띠시며, “그래? 그러면 깎아야지”하셨다. 연로한 많은 지도자들 앞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니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잠시 뒤 한 사람이 “아빠는 크리스천인데 당신은 동양종교를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라고 했다. 나는 즉시 “아빠를 단순히 기독교인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아빠가 메시아라고 천명하신 것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만약 아빠가 단지 기독교인일 뿐이라면, 세계의 일부분만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른 수십억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바다로 몰아넣을까요? 아니, 모두 죽이는 건 어때요?” 나는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아버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1.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로부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명칭을 바꾸심(단순한 기독교 통일의 차원에서 세계평화 구현의 책임으로의 확장을 강조하심).
2. 축복(통일이념의 유일한 주요 성사의식)을 결혼한 불가의 스님이나, 힌두교의 도사, 이슬람의 이맘, 유대교의 랍비, 기독교의 목사, 자이나교 목사, 미국 원주민 족장 등등에게 해주심.
3. 우리의 운동이 ‘종교, 국가, 인종, 그리고 세계를 초월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꾸준히 강조하심(초종교, 초국가, 초인종).
4. 다음과 같은 영계에 대한 견해를 강조하심. 즉 영계에서는 예수님이 석가모니를 ‘존경하는 석가’라고 부르며, “기독교 의식과 불교 의식 두 가지로 예배 봅시다”라고 말씀하신다. 또 예수님께서 기독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여러분이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상 숭배자라고 부르는 석가와 함께 있는 나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물으신다. 또한 영계는 공자와 모하메드가 종교적 지도자로서 하나 되는 곳이며, 각 종교간 사람들이 각각의 종교적 정체성(기됵고인, 이슬람인, 불교인 등)을 지키며 하나님 아래에 통일되는 곳이다.
5. 유엔에 아브라함의 종교만이 아닌, 모든 종교인들로 구성되는, 초종교 의회를 구성하라고 강조하시며 사람들을 동원시키심(많은 사람들은 아버님께서 아브라함의 종교만을 참된 종교라 하고 다른 종교들은 이단 종교라고 생각하시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나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최근 강조하시는 점들을 믿고 안 믿고는 각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학도로서 볼 때, 이와 같이 초월적이며 진정으로 종교간화합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르침과 주장은 통일이념 전통과 창시자의 사명 인식 과정에 있어 흥미 있는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는 밝게 미소지으셨다. 우리는 목장에 가기 위해 두 시간에 걸친 대화를 마쳐야 했으나, 차 안에서 나는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교수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내가 아버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라곤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은 아버님께서 단지 초종교간의 ‘이것 저것’에 대해 말로만 떠드는 기독교의 근본주의에 국한된 좁은 시각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보다 넓은 시각을 지니신 분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원리강론에 명시되어 있는 메시아의 사명, 즉 모든 민족⋅종교⋅인종간 통일을 위한 사명을 상기시켰다. 나는 구원자를 향한 종교적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구세주가 거의 대부분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주된 요소-회회교 시아파의 마디, 불교의 미륵 부처, 기독교에서의 재림주님, 힌두교에서의 칼키 아바타, 유대교에서의 메시아-임을 알고 얼마나 고무되었었나에 대해서도.
이 모든 것이 끝나갈 즈음 누군가가 “와, 오늘 아버님 많이 배우셨습니다. 아드님이 말씀하신 것에 박수 안 쳐주십니까?”라고 했고, 나는 “아니요. 죄송하지만 아버님은 오늘 아무것도 새로 배우신 게 없어요. 이 모든 것은 다 아버님께서 가르쳐주신걸요”라고 대답했다. 아버님께서는 박수를 치셨다.
차 안에서의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의 궤도를 다시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였다.즉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우리의 방향은 또 다른 기독교계의 한 종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 전통을 끌어안을 수 있는 구원자로서 모든 전통과 사람, 인종들에 대해 ‘지도적인 사역자’가 되자는 운동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내가 볼 때 통일이념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희망인 것이다.
옛 기독교 초창기 시절의 예를 든다면 당시에는 두 이념적 주류가 있었다. ‘베드로파’라 일컫는 부류에서는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제적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했으며, ‘바울파’에서는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할례, 금식 등의 의식 없이도 예수님께로 곧장 갈 수 있었다. 학자들은 기독교가 바울의 이념을 채택했으므로 초대 기독교가 전세계적으로 다 넓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앞으로 통일 이념에 대해 가장 논쟁이 될 만한 문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다른 믿음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참부모님께 곧장 갈 수 있을 것이냐, 아니면 먼저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느냐? 아버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1) 각자의 종교를 바꾸지 않고서도 가장 중요한 의식(축복)을 나눌 수 있다.
2) 영계 메시지는 여러 다른 종단들이 고유의 종교를 지키면서도 서로 다른 전통을 존경하며 교류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3) 예수, 부처, 공자, 마호메드 등 역사적 인물들을 통일교회 전통에서는 성자로 인정한다.
내가 믿건대, 이것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참된 평화를 지속적으로 이룰 수 있고, 모든 인종의 사람들과 모든 국가, 모든 종교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와이에서 발견한 참된 보석들이었다.
탐구
나는 집에 있을 때, 성지를 오르내리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집약하여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한자(漢字)가 있다면 무엇일까 몇 달 동안 고심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한자, 모든 것의 기준이 되며 신성함(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될 수 있는 구심점이 될 단 하나의 한자를 찾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것이 마음 심(心, 한자로 영혼, 마음, 심정 등을 표현하는)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무엇인가가 허전했다.
아빠가 외국에서 돌아오셨을 때, 아빠에게 가장 귀하고 소중한 한자가 있다면 알려주십사 여쭈었다. 이 순간을, 그분의 가르침을, 그분의 지혜를 얼마나 갈망하여 왔던가! 나름대로는 열의를 다해 탐구하였지만, 아직도 석연치가 않았던 것이다. 주저함 없이, 그는 한 글자를 쓰셨다(내가 단 하나의 한자로 압축하여 달라고 부탁드렸으므로).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깨달음의 순간이 오고 있었다. 정성 성(誠)자를 쓰셨다. 아버님께서는, 이 글자는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후에 깨닫게 된 것이지만, 이 글자의 왼쪽은 말씀을 상징하며, 그것은 서양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이 모두 말씀(토라, 성경, 코란)을 믿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 글자의 오른쪽은 이룸을 상징하며, 동양 종교들(불교, 힌두교, 도교, 유교)이 ~이 되고자 하는 신앙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근본적으로 명상을 통한 심리학적 방법을 쓴다).
