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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한계 깨뜨리기 (막 6:45~52)
해안가를 지나가다보면 촛불을 켜 놓고 징을 치면서 정성껏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잔잔해도 바다는 바다가 갑자기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친 파도가 일어도 생계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언제 바다에 나간 남편이 죽어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서 비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랑이 일자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물에 빠져 죽겠소!” 제자들은 어부출신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큰 풍랑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압니다. 어부출신의 제자들도 거친 풍랑이 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우 두려워하게 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 있게 여기고 있었던 것들이 오히려 그들을 두렵게 만든 것입니다. 어부의 지식과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정도 거친 풍랑이라면 다 죽었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한계는 바로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바로 그 지식과 경험입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약하게 만듭니다. 맹활약하지 못하도록 제한합니다. 자신을 작게 만들고 낙심시키고 절망시킵니다. 이것은 마귀가 즐겨 쓰는 방법입니다. 대부분 무섭고 두려우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기해 버립니다. 사명까지도 포기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정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어. 나는 이제 끝이야.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다 포기해야겠어.”
그런데 자신의 한계는 누가 정해주었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누에고치가 자기 입으로 실을 뽑아내 누에고치 집을 짓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입으로,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 집을 만들고 그 한계 안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때론 틀 안에 갇힌 것 때문에 절망하고, 때론 주어진 틀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한계를 깨뜨리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고치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한계의 집을 깨뜨리고 나와서 나방이 되어 훨훨 날아오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보면 풍랑을 보고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배 안에 갇혀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한계의 풍랑을 건너 육지에 도착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실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49절을 보면 예수님을 유령으로 취급하고 “유령이다”라고 무서워서 소리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육적인 감각으로는 그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감히 예수님을 유령 취급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상식과 경험으로 가려진 그들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눈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계를 정해버리고 그마저 도와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는 아닌가요? “예수님은 나의 도움이 못 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유령 취급해 버리고 여전히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능력을 총동원해 풍랑을 헤쳐 나가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는지요?
제자들은 바다를 건너기 직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때어주신 떡과 생선을 제자들이 친히 받아 떼를 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누어주어도 또 생기고 나누어주어도 또 생겨났습니다. 다섯 개의 떡과 생선 두 마리가 얼마나 많이 불어났는지 남자만 오천 명이나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 두광주리에 가득 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 기적을 까마듯하게 잊었습니다. 52절을 보면 “그들이 그 떡을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한계는 오직 자신들이 이제껏 살아온 환경과 배경과 지식과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기적과 지식과 경험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생각나지도 않았고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함께 동행하셔도 여전히 내 생각과 내 지식과 내 판단과 내 경험을 앞세워 내가 정해놓은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보다는 내 자신을 더 우선해서 살아감으로써 우리가 만든 한계 속에서 갇혀 고생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렇다면 이런 고난의 풍랑의 한계를 깨뜨리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믿음이 충만해지면 됩니다. 둔해진 마음을 깨닫게 하고 굳세게 세우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이기게 합니다. 믿음이 한계를 깨뜨립니다. 믿음은 믿은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한 지식과 경험과 능력입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과 능력으로는 한계를 깨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갇혀 삽니다. 기적이 없는 삶을 삽니다. 자신의 능력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충만해지면 기적을 체험하면서 삽니다. 자신의 한계 이상의 기적을 만들면서 삽니다.
이 풍랑사건 앞에 있었던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있었던 사건은 무엇일까요?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한 여인을 고쳐준 사건입니다(5:25~34). 가련한 여인은 많은 의사에게 치료받았으나 헛수고했습니다. 가진 재산도 치료비로 모두 허비했습니다. 아무 효험도 없이 병만 더 심해진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살짝”만 닿으면 괴로움 받던 병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틈에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댔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바로 그 순간 즉시 깨끗하게 치료받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시고 둘러 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소?” 제자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밀치다 보니 그랬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다. 분명히 만졌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실직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하여라.” 할렐루야!
