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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평 택 농 악
*위치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 241-1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
1.평택농악의 형성
평택농악은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를 중심으로, 충청도 북부, 경기남부 지역의 전문 연희패의 웃다리 농악과 평궁리 두레농악이 결합되어 형성된 농악(農樂)이다. 1970년대 이전 경기남부와 충청도 북부지역에는 걸립패, 사당패 등 상당히 많은 전문 연희패가 활동하였는데, 평택농악은 이들 전문 연희패의 명인들이 중심이 되고, 평궁리 마을의 두레농악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두레농악은 정초나 대보름에 지신밟기를 하거나 농사철에 두레풍물을 치던 놀이를 말한다. 두레노동은 해방 후에서 1970년대 이전 사이까지만 해도 논농사가 발달한 농촌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형성된 공동노동조직인데, 두레농악은 두레노동을 할 때 함께 행해졌던 놀이였다. 일제가 1941년에 발행한 “조선의 향토오락”에도 “제초기간 중에 농민들이 농악을 놀았다”라는 기록과 “7월에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호미씻이를 했는데 경기도 타지방과 동일하다”라는 기록이 있어 일제시대 말까지도 두레노동과 함께 두레농악이 일반적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이전 평택지방의 상당수 마을에는 두레농악패가 있었는데, 평궁리 두레농악패도 그 중 하나였다.
평택농악의 형성과 발전을 주도한 인물은 최은창(1914 ~) 옹이다. 최은창은 팽성읍 평궁리 출신으로 대대로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풍물에 큰 재능을 보였다. 두레농악은 보통 농번기가 시작될 때 만들어졌다가 세 벌 김매기가 끝나는 7월 백중 때에 해산하였는데, 최은창은 농번기에는 두레농악을 하며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는 전문연희패에 가담하여 촌걸립이나 절걸립을 하였고, 또 직접 절걸립 패나 촌걸립패를 이끌기도 하였다. 1950년대에는 서울에서 남운형 등이 만든 “민속극회 남사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는데, 이 단체는 전국의 명인들을 망라한 조직이었다.
“평택농악(平澤農樂)”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게 된 계기는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여 개최된 농악경연대회에서 평택군의 요청으로 농악패를 꾸려 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 꾸려진 농악패는 경기남부지역 뿐 아니라 충청도 등 각 지역의 실력 있는 연희자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어서, 최은창 옹이 주도를 했으면서도 평궁리 두레농악과는 관련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8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요청을 받아 천안, 안성, 서울, 공주지역의 실력 있는 명인들과 평궁리 두례농악 패를 주축으로 “평택농악”을 재구성하여 대회에 참가하면서 평택농악은 다시 부활하였다. 이 대회에서 평택농악은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는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1985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2.평택농악의 성격
평택농악은 평궁리 마을의 두레농악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최은창 옹이 전문 연희패에서 활동하며 기예를 익혔고, 초기 구성원들의 중심이 서울 및 경기남부, 천안, 공주지역에 흩어진 명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두레농악 적 성격보다 전문연희패 적인 성격이 보다 강하다. 또한 평택이라는 특정지역의 농악을 대표하는 놀이패보다는 경기남부 지역의 웃다리 농악을 특징짓는 놀이패적 성격이 강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해방 전후 시기 경기남부 지역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이 시기 경기남부 지역에는 전문연희패의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이 때문에 마을의 두레농악이 쇠퇴하였다. 그래서 특정 단체를 구성할 때는 두레농악보다는 전문 연희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현상 때문에 경기남부 지역에는 특정 마을이나 지역적 특성을 표방할 수 있는 농악이 형성되기 어려웠으며, 이와 같은 특성은 평택농악의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래서 평택농악이 평궁리 전수회관을 중심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평택”이라는 지역 이름을 사용하고는 있기는 하지만, 평택지방 두레농악의 특징을 계승 보존하는 농악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부연설명하면 평택농악은 평택지방의 두레농악을 대표한다기보다는, 경기 충청지방의 전문연희패의 가락과 판제를 계승한 대표적인 웃다리 농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평택농악에는 두레농악에서 하였던 지신밟기, 두레굿과 함께 난장굿이나 절걸립, 촌걸립 등 걸립패에서 행해졌던 전문연희패적 요소가 함께 나타나며, 주변지역인 안성, 용인, 오산지역의 가락이나 판제와 거의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
3.평택농악의 형태
1)지신밟기
지신밟기는 정초에 마을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면서 풍물을 치고 지신을 밟아주며 축원을 하고 쌀과 돈을 추렴하는 세시풍속이다. 이 행위는 마을에는 안녕을 빌어주고 마을의 각종 행사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각 가정에는 잡귀잡신을 물리치고 액을 막아주어 한 해의 재수와 소망을 빌어주는 행위였다. 지신밟기는 남부지방에서 주로 성행하였고, 평택지방에서는 매년 일정하게 행해지지는 않았으며, 평궁리에서도 축소된 형태로 격식만 갖춰 행해졌다고 한다.