이 단 하나의 글자에, 오른쪽과 왼쪽, 동양과 서양의 전통이 어우러져 하나의 역동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정성 성(誠)! 정성이 없다면 심장은 그저 피를 보내는 근육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정성을 들이게 될 때, 하나님과 우리는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정성의 유무(有無)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히 떨어질 수도, 하나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아버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글자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는 역동하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모두가 이해하듯이 이 글자는 깨달음을 주지만, 이것은 부분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다음 이야기를 보자. 나는 하나님과 진리 등을 대표하는 글자를 찾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찾고,찾고, 또 찾아 헤맸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나는 정성 성(誠)을 통해 “만약 찾지 않는다면 못 찾을 것이요, 찾아 헤맨다 해도 못 찾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닌, ‘~을 이루는 것’의 문제인 것이다. 평화를 찾아 다니다가, 찾았다고 해도 평화는 한 발 앞선 곳에 있을 뿐이다. 항상 우리의 노력을 헛되게 하면서, 그보다는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찾아 다닐 필요가 없어진다.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기쁨은 단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기쁨을 지속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평화를 찾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가 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사랑⋅동정⋅용서⋅공감⋅이해⋅덕행⋅박애⋅인내⋅겸손⋅감사⋅친절 등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위의 것들을 찾기만 해서는 결코 이 세상에 실질적으로 실현시킬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와 같이 이룬다면-아니 매 순간 새롭게 되고,매번 기회가 왔을 때마다 되어야 하지만-이 세상을 실질적으로 더 좋은 곳이 되도록 할 수 있다.
한국말에 정성을 들인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종종 영적 수련을 하거나, 기도, 명상, 헌신 등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이다. 왜 심신통일 수련과정에 정성들이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그것은 심신 수련이란 어떤 특정한 덕목에 대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 용서, 공감, 다른 이들을 위한 삶, 그리고 사랑의 실체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다.
자신을 계발하기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무술을 배웠는데 열 살 정도에 그만두었다. 그 대신 나는 스케이트 보드 타기를 즐겼는데,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여름에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무술을 시작했다. 나의 옷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청바지에서 중국식 쿵푸 유니폼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나와 동년배인 친구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보였으며 그들은 나를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생각했다.
나는 여러 사범들과 교수들로부터 지도를 받았으며, 무술의 여러 가지 다양한 기법에 거의 정통하게 되었다. 나는 열의를 다해 최고의 무술을 추구하였으며, 다른 것을, 다른 사람을 원망할 시간이 없었다. 대련할 때에는 보다 유리한 공격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비장의 몸짓과 같은 새로운 기술 배우기에 늘 굶주려 있었다. 내 전세계는 다시 시작한 소모적인 열정에 푹 빠져 있었다. 문자 그대로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소위 진급이라든가 검은 띠 또는 모든 관습적인 틀에 얽매이는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저 단지 위대한 무술가-위협을 받으면 큰 재앙을 가져올, 걸어다니는 ‘화약고’-가 되기를 원했다. 몇 시간을 계속하여 수련했으며, 시간, 속도, 힘 등에 있어 내게 적절한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내곤 했다. 내 마음은 언제나 기술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하나하나 동작을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각도에서 자세히 연구하면서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반복하여 연습했다. 그렇게 사랑했다.이것이 진짜 사는 맛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며 비웃었다. 그들이 먼저 시작하지 않는 한,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내게 시비를 걸었었다면 톡톡히 당했을 것이었지만, 나는 건방졌으며, 거만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안 했으며, 마약도 데이트도 하지 않았다. 왜냐는 물음을 들으면, 그저 단순하게, 내 무술 연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갓 시작했었을 때, 내 기억이 맞다면, 평점이 1.6점(4점 만점에)이었던 것이 졸업할 때는 3.33점이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이 더욱 대견해 보였으며, 성공적이고 위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내 자신의 매우 빠른 발전과 그리고 대단한 무술 수준으로의 성장을 보면서 흐뭇해했지만 동시에 자기 중심적 자아를 어마어마하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학업의 향상은 육체적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서까지 나의 용맹함을 보이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정신적 수양을 나의 ‘자아상(像)’을 더 훌륭히, 더 인상적으로, 더 매력적으로 높이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것은 점점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보다 악마적인 것으로.
저 문 뒤에 있는 사탄
“영적인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자아 개발이며,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것, 발전시키는 것 등이다.
“옳은 말인가?” 대답은 압도적으로 “예, 물론이죠” “당연하죠” “옳아요” 등이다(적어도 이것은 내가 질문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답변들이다). 미안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악마가 되는 길로 인도할 뿐이다.
“뭐라고? 지금 저 대머리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제 여러분은 이 대머리 아저씨가 완전히 돌았다고 생각하시죠?” 자, 농담은 접어두고, 왜 이 길이 악마에게 이르는 길인가? 나 역시 이것이 영적인 길이며, 자신을 계발하여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수련 길에서의 위험 요소이다. 마음이나 심정, 감정, 심리, 양심, 영혼 등을 다루는 일은 매우 섬세하다. 단 하나의 작은 무지(無知), 한 작은 오해, 잘못 설정된 작은 가설이 우리를 생각지도 못한 추한 곳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나는 통일교인이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영적인 길을 따른다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나무를 심으면서,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면서, 또는 기도하면서, 그들은 이제 성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에 열 시간이나 기도한다.” “나는 50명의 노숙자들을 먹여주었어!” “나는 1년 반 동안이나 봉사 생활을 해 왔는걸! 나는 참으로 가치있는 일을 많이했어. 모두들 감사해야 해.” 그들은 뽐내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들은 영적인 길이 자기 계발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기 강화, 자만, 자신의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인정하는 일이 생긴다. 물론 옳다.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거만함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인류에, 역사에, 우리의 운동에, 또 세계에 온전히 공헌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며, 무언중에 자신의 위대함과 자랑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여러 종교 전통에서 보이는) 앞에 나타나는 악마의 교만이요, 자만, 자기 과시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영적인 길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오류이다. 사람들은 영적인 길을 하나의 자아 계발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불행히도 그 길은 더욱 자기 중심적이요, 자기 집착적인 길로 인도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시도이며, 자신이 얼마나 큰 사람이며 얼마나 선한 존재인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심판적인 경쟁, 공포, 의심, 불신 등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위대성을 알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다. 공포와 불완전한 자신감, 거대한 이기적 자아(자신 속 환상으로 만들어진)로 채워진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진정한 화합을 이루지도, 타인을 위한 삶을 살지도, 서로 깊이 사랑하지도 못하며,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순하게도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정신 이상적으로 자기 도취에 깊이 빠져 있어서 소위 자기 계발이나 성장 또는 발전이라는 데에만 골몰하기 때문이다.
자아 성찰
이것은 처음에는 스스로 인정하기 어렵다.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즉시 불편함을 느끼고 방어적이 된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방패, 벽, 높은 탑들, 장애물 등이 갑자기 보이게 되며,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볼품없는지를 알게 된다. 위대하다는 느낌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자신감, 자긍심 등을 제공하였었는데 이제 이것들은 파괴되었다. 거울을 통해 왜곡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겁에 질려 떨고 있는지 느낀다. 보는 것 자체가 두려울 뿐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과정이 쉬울 거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영적인 길은 거친 길이다. 고된 길이며,냉혹할 만큼 정직하다. 우리는 생각했던 것처럼 위대하지도, 자신감에 차 있지도, 신과 같지도 않다. 가시밭길이며, 빡빡하게 들어찬 죽음의 함정으로 가득한 땅과 같다. 우리는 그 길을 통과하려 하기 전에 적어도 그 정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만 한다. 적어도 이것은 내 의견이다.