여인은 그동안 돈으로 치료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불치병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잘 고친다는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그것도 불치병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치병의 한계를 뛰어넘고 깨뜨렸습니까? 그동안 사람과 돈으로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해결 못 받은 것을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해결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불치병과 돈과 사람이란 한계를 뛰어넘게 만듭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초 목적지인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갔습니다(5:35~43). 거기엔 12세 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미 죽었습니다. 어린 꽃다운 나이에 죽어서 동네사람들이 모두가 안타까워 크게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자신들의 한계로 볼 때 죽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정보와 지식과 경험으로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실은 맞습니다. 이처럼 한계는 한계 안에 머물게 합니다. 그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예수님은 그 한계를 여지없이 깨뜨리십니다. “달리다굼”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한다, 소녀야 일어나라!” 입니다. 소녀는 죽음의 한계를 깨뜨리고 살아났습니다. 그 때서야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라워했습니다. 한계가 깨어지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뻔히 잘 알고 있으면 놀랄 것 없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에 놀란 것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기에 그들이 놀란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의 한계에 우리 자신을 맡겨 놓았다면 우리는 영생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서 천국에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죽으면 끝입니다, 끝”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가두어 놓지 않으시고 한계를 깨뜨리고 나오게 하셨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죽음의 한계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계를 뛰어넘어 다시 살아나서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불치병 역시 우리의 한계 속에 두었다면 고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치료받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발생하는 불치병도 가끔 치료받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진정한 치료는 천국에 들어갈 때 이루어집니다. 부활할 때 완벽하게 건강한 형체로 부활합니다. 믿음이 이 모든 한계를 깨고 기적을 얻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생명 내 생명, 예수님 부활 내 부활”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믿음이 없다고 해서 냉정하게 뿌리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찾아오셔서 믿음을 주십니다. 때론 풍랑을 그대로 두고 본문 48절처럼 배 옆을 지나가시려고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더 큰 믿음을 주셔서 더 큰 풍랑의 한계를 깨뜨리기를 원해서 의도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극복하게 하십니다. “정말 너희들이 나를 원하느냐?” “정말 너희들은 나를 믿느냐?” “정말 너희들은 나를 의지하느냐?” 이 질문에 “네, 주님!”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풍랑 때문에 “쩔쩔” 매고 있어도 잠시 모른척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 상태는 깨닫지도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굳어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한계 때문에, 즉 풍랑의 결과에 두려워하고, 풍랑을 해결할 수 없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였지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건져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구해주셨습니다.
우리도 때론 여러 가지 풍랑 속에서 괴로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물질의 풍랑의 위력은 큽니다. “이러다가 망하는 것 아냐? 앞으로 이것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지?” 별의 별 근심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물질의 이 거친 풍랑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자신이 받은 고귀한 사명마저 떠날 수도 있습니다. 삶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해주십니다.
“앞으로 이것저것 계산해보면 2~3억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수중엔 1천만 밖에 없으니 어떻게 살아가나? 거처할 집은? 생계비는? 아이들 학비는? 결혼비용은? 등등, 절망적이다” 이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지식과 경험과 정보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손에 가진 1천만을 가지고도 2~3억을 해결하고, 더 나아가 5억까지도 넉넉하게 해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죽음도, 불치병도, 그 모든 것도, 한계를 깨뜨리시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손을 잡아주시면 해결 받습니다. 믿음이 충만해지면 한계가 무너집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무한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믿은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과 우리의 연약한 손과 우리가 정해놓은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십니다. 믿음을 주셔서 한계를 깨게 만드십니다. 할렐루야!
이제 마칩니다. 우리의 한계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식과 정보와 경험과 능력을 내세우기보다는, 예수님의 지식과 정보와 경험과 능력을 내세우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죽음도, 불치병도 극복하시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고통스러운 문제도 해결 받고, 사명을 감당하는 문제도 해결 받으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무조건 믿음이 만능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기적의 믿음은 필요한 경우에 가끔 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