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쓰는 기호체계인 한글의 글자를 가리키는 말은 '가나다'입니다. 그러면 영어를 쓰는 기호체계인 글자들은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예... 그렇죠. 알파벳입니다.
그런데, "알파벳"(alphabet)이란 말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후후, 잘 아시다시피 그것은 그리스어의 첫 두 글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도 사실 "알렙, 벹, 김멜, 달렡..."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희한하게 그리스어의 "알파, 베타, 감마, 델타..."와 순서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는 22개의 자음만으로 되어 있는 반면, 그리스어는 24개의 자모로 되어 있죠. 대부분의 유럽어는 그리스어와 깊이 연관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리스어를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등학교 수학교과서입니다. 영어 표현 중에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그거 그리스어 같이 들린다"(It sounds Greek.)고 하죠. 온갖 외국어가 있는데, 왜 하필 그리스어를 어렵다고 생각했을까요? 제 막연한 추측은 19세기까지, 아니 20세기 중반까지도 서구(유럽과 미국)의 대학교육, 아니 중등학교 교육에서 중시되었던 교육 중 하나가 그리스어 교육이죠. 헤르만 헤세의 소설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서 수도원에 버려진 골트문트가 결국 조각가가 되기까지 언제나 우상이 되었던 나르치스는 바로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었죠. 그리스어만큼이나 정교하고 체계적이고 이성적이고 반듯하고 깔끔한 인간상으로 나옵니다. 실제로 19세기까지 독일의 귐나지움(초등학교 4년을 마친 뒤 입학하여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9년 동안 다니는 인문학교)의 교육에서 그리스어 교육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하여튼 각설하고, 이제 실제로 그리스어 문자를 좀 볼까요? 안타깝게도, 제가 배운 그리스어는 기독교 신약성서를 읽기 위한 코스였기 때문에, 좀더 고급스런 텍스트는 잘 읽지 못합니다만, 그래도 그냥 아는 대로만 좀 적어볼랍니다. 그리스어는 독일어처럼 글자와 발음이 일대일 대응되기 때문에, 그냥 소리내어 읽는 것은 조금만 배우면 아주 쉽죠.
아, 제가 관심 있는 고대 그리스어 내지 기독교성서 그리스어에서는 대문자와 소문자가 섞여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8세기까지는 문서들이 대문자로만 기록되어 있던 반면에 9세기 들어서면서 이문서들이 소문자로만 씌어지기 시작하죠(참조: http://blog.empas.com/zyghim/1567102 ). 영어처럼 문장 처음에는 대문자로 쓰는 게 사실 좀 웃기는 짓이잖아요. 요즘 프랑스를 중심으로 대문자 없애기 운동이 한창이더군요. ^^;
근데, 예전에 한번 누군가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쳐 본 적이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가장 큰 관문이 글자를 외우는 것이더라구요. 알파, 베타, 감마, 테타, 피(pi) 정도까지는 그래도 본 적이 있는데, 크시, 프시, 크히... 뭐, 이 정도 오면 상당히 헷갈린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물리학과를 다녀서, 그리스어 알파벳을 써서 뭔가를 나타내는 것은 아주 오래된 습관이 되어 버렸지만, 사실 물리학자들 중에 알파벳의 이름 자체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답니다.
어떤 사람은 "Fraternity, Physics, and Calculus pronunciation"이라고 해서, 물리교사나 수학교사가 그리스어 문자를 읽는 방식이 따로 있다고 얘기할 정도죠. 예를 들어, "앨퍼, 비다, 개머, 델타, 입실란, 지타, 이타, 씨다, 아이오터, 캐퍼, 램더, 무, 누, 크싸이, ..., 오우미가" 이렇게 말이죠. 당근...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를 "앨리그잰더"라 읽어대는 천박한 미국인들의 습관입니다만, 어쩌겠습니까요... 그들이 주류요, 권력자인 것을... --.--;;;;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나 기독교 신약성서 같은 걸 접하기는 쉽지 않지만, 재미없는(ㅠ.ㅠ) 물리시간이나 수학시간에 외워야 했던 꼬불꼬불한 글씨 때문에 그리스어 문자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원주율을 나타내는 pi는 원주라는 말 perimeter의 첫 글자 p에 대응되는 그리스어 pi에서 온 것인데, 지금은 아예 전세계적인 표준이 되었죠. 고등학교 수학에서 처음 배우는 "합산"(덧셈)의 기호 대문자 Sigma (M 자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양)도 '합'을 나타내는 라틴어 summa의 s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문자를 원용한 것이구요. 고급물리(?)에서 나오는 파동함수 psi 도 사실은 그리스어 문자 중 하나일 뿐이죠.