우리가 잘못 세운 가설들(이미 죽어버린 것도 포함하여)을 바로 직시할 수 있다면 무지의 길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영적인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니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 길 자체가 될 수 있다. 그 길은 더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것이며, 이기적 자아를 없애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고, 비우고,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주권 앞에 완전히 자신을 굴복시키는 데서 참된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의 본심 그리고 본연의 신성한 선(善)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만약 그것이 우리 자신의 선과 힘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이기적인 자아만을 더 크게 할 뿐이다. 스스로를 확대시키려는 경향을 반드시 억제하며 늘 경계해야 한다.
우리 자신(미움, 분노, 욕심 등)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맞이할 수 있다. 이기적 자아의 달라붙고 잡고 뒤트는 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타고난 성품인 따스함, 동정심, 사랑, 그리고 자비심은 밝게 빛날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스러운 선함과 사랑하는 마음을 깊게 해주는 영적인 길의 기반이 닦아지는 것이며 신성한 존재로 하여금 현현하여 이 고통의 세계를 어루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기적 자아
항상 앞서가려 하고, 발전시키려 하고, 성장하며 팽창시키려고 노력하는, 나 속의 이기적 자아라는 것이 실제 눈에 보이게 분리되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보다 깊게 그리고 분명한 이기적 자아 속에 빠지게 될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이기적 자아’를 볼 수 없다.그러나 깊이 들여다볼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많은 부분적인 생각, 감정, 정신적 상태, 육체적 상태 등의 복합체인 것을 본다. 구체적인 ‘자아’의 인식이 무너질 때, 또 다른 이기적 자아 개념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공포, 참된 자신감의 부족, 불안정, 잠재되어 있는 부적당한 감정에 대한 보상 심리, 또는 스스로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 등이 복합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감을 갖게 되지만, 그 그림 속으로 다른 사람이 걸어 들어오게 되면 즉시 우리는 위협을 느끼며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들을 즉시 적으로, 경쟁자 또는 나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한 대상으로 정해버린다. 우리는 거의 병적으로 이기적 자아에 집착하며 살고 있다.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잘못을 재빨리 집어내곤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에게는 전세계가 문제투성이다. 불행히도 그런 사람들은 깊은 반목, 분노, 원한, 자신감의 부족, 자기 학대 등으로 가득차 있다. 스스로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감이 가장 결여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감의 기운을 곁들일 수 있으나, 그 뒤에는 자기 장난감을 다른 아이들 것과 비교하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징징거리는 어린 아이가 살고 있어 자기 방어를 위해 다른 사람을 비하시키곤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되돌아보면, 우리도 이러한 일들을 종종 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소유한 자신감과 자기 가치성은 소위 자아, 이기적 자아라고 불리는 변화하는 아말감같이 변덕스러운 것에서부터 생기는 것으로, 그 자신감이라든가 자기 가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기 방어와 자기 안전, 견고함, 성취를 기르게 하는 한 단어만을 취하게 하며, 압도적인 의심으로 ‘자아⋅자신감’을 파괴하고 그것을 대신 채울 감정과 정신(혹은 의지) 상태의 변화만을 요구할 뿐이다.
우리가 완전히 자아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자아 자신감은 자기 중심적 자신감(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보았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진정한 자아⋅자신감은 스스로가 참된 자아, 본심,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만 오는 것이다.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내적인 요소, 즉 본질적인 따스함, 동정, 사랑, 보살핌, 연민, 심정 등을 깊게 할 때를 말한다.
자신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요구, 욕심, 미움, 편애, 원한, 이기심과 같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떠오르는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이기적⋅자기중심적인 자아의 창살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며, 본성의 선함, 사랑, 동정적인 마음 등을 빛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여기 평화속에서 쉴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자아이다. 타인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고뇌뿐 아니라 육체적 고통이나, 질병들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동정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가 부지런히 자기중심적인 것을 비워낸다면, 자연스럽게 본심의 때를 닦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다면, 사소한 문제가 있는 날, 작은 하나의 논쟁, 한마디의 비난이 우리 전체를 압도해버려 하찮은 것 하나가 세상을 파멸의 그림자 속으로 휘몰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인해 생기는 뒤틀어짐이나 고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다른이의 고통을 우리의 시각 안에 포함시켜 마음에 보듬을 수 있다면, 사소한 문제가 있는 날쯤이 세상의 종말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것은 정신적 안정의 참된 근원이 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본심인 사랑의 본성 안에서 쉴 수 있으며, 온전히 안전하게 된다. 자기중심적 자아를 버리고 본심에 따르고 굴복할 때만이 하나님이나 본심이 힘과 광채를 가지고 빛날 수 있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울 때만이 하나님의 심정에 보다 깊게 접근할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종교를 공부하면서
하버드로 전학한 이후 나는 진지하게 철학, 종교, 심리학, 과학 등의 분야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모든 신앙에서 보이는 하나님, 타다가타가바, 알라, 니빠나,도(道), 심지어 과학 분야의 양자에 이르기까지-에 대해 더 큰 깊이와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우주적 에너지에 대한 믿음이건, 편재하신 하나님이건, 또는 모든 선함에 대한 믿음이건 상관없이,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존재와 그 실존을 나타내는 여러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독특한 것과 같이 하나의 존재도 역시 특별한 차원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차별과 분리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하나의 존재를 각기 하나님, 절대적인 공(空), 알라, 더 높은 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각기 다른 그룹과 파(派)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느 줄의 한쪽에, 다른 사람을 다른 한쪽에 놓아서는 안 된다. 사실, 줄 자체가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한번은 어느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하나님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성부⋅성자⋅성신으로 계십니다.”
“네, 그렇지요. 그러나 좀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사람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말로써는 설명과 표현을 하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나는 또 50년간 수도를 하고 있는 불교 스님에게로 가서 물었다.
“절대적 공(空)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그것은 기쁨의 빛이며 깨달음의 기운과도 같습니다.”
“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으며 표현을 넘어서 있습니다.”
