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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나에게 소중한 기억의 자산은 흙과 별이라고 했다.
별에 대해서는 일전에 소견으로 추억을 설파한 적이 있었는데 내 단편의 생각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 준 책이
최근에 발간되어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책장사는 아니니 오해말길..., 단지 우리가 생각한 대로, 의지대로 우주도 그렇게 따라준다는 사실이 중요)
''디바인 매트릭스" (Divine Matrix, 그렉브레이든 지음,김시현 옮김.굿모닝미디어 08.11.25일 출간) 가 그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간직하면 우주적 힘이 자신을 이끌어 목표에 도달하게 해준다는 것.
물질이든 의식이든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근본은 하나이며 우리 삶을 결정하는 요인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한 책.
내가 지금 이곳에서 경험하는 '이루었다' 는 감정은 온 우주에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공명하여 그것이 실현되도록 하는
우주적 작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우주와 나는 마치 하나인 듯...
작금의 팍팍한 시국에 용기와 의지를 곧추 세우면 우주도 도와준다는 희망의 메세지인 것 같아 일독을 권한다.
각설하고 또 다른 우리들의 자산인 그 흙이 뭉쳐서 빚어낸 인간냄새가 나는 마을들이 있었으니
그 정겨운 우리 마실들을 반추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
우리들은 그 흙 냄새를 맡으면서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조화로운 마을에서 청소년기 초입을 보냈기에
팍팍한 인생살이에 행복의 감성을 고이 간직할 수 있는 축복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계절따라 형형색색 피어나던 꽃과 풀과 나무들,,. 배고픈 시절 우리의 간식이 되어주었던 자연이 준 과일과 열매들,
놀이거리가 없어 지루하던 시절에 놀이거리를 제공했던 자연들, 이 모두가 우리 땅에서 잉태된 소중한 것이리….
우리의 곁에 있던 흙과 자연의 선물.. 지금도 언뜻 생각나는 것...
꽃 : 집에는 맨드라미,채송화,해바라기,호박꽃,작약, 산에는 진달래,개나리,찔레꽃,아카시아꽃, 들에는 도라지꽃,할미꽃
열매: 어름,겨울철 홍시,오디,산딸기,보두룩,감(쪽감,따배감,도우감,단감),곰,잣, 찔레순과 소나무순의 아련한 기억
나물: 드릎과 냉이를 제일 좋아함. 쑥,돌개나물,고사리,미나리,각종 나물들(기억이 잘 안남)
음식: 다슬기국,피리매운탕,손칼국수(긴 홍두깨 생각), 냉이국,식혜(무우넣은),제삿밥의 추억,조청,호박범벅,감자범벅
육류(?) : 개구리,메뚜기,뱀, 피리,붕어, 메기 (에잇 양서류와 어류 쪽이네 ...쩝), 꿩고기(닭고기보다 나을 걸)
다행히 육류에 개고기 (둘도 없던 내 개를 감나무에 매달고 쪽쳐서 냠냠해버린 어른들 형태에 어릴 때 충격)
놀이: 화구단(산에다 꽃심는 원예활동?),간첩놀이,쥐불놀이,자치기,연날리기,팽이,썰매,논축구,굴렁쇠,구슬치기,
땅따먹기, 때기치기(진화되어 딱지치기로 발전),하드코어놀이 부랄까기 (고자된 친구없어 천만다행)
아울러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며 살아왔던 우리들…...
기억하는가?
봄에는 아지랑이 살랑살랑 피어오르던 나른한 봄처녀 치마자락처럼 팔랑거리던 그 들판을 !!
여름이면 호랑이 장가가던 날(소낙비 온 뒤) 하늘과 산에 걸렸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를 !! (파랑새의 주인공이 될 뻔...)
그리고 소낙비 내린 뒤 물기를 머뭄고 있던 찬란한 슬픔의 그 자줏빛 도라지꽃을 !!
여름 땡볕에 멱감고 고기잡던 그 시원하고 맑은 강가를 !!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멱감던 허기를 달래려고 먹었던 분이 팍팍나던 햇 감자와 찰찐 옥수수의 그 맛을 !!
