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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구간 (아름다운 동행, 경호강)
허준(許浚)과 유의태(劉義泰)
6구간의 출발점 수철에서 처음 만나는 마을이 지막이다.
지막(紙幕)은 종이를 만드는 곳이라 하여 지막골 또는 지막동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마을 뒷산에 지초(芝)가 지천으로 깔려서 막(幕)을 쳐놓고 약초를 캐었다고 하여 지막(芝幕)으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지초 ‘芝’가 종이 ‘紙’ 바뀌어져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지초는 그 효능이 남달라서, 예부터 산삼에 버금가는 약재 중의 약재로 꼽힌다.
사실 이곳 산청은 지리산 줄기에서 나는 자생약초들의 보고이다.
그래서 산청군은 근래 들어 왕산 하단에 한방단지를 조성하여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과 그의 스승 유의태를 기리면서 산청이 한방의학의 메커임을 알리고 있다.
여기서 조선조의 걸출한 명의, 구암(龜巖) 허준(許浚)의 생애와 유의태의 이야기를 개관해 보기로 한다.
허준의 생애 - 픽션의 힘 Ⅱ
사실 허준의 출생에서부터 청년기까지의 기록은 거의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은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홍담과 자신이 천거하여 허준을 내의원에 출사케 하였다”고 기술된 것이 최초의 것이다.
그나마 유희춘 개인의 비공식적인 기록일 뿐이고, 공식적인 기록은 1571년 내의원 첨정으로 근무하였다는 것이 최초이다.
아무튼 그는 1539년(이설이 있음) 양천현(현재 서울 강서구)에서 무관출신인 허윤의 서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1569년 그의 나이 31세 때 유희춘 부인의 병을 치료한 인연으로 유희춘과 당시의 이조판서 홍담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게 된다.
1571년에 종4품 내의원 첨정을 거쳐, 1590년 왕세자의 천연두를 고친 공으로 당상관(정3품)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서자출신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 종3품이었는데, 선조는 신하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그를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허준은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면서 선조의 건강을 돌보게 되고, 1596년에는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정헌대부 중추부지사(정2품)에 오르게 된다.
그 후 (1600년) 수의(首醫:내의원 책임자) 양예수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수의가 되었다.
1604년에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 3등으로 책훈되는 한편,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면서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 (호성공신(扈聖功臣)이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위하여 따랐던 공으로 이항복 등 여든여섯 사람에게 내린 훈호(勳號)를 말한다)
1606년에는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정1품 보국승록대부로 승진하게 되나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백지화되었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면서 그는 파직당하고 의주로 유배가게 된다.
1609년 유배가 풀리기까지 1년8개월 동안 그는 1596년부터 왕명으로 편찬하고 있던 의서를 정리하여 1610년 희대의 걸작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되었다.
1615년 77세로 사망하게 되자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보국승록대부를 추증하였다.
조선조 역사상 서자이면서 잡과출신으로서는 정1품에 오른 인물로는 허준이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아무튼 허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선조와 광해군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던 어의라는 인물적 관점보다는 그가 편술한 불세출의 명저 ‘동의보감’의 한의학적(韓醫學的)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의학체계를 구축한 한의학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국・일본 등에도 소개되어 동아시아 의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이룬 의서이다.
사실 허준이 근래 들어 일반인들에게 널리 회자되면서 유명해지게 된 것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과 이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때문이었다.
유의태가 그의 스승이라는 것과 밀양 얼음골에서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했다는 이야기, 내의원 취재에 장원 급제한 일, 수의 양예수와의 갈등, 그리고 내의원 등과전까지의 산청에서의 생활 등은 이 소설에 설정된 것일 뿐 실재 허준의 생애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산청출신으로서의 허준과 유의태의 제자로서의 허준이라는 소설에서의 연결고리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청군에서는 이곳 출신의 의원 허준과 스승 유의태라는 관계설정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산청이 한의학의 본산지임을 홍보하고 있다.
사실 허준이 산청에서 생활하였는지 여부와 유의태의 제자이었는지의 여부는 소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허준의 의업활인(醫業活人)의 휴머니즘 앞에서는 부질없는 소모적 논쟁에 불과한 것이리라.