각각의 신학으로 말하자면 여러 종교들간에 차이가,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정반대의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한 특정 기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종교와 그 종교의 본질인 진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서 종교는 어느 시기에 발생되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증언하는 진리는 특정 시간의 개념이 없다. 늘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모든 주요 종교의 전통은 사람을 좀더 깊고 더 사랑하도록, 더 인간적이 되도록 하는 데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각 종교가 지닌 성격은 이 지구상의 개개인이 독특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특하며 특별하다. 하나님을 반어법 또는 직설법으로 표현하든지에 상관없이(긍정적 방법 또는 부정적 방법-이것 저것이다라는 긍정적 용어를 사용하거나 이것 저것이 아니다라는 부정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 모든 종교적 전통은 명료하게 신의 초월성을 가르치고 있다. 종교마다 다양한 전통이 있으나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며 이해하라는 등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주제와 변형의 문제이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 육신생활의 소중함,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인정, 보다 인내하고 정직하게 회개하며 동정하는 삶 등은 모든 주요 종교에서 강조하는 근본적인 주제이다. 신학이나 신화, 설화 그리고 종교의식에 있어서는 다양한 변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 주제는 각 종교 신도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며 서로 돕는 삶을 영위하도록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문화간⋅종교간에 이해와 관용을 이끌 수 있는 큰 희망이다.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 평화의 한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러나 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통일, 화합의 실체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함께 경험하고, 수행하며, 서로의 진심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가 불가피하게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종교적 성향을 잘 알고 공통의 형제애라는 심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것은 자신이 지닌 도덕적 전통의 가치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다른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 분열보다는 화합의 한 점을 찾아낼 것을 결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 세계에서는 이념간의 분열이 지구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켜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북아일랜드에서는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죽이고 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인과 이슬람인 그리고 기독교인이 서로를 살해하며, 인도에서는 힌두교인과 이슬람 신도 간에 싸움과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 되며,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충분한 것이 아니다. 저변에 깔린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이 종교적 갈등을 깊게 하는 것이다. 종교적 광신자들이 종교로 하여금 살인과 그 밖의 일들을 정당화시켜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전의 한 면에 불과할 뿐이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얼마나 많은 살육과 죽음을 단념케 하였으며 피하게 하였는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부터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보면서 네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내 생각으로는 종교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같이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종교야말로 이 세계가 실질적인 평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보살피며 동정하고 인내와 용서를 배우는 것은 종교의 핵심적 가르침 안에서 가능하다. 종교적인 핵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사랑하게 하고, 인간적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살인하고 강간하고 도둑질하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옥일 것이다.
아버님께서 종종 말씀하시길,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종교가 필요없다고 하신다. 나는 이것이 아버님이 단순히 종교적 전통을 파괴하고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공산주의의 폐악을 되풀이하는 것이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각자 다른 종교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차이점보다는 더 많은 유사점들을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함(본심)을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교파주의적 사고를 뛰어넘어서 공통된 인간으로의 형제애를 느낄 것을 요구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양자 에너지의 집합체로서 묶여 있는 영광된 존재이며, 희망과 꿈을 가지고 있고, 인생에 있어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 하고, 어려움을 경험하며, 실수도 하고, 별을 연구하며, 마음에 평화를 갈구하는, 그리고 하나의 존재와 일체가 되고자 하는 그런 모습들이다.
당신을 가깝게 잘 아는 사람들은 당신의 작은 불완전함을 알고 있다. 머리를 긁는 버릇이라거나,춤추는 스타일 등등. 이러한 것들이 당신이 멀리 있을 때에 우리로 하여금 즐거움의 눈물을 흘리며 웃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어떤 두려움이나 심판, 또는 조롱함 없이 완전히 알 수 있다면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위로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주저함도 없이-왜냐하면 우리를 완전히 신뢰하므로-얼마나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던가를 추억할 수 있다.이렇게 자유로움을 주는 신뢰가 바로 종교들을 화합하는 데 필요한 것이며, 각자의 이념적 위치를 초월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나는 신앙의 체계가 서로 같은 믿음-자신보다 위대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교류함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달에 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했다. 우리는 더 오래 살 것이라고, 행복을 가질 수 있다고,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만약에 믿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러한 목표도 이룰 수 있거나 성취함에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믿음, 인생이랄까, 혹은 심지어 피할 수 없는 슬픔이나 고통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일상적 갈등에 대해 일종의 해독제가 되지 않을까?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듯이, 나는 삶 속에서 우여곡절을 경험했다. 그 경험과 묵상을 통해서 얻은 소견을 일기에 적어놓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 한 번의 윙크에 지나지 않는다. 한순간에 지나가 버린다. 주의를 기울일 때만이 우리의 인생은 의미롭게 된다. 저 윙크가 주는 무한한 영광의 햇빛을 쬐어라. 다양한 각도를 통해서 보아라. 윙크를 느끼며 그것과 하나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많은 윙크가 그러하듯이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소위 인생이라 불리는 이것은 매우 귀하고 풍성하다. 그것은 영원 속의 한순간과도 같으며, 광대한 시간의 흐름에 희미한 불빛과도 같으나, 말할 수 없이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순간은 곧 영원한 순간이다. 그것은 영원 자체보다도 훨씬 귀한 영원 전체를 함축한 순간인데, 그 이유는 당신이 그 순간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무한한 감사를 느끼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은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인생에 대해 더 큰 감사를 느끼도록 해준다. 내가 하는 “안녕히 가세요” 또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더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우리들의 실수를 더욱 의미롭게 만들어준다. 우리 부모님과 형제, 스승, 조언자, 그리고 세계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하나의 존재를 더 심오하게 느끼게 해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게 귀중한 모든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언젠가는 나를 떠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기 있는 동안 나는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나는 죽을 때가 가까워져 후회하며,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써주었어야 했는데” “그 다락에 올라가서 나의 영혼을 찾았어야 했는데” “내 인생을 분노와 원한으로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살아 있을 때 더 삶다운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죽기 위해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살기 위해 죽는 것이다. 한순간도 낭비하지 말라. 그저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사라지게 하지 말라. 그 대신 찾으라. 모든 종류의 가방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다락으로 올라가라. 그것들을 분류하고, 새롭게 마음을 잡아라. 평화를 만들고, 행복을 찾으며, 영혼으로 하여금 영광된 사랑의 품으로 맘껏 날아가게 하라.
우리는 선택한다.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인생을 선택할 수 있다.
- 인생은 영원이라는 사막 가운데 있는 작은 모래 알갱이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 마음의 바람에 의해 그것이 날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흩어진 다이아몬드 이야기
어느 날 신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빛나는 열 개의 다이아몬드를 숨겨놓기로 결심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런 빛과 광채를 내는, 심지어 가장 부유했던 왕이 찾다가 죽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 다이아몬드를 본 일이 없다. 그날 밤, 신은 세상으로부터 숨겨진 곳을 찾아 비밀리에 하나씩 다이아몬드를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를 묻으려는 순간, 다이아몬드가 금이 가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신은 한숨을 쉬며, 간신히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신성한 산중에 묻었다. 조각난 다이아몬드가 그곳에 잘 놓여져 있기를 기대하면서.
시간이 흘러 다이아몬드가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서서히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왕으로부터 유랑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이 귀한 보석을 찾기 위해서 땅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소문들이 하나 둘 구체화되어 땅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군중들 틈에서 소란스럽게 퍼졌다.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해 살인과 약탈이 일어났다. 핏발선 눈들이 앞뒤를 쏘아보고, 의심과 교활한 흉계와 미친 듯 날뛰는 열망이 사람들을 전염병에 걸린 듯 몰아갔다.
세상은 어두워졌으며, 등이 휜 도깨비들이 땅을 휩쓸고 있는 듯했다. 어둠의 그늘 속에 숨어서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못한 채, 모두 다이아몬드만을 열망하고 있었다. 조각나지 않은 아홉 개의 다이아몬드는 이미 여러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으며, 심지어 피 묻고 욕심사나운 손들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며, 공포와 불신의 날카로운 소리가 깊은 밤을 꿰뚫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리를 이탈한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산 속에서 놀고 있었다. 그날 그는 어떤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세상을 영원히 바꿀 줄이야!