지신밟기의 인원구성은 기본적으로 기수 1명, 영기수 2명, 치배 8명(쇠 2명, 징 1명, 장고 3명, 북 2명), 법고 8명, 무동 8명, 호적 1명, 양반 1명이었다. 이 가운데 영기수는 무동이 하였기 때문에 총 인원은 26명 내 외였다. 그러나 이 행사가 보통 마을단위로 행해졌기 때문에 기본구성을 모두 채우는 경우는 적었다.
복색(服色)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농기(農旗)와 흰 바지저고리에 삼색띠를 두르고 흰색 꽃 띠를 이마에 둘러 맨 농기수, 청색과 홍색바탕에 하얀 글씨로 영(令)이라고 쓴 영기와 영기수, 농기수와 같은 복장에 벙거지를 쓰고 나비상을 단 쇠잡이, 징수, 장고수, 북수, 법고잡이, 희색 속곳에 노랑저고리와 빨강치마를 입고 남쾌자를 걸쳤으며, 삼색 띠를 두르고 댕기머리에 흰색수건을 쓴 무동, 흰 바지저고리에 흰장삼을 걸치고 흰색 고깔을 쓴 사미, 농기수와 같은 복색을 한 호적, 흰 바지저고리에 도포를 입고 얼굴에는 수염을 붙이고 갓을 쓴 양반 등의 형태였다.
지신밟기의 순서는 먼저 간단하게 길놀이를 하고 이장 집부터 집돌이를 하였다. 집돌이는 먼저 대문 밖에서 수문장 굿을 하고, 집안에 들어간 후 우물가에서 용왕굿(우물굿), 장독대 옆의 터주에서 터주굿을 하였으며, 부엌에서 조왕굿을 하였고, 풍물패가 굿을 치는 동안 주인이 대청마루에 준비한 고사상에서 고사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마당에 나가 마당굿을 쳤다.
2)두레굿
두레란 주로 논농사지역에서 농경을 목적으로 조직된 공동노동조직이다. 두레조직은 길쌈을 목적으로 여성들이 조직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논농사를 목적으로 마을의 장정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두레굿은 논농사에서 모내기나 김매기와 같이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일에서 행해졌다. 두레굿은 힘든 노동에서 협동심을 돋우고 농사의 피로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평궁리 평택농악의 두레굿은 모내기에서 시작되어 세 벌 김매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 벌 김매기가 끝나는 날은 호미씻이라고도 하고 백중놀이라고도 하는 놀이판을 열어 그동안의 피로를 풀어냈다.
두레굿의 편성은 기본적으로 지신밟기와 같았지만, 농사일의 성격상 무동이나 잡색은 편성에서 제외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복색도 농사일과 함께 연희를 해야했기 때문에 농사일에 편리한 복장을 하고 그 위에 가사와 상모를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레굿의 편성 시기는 모내기철이나 김매기철에 만들어졌다. 이 때가 되면 두레꾼들은 마을 이장집에 모여 두레의 순서를 정한 후 농기를 앞세우고 두레굿패의 가락에 맞춰 논으로 나갔다. 일이 시작되면 굿패들도 같이 일을 하였는데, 때로는 사물이나 북 하나만 남아 논매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기도 하였다. 한 곳의 일이 끝나면 다음 논으로 이동할 때도 풍물을 치며 이동했으며, 다음날에도 같은 순서로 일을 하였다. 이와 같은 두레노동은 세 벌 김매기가 끝나는 백중날 호미씻이를 하면서 끝을 맺었다.