소설에서 허준은 병들어 고통 받는 민초들을 동정하고 구원하는 따스한 인간애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허준이라는 위인의 역사적 업적보다는 비록 소설이지만 민초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희생정신을 가진 의원이라는 인간애에 매력을 느끼고 싶은지 모른다.
그리하여 지리산 자생약초의 본고장 산청이 허준의 생활터전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들 역사적 팩트와 상이하다고 항변할 자가 없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임금에게서 총애 받은 어의 허준이 아닌 애민박애의 의원 허준이라는 것이고, 산청고을의 심성적 이미지가 그 배경으로서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소설상 픽션이 역사상 팩트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의(神醫) 유의태
앞에서 잠깐 언급 하였다시피 유의태(劉義泰)가 허준의 스승이라는 것은 소설에서의 설정일 뿐이고 이를 사실로 뒷받침할만한 기록은 없다.
다만 비슷한 이름의 실존인물로 허준 사후 약100년이 지난 숙종 때 어의를 지냈던 유이태(劉以(爾)泰:1652~1715)가 소설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이곳 산청에서는 유의태의 관련한 전설이 많이 구전되고 있는데, 이를 기초로 하여 추정을 해보면 그가 이곳에서 의술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 아닐까 한다.
또한 화계의 구형왕릉에서 조금 올라가면 유의태 약수터가 있다.
이곳 산청에서 구전되고 있는 유의태의 관련한 전설 중 몇 개만 추려서 이야기 해 보련다.
어느 날 유의태는 청나라에서 고종의 중병을 치료해 달라는 청을 받고, 이에 두 달의 기한으로 청나라로 왕진을 가게 되었다.
고종의 병을 진맥하여 보니 천문창(天門瘡)이라고 하는 두창이었는데, 당시의 의술로서는 고치기 힘든 등창의 일종이었다.
진맥을 마치고 객관에 나왔으나 치료의 별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 밥상을 받고 밥을 먹으려 하는데 밥그릇이 엎어져 방바닥에 밥이 쏟아져버렸다.
그 상황을 보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에 쏟아진 밥을 벽에 문질러 발랐다. 그러고는 차일피일 한 달 이상의 시일을 보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명의라고 기대를 하면서 불렀으나 아무런 처방도 없이 시일만 보내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럭저럭 한 달을 지내고 나서야 유의태는 벽에 발라 두었던 밥풀을 긁어서 모아 가루를 만들어 그것을 고종의 헐어진 환부에 넣었다
신기하게도 하루를 지나니 그 두창의 고름이 줄어든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 가루를 계속 환부에 넣으니 남은 한 달이 다 되기도 전에 두창은 완치가 되었다.
이로써 청나라의 온 조정이 조선의 명의 유의태를 신의(神醫)로 받들게 된 것이었다.
이른바 ‘낙반비벽토(落飯庇壁土)’의 이야기이다.
한양의 김판서에게는 별당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18세 되던 해에 처녀의 몸으로 배가 산등성이처럼 불러졌다.
물론 별당은 임신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식구들은 반신반의 하였고, 결국 김판서는 명의인 유의태를 부르게 되었다.
진맥을 마친 유의태는 별당의 배부른 증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병인데 기적이 일어나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한 목숨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김판서의 부인은 유의태에게 어떤 방법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듯이 매달렸다.
그러자 유의태는 별당을 데리고 천리 밖을 나서면 행여 무슨 수가 날 수도 있겠으나 그마저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성의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별당의 어머니와 오빠는 별당을 데리고 천리 밖으로 가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함께 출발하였다.
그들은 유의태의 말에 기적의 희망을 걸어보지만, 그것보다 별당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나면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니 차라리 천리 밖 멀리 갔다 버리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 한 것이었다.
집을 떠난 일행이 거의 천리 밖까지 나온 어느 날 밤, 그들은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다음날 별당을 버려두고 되돌아 갈 생각을 하였다.
이날 저녁, 하인들은 죽은 노루를 발견하고 그것을 장만하여 솥에 넣고 푹 삶고 이었다.