아침 통학길에 바라 본 아늑하고 고즈넉한 물안개에 덮힌 그 강가를 !!
가을이면 추수한 뒤 수고로움을 한 순간에 날려주던 볏단위에 누워 바라보던 그 청명한 하늘과 새참의 맛을 !!
들판에 한가로이 소를 풀 뜯게 하고 팔베게하고 책보던 그 낭만과 옆에 누워 반기던 할미꽃의 그 편안한 미소를 !!
깊어가는 가을 밤, 풍년이라고 지저귀던 돌비 디지털 사운드 소쩍새의 그 청아한 소리를 !!
추수 무렵 설치던 메뚜기 뽂음의 그 맛과 콩서리 해 먹다 입 주위 잔뜩 묻었던 검댕이 색깔의 친구들 모습을 !!
겨울이면 앞마당과 길가에 소복히 쌓였던 눈과 뒹굴며 만들었던 미소 머금고 밀짚모자 쓴 그 눈사람을 !!
깊은 겨울 밤 초생달이 하얀 눈에 살포시 수줍게 내려 앉은 하염없이 정겹고 고요한 그 풍경을 !!
겨울아침 통학길 자전거 어깨 메고 살을 에는 듯한 강물을 건너면서 뼛속 깊숙히 전해오던 그 살떨림의 전율을 !!
처마위로 대롱대롱 매달린 고드름과 눈 덮인 초가집 굴뚝 위로 연기가 피워오르던 그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
동네 누나 형들과 민화토치다 간식 서리용 무우와 김치를 묻어두던 그 추억 땅속 항아리를 !!
그 풍경과 맛의 기억들을 이제는 가슴속에 소중히 여미고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
갑자기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 농담삼아 쓰던 마을 이름들이 떠올라 풋 웃음을 지울 수가 없다.
노달아! 방전아! 신사야!
아마도 그 말은 장터를 중심으로 입암 중심가 소재 친구들이 나름대로 자기 지역과 지역차별을 염두에 두고
쓰던 말이 아니였나 생각된다.
잘 모르는 오지 마을을 지칭하면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 없으니 그 중에 인구도 좀 되고 남들에게
좀 알려진 동네를 총칭하여 부른 듯 하다. 다만 순서는 발음때문인지, 인지도 순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찌보면 그렇게 부른 사람들의 허세와 냉소일 수도 있고 달리보면 한 울타리라는 동질성의 발로일 수도 있으리…
물론 공감하지 않을 친구도 있지만 왜 하필이면 많은 마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 동네만 입방아처럼 떠들었던 지...
그 말의 어원 내지 기원이나 배경을 아는 친구들이 있으면 알려주길...
지금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기억을 더듬어 우리들이 살았던 살갑고 정겨운 우리 마을 이름과 추억들이다.
내가 살던 지역을 중심으로 기억을 더듬어 반추해보는 거라서 이름이 누락될 수도 있으니 서운타 생각말고
마실과 관련한 정다운 사연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친구들의 후기를 많이 올려주었면 한다.
아울러 잘못 기억된 사실이 있다면 여과없이 바로잡아 주길 바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순수한 마을 이름들이다.
하여간 나의 동네는 저동인데 순수한 말로 모싯골이라고 했다. 과거에 모시 재배를 많이 해서 그렇단다.
자고로 동네가 그래서 그런 지 출세할려면 모시꽃씨처럼 서울로, 해외로 방방곡곡 흩뿌려져야 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우리 동네는 여의도처럼 구심력보다 원심력을 더 추구하는 터가 센 마을인 셈이다.
우연인 지 필연인 지 몰라도 서울서 첫 직장이 서울 중구 저동으로 漢字까지 똑 같을 줄이야!
이런 마을에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었으니... 아마 선바위를 아는 친구들이라면 한번 쯤 기억에 있을 듯...
