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소시집 / 이선이
손 없는 날 외 4편
말린 옷가지들 솔기 맞춰 접어서 구름서랍장에 정리하기
베란다에 앉아 로즈마리 잎잎이 초록향기 털어내기
생각의 외투를 벗고 가만히 허밍하기
손바닥에 햇살들이기
빈손으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기
흘러가기
맨발로 산책하기
강아지랑 풀밭에서 햇살 밟기
입술로 모음 만들기
모음으로 된 기도문 완성하기
한 마음도 다치지 않게
한 눈물도 상하지 않게
단출한 밤을 흠모하기
살았다고 해야 할까
살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오래오래
그렇게
비우고 떠날 때는
목에 감고 다니던 노을은 풀어두고 가야지
----------------------------------------------
평화
마주보고 밥을 먹는다
가지런히 수저를 내려놓는다
너무 고요하지 않게
너무 자상하지 않게
등 돌리고 자다 깨기도 하는 밤
꿈에 폭설이 내리면
외투를 가져다 눈을 덮어주는
------------------------------------------
캠페인
얼음땡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놀이에 집중해 본 적이 없습니다
폐업식당 모서리에 접힌 의자처럼 웅크립니다
출입통제라고 쓴 붉은 테이프로 숨을 봉인하고요
우리는 불로 얼음을 빚는 마법의 손에 세계를 팔아치운 걸까요
술래에게 잡힐까 두려워 일제히‘얼음’하고 외쳤지만
술래는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르고
누가 술래인지도 모르고
누군가 깨워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깰 수 없는 꿈에게
우리의 밤을 헐값에 넘겨버린 걸까요
하지만 이 놀이는 모두가 얼음 속에 몸을 숨기면 끝나는 이야기
결국 내가 술래였음을 고백하게 되는 싱거운 연극이지요
얼음폭포처럼 고드름처럼
꽁꽁 얼어주세요
놀이는
살려내고 싶어서 조바심치는 이들이 만든 엔터테인먼트
평원을 전쟁터로 바꾸면서 생겨난 레크리에이션이니까요
----------------------------------------
감자의 맛
누군가 소리를 쟁여 두었다 한들 듣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이들이 낙엽을 밟으며 놀고 있다
공원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팽팽하게 포장해도 절반은 으스러지는 튀긴 감자를 꺼내먹기 좋은 곳
바사삭바사삭
출출한 시간의 허기 달래라고
가을이 우리를 공원으로 불러들이면
아이들은 마른 낙엽 찾아다니며 잎맥을 끊어놓고
우리는 감자칩이 든 봉지를 열어
싹을 지키려고 독을 품는 감자의 시간을 만지는데
심야배송 나갔다 쓰러진 채
지상의 마지막 송장(送狀)에 제 이름을 적었다는 그 손을 생각한다
꽃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주검을 배송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정원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
바삭바삭
낙엽은 쟁여둔 소리를 깨우느라 바스러지고
사방으로 퍼지는 소리의 비수들 공원의 심장을 찌르는데
감자칩 속에는
반송되지 않는 작은 정원이 산다
------------------------------------------
자매를 위한 시
서로에게 양말 한 짝은 기꺼이 빌려주자
산타할아버지는 어쨌든 선물을 주실 거라 믿는 밤을 함께 지나왔으니
싸게 산 치마의 검정은 흰 셔츠에게 아낌없이 나누자
가끔은 얼룩양이 태어나지만
우리는 서로의 얼룩을 입고서
다른 양을 기르는 그 손을 잡기 위해 태어났으니
하지만 누구의 것이라 말 할 수 없는 것은 공평하게 잊어주자
비듬 내려앉은 자리에 새치를 덮어둔 채
낡은 소파담요는 먼지를 불러들여 시간의 발목을 덮어주잖니?
먼지는 별들의 옹알이라 믿으며
우주까지 날아가는 저녁의 수다를 끌어당겨
서로의 시린 발을 데워주자
줄어든 면티를 입을 때면
누군가 다녀가셨음을 알고 가만히 침묵을 분담하자
우리는 정갈한 향을 세워두고 죽음을 단정하게 나눠 입는 사이잖니?
그러니 둘이 하나 되는 이야기는 없는 셈 치자
가끔 구멍 난 이야기를 꿰매다 보면 덧셈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겠지만
끝내 둘이 둘로 남는 단단한 심장을 가졌으니
한 짝씩 나눠 신은 아침이 짝짝이 구두를 타고 돌아오는 밤이 오더라도
기린처럼 목을 늘여 첫눈을 기다리자
우리는 트리에 걸어둔 양말 안에 어린 양을 키운 비밀의 겨울을 가졌으니
-------------------------------------------------
<시작노트>
봉쇄도시에서 보내는 두 번째 가을을 통과하고 있다. 머뭇거림이 정체성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이 표정이 되는 이상한 시간을 건너는 중이다. 이렇게라도 살아지는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빈 밥집과 텅 빈 술집과 텅텅 빈 캠퍼스를 무심해지려 애쓰며 오갔다. 그 사이 마음의 결절이 만져졌지만 달래고 풀어낼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비어있는 그 자체를 마음으로 우리고 또 우렸다. 무심하게 그러면서도 지극한 마음으로 살아내는 일은 세상이 내게 말 걸어오도록 길을 터놓는 하나의 형식이다.
폐쇄와 단절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보잘것없이 여겼던 일상을 오감으로 감각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재난 속의 유토피아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로즈마리를 키우고 감자칩을 만드는 일, 오래 전에 사서 책장에 모셔두기만 했던 책들을 펼쳐서는 문장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 책의 표지와 등, 날개와 속지를 손끝으로 만지며 감각을 겸한 읽기를 하는 경험은 선물처럼 다가왔다. 이렇게 손의 감각에 충실해지면서 이 세계를 떠받치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조금 넓어졌다. 우리들의 평화가 누군가의 신산스런 삶, 죽음으로 밖에는 벗어날 길 없는 삶과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 오래 머물기도 했다.
이방인으로 떠돌며 시를 썼던 폴란드의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Adam Zagajewski)는 시 쓰기에 대한 자기고백적인 시 「시를 쓴다는 것은」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를 쓴다는 것은“나비의 눈에 비친 거대한 산처럼 육중한 그림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듯 압도하는 어떤 이미지가 출현하는 순간과의 조우이며, “고통 속에 겨울이 탄생하던 그날 밤의 성냥 불빛”같은 예기치 않은 섬광에 매혹되는 순간이라고.(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문학의 숲) 문제는 어떻게 이런 이미지와 섬광을 만나느냐 하는 것이다.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봉쇄도시의 두 번째 봄을 견디던 지난 삼월에 세상과 완전히 결별했다. 봄에 떠난 시인을 가을에 더욱 추모하게 되는 것은, 그의 삶이 봉쇄와 단절을 견디며 나와 남, 자신과 타인을 유의어의 단단한 끈으로 묶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섬광은 반의어를 유의어로 돌려놓는 그 길목에서 가끔 만나는 시적 지복이리라.
-----------------------------
이선이
*경남 진양 출생
*1991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서서 우는 마음』
*저서로『상상의 열림과 떨림』, 『생명과 서정』, 근대 문화지형과 만해 한용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