노루고기의 구수한 냄새를 맡은 별당은 오라버니에게 그 국물 한 그릇 갖다 달라고 청했다.
오빠는 내일이면 버리고 갈 동생이라는 생각에 그 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한 그릇을 갖다 주었다.
갖다 준 노루국을 훌쩍 마신 별당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새벽, 별당이 자는 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딸이 부르는 소리에 그 방으로 간 김판서 부인은 방안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터질 듯이 불렀던 별당의 배는 훌쭉 꺼져 있었고 아랫목에 벌레 떼가 우글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별당이 배가 불러졌던 이유는 이러했다.
어느 날 별당이 노송나무 밑에서 소피를 보았는데, 그때 벌레가 배속으로 따라 들어가 알을 까서 희한한 병이 생긴 것이었다.
아무튼 별당의 배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얼굴에도 화색이 번져오자 별당은 어머니와 오빠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런 사연을 들은 김판서는 완쾌된 딸을 보면서 기뻤지만, 당장의 치료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아내와 자식들을 천리 밖까지 고생시킨 유의태의 소행이 괘심하기 짝이 없어 급히 그를 불러오게 했다.
“너는 어찌 병명을 숨기고 내 집안 식구들을 멀리까지 고생시켰느냐, 네가 양반을 속인 죄 죽어 마땅하리라” 김판서의 호령이 대단했다.
그러나 유의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게 아니올시다. 천리 밖의 죽은 노루고기를 소인이 여기서 어찌 구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또 제가 가서 설혹 구한대 해도 천리 길을 왔다 갔다 하면 별당 아씨는 이 세상 사람이겠습니까? 소인이 자신이 없다고 한 것은 하늘이 정해 놓은 일을 한갓 의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김판서는 아무 대답을 못하였다고 한다.
어느 효자가 노모의 병환이 날로 깊어만 가자 유의태에게 업고 가서 고쳐 주기를 사정 하였다.
유의태가 보기에 효자의 노모에게 맞는 약이 있기는 한데 그 약을 구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효자는 그래도 명의인 유의태가 돌보아 주면 차도가 있으리라 싶어 애걸하자 유의태는 “의원이라고 아무 병이나 다 고치지 못한다오. 특히 당신 어머니의 병은 하늘이 결정할 일이지 나의 의술로는 아예 범접할 바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효자는 유의태의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노모를 업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산길로 들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노모가 갑자기 목이 마르다고 하였다. 효자는 사방이 어두워진 산속에서 물을 찾으려고 산골짜기를 한참을 헤매던 끝에 물이 고여 있는 박조각을 발견하였다.
노모는 아들이 들고 온 박조각 속의 물을 아주 맛있게 마셨다.
그러자 노모의 얼굴이 금새 환해지며 그동안 병환으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기적 같은 변화에 효자는 노모를 모시고 다시 유이태에게 가서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유의태는 효자의 말을 듣고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과연 효자는 하늘의 보살핌이 있는가 보군. 자네의 어머니가 마신 물은 천년두골(千年頭骨) 삼인수(三蚓水)라는 물이네. 즉 천 년 된 해골에 지렁이 세 마리가 빠져 죽은 물인데 내 능력으로 어찌 그 귀한 것을 구할 수 있겠느냐? 아무튼 자네의 효성에 하늘도 감동되어 내리신 약이니 이제부터 늙으신 어머니를 이전보다 더욱 잘 모시게. 그것이 하늘의 은덕에 보답하는 길이라네.” 천인수(千蚓水 : 萬蚓水라고도 함)의 전설이다.
유의태는 무릇 물에는 서른세 가지 종류가 있고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약효를 내는데 물을 가려 써야 한다면서 물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물중에 정화수(井華水)에 이어 두 번째로 치는 ‘한천수(寒天水)’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溫)하며 장복하면 반위(反胃:胃癌)를 다스린다는 물로써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현재 유의태 약수터이다.
이 약수는 왕산의 구형왕의 수정궁터 옆 돌너덜 아래에 자리 잡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로 위장병과 피부병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즐겨 애용하는 곳이다.