멀리 동떨어져 있는 바위산 속에서 그 소년은 한 줄기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마지막 남은 깨어진 다이아몬드였다. 확신하건대, 이 다이아몬드는 아무도 원치 않을 것이다.다른 다이아몬드들은 하나의 눈부신 작품이었는데 반해, 이것은 깨진 작은 조각들에 불과하다.그 소년은 매일 새벽 동이 트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갔다. 천천히, 한 조각씩, 그 깨진 조각들을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 소년은 노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깨진 다이아몬드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한평생이 걸리는 일이었다. 단지 세 개의 조각만을 더 찾아 맞추기만 하면 된다. 이제 노인은 두 조각을 발견하기 위해 밤낮으로 찾아 해맸다. 이제 한 조각만이 남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쉬는 이 노인은 이젠 걷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의 호흡은 딱딱한 인생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찾고 있다. 그의 야윈 체구가 지탱하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그는 그곳에 누워서 신에게 마지막 한 조각을 찾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매달렸다.
눈발이 조용히 날린다. 노인은 그의 딱딱하게 굳은 몸을 눈 위에 눕힌 채 얼어붙은 손을 하늘을 향해 내밀었다. 그때 나뭇가지로부터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이 떨어져 흩날리더니, 그 마지막 남은 자리에 맞춰지며, 깨진 다이아몬드는 온전한 것으로 완성되었다. 그 다이아몬드는 수백 년간 갇혀 있던 어둠의 마법에서 풀린 듯 환상적인 빛을 발하며 쉬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깨진 다이아몬드는 조각들이 합해져서 수만 개의 태양이 발하는 광채보다도 더 강렬하게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조각과 각도에서 발하는 빛은 쉽게 꺼질 듯싶지 않았다.
그 노인은 남은 목숨과 모든 힘을 모아 그 보석을 하늘을 향해 힘껏 던졌다. “언제나 당신 것이었던 것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신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꺼이 미소를 짓는다.
이 이야기는 아버님께서 들려주신 것이다. 물론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시적인 감상을 첨가하였지만 이야기의 주된 본질은 같다. 아버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보석이기에, 그 흩어진 보석을 찾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실로 효성스러운 사람은 천 개의 완전한 다이아몬드에 대한 것과 같은 감사함을 가지고 깨진 보석을 대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다(2002년 참하나님의 날, 청평 천주수련원의 식당에서).
하나님과 전화로 대화하기?
호기심으로 나는 아버님께 하나님과 대화할 때 그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여쭈어보았다. 아버님은 목소리 대신 직접 느낌으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본질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점이다. 만약 아버님께서 목소리를 들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버님이 서로 분리되고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느낀다는 것은 하나로 통합되고, 일체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여러 식구들에게 아버님이 하나님의 소리를 직접 듣고 계신지 어떨지에 대해 물어보곤 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반응은 확신에 찬 “물론 그렇지요”였다.
다시 한번 우리는 신성한 존재와 우리와의 잠재된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본질을 잘못 이해함으로 인해, 종종 듣지 못하고 답을 받지 못하는, 버려진 느낌을 받곤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밖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됐다고 느낀다. 학생의 길이라는 훈독 교재에서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영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마음의 중심에 계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다시 한번 우리의 내면을 깊이 통찰해야 함을 강조한다. 본심이라는 보석을 잘 갈고 닦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적인 선함, 동정심, 사랑 등을 다시 잘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을 하늘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우리 앞에 늘 놓여 있는 사랑의 선물을 보지 못할 것이다.우리들 대부분은 걷고, 뛰고, 말하며, 숨쉴 수 있는 은혜를 받고 있다. 인생, 건강,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능력(장님이 아니기에), 상쾌한 아침에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귀머거리가 아니기에), 피어나는 꽃의 향기를 맡고, 숲의 부드러움을 만지며, 깨끗하고 순수한 물의 신선함을 맛보고, 솟아오른 산의 봉우리에 경외를 느끼며, 생각하고,꿈을 꾸며, 다른 이들의 행복을 기원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는 인간으로서의 경이로움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고귀한 선물들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그 사람들은 많은 경우, 가볍거나 큰 병을 앓고 있으며, 인생의 이런 선물들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의학적인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에 이런 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더 착하고, 더 강하고, 또는 더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저 단순히 주어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면 정신을 집중해 호흡을 한 번 함으로써 쌓였던 분노와 좌절을 한순간에 정화시킬 수 있다.나는 생명과, 우주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단한 감사를 느끼고 있다(어느 오후 거실에서,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음).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
나는 아버님께, 요즘은 숨쉬고 걷는 것 등에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함도 느끼고 있다고, 또 덧붙여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걸을 때면, 하나님과 같이 걸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만약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분명 다시 걸을 수 있기를 열망하겠지요. 심지어 내가 당연히 걸을 수 있었을 때 감사하지 않았음을 후회하겠지요. 세상에는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병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사람들도 많구요. 숨 안 쉬고 살 수 있을까요? 몇 분도 안 돼 죽고 말 거예요.”
아버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심장 박동도 그렇지”라고 말씀하셨다. 내 기억에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 되어 대화는 간단하게 끝났던 것 같다(2002년 4월 1일 오전 5시 51분, 봄방학 기간 중 아버님과의 대화 중에서).
축복
내가 아버님과 하버드 대학에서 듣고 있는 세계종교 과목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는 도중, 아버님께서 통일교회를 뛰어넘어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시작하신 것이 얼마나 비범한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종교 지도자로서 아버님은 그분이 만드신 조직, 작품을 해체하신 것이다.
나는 또한 축복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아버님은 실질적인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축복이야말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축복의 방법이야말로 가장 친밀한 관계인 남편과 아내로부터 시작하여 각 개인과 그룹들 사이에 놓여 있는 종교적⋅역사적⋅윤리적⋅문화적 장벽을 치유하는 의식임을 깨달았다. 내가 “축복을 받지 않으면 다른 무엇이 각기 다른 종단의 신도들에게 공통 요인이 될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이집트의 모슬람인과 한국의 선불교 스님 사이에 공통점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둘 다 인간이라는 점이다. 둘 다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축복을 받는다. 축복을 받음으로써 그들(모든 종교의 참여자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단체간에 변할 수 없는 제휴의 영적인 다리를 놓는 것이다. 축복 그 자체도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이 부부들에게 먼저 축복을 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성혼서약을 선언하심으로 마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세계의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적 전통을 지닌 대표자들을 불러서 초종교적 집회를 통해 그들의 신도들에게 결혼 축복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아버님의 비전은 종교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 축복은 소위 ‘사탄과 연결된 혈통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축복은 모든 참여자들로 하여금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를 통해 초월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백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아버님의 비전에 의해 믿음의 우산을 함께 듦으로써 모든 참가자들을 하나로 묶고 화합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증거할 만한 역사적인 종교의 의식이다.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보통 우리는 대화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간의 교류는 대화를 통한 것이 기본이다. 이것은 부부관계의 전 기간 동안 배우자와 전화만을 통해 대화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전 생애를 통해 배우자와 대화만을 하고 산다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얼마나 불완전하며 부적절한 일인가! 그런 종류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내가 믿건대 만약 종교간의 활동이 깊고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결혼은 우정의, 이해의, 감사의 결혼관계와 같아야 할 것이다. 평화, 이해, 서로에 대한 존경 등과 같은 덕목을 말로만 할 수는 없다. 물론 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때,주고 받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 된다.