3)난장굿
난장이란 필요에 따라 열리는 가설시장을 말한다. 난장은 보통 특산물이 집중적으로 공급되고 수요되는 지방에서 열렸다. 난장은 하루씩 열리는 정기시에 비하여 며칠씩 계속 되었으며 명절에도 열렸다. 평택지방은 명절날 난쟁이 열렸는데, 파일난장이나 백중난장이 그것이다. 난쟁이 열릴 때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전문 연희패를 불러 굿을 놀게 하였는데 이것이 난장굿이었다. 평택지방에서는 세 벌 김매기가 끝나는 백중에 평택 뿐 아니라 안성, 오산, 안산, 용인, 수원에서 난장이 열리고 난장굿도 푸짐하게 열렸다.
난장굿은 편성이 8잽이, 8법고, 8무동에 농기 1개, 호적 1개, 양반 1명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판굿을 좀 더 화려하게 하기 위해서는 10법고나 12법고를 쓰기도 하였다. 복색은 전문 연희패일 경우에는 일정한 복장이 필요했으나 마을 두레패일 경우에는 통일된 복장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연희의 방법은 백중에 하는 두레난장 굿일 경우에는 먼저 길놀이를 통하여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장터에 사람들이 모이면 판굿을 하였다. 4월 초파일에 하는 파일난장 굿일 경우에는 장(場)이 열리는 길 한복판에 등을 세우고, 전봇대 크기 만한 깃대를 세운 후 깃대 꼭대기에서 밑동까지 흰 천을 감는다. 깃대 꼭대기에는 큰 등을 달고 삼색 끈에는 작은 연등 7개를 단다. 그런 다음 길놀이를 하여 사람을 불러모으고 돌아와서는 등대굿을 하였다. 등대굿을 마치면 놀이판으로 나아가 판굿을 열었다. 파일난장은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4)걸립굿
걸립은 공동의 기금을 마련하거나 특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풍물을 치고 고사를 하며 축원을 하는 대가로 돈이나 곡식을 걷는 행위를 말한다. 걸립은 지역에 딸 걸궁, 걸량이라고도 한다. 걸립은 촌걸립과 절걸립으로 나뉘며, 촌걸립은 저문적인 연희패가 광범한 지역을 돌며 걸립하는 것을 말하며, 절걸립은 절에서 사용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패를 구성하여 고사를 위주로 연희하는 것을 말한다.
촌걸립 패는 난장굿 패와 같은 편성이다. 그러나 촌걸립에는 낭기나 영가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고사꾼이 두 명이상 필요하고, 굿화주와 식화주, 탁자, 총무가 더 있어야 하는 점이 달랐다. 편성은 낭기 1명, 영기 2명, 쇠 2명, 징 1명, 장고 3명, 북 2명, 법고 8명, 무동 8명, 호적 1명, 양반 1명, 식화주 1명, 굿화주 1명, 탁자 1명, 총무 1명이었다.
어느 지역에 공공건물을 새로 건축하거나 보수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었는데, 지역 사람들은 비용마련을 위해 전문연희패에게 촌걸립을 요청한다. 의뢰받은 총무는 걸립패를 구성하기 위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단원들을 불러모은다. 걸립패가 구성되면 복색을 갖춘 후 낭기받기를 하였다. 낭기받기가 끝나고 걸립이 시작되면 걸립패들은 각 마을을 돌며 걸립을 허락받는다. 걸립을 허락받으면 마을에 들어가 가장 먼저 당굿을 친다. 숙식은 마을에서 제공받는데,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면 마을의 공동우물에서 우물굿을 친다. 당굿과 우물굿을 쳐서 마을의 지신(地神)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집돌이를 한다. 집돌이는 화주가 집집마다 돌며 허락을 받은 집에서만 한다. 집돌이가 끝나고 어두워지면 마을 공터에서 밤 굿을 하였다. 밤 굿에서는 판굿을 노는데 끝나면 반드시 뒷풀이를 하였다.