덕계(德溪) 오건(吳健)
지막마을을 지나면서 건너다보면 천변 길옆에 ‘자연동천(紫烟洞天) 춘래대(春來臺)’라고 각자되어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위에는 아담한 정자가 있는데 이름하여 춘래대의 정자이다.
이곳은 남명 조식선생께서 자기의 애제자 덕계 오건을 만나러 오던 곳이기도 하고, 덕계 역시 스승인 남명선생을 영접하는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그들은 사제의 회포를 풀고, 내리의 지곡사로 자리를 옮겨서 학문을 논하고 자연을 읊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덕계와 남명선생이 이곳에서 내리로 갔던 길은 현재 우리가 가고 있는 둘레길(6구간)과 일치한다.
남명선생의 이야기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이곳 출신인 덕계 오건선생(1521~1574)에 대하여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덕계선생은 이곳 산음현 덕촌(현재의 특리)에서 태어나서 38세(1558년)의 늦은 나이로 대과(문과)에 급제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정계와 학계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선생은 9세에 대학과 논어를 읽으면서 과거를 준비하고자 하였으나, 11세에 부친을 여의면서 시묘살이를 하게 된 이후, 연이어 14세에 조모상, 16세에 조부상, 24세에 모친상, 25세에 계조모상을 치르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상복을 벗고 나니 28세였다.
모친상 때에는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예조(禮曹)의 포상과 임금으로부터 복호(復戶:세금이나 역을 면제)를 받았으나 그것도 사양하였다.
선생은 연이은 상(喪)과 가난함으로 인하여 스승 없이 독학으로 자성하였는데 중용책은 읽은 횟수를 알 수 없고, 대학은 천 여번, 그 외 경전은 모두 4~5백 회씩은 읽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도 중용에 대하여는 덕계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하면서 “오건의 중용공부는 지극히 정밀하고 깊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체득하여 궁구하기를 오래도록 하지 않았다면 이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31세때(1551년) 합천 삼가의 뇌룡정으로 찾아가 남명 문하에 들었으며, 그해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 회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38세(1558년)에 대과(문과)에 급제하고 39세 성균관 교유라는 교수직으로 경상좌도 성주목 훈도로 재직하게 되었다.
이때의 수재자가 한강 정구이다.
선생은 높은 벼슬보다는 성균관 학유 등 유생을 가르치는 직책을 주로 맡았다.
43세 때 선생은 도산으로 퇴계를 찾으면서 퇴계의 문인에도 들게 된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조선 유학의 최고봉이지만 서로 상이한 학문적 접근방식과 생활 때문에 긴장된 경쟁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퇴계와 남명은 각기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대표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하였지만 두 분 생전에는 그렇게 반목하지 않았다.
두 분 사후 양 사문(師門)의 수제자격인 안동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진주의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이 서로 정적관계로 발전하면서 두 학파의 대립이 첨예해 진 것이었다.
특히 기축옥사(己丑獄死)를 계기로 같은 동인이었던 영남학파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면서 퇴계 문인은 주로 남인, 남명 문인은 주로 북인 편으로 갈라지게 되고 이때부터 두 학파는 서로 학문적 입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아무튼 선생은 경상우도의 거유(巨儒) 남명의 수제자이면서 경상좌도의 거유 퇴계의 문인으로도 대접받게 된다.
이리하여 선생의 학문은 궁리거경(窮理居敬)을 중시하였는데 그것은 퇴계의 이기철학(理氣哲學)과 남명의 경의철학(敬義哲學)을 융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나쁘게 말하면 양다리를 걸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선생의 학문이 양 학파의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동인⋅서인으로 분당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572년(선조 5) 백관의 인사권을 가진 중요한 요직인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김효원이 천거되자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이 명종 때 권신이던 윤원형의 식객이었던 것을 문제 삼아 반대하였다.
그러나 2년 후(1574년)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김효원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게 되면서 그 후임자를 심의겸이 동생 심충겸으로 천거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이조전랑의 직분이 척신(戚臣:심의겸, 심충겸의 누이가 명종비 인순왕후임)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함으로서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인⋅서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심의겸이 도성 서쪽에 살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서인, 김효원이 도성 동쪽에 살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동인이라 하였다.