주연:남이장군, 조연:아룡,자룡 형제, 헌팅장소:선바위와 모싯골 연못(일설에는 모싯골과 연당 사이인 돌백리라고도 함)
때는 지금부터 500여년 전 청기면 모싯골에 아룡과 자룡이라는 남매 도적이 살고 있었다.
아룡이 누이고 자룡이 동생이였는데 둘 다 힘이 장사였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바람과 같이 신출귀몰했단다.
근데 이들이 산 곳이 바로 우리 동네란다. 지금 모싯골 연못이 있는 터에다 집을 짓고 살며, 인근 마을을 습격하여
재물을 탈취하였으나 지방 관아의 나졸로써는 감당할 수가 없었단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남이 장군에게 이 두 도적을 토벌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남이 장군이 명을 받고 베장수로 변장하여 선바위 부근 물가에 베를 말리고 있었다.
베장수가 베를 말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두 도적은 선바위로 와서 위협하며 물건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남이 장군은 서로 힘내기를 하여 지면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힘내기는 선바위 꼭대기에서 물을 건너
반대편 산까지 뛰어갔다 오는 것이였다.
먼저 아룡이 강건너 산까지 뛰어갔다 올 적에 장군은 출발하여 강 위 공중에서 마주쳤다.
이 때 장군은 쇠방망이를 꺼내어 아룡을 힘껏 내리쳐 죽였다. 이를 본 자룡이 달려오자 마찬가지로 내리쳐 죽였다.
이로써 흉흉하던 마을이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고 두 도적을 처단한 것을 기념하여 장군은 산 절벽 바위에 칼로
자기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대나 어쩠대나...
그리고 두 도적이 탈취한 재물을 주인들에게 돌려주고 안동부사,진보현감,영양군수 등이 참석하여 두 도적이 살던
집 터에다 못을 팠는 데 이를 "모싯골못"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려...
이 이야기는 어릴 적 몇 번 들었던 이야기인데 현대 정치사로 재해석해 보면 아룡,자룡 두 도적은 기득권 세력에서는
반란군이요 역적일 지 모르지만 민초들의 입장에서 보면 의협심 강한 의적일 확률이 높다.
역사는 승자 편에서 전설을 만들고 구전되어 허구를 확대 재생산하여 오지 않았던가?
하여간 이 전설 한편으로만 보면 우리 동네는 저항의 근거지요, 억압받던 민초들의 투쟁의 본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역사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인 수많은 민초들의 삶인 것을...
하여간 출신 동네로 따지자면 비주류인 셈이다. 내가 나온 청남 초등학교엔 상청동네가 주류이기에..
여기서 주류란 쪽수와 동네 크기 기준이다. 그러고 보니 난 출신지역으로 따지자면 지금까지 영원한 비주류이다.
하지만 어떠하리! 대한민국 대통령들도 따지고 보면 이승만을 제외하곤 모두 지역적으로 비주류 출신인 걸...
실제로 나는 청기면 출신인데 남쪽에 있는 동네라서 우리 청남국민학교 친구들은 청기중학교보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입암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동네 어르신들도 주로 조고리 장터를 다니셨다. (영양장도 다니셨지만...)
그래도 청남국민학교도 분교가 있었다. 바로 구매분교였다. 하지만 그 구매분교에 한번 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안가본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니면 그 친구들이 우리학교에 와서 원정 순시 했던가?
유일하게 입압중학교에서 다른 면이라면 우리 초등학교 출신들이 살던 청기면 남부지역의 동네들이다.
남에서 북쪽으로 거슬러 가면 돌베개(연당 2동 정도 되나), 모싯골, 소청,신당,발매,구통으로 기억난다.
고모가 발매에 살고 계셔서 초딩 때 방문 한 적 있었는 데 정말 산촌 중에 산촌인기라...
어쩌면 청기면 자체가 영양군 중에서 가장 길쭉하고 오지 중의 오지일 지도 모른다.
난 청기면 제일 남쪽에 있는 우리 마을이 그렇게 크게 보일 줄 몰랐다.