절걸립의 경우 전문 연희패를 동원하여 절의 건축비용이나 운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행해졌다. 촌 걸립은 주로 농한기를 이용하여 하였다면 절 걸립은 일정한 시기없이 연중 내내 행한 것이 특징이다. 평택농악의 최은창 옹이 이끌었던 절 걸립패도 일년 내내 돌아다녔다고 한다. 절 걸립은 일년 내내 돌아다녔기 때문에 농촌지역보다는 상업이 발달한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절 걸립은 고사에 의존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기예보다는 고사 덕담을 많이 하였다. 이들은 절 걸립패의 신표라고 할 수 있는 권선(절에서 발행하는 증면서)을 소지하였고, 중의 복색을 한 사람을 행중에 두었으며 고사와 염불을 잘하여야 하였다. 절걸립의 순서는 먼저 권선문을 만들고, 특정 도시에 들어가 허가를 받았다. 그런 다음 우물굿이나 당굿을 생략하고 집돌이를 하였다. 숙식은 여각에서 해결하였으며, 걸립을 하고 나면 그날의 수입을 분배하였다. 평택농악의 최은창 옹은 1960년대 말 북한산 태고사의 중창불사를 위한 절걸립패를 운영하였는데, 한 달에 걸립을 하고는 5천원에서 만원 정도씩 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4.평택농악의 판굿과 가락
1)판굿
판굿은 굿패들이 여러 가지 놀이와 진풀이를 순서대로 짜서 기에를 보여주기 위해 벌이는 풍물놀이다. 이것은 지신밟기나 걸립을 하면서 집집마다 마당씻이로 하던 풍물놀이가 발전한 것인데, 본격적인 판굿의 발달은 전문 걸립패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판굿만을 보여주고 대가를 받는 난장굿 패나 유량 연희패가 생겨날 정도로 판굿은 연희활동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판굿은 지방에 따라 놀이와 진풀이가 각기 다르다. 웃다리 농악을 대표하는 평택농악은 가락의 종류가 많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변주가 특징이다. 또한 가락이 빠르고 힘이 있으며 맺고 끊음이 분명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와 함께 판굿도 진풀이가 다양하고, 화려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웃다리 판굿은 보통 30명 정도로 구성되는데, 농기와 영기를 앞세우고 호적수가 따르며 그 뒤로 쇠, 징, 장고, 법고, 무동 등이 뒤를 따른다. 평택농악의 판굿에서는 당산벌림대형과 무동놀이를 특징으로 한다. 특히 오무동에서 보여주는 동거리와 곡마단은 평택농악의 백미인데, 난이도와 화려함에서 수준 높은 기예를 보여준다.
평택농악의 판굿은 인사굿→돌립법고→당산벌림 1 →오방진→돌림법고→당산벌림 2 →사통백이→돌림좌우치기→합동좌우치기→가새발림→쩍쩍이 춤(연풍대)→돌림법고→무동놀이→채상놀이→인사굿의 순서로 진행된다. 먼저 놀이판에 들어가기 전에 판열기를 한다. 판열기는 간단한 가락을 쳐서 굿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이다. 판열기가 끝나면 인사굿부터 차레로 판굿을 진행한다. 다음은 판굿의 형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 평택농악의 판굿의 형태
2)가락
풍물가락에는 고유명칭으로 쩍쩍이, 더드레기, 덩더궁이가 있고, 일반명칭에는 가락, 장단, 굿, 채, 마치 등이 있다. 또 가락이라는 이름에는 자진가락처럼 하나의 고유명칭으로 굳어진 것도 있고, 삼채가락처럼 고유명칭 뒤에 붙여 쓰는 것도 있다. 평택농악에서도 가락, 장단, 굿 채와 같은 이름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평택농악의 가락은 막히지 않고 연결되는 경쾌함과 다양한 변주가 특징이다.
평택농악에 사용되는 가락은 모두 9~10종류이다. 그 중에서 평택농악을 특징짓는 가락은 길군악 칠채이다. 길군악 칠채는 평택 뿐 아니라 경기, 충청도의 웃다리 농악에서 널리 사용되는데, 마당일채, 쩍쩍이, 자진가락, 더드레기, 삼채, 좌우치기, 양산더드레기, 연풍대, 인사굿의 가락이 사용된다. 김호환은 평택농악의 판굿에서 사용되는 가락의 흐름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하였다.
*첫 번째 흐름 :덩더궁이 →쩍쩍이 →넘기는 가락 →자진가락 →더드레기 →자진가락
이 가락은 판굿에서 많이 사용하는 가락의 흐름으로 돌림법고에 쓰인다.
*두 번째 흐름 : 길군악 칠채 →자진가락
오방진에서 마지막 가운데 진이 완성되었을 때 칠채 마지막을 끊어주고 자 진가락으로 넘어간다.
*세 번째 흐름 :양산더드레기 →연풍대 →마당일채 →쩍쩍이 →자진가락 →더드레기 →자 진가락
이 가락은 판굿에서 쩍쩍이 춤을 출 때와 다시 돌림법고로 들어갈 때 사용되 는 가락의 흐름이다.
위의 가락의 3가지 흐름 외에도 인사굿, 좌우치기 가락, 물채가락이 있다.