김효원은 덕계선생과 마찬가지로 남명과 퇴계의 문인이며, 따라서 동인의 주요인물 역시 퇴계와 남명의 문인(후에 남인⋅북인으로 갈라진 유성룡, 정인홍 포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조정랑에 김효원을 천거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덕계선생이었다.
선생이 52세때(1572년) 이조정랑을 사직하면서 당시의 관례대로 그 후임에 같은 남명문인이며 후학인 김효원을 천거하였는데 외척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서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산음으로 낙향하였다.
선생의 의사와는 무관한 일이지만 자신이 사직한 이조정랑 후임자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면서 동서 분당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조선 정치사를 뒤흔든 300년 당쟁이 시작되었다.
그 당쟁의 시작은 선생이 돌아가신 그 이듬해(1575년)였다.
산청(山淸)의 변천사
지리산 둘레길은 대장마을에서 매촌리를 거쳐 경호강을 건넌다.
여기서부터 산청읍이며, 군행정의 중심인 군청 소재지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산청군은 중북부의 금서면, 생초면, 오부면, 차황면과 동부의 신등면, 생비량면, 신안면, 그리고 남부의 단성면, 시천면, 삼장면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산청군의 행정구역은 1914년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단성면인 단성군과 통합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산청과 단성은 이합(離合)의 변동을 거치면서 그 이름 역시 여러 차례의 변천과정을 겪게 되었다.
산음(山陰) 이야기
원래의 산청은 현재의 산청읍을 위시한 중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통일신라 때에는 지품천현으로 불리다가 그 후에 산음현으로 개칭하였다.
처음에 이웃 단읍현(현재의 단계, 생비량, 신안)과 함께 궐성군(현재의 단성) 소속의 영현(領縣)으로, 고려조에는 합주(현재의 합천) 소속의 영현으로 되었다가 고려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그 관할로부터 벗어나 독립현이 되었다.
아무튼 산음이란 지명은 중국 절강성 회계군 산음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절강성 회계군하면 왕희지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임명되어 그곳 회계군에서 4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리하여 이곳의 산음에도 왕희지의 일화와 관련한 환아정(換鵝亭), 세연지(洗硯池), 도사관(道士館), 수계정(脩禊亭) 등이 건립되기도 하였다.(거위를 좋아하였던 왕희지가 어느 도사에게 도가의 경전인 황장경을 써주고 거위를 바꾸었다는 환아(換鵝)의 일화와 연관된 환아정(換鵝亭), 도사관(道士館)과 왕희지가 벼루를 씻었다는 세연지(洗硯池)는 조선조 산음현의 객사 자리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또한 수계정(脩禊亭)은 황희지가 난정(蘭亭)에서 당대의 명사들과 유상곡수(流觴曲水: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마시며 노는 것)를 즐겼던 수계(脩禊)의 풍습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역시 현존하지 않는다. 이 건물들은 현재의 산청초등학교의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최근 산청군에서 복원을 계획 중에 있다고 한다.)
특히 환아정은 몇 번에 걸친 재건과 중수가 있었는데, 한때는 한석봉이 쓴 편액을 걸기도 하였고 우암 송시열이 정자의 기문을 쓰기도 하였다.
우암은 환아정기의 말미에 “나는 중국 회계 산음은 가보지 못했는데, 빼어난 산수는 어디가 나을지 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름만으로 본다면 서로 비슷하여 낫고 못함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곳의 산음이 중국의 산음과 겹쳐지는 가장 큰 그림은 다름이 아닌 경호강이었다.
중국 회계의 회계산 아래에 감호(鑑湖)라 불리는 큰 호수가 있는데,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
그 호수의 또 다른 이름이 경호(鏡湖)였으며, 그런 연유로 이곳 산음을 휘감아 도는 강의 이름이 경호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산음이 산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조선 영조 때의 다소 황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1767년(영조 43), 산음현의 어느 마을에서 일곱 살 먹은 여자아이가 아들을 낳았다는 경상감사의 장계가 올라온다.
이에 조정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그 진상을 조사케 하였다.