그리고 지금은 작고하신 작은 아버님댁이 섯치라서 제사라던가 대소사 일이 생기면 자주 왕래를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사래 동네를 거쳐 섯치로 갔다. 그 사래동네는 아담하고 정겨운 풍경이라 그런 지 몰라도 중학교 통학길에
자주 만났던 사래방면 친구들과 특별히 교분을 많이 나누고 놀러도 자주 가곤 했던 마을이다.
홈피에 재영이가 최근 올렸던 그 사래 마을이 향수를 불러 올 줄이야…
그 사래마을을 지나서 산해4동 멍산골 둘째누님댁까지 방학 때면 한번씩 다녔던 그 길과 동네가 생각난다.
그 때 기억으론 사래 마을에서 산해동으로 넘어가는 고갯재가 하나 있었는데 눈이라도 쌓이면 그 길을 잃어버려
혼줄이 났던 몇 번의 기억이 있다. 무슨 영화에 나오는 눈길 덮힌 오지를 헤메는 수도승 같은 기분… 알련가?
산해가 괜히 산해가 아니더란 생각이 절로 난다. 그 길들은 신작로가 아닌 그 시절엔 오솔길 같았던 기억이 난다.
산해리는 섯치앞에 있는 새골, 맞은 편에 봉감,주파,뒷개, 북쪽으로 동사태란 말이 기억에 난다.
신사국민학교도 분교가 있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금대 댓거리 애들이 다녔던 걸로 기억(금학분교인가?) 된다.
대학교 때 찾은 댓거리는 정말로 멀게만 느껴졌다.
여기도 입암면이지만 차라리 우리 마을이 입암보다 가까운 동네로 느껴졌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 같았는데
농촌이라기보다는 산촌이 어울릴 정도로 정말 오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중학시절에도 연당,사래,산해 출신 친구들과 통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 또한 물줄기와 산등성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나름대로의 친소관계가 빚어낸 지역주의가 아니였던가 싶다.
역시 비주류세력끼리는 편안하고 동질성도 생겨 잘 뭉치는 것 같다.
아 참 친구들이여! 기억나는가?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까까머리를 한 채 가장 맛있는 반찬을 싸서 갔던 중학교 소풍의 요지, 봉감 모전석탑…
광대가 가수라고 반변천에다 한자락 노래를 뿜어 내던 그 소풍의 아련한 추억을...
근데 정작 중요한 문화재인 봉감 모전석탑이 어느 시대 것인 지 누가 만들었는 지도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찾아봤다. 국보란다. 그리고 그 일대가 절(사찰)로 추정되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었단다.
우리는 약 1,500여년의 전통과 역사가 있는 석탑과 중딩시절 소풍의 기억을 아로 새긴 것이다.
양항은 2년전 고향가는 길에 약수물 뜨러 방문했는데 마을 주민들이 밥도 챙겨주어 먹고 왔던 기억이 있다.
새골은 조고리서 섯치가는 길 지나가는 마을인데 강과 절벽바위로 난 그 길이 아슬아슬하여 아직도 기억에 있다.
지금도 그 길을 걸으면 많이 떨리고 아슬아슬할려나?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산을 넘어 영양장을 보러 가던 지름길이 있었는데 올 때는 가끔 감천을 지나
선바위 절벽밑의 조그만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오던 길이 생각난다.
지난 번 현식이 말대로 우리의 엄마들이 생필품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지나 다니셨던 곳..
우리들 입에 많이 회자되던 노달과 방전(병옥 포함)은 정작 애석하게도 방문해 본 적이 없다.
진보나 안동으로 버스타고 갈 때 물끄러미 지나쳐서 본 기억들 뿐... 처음 그 물음에 답할 소스가 없는 셈이다.
지역적으로 우리 마을과 반대편에 멀리 위치한 것도 그렇고 내 친척들이 그 마을엔 없어서 그런 것도 있고..
나름대로 마을로서 인지도는 높은 편인데 그 마을의 정서와 추억들을 친구들이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 외 우리 친구들이 살던 마을 이름이 많이 누락되었을텐데 재미있는 사연 많이 올려주길 바란다.
