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1. 망향(望鄕) 문중 방천리 문화류씨와 여호재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실향민·망향민(望鄕民)’. 글자 그대로 고향을 잃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고향 땅이 북한에 있거나 댐 건설로 수몰된 경우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는 망향민도 있다. 개발 등의 이유로 고향 땅을 떠난 이들이다. 이번에는 400년 세거지를 대구위생매립장에 내어주고 고향 땅을 떠난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 문화류씨(文化柳氏)와 그들의 재실인 여호재(驪湖齋) 이야기다.
시조 류차달(柳車達)과 2세 류효금(柳孝金)
문화류씨 시조는 류차달이다. 그는 황해도 유주[儒州=문화현] 사람으로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고려 태조로부터 대승(大丞) 관직과 삼한공신(三韓功臣) 훈호(勳號)를 받은 인물이다. 문화류씨는 고려, 조선조에서 인물을 많이 배출해 명문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문화류씨 관련해 흥미로운 스토리 하나가 전한다. 바로 류차달의 외아들 류효금과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1530년(중종 25)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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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효금이 구월산의 한 절에서 재[齋:불교의식]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큰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레 호랑이 입안을 들여다보니 목구멍에 은비녀가 걸려 있었다. 그가 호랑이에게 “네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네 목구멍에 걸린 것을 뽑아 주겠다”고 말하니 호랑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호랑이의 목구멍에서 은비녀를 뽑아주었다. 그날 저녁 류효금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목에 무엇인가 걸려 괴롭던 차에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고관대작이 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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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구월산 산신령의 영험이 있은 것일까? 문화류씨는 이후 수 대에 걸쳐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고려조에서 명신 문간공 류공권, 한림학사 대제학 류택, 문정공 류경, 정신공 류승 등이 났다. 조선조에서도 대과 134인, 당상관 90여 인, 상신(相臣) 9인, 호당(湖堂) 5인, 청백리 4인, 공신 11인, 시호(諡號) 22인 등을 배출했다. 우리나라 최초 족보로 알려진 문화류씨 영락보[1423년]는 실물은 없고 서문만이 전하는데 시작이 이러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문화류씨가 번창한 것은 류효금이 호랑이를 살려준 것에 대한 음덕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대구 방천리 입향조 류희상(柳希祥)
문화류씨 대구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 입향조는 류희상이다. 그는 문화류씨 19세로 자는 운여(雲汝), 조선 태종 때의 명신 충경공(忠景公) 류양(柳亮)의 5세손이다. 증조부는 금산군수를 지낸 성곡(醒谷) 류약(柳約)으로 성종 때 음사로 출사했으나, 연산군 때 간신의 모함을 받고 무주에 은거했다. 조부는 절충장군 행용양위대호군 류영간(柳榮幹), 아버지는 현신교위 용양위부사직 류준(柳俊),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박일의 딸이다. 그는 1544년(중종 39) 충북 보은 구리목(九里木)에서 3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두 형은 모두 출셋길에 올랐지만 그는 고향에서 처사로서 삶을 보냈다. 임진왜란 때 가족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나섰다가 대구 와룡산 아래 여호마을[방천리]에 정착을 했으니, 문화류씨 대구 방천리 입향조가 됐다.
문화류씨 세천지(世阡地)와 여호재(驪湖齋)
여호재는 방천리에 있는 문화류씨 충경공파 성곡종회 재실이다. 1838년(헌종 4) 처음 건립될 때는 방천리 윗마을 뒷산에 있었다. 그로부터 155년 뒤인 1993년, 방천리에 위생매립장이 들어설 때 현재 자리로 옮겼고, 2011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창했다. 현재 여호재는 대구환경자원사업소 인근에 새로 조성된 문화류씨 세천지(世阡地) 경내에 세워져 있다. 세천지라는 말은 세장지(世葬地)·세거지와 같은 말로 ‘조상 대대로 이어온 땅’이라는 뜻이다.
방천리 망향비(望鄕碑)와 망향정(望鄕亭)
방천리(坊川里)는 와룡산과 금호강에 둘러싸인 마을인데 형국이 좀 특이하다. 와룡산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꼭 말발굽을 닮았다. 남·동·서 3면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북쪽만 터져있는데 이마저도 금호강이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일까. 말발굽 안쪽에 자리한 400년 내력 방천리는 1989년 윗마을을 시작으로 2005년에는 아랫마을에 이르기까지 위생[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섰다. 이로써 방천리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고향 땅을 떠났고, 지도상에서 방천리라는 마을은 사라졌다. 방천리는 다른 말로 여호리·방내리·이반마을 등으로도 불렸다. 본래 방천리에는 밀양손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았고 이어 성주이씨, 진주강씨 순으로 터를 잡았는데, 나중에는 문화류씨와 진주강씨가 번성했다. 매립장이 조성되기 전 방천리에는 안마을, 바깥마을, 원(院)마을 세 마을에 100여 호의 민가가 있었다. 이 중 가장 안쪽에 자리한 안마을이 400년 내력 문화류씨 집성촌이었고, 바깥마을과 원마을에도 류씨, 강씨 등이 살았다.
에필로그
10여 년 전, 금호강변을 따라 방천리 앞을 지날 때면 늘 방천리 입구에 서 있던 ‘문화류씨세천지’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표지석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나저나 새롭게 단장된 지금의 방천리 문화류씨 세천지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와룡산 용머리와 금호강 그리고 멀리 가야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참으로 절경이다. 현재 방천리 대구환경자원사업소와 서재근린공원 사이에는 고향을 떠난 방천리 주민들이 건립한 방천리 망향비와 망향정이 망향민의 애환을 달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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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부터 안마, 바깥마, 원마 세 마을이 차례대로 사라졌어요. 당산나무, 장수바위, 여호재, 척호정, 참샘, 상엿집, 마을돌담도 다 사라졌죠. 제주도 돌담 못지않았는데 (중략) 기억이 남아 있을 때 옛 고향 모습을 스케치형식으로라도 정리할 생각이에요. 고향을 지키지 못했던 우리 세대가 후손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죠.(2020.3.20. 문중회장 류성렬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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