조사 결과 그 여아의 이름은 종단인데 일곱 살인데도 매우 숙성하였으며 종단을 범해서 아들을 낳게 한 범인은 소금장수 송지명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어사는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산음현감의 책임을 물어 파직하고 그 여아인 종단과 아이, 그리고 간통한 송지명을 각각 섬으로 귀양 보내어 종으로 삼게 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고는 그 지명에 유래하는 바 없지 않다고 하면서 음기가 센 음(陰)자를 빼어 산청(山淸)으로 고치게 하였다.
단성(丹城)의 변천과정
1914년 산청군에 통합되기 이전의 단성은 산청보다 큰 고을이었다.
통일신라 때에는 궐지군이었다가 궐성군으로 되면서 적촌현이었던 단읍현(고려 때 단계현으로 개칭)과 산음현을 속현으로 삼았다.
현재의 산청 땅을 기준으로 할 때 당시의 산청은 중북부에 자리한 산음현과 동쪽의 단읍현, 그리고 남부에 위치한 궐성군으로 삼분되어 있었다.
이 세 고을 중 궐성은 현(縣)인 산음과 단읍을 거느릴 정도의 상급 행정단위인 군(郡)이었던 것이다.
고려 때 잠깐 강성현(江城縣)으로 개칭하여 강등되었다가 뒤에 다시 강성군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고려 현종 때에는 강주(진주의 옛 이름)에 예속되기도 하였으나 고려 말인 공양왕 때 감무(監務)를 두고 독립군으로 되면서 단계현을 다시 속현을 삼게 되었다.
조선 초 정종 때에는 진성현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는데 그 연유가 흥미롭다.
1399년(정종 1), 왜구들의 준동으로 거제도에 있던 명진현이 내륙으로 피난을 오게 된다.
그 명진현이 피난 온 곳이 강성현이었다.
그리하여 강성현에 피난 온 명진현이 합해지면서 명진현의 ‘진’과 강성현의 ‘성’을 따서 진성현으로 개칭한 것이다.
명진현의 땅은 그대로 두고 명진현의 이름과 합쳐진 것이었다.
1428년(세종 10). 30년의 피난생활을 끝낸 명진현은 다시 거제현으로 이속된다
그 직후인 1432년(세종 14)에 다시 고을명이 바뀌게 되는데 이웃한 단계현과 통합하면서 단계의 ‘단’과 강성의 ‘성’을 따서 단성현이 되었다.
이번에는 진성현처럼 이름만 합해진 것이 아니라 그 영역까지도 합해졌다.
그리하여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볼 때 단성면과 신등면(단계), 생비량면, 신안면까지도 아우르는 고을로 부상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단성현의 이름과 영역은 임진왜란에 황폐되어 잠깐 동안 산음현에 영속되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약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리산 동쪽 자락의 대표적인 거점 고을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였던 1914년, 단성은 산청에 편입되면서 면으로 격하되어 그 영역이었던 단계(신등면)와 생비량면, 신안면이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다만 단계와 합하면서 단성으로 바뀌었던 지명은 예전의 강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경호강(鏡湖江)
평촌, 대장을 지나 경호교를 건너면 산청읍인데 여기서 둘레길은 시가지로 진입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틀어 반원으로 휘어진 경호강의 호젓한 강변길로 접어든다.
여기서부터 경호강은 6구간의 마지막인 성심원까지 계속하여 함께한다.
그리고 7구간의 시작점에서 헤어지게 된다. 5구간의 시작점에서 임천과 헤어졌듯이.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함양의 서상⋅서하⋅안의⋅수동을 거친 본류가 5구간까지 함께 했던 임천과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 합류하면서 비로소 ‘강(江)’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것이 경호강의 시작이다.
그리하여 경호강은 지리산과 덕유산의 골골에서 나온 물들을 받아 진주시 대평의 진양호를 만나면서 남강에 인계한다.
정확하게는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에서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까지의 80리(32km)의 물길을 경호강이라 부르는 것이다.
임천은 천변의 바위들과 부딪치면서 급한 물길로 경호강을 만나고, 경호강에서 물을 받은 남강과 낙동강은 부드러운 모래톱을 만들면서 완만하게 바다로 흘러간다.