팍팍한 인생살이에 우리의 정겨운 마을을 반추해보면서 그 흙의 정신으로, 흙이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추억을 되새기면서 그 질박했던 우리의 삶과 정서를 삶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살아간다면 이 어려움과 힘듬은 우리가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는 시련이리...
친구들이여! 힘내자. 그리고 아프지 말자..
우리가 살던 정든 마실을 떠올리며 올 한해도 따뜻하고 정겹게 마무리 잘하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만사형통하길...
인생! 마음먹기에 달렸다!
첫댓글 단어 한 개에 입김을 불어가며 쓴글처럼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동네 마실에서 바라보던 어른들(우리아버지 대)은 지금 한 두분들 빡에 안계시고 허전하기만 하다네 하지만 농암의 싯구처럼 암전의 모수모구는 어제 본 듯 생생하다네
잠깐 에해 노달아 방전아까지는 아는 데 사래는 못들어 봤다
재영아! 아무래도 우리 마을 애들이 하나 더 넣어 가까운 신사를 붙인 것 같다. 아무래도 노달 방전보다는 사래가 가깝잖아. 우리 마을도 사래하고 현실은 별반 다름이 없다. 그래도 고향은 언제나 마음의 안식처지...(수구초심,귀거래사)
다시한번 고향의 정감을 느끼게 하네...잘 지내지????? 보고싶다.....
요번에는 남釣師가 좋아하는 낚시터에서 만날까? 세월도 낚고 추억도 낚으면서 말이다. 이제 우리가 시끄러운 곳 가서 고성방가하며 놀기는 좀 그렇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맞네 마음으로는 아직도 그 시절을 떠 올리며 행복하니 말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 그때 그시절로.....
광대가 조회 시간이었던가 전교생 앞에서 구성지게 부르던 노래 '풍년가(?0)' 라고 기억하는데...듣는 순간 가슴이 싸~ 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왕자가 떠오르네. 이별 저별처럼 이마실 저마실 이야기가 어린왕자책속 이야기처럼 다가오네. 그나저나 이 긴글을 ...대단타요즈음 아이들 왠만한 책한권 분량이네. 개인 문집으로 엮어서 후세에 남겨주면 좋겠다. 훗 이 아침이 아름다워라
우선 장대한 글에 경의를 표한다. 아스라히 잊혀져가는 추억들을 퀄트처럼 한땀한땀 엮은 글 솜씨에 다시 한번 놀란다. 그런데 구매초등학교는 청남초등학교의 분교가 아니다. 그리고 영양에는 청기중학교가 없다. 입암중학교에는 3개면 청기와 영양읍(감천), 입암면 출신들이 다녔다. 그리고 노달아 방전아 하는 말은 지정학적이고 아니고 음운학적으로 부르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 입암 본터사람들이 변두리 사람들을 얕잡아볼 때 자주 썼다는 것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우주는 태양 이외의 것들은 모두 행성이라 한단다. 태양 이외에는 동급이라는 말이다. 주변인이라고 해서 맘 상하지 마라. 하나님은 다 동급으로 처리한단다. 부처님도.
음.. 기억을 더듬어 본 것이라서.. 청기중학교는 없었던 것 같고 구매분교는 청남초등학교 분교였던 걸로 기억...(확인이 필요함) 감천이 영양읍이란 사실을 몰랐구먼... 현식이 여러모로 기억력 좋네... 주변인이라고 마음 상하는 것은 더욱 아니고 그 때 그 시절의 추억으로 거슬러 가 본 것 뿐.. 冒頭와 말미에 언급했다시피 우리의 의지와 마음먹기가 중요한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을...
입암장터에 장보러왔던 기억은 없나?
초딩 때까지 조고리장터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고 중딩 때에 자연스럽게 조고리 장터를 접한 것 같다. 초딩 때는 산넘으면 가까운 영양장터에 자주 따라가곤 했는데 그 때 먹어 본 자장면 맛하며 엄마 기다리며 읽던 만화방의 재미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글이 기니까 댓글도 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