축복이란 심오한 지혜를 지니고 있는 정말 훌륭한 모델이다. 진정한 화합은 살아 있는 경험이라야 한다. 참된 감사와 사랑이 살아 숨쉬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진정한 평화의 실체가 되어야 한다. 각 순간을 남편과 아내, 백인과 흑인, 동양과 서양, 북쪽 사람과 남쪽 사람 등이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한다(2002년 5월 10일 오후 5시 4분, 15분 전 거실에서 돌아온 후).
연못
연못을 주의 깊게 정신을 집중하여 보고 있노라면 전혀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편안한 눈으로 보면 광활한 푸른 하늘이 보이고, 새들이 가끔씩 지저귀며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집중하여 연못을 보게 되면 단지 표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밑의 심오한 세계를 볼 수 있다. 바위와 물고기들, 전체 생태계를 본다. 항상 집중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만약 1초라도 집중이 깨어진다면 그 밑의 세계는 사라지고 대신 영상들의 환상이 다시 살아나 나의 현실을 지배하게 된다.
그것은 내게 바로 이 순간, 이 모습, 우리의 존재 현실을 비추는 거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적절한 집중이 없이, 단지 느슨한 시선만을 가지고서는,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가 더 깊고 더 심오한 현실을 제압해버린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표면 밑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불행히도 대부분 사람들은 결코 그 밑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그 표면은 우리 집과 자동차, 성공을 위한 몸부림, 애완견 등을 뚜렷하게 반사하고 있다. 우리는 불가항력으로 이런 것들(우리의 게으른 시각으로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만을 볼 수 있다)이 전체 세계, 우주 또는 하나님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변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이 지루한 질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연못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수면 밑 미끌미끌한 경사진 땅, 어둡고 축축하고 추운 곳에서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 물은 우리가 실제 그 속에 들어간다면 공포스러운 것이다. 물에 잠기는 순간 우리의 싸우고 날고 싶은 본능이 저절로 작동하게 된다. 전혀 다른 이질적인 환경 속에 들어감으로써 움직임은 방해받고, 숨도 쉴 수 없으며, 시력도 작동할 수 없게 된다(인간은 정보의 90%를 시각을 통해 받아들인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 우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연못의 실제의 경우이기도 하다. 삶이 불행의 그림자로 변해버린 어린아이들이 있다. 아이의 어머니가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며 목놓아 울 때, 죽음이 아이의 눈에 베일을 드리우고 있다. 배설물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집, 찬 바닥에 홀로 누워서 죽음만을 기다리며 거친 기침을 토하고 있는 우리의 동료들이 있다. 먹을 것이 없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팔다리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 야위고 가여운 아이가 한 줌의 공기를, 먹을 것을, 생명을 갈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통곡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가 지속하는 안락한 생활 저변으로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가!그것은 고통과 고민,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얼룩진 어둡고 차디찬 고생길이다. 우리는 공포에 움츠리며, 냉정한 외계의 세계인 연못에 있다.
그런데 공포의 진정한 실체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이다. 하나의 느낌 혹은 여러 상태와 기분이 복합된 것이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조절하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 자신이다. 표면 밑에 있는 세계, 우리 동료들의 현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염려하고 있는-이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행복(행복? 나중에 논의될 것이다)만을 찾도록 강요하므로-그런 세계이다.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나 맨해튼에서 살아 있는 송장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서 눈을 가리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 방법인가? 영혼의 감옥에서 족쇄를 차고 있는 우리의 형제들을 외면하는 것은 또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이 세계, 우주, 하나님, 또는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고통에 대해 망각하는 것은 얼마나 편한 길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한 가닥 섬광이 보인다. 이 칠흑같이 어두운 물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불꽃이 있다.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잘 다스려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여느 때와 같이 공포의 감정에서 도망가는 대신, 용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랑하고,세상의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추진력으로 삼을 수 있다. 두려움 자체는 변형될 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꾸준히 투영된 세상의 밑에 있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고통스런 상태로부터 인류를 구함은 물론, 인간성을 고양시키고 하나님도 모실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세상으로부터 자유의 세상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수련장
왜 우리는 결혼하는가? 아버님께서는 절대적인 성(性)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성적인 즐거움을 갈구하라는 말인가? 단지 우리의 욕구만을 만족시키라는 뜻인가? 아니다. 배우자와 함께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완전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버릴 수 있다. 우리는 배우자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 사랑의 느낌을 보낼 수 있으며, 그것은 성적으로 결합할 때에 진정으로 절대적이 되며 고귀한 경험이 된다.
만약 프리섹스를 즐기고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성을 갈구한다면, 그것은 탐욕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자 한다. 이러한 것으로는 분명히 지속적인 기쁨을 느끼며 고통을 줄여갈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근본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독을 먹이는 것이다. 그들이 더 이상 만족을 주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관심과 애정과 흥미를 잃게 된다. 둘의 관계는 상대방이 얼마나 자신을 즐겁게 해주느냐에 달려 있는 조건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피하며 행복을 찾고자 한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결혼생활에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한다면, 상대방이 그 기대에 못 미쳤을 경우 그 사람에 대해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왜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았지?” “왜 이런,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거지?” 또는 “나는 주체이고, 당신은 대상일 뿐이야” 등등의 반응으로 상호간 존경과 사랑은 점차 식어가게 된다.
부부관계에서 너무 과도한 기대를 갖게 되면 두 사람 모두 큰 중압감을 받게 된다. 첫째로, 우리의 배우자 그리고 그 또는 그녀가 제공하고 있는 그리고 제공해야만 하는 것을 제한하고 틀에 가두게 된다. 둘째로 우리는 자신을 철저히 폐쇄시킴으로써, 모든 사람이 유일하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인격체임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그 사람을 내가 원하고, 내가 필요로 하고, 내가 희망하는 대로 맞추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우자 안에 숨어 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결혼관계에서의 사랑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상대방이 우리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에만 성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반대로 사랑을 받는다는 것도 상대가 우리에게 사랑을 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좋건 싫건 상호의존적인 존재들이다. 절대적인(순결한) 성은 행복과 상호비례적인 관계에 있는가? 육적인 욕망에만 의존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목적도 없이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절대적인 성에 대한 정의란 배우자와의 총합적관계를 의미한다. 절대적인 성은 두 사람의 결합이며, 친밀한 포용,사랑의 상호 교환이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완전한 은유이다. 항상 남편과 아내로서 융합되어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배우자에게 더 잘 봉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 이것이 절대적인 성생활이 된다. 우리 자신을 열어 배우자와 교통할 때 서로에게 더 잘 봉사활 수 있으며, 이것 역시 절대적 성생활이 된다.