3)고사소리
고사소리는 걸립노래, 지신밟기 노래, 비나리, 비나리 소리, 고사반 등으로 불리는 것으로 지신밟기나 걸립을 할 때 고사상 앞에서 하는 사설이다. 지신밟기나 걸립을 할 때는 액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사설이 많이 들어간다. 특히 지신밟기의 사설은 짧고 간단하지만 걸립을 할 때 대청마루에 차려놓은 고사상에서 하는 고사소리는 길고 내용도 다양하다.
고사소리는 크게 선고사와 뒷불자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선고사는 축원덕담이라고도 하며 뒷불자는 뒷염불이라고도 하는데, 이 것은 내용과 가락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평택농악의 최은창의 축원덕담은 치국잡기(산세풀이) →(장소아뢰기) →살풀이 →삼재 살풀이 →호구역 살풀이 →장사풀이 →농사풀이 →성주풀이 →달거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는 최은창의 축원덕담은 일반적인 고사소리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대부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뒷불자(뒷염불)는 축원덕담에 비하여 양이 훨씬 적다. 그렇지만 덕담은 주어섬기듯 빠르게 하는데 비하여 뒷염불은 느린 곡조에 실어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최은창의 염불은 앞부분에서 뒤쪽의 집치장과 우마풀까지 모두 일곱단락으로 되어있는데,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후렴구가 있어서 반주자들이 받아서 노래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다음은 평택농악 고사소리의 일부이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에
근본이라
신농씨에 본을 받아
농사한철 지어볼제
건답수답을 다갈어 놓고
수답농사를 지을적에
무슨 씨를 심었더냐
의주 이천 자체벼요
김포 통진 밀다리
무살리 뭐머래
의절 앞에는 상봉철
많이 먹었다 등대기냐
적게 먹었다 홀쭉배요
알록달록에 까투리 찰이요
커커덕 푸드덕 쟁기찰
일락 서산에 정금찰
너울너울에 일산벼
두렁 넘어 창출벼
장가못가 도령찰
시집못가 시애기찰
광주분원 대추찰
시방시체 개량종으로
다마금은방 풍옥팔달
여기저기다 심어노니.....
(농사풀이 중에서)
5.평택농악의 활동과 사람들
1)활동
평택농악은 웃다리 농악을 대표하는 전문연희패 출신들이 중심이되고 평궁리 두레농악패들이 가담하여 만들어진 단체이다. 이 단체는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로 지정받으며 웃다리 농악을 대표하게 되었다. 평택농악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으며 “평택농악보존회”를 만들고 최은창 옹이 거주하는 평궁리에 평택농악 전수회관을 건립하여, 평택농악의 보존 및 공연활동을 하고 있다. 평택농악의 최근 활동은 공연활동과 강습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공연활동은 1년에 평균 15회 정도를 하고 있는데, 평택에서 하는 발표공연(파일 난장굿, 5월 초파일)을 1회하고, 나머지 약 14회의 공연은 각종 국제행사 등 외부 초청공연으로 참여하고 있다. 2000년에 참가한 공연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고양 꽃 박람회 공연, 광주 비엔날레 공연, 안동국제 탈춤페스티발 공연 등이 있다.
강습활동은 평택농악전수회관에서 실시하고 있다. 강습활동은 후계자강습과 일반전수강습으로 구분한다. 후계자강습은 평택농악의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인원을 모집하여 실시하며, 현재 000 의 후계자가 기예를 연마하고 있다. 일반전수강습은 외부의 요청에 의해 실시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방학 때를 이용해서 실시된다.
2)평택농악의 사람들
(1)최은창(1914 ~ )
최은창은 팽성읍 원정리에서 최상순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출생 직후 평궁리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농사를 지으며 이곳에서 살고 있다. 학력은 13살에 팽성읍 객사리의 강습소에 들어가서 3년을 공부했고, 평궁리 서당에서 2년 동안 한학을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16살에는 동네 어른들의 권유로 평궁리 마을 두레패에서 쇠를 잡고 상쇠를 하였다. 20세 되던 해에는 안성의 서상현의 권유로 걸립패를 이끌던 이원보 행중에 들어가 장구를 쳤다. 이원보 패는 주로 촌걸립을 하였는데, 최은창은 가을걷이가 끝나는 10월에 나가서 농사일이 시작되는 이듬해 삼월 초순까지 활동하고 돌아왔다. 이후 삼사년 동안 이원보 패와 활동하면서 최은창은 이원보 패의 명인들에게 기예를 익혔다.
