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세평]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박일훈 시인ㆍ법학박사ㆍ초당대교수
2015. 01.21(수) 18:15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하는 안톤 슈나크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작은 슬픔과 삶의 허망감에서 오는 우수를 노래하고 있다. 산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정시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게 하는 글이기도 하다.
본문 중에는 특히 이제는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이나 부유한 기업가가 된 옛 친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이에게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의 아픈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듯하다.
구랍 21일 '교수신문'은 전국 724명의 교수를 대상으로 2014년을 결산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물은 결과 201명(27.8%)이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필자도 본 조사에 응하여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지록위마의 이야기는 사기(史記)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에 나오는 말인데,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신하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사슴을 말이라고 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자신을 진(秦)나라의 처음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후계자들을 이세 황제(二世皇帝), 삼세 황제(三世皇帝)등으로 호칭하도록 하여 나라가 영원히 번영하기를 염원했다. 하지만, 제5차 순행 도중에 시황은 중병에 걸리고 말았고 자신의 천수가 다했음을 직감한 시황은 환관(宦官) 조고(趙高)에게 명하여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이세 황제가 되도록 하고 몽념(蒙恬) 장군이 군사를 맡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승하했다.
당시 시황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시황의 다른 아들 호해(胡亥)와 승상 이사(李斯)와 조고, 그리고 심복 환관 오륙 명뿐이었다. 옥새와 유서를 가지고 있던 조고는 먼저 호해를 설득하고 나서 회유와 협박을 동원하여 승상 이사까지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즉, 세 사람은 비밀리에 담합하여 호해를 이세 황제로 세우고, 부소와 몽념은 자결하라는 내용의 유서로 조작하게 된다. 부소는 결국 자살했고 몽념은 자결을 거부하다가 반역죄로 사형을 당했다. 이세 황제(二世皇帝)가 된 호해의 무능을 이용하여 조고는 급기야 승상 이사를 모반죄로 뒤집어씌워 제거하고 자신이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조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의 자리를 노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러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하여 조고는 신하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이세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이세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구려."
조고가 대신들을 둘러보며 묻자,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며 조고의 뜻에 영합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대답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암암리에 모두 처형했다. 모든 신하들은 조고를 두려워했다.(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問左右, 左右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候群臣皆畏高.)
굳이 장황하게 사기를 인용한 것은 지난해처럼 온 국민이 비탄에 빠진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태의 참담함은 이루 형언하기조차 어렵다. 지난 2013년 12월 국제투명성기구가 박근혜 정부의 '부패인식지수' 순위를 OECD 37개국 중 27위라고 발표했을 때까지만 해도 설마 설마 했다. 그런데 여객선의 탑승인원 476명 중 어이없게도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되는 현장을 온종일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대한민국 정치에 과연 미래가 있는지 대한국민이라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그 뿐이랴. 연말에 불거진 정윤회 문건 파동으로 대두된 비선 실세 의혹은 중국 후한 말의 환관 정치 십상시(十常侍)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다급해진 탓일까. 박근헤 대통령은 우리말이 아닌, 천박한 일본어 '찌라시'를 언급하기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덕분에 검찰 수사는 무미건조해지고 검찰에 출두하는 정윤회는 여유로운 미소로 가득했다. 그런 가운데 십상시의 한 멤버로 거론됐던 청와대의 행정관은 감히 집권여당의 대표와 중진의원의 저격수를 자처하고 나섰다가 돌연 옷을 벗기도 했다. 신년 기자회견 이후 오히려 박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는 날로 가속화돼 이미 60%에 육박하고 국정 지지율은 30%대로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
한편 '교수신문'은 지난 4일 2015년 새해의 사자성어로 정본청원(正本淸源)을 택했다. 근본을 바로 세우라는 말이지만, 회천재조(回天再造, 어지러운 상태에서 벗어나 나라를 새롭게 건설한다) 없이 가능할 리 없다. 어쩌면 우리는 한국식 대통령제가 가지는 제왕적 권위의 한계에 봉착해 있는지 모른다. 준비된 말만 하는 대통령이 찌라시까지 입에 올릴 때 우리는 정녕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옥조 okjo@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