이 명상법을 한번 시도해보라
편안히 앉아서 두 눈을 감고 당신의 가슴이 열리는 것을 상상하며,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들어보라.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 가진 것 없이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고 느껴보라. 활짝 열어 당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주어라. 당신의 사랑, 심정, 생명까지도. 이 사랑을 당신의 고동치는 심장에까지 스며들도록 확대시켜보라. 따스함과 설레임을 느껴보라. 이것을 당신의 가슴과 등, 목까지, 또 턱, 볼, 눈, 눈썹, 머리에 이르기까지 확대해보라. 이것으로 사랑을 열어 당신의 전신을 채우고, 당신의 마음, 심장까지 채워보라. 더 나아가 당신의 배우자에게까지 충분히 넓히라. 당신의 가족들, 즉 자녀들, 부모, 조부모에게까지 이르게 하라. 그 다음엔 당신의 이웃과 동네, 도시, 그리고 그 인접해 있는 도, 나라, 세계, 우주,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한 번에 10피트(약 3미터)씩 넓혀라.
위의 명상 연습을 하게 되면 조금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닫아놓고 있다. 대부분 방어적이며,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진정한 관계의 완성을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완전히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배우자와 가장 쉽게 이러한 덕목과 심정을 연습하고 배울 수 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논쟁하거나 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큰 축복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는 기회요, 행운인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선택이 있다. 자신만을 방어하고 정당화시키는 것, 즉 이기적인 자아를 방어하는 것이다. 또는 상대에 대해 듣고, 알아가고,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다.
결혼생활에 있어 나 자신은, 배우자에게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과 같다. 부부란, 배우자로 하여금 나라는 개념을 버리고 초월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두 사람 모두에게 시험받기도 하고 또 노력이 요구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좌절하기도 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감정들에게 먹이를 떨어뜨리게 되면, 우리는 즉시 참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를 빨리 망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리하여 내가 깨닫건대 결혼은 수련이다. 이기적으로 받고자 함을 최소화시키고 사심 없이 주는 것을 극대화시키는 수련이다. 이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자유가 발견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만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취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그 나약함을 알고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관계를 성숙하게 하고 심정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며, 그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인격이 창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에서 해방되어 사랑하고 봉사하고 주는 등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변화되는 것이다.
결혼생활에서 우리는 하나인 동시에 둘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로서의 영적인 관계를 위해 심신통일수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자가 이기적으로 취하는 것을 최소화시키고, 헌신함을 극대화시키는 훈련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참된 배우자가 될 수 있는 힘을 얻으며, 배우자에게 자유와 영원한 참된 기쁨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독을 줄 수도, 참되고 진실된 행복으로의 해답을 줄 수도 있다. 당신 자신과 배우자를 수련장으로 초대하라. 그리고 수련을 시작해보라!
위하여 살기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의 핵심적 가르침은 위하여 살라 그리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현실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 관습적인 견해로는 자아가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구체화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와 분리된 것들(구름, 나무, 산 등), 그리고 우리 내부에 있는 것 등과 연결된 분명하고 독특한 실제이며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의 참되고 절대적인 자아와도 똑같이 분리되어 있는지 모른다. 현실의 습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각, 감정, 가설 등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면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를 해석하거나 재해석하는 의식의 인습적인 양식인가?
다음의 문구를 경청해보라. 위하여 살라. 그리고 당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 들었는가? 좀더 가까이 들어보라. 위하여 살라. 그리고 당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 당신의 참된 자아는 지금 어디 있는가? 그렇다. 다른 사람 안에 있다.
이 문구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그것이 어째서 때가 왔다는 가르침인가? 만약 이 문구가 사실이라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다른 사람들 속에 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의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은 시각의 변화인 동시에 존재론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독자는 여기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 보통 우리의 참된 자아가 자신들 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주위의 세계와 분리시킨다. 스스로를-적어도 인식 속에서 소우주(小宇宙)인 우리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섬으로 만든다. “내 인생은 내 문제이고 네 인생은 네 문제일 뿐”이라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그것이 자아 또는 참된 자아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 되어왔다. 여기서 180도 방향을 바꾸어보자.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돌아보자.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주위의 세상과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곧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우리 마음은 독과 미움에 의해 상처받는다-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책임은 물론 책임의 의미 또한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 있으며 더 많은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 서로를 묶어주는 연관성이 있다는 것. 그러나 다만 서로를 구별하는 인습적인 생활의 베일에 쌓여 가려져 있을 뿐임을 보여준다.
먹을 것이 필요하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나가며, 고통을 느끼는 등의 자아가 가장 확실한 실재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평상적 인식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가 다른 사람 속에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소위 관습적으로 서술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아라고 불리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관습적인 인식 하에서는(또는 의식의 세계에서는) 나는 분리되어 나타난 개인으로서 분명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절대적 실재의 차원에서는 참된 자아란 이중성과 다른 사람, 세계와의 분리성을 초월한 하나의 존재이다. 둘 다 실재하는 것이며, 각기 질적인 면에서 독특한 본질을 지닌다.
심오한 가르침인 위하여 살라 그리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는 문구는 이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이중성과 일체성이 같이 존재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며(나는 당신을 위해 산다. 즉 이중성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절대적 실재로서 존재한다. 이리하여 나와 네가 하나가 된다.
우리가 이중성을 지닌 일체를 우리의 삶 속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실재하는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로 관습적인 현실의 영역에만 있는 한 우리는 한쪽 면만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전체와 하나가 될 때, 전체는 또한 하나가 된다. 이제 의식의 인습적 현실로 돌아오면, 변화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전에는 제3세계에 있는 굶주린 아이들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단지 안됐다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양식과 사랑과 목숨을 구걸하는 제3세계의 어린이로 생각한다. 내가 바로 그 어린이인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 실재에서 절대적 자아를 경험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인습적인 의식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필터를 갖게 되며, 그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세계와 하나의 관계를 이룬다면, 상호작용을 함에 있어 더욱 동정적이 되며, 더이상 세상을 우리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친밀한 관계를 지닌 것으로 보게 된다. 그리하여 고통에 찬 세상을 보게 될 때,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배고픔, 자신의 고생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고통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유권이다. 자신이 소유한 고통에만 집중한다면 절망과 나약함만이 생길 뿐이다. 선택도 조절도 할 수 없는 고통이라 느끼면서. 그러나 다른 이들의 고통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자신과 연결된 것으로 보고 느끼기를 노력할 때,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부터 작동하는 것이며, 다른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경험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를 선택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자신만을 위한 삶은 스스로를 무력하다고 느끼게 한다. 인생이 던져주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를 선택함으로써 사랑의 본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적인 힘을 통해 자신에 대한 확신감을 얻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것을 선택했다. 이러한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진실된 삶, 위하여 사는 삶을 살 수 있다.