강제공출 및 징용, 징병 등으로 걸립활동이 중단된 일제 말이 지나고 해방이 되면서 걸립활동은 다시 활발해졌다. 최은창은 평궁리 두레패를 중심으로 평궁리 일대에서 나걸립을 하였다. 이 때 걸립패의 인원은 28명이었는데, 나중에는 소방서 걸립이나 절 걸립도 하게 되었다. 절걸립은 서울 약수암, 적조암, 인천 연화사, 북한산 태고사 등에서 하였는데, 이 가운데 태고사에서는 12년 동안이나 하였다. 1955년 남운형 행중에 가담해서는 부쇠를 쳤다. 그러다가 1960년 남운형 등이 주도한 민속극회 남사당이 발족되면서는 장구를 쳤다. 이 시기 최은창은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해마다 개최되었던 농악대회에서, 평택군청의 권유로 대전의 송순갑 행중 사람들을 데리고 “평택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하였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으로 걸립활동이 어려워지면서 걸립을 그만두고 1980년 평택농악단을 조직하여 상쇠가 되었다. 1980년 제21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 경기남부 농악의 명인들과 평궁리 두레패로 구성된 평택농악단을 이끌고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86년에는 평택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로 지정받으면서 최은창은 상쇠로서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2)이돌천(1919 ~1994)
경기도 장호원에서 출생하여 10대에 천안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천안시 쌍용동의 농악패에서 풍물을 익혔다. 천안 인근의 걸립패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60년대에는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하였다. 1980년 평택농악을 창단할 때부터 참여하여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을 때 상법고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3)김용래(1939 ~ )
충남 천안출생이다. 13세에 천안시 용곡동 마을두레패에서 무동으로 활동하면서 농악을 시작하였다. 16세에는 대전의 송순갑 행중에서 무동으로 2년 간 활동했고, 안성의 남운형 행주에서도 무동으로 활동했다. 18세 대는 이돌천에게 상모를 배워 천안 인근에서 활동하였으며 최은창과도 활동하였다.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하다가 1982년 평택농악에 참가했으며, 주특기는 법고로 1990년 기능보유자 후보로 지정받았다.
(4)이경일(1942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서울을 거쳐 17세부터 안성에서 살았다. 안성이 서운면 마을 두레패에서 상모를 배웠고, 19세에는 최은창과 태고사 절걸립을 하였다. 1982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였으며 법고와 무동놀이가 특기이다.
(5)이성호(1940 ~)
충남 공주 출신으로 마을 두레패에서 농악을 시작하였다. 서울로 올라간 뒤에는 최성구에게 상쇠와 부포놀이를 배웠으며, 최은창, 남운형 등의 걸립패에서 활동하다가 1989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였다. 특기는 상쇠와 부포놀이 고사소리이다. 1995년 이수자가 되었다.
(6)이영옥(1942 ~)
충남 당진출생으로 마을 두레패에서 농악을 시작하였다. 인천을 거쳐 20살에는 서울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인천의 강개령이 이끌던 난걸립패에 가담하여 활동하며 박산옥에게 쇠, 장고, 법고를 배웠고, 그 후 여러 행중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89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였으며, 장고로 1995년 이수자가 되었다.
(7)김육동(1928 ~)안성군 공도면 출신이다. 공도면 웅교리의 마을 두레패에서 농악을 시작하였으며 최은창 행중에서 절걸립을 하기도 하였다. 1980년 평택농악 창단할 때 참여하여 1987년 법고와 무동놀이로 이수자가 되었다.
(8)정한모(1928 ~)
안성군 공도면 출신으로, 공도면 웅교리 두레패에서 농악을 배워 안성농악에서 활동하였다. 1985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였고, 특기는 북이다. 1987년 이수자가 되었다.
(9)유준(1936 ~)안성군 공도면 출신으로, 공도면 웅교리 두레패에서 농악을 배워 1983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였다. 주특기는 북과 무동놀이로 1987년 이수자가 되었다.
(10)손석건(1919 ~)
팽성읍 평궁리가 고향으로 마을 두레패에서 농악을 배웠으며, 평택농악 창단 때부터 참여하였다. 평택농악의 기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주요 활동가로 안성의 김기복, 천안의 윤인수, 팽성읍 대추리의 방오봉, 포승면의 이민조, 평궁리의 최종성, 손기영 등이 있다. 현재 평택농악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