그래도 몇 번 써 보시면, 비교적 쉽게 글자 모양들을 외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어 문자를 익힐 때 한 가지 기억하실 점은 영어식으로 (정확히는 미국영어식으로) 오염된 발음을 피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의 "번데기"(theta) 발음이 있죠. 이게 혀를 이빨 사이로 살짝 내밀었다가 혀를 쑥 잡아당기면서 "뜨" 발음을 내는 거잖아요. 근데, 그리스어에서 theta는 우리말의 "트"에다가 강한 호흡을 넣어 "ㅎ" 발음이 추가되게 하는 발음이랍니다. 그래서, 굳이 쓰자면, "ㅌ헤타" 정도가 되는 거죠. 약하게 ㅡ모음을 넣어 주면 "트헤타"가 되는데, 이걸 두 글자, 즉 두 음절이 되게 발음하면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ㅎ" 발음이 추가되어 강해지는 발음으로는 theta, chi, phi 가 있습니다. phi도 영어식(즉 물리학자식)으로 /fai/가 아니라 "프히" 내지 "ㅍ히"로 발음해야 합니다. '철학'(哲學)이라고 번역된 philosophia에서도 ph는 "f" 발음이 아니라 "p+h" 발음이죠. psi와 xi(ksi)는 우리말로 하면 "프시"와 "ㅍ시"와 "크시" 내지 "ㅋ시"가 될 겁니다. 이렇게 이질적인 자음이 겹쳐지는 것은 그리스어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라고 합니다. 영어에서는 psi에서 p를 아예 발음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고, 독일어에서는 기어코 p와 s를 다 발음합니다. 그래서 독일어 발음에서 아주 힘든 것 중 하나가 Psyche이죠. ps 발음도 힘들고 ch 발음도 힘든 데에다 y 발음도 짜증이죠~~
이거 쓰는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 그리고 "시그마"에 해당하는 얘긴데, 얘는 단어의 맨 끝에서는 글자가 오그라들지 않고 꼬리 달린 C자 모양으로 열린 모양이 됩니다. 이 텍스트 편집기에서는 그리스어를 쓸 수 없어서 말이 좀 돌아가네요~~~
그리스어에서 모음은 알파(ㅏ), 엡실론(단음 ㅔ), 에타(장음 ㅔ), 이오타(ㅣ), 오미크론(단음 ㅗ), 오메가(장음 ㅗ), 윕실론(독일어의 ü 또는 불어의 u) 이렇게 7개가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복모음이 있죠.
아, 그리고 모음이 단어의 맨 처음에 나왔을 때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강기식, 연기식 이렇게 말하는데요.
이렇게 두 가지가 있어서, 이 표시에 따라 'ㅎ' 발음이 들어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예를 들어, '길'을 의미하는 odos는 어두의 오미크론에 강기식이 들어가서 발음이 "호도스"가 됩니다. 주의 깊은 분은 그리스어 24개 알파벳 중에서 h 발음이 따로 없다는 것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에타"는 대문자로 쓸 때 영어의 H와 같은 모양이지만, "장음 ㅔ"의 음가를 갖는 모음이죠.
그리스어 특유의 이런 특징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 중 하나는 영어의 hour 같은 거죠. h를 쓰지만 발음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어에서 h(아쉬)는 언제나 발음이 없죠. 물론 무음 아쉬와 유음 아쉬가 따로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요. 아, 제가 독일어 배우던 코스에 프랑스 분이 한 분 있었거든요. 근데, 희한하게도 항상 h는 발음은 않는 거예요. 예를 들어, Ich habe das Haenchen. 이렇게 되어 있으면 항상 "이씨 아베 다스 앤쏀" 이런 식으로 h 발음은 꼬박꼬박 빼먹더라구요. 잘 안 고쳐진데요.
[출처] https://blog.naver.com/ezgun82/11151138 |작성자 이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