완성의 8단계
아버님은 자주 완성의 8단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흔히 층계와 같은, 단계적 개념으로 생각한다. “먼저 개인적인 단계를 완성하고 그 다음에 가정적인 단계, 그리고 종족⋅사회⋅국가⋅세계⋅천주⋅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렇게 우리는 단계들을 분리하고 나누며 격리시킨다. 이러한 이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아버님께서 8단계의 완성에 대해 그림을 그리시는 것을 보면, 한 번도 층계 형태로 그리신 적이 없다. 항상 원 안에 원이 있고 또 그 원 안에 원이 있는 형태로 그리시곤 하신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기 위함일까? 사실 그 속에는 하나의 원밖에는 없다. 하나의 중심만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합쳐지고 연결되고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찾고 있는 바로 그 행복이 우리 가족 전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행복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염원하는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 세계가 희망하는 바로 그 평화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갈구하는 사랑이 하나님이 경험하시길 고대하시는 바로 그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목표와 방법을 분리시키곤 한다. 또한 그 둘을 앞서 가는 것과 따라가는 것, 두 개의 다른 성질로 보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인 이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그래, 평화와 행복, 사랑 등을 이루는 데는 이제 다섯 단계만 거치면 된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평화는 항상 우리를 피해간다. 항상 다른 사람의 탓, 다른 사람의 문제가 될 것이다.평화는 목적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다. 오히려 목표를 향한 과정이다. 길의 각 단계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평화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평화를 좇지 않아도 되며, 어느새 여기에 있는 평화를 발견할 것이다.
정성 성(誠)을 기억하는가? “말씀을 이룬다.” 즉 평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우리는 평화의 실체가 되어야만 한다. 사랑에 대해 말한다면, 반드시 사랑이 되어야만 하며, 동정에 대해 말한다면 동정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버님께서 써주신 가장 중요하고도 중심적인 단어라고 내게 말씀해주신 심오한 단어가지닌 큰 희망이다. 정성(‘말씀’+‘이룸’)이라는 글자에서 평화, 사랑, 행복에로의 열쇠를 본다. 세계의 평화와 화목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그 열쇠는 다가오는 매 순간마다 새롭게, 새로운 호흡과 더불어, 새 노력과 헌신으로 그것이 되는 데 있다.
1,000억 원
1,000억 원을 갖고 싶지 않은가? 그것이 있다면 경제적 자유, 안전한 삶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나아가 다른 사람을 돕거나 하는 데에 자신을 더욱 헌신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직장을 그만둘 수도 있다. 그렇게 원하던 자동차와 집도 구할 수 있다. 자녀들에게 더 많은 장난감을 사줄 수도 있다.
오늘 독자들은 1,000억 원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한 가지를 꼭 해야만 한다. 조그맣고 사소한 것이다. 이것이 궁금한가? 1,000억 원을 갖기 위해 꼭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은가?(준비가 되었는가?)
그럼,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은...
(지금도 계속 알고 싶은가? 궁금한가?)
바로 이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은 60초간 숨을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당신의 한 손에1,000억 원을, 다른 한 손에는 숨쉴 수 있는 공기를 줄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내게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숨 쉬는 것을 선택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1,000억 원을 원하지 않았던가?”
한번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1,000억 원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한 번의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은 선물이다. 평상시 모르고 사는 신성한 축복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숨을 들이쉬는 것이다.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것은? 숨을 내쉬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우리가 쉬는 한 번의 호흡은 전 생애와 같은 가치를 지닌다.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존재하기 위한 근본적인 요소다. 삶을 견고하게 해주고 힘을 주는 호흡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진 줄과 같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성한 기회인 것이다.
100년 후에, 이 책을 읽고 있는 어느 누구도 숨을 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지니고 호흡할 수 있는 동안, 이 선물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우리는 보통 누군가로부터 값비싼 선물을 받게 되면 무척이나 고마워한다. 그런데 어느 돈보다도 귀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우리의 삶에서 매 시간 호흡하고 있으면서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숨쉬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면, 당신의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나, 중국의 엄마, 러시아의 할아버지 또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내는 것은 훨씬 더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보듯,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시작하고 끝난다. 100년 후에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인생에서 참된 가치를 지닌 것들에게 우선순위를 줄 수 있다.
내 형을 잃은 후에 나는 본능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깨달았으며, 내 자신을 위해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다. 그 우선순위는 더 이상 멋지고 부유하고 위대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정(仁情)과 사랑⋅겸손⋅박애⋅진실됨⋅인내⋅관용⋅평정⋅용서⋅동정⋅관심⋅이해함 등을 지닌 사람이 되는 수련이다.
이러한 것들은 끝이 없는 가치들이며, 이들로부터 우리는 한없는 행복, 만족과 힘을 경험할 수 있으며, 물론 우리가 세상을 향해 무한한 행복, 이해, 힘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부족하고 실패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좌절하고, 화내며, 미워하고,원망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나는 내 자신이 가장 큰 위선자라고 말한다. 나는 영적인 길에서는 자신이 지닌 위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더욱더 위선자가 될 소지가 많은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게 된다. 내게 있어서는 영적인 생활이란 항상 자신이 위선자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나의 부적절함을 고칠 수 있고 영적인 수련을 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게는 이러한 것들이 참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핵심적 가르침이다. 이것들이 영원히 지속될 가치들이다. 이들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치들이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벌이는 운동은 계획한 목표만을 달성하는 자기중심적 운동이 될 뿐이다.세계와 하나님의 고통을 잊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부모님의 삶을 더럽힐 것이다.
내게 있어 천일국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통일 운동은 바로 내 자신을 사랑하듯 함이요, 통일 운동은 바로 스스로에게 인정을 베풀 듯 함이요, 통일 운동은 바로 내가 그러하듯 평화스러울 뿐이다. 우리 개개인은 세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가정 연합이다. 나 자신이 운동이며, 자신이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과연 이런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정성(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평화와 행복을 구현하는데 단지 노래만을 부를 뿐이며 훨씬 중요한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하는 것 말이다.
영광의 왕관
내가 사람을 의심할 때 나는 고통을 느낍니다.
내가 사람을 심판할 때 나는 견디지 못합니다.
내가 사람을 증오할 때 나는 존재의 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믿으면 나는 분명히 속임을 당합니다.
내가 만일 사랑하면 나는 거역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내 머리와 몸은 고통과 슬픔에 떨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나는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속임을 당할지라도 나는 역시 믿습니다.
내가 반역을 당할지라도 나는 역시 용서합니다.
나는 나를 증오하는 자를 송두리째 사랑할 것입니다.
오, 주여! 사랑한다는 아픔이여, 내 손을 보아주세요.
이 내 가슴에 주의 손을 얹어보소서.
나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고뇌 속에 터질 듯만 하옵니다.
그러나 나는 거역한 자들을 내가 사랑할 때
승리를 성취하옵니다.
만일 당신도 나같이 사랑한다면
나는 당신께 영광의 왕관을 드리오리다.
<1936년, 문선명 선생님께서 16살 때 쓰신 시>
첫댓글 10년전 카프 학사에서 다 읽지 못한 내용을 여기서 찾아 읽게되서 많은 은혜 받고 깨닫게 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