임천을 청년기, 남강이나 낙동강의 물길을 노년기라고 한다면 경호강은 이 두 가지 물길의 중간인 장년기(壯年期)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천은 격렬하고 거칠지만 순수한 청년의 모습으로서, 남강⋅낙동강은 느리지만 자적(自適)하고 여유로운 노년의 모습으로서, 그리고 경호강은 역동적이면서 유연한 장년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사실 지리적으로도 경호강의 하상(河床)은 암반과 자갈, 그리고 모래가 적당히 분포되어 있고, 유속 또한 느리지도 급박하지도 않는 점에서 임천과 남강⋅낙동강의 중간 형태인 장년기층을 형성 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근래에는 레프팅의 명소가 되어 성수기에는 경호강의 물고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물길을 즐긴다.
이렇듯 경호강은 다급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경쾌한 보폭으로 둘레길의 나그네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혼자서 경호강을 찾곤 하는데 나만의 장소가 두어 곳이 있다.
그 하나가 어천교 옆 강변의 너럭바위이다.
지금은 거대한 콘크리트 다리가 생겼지만 예전에는 강물이 불어나면 잠길 정도의 작고 아담한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 옆의 자그마한 너럭바위가 내가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그곳은 탁족하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로서 바위 끝에 걸터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흐르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물과 내가 하나가 된 듯한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안락(安樂)을 맛볼 수 있는 자리이었다.
현재의 다리가 생기면서 그 바위가 없어졌으나, 나는 곧 그 인근에 비슷한 바위를 찜해두고 지금도 가끔 새로운 나의 바위를 찾곤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원지(산청군 신안면 하정리)에서 다리를 건너 단성중학교 옆 제방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강 건너편에 병풍을 쳐놓은 듯한 단애(斷崖)의 적벽산(赤壁山)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강가의 자갈밭어디든 자리 잡으면 된다.
건너편 적벽산의 까마득한 천인단애(千仞斷崖)의 긴장감이 경호(鏡湖)의 거울에 비쳐지면서 수려한 그림으로 이완(弛緩)되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은 내가 보고 느끼고 즐기는 순간 나의 그림이 되고 나만의 희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풍경은 계절에 따라, 또는 시간과 날씨에 따라 다른 색감으로 변화되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원래모습 그대로이며 아무리 보아도 소진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나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의 이러한 상념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그 유명한 ‘적벽부(赤壁賦)’에서 차용하여 온 것이다.
그것은 이곳의 적벽산이 소동파의 적벽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하는 막연한 나의 생각에서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적벽부는 소동파가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장강(長江)의 적벽(赤壁) 아래서 배를 타고 노닐면서 지은 글로 전⋅후 적벽부 2편이 있다.
전 적벽부는 삼국지의 오나라 장수 주유(周瑜)가 위나라의 조조(曹操)를 대파한 적벽대전에 대한 고사를 생각하며 덧없는 인생과 대자연의 무궁함을 노래한 시이다.
원래의 적벽대전 현장은 소동파의 적벽에서 장강을 따라 삼백 리가량 거슬러 올라 간 포기(蒲圻)라는 곳에 있다.
그리하여 포기의 그곳을 삼국적벽이라 하고, 소동파가 적벽부를 지은 적벽을 동파적벽이라고 한다.
적벽부에서 소동파는 적벽대전의 영웅인 조조와 주유를 회상하고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라면서 무한한 본체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만물이 다 같은 것이라는 것을 물과 달을 비유하며 장자의 제물론적(齊物論的)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은 이처럼 밤낮없이 흐르지만 한 번도 저 강이 가버린 적이 없고, 달이 저처럼 찼다가 기울지만 끝내 조금도 없어지거나 더 자란 적이 없다오. 변한다는 관점에서 볼라치면 천지는 한순간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볼라치면 이 세상 만물과 내가 영원한 것이니 또한 무엇을 부러워 하리오? 그리고 저 천지간의 만물은 저마다 주인이 있으니 내 것이 아니면 비록 털끝 하나라도 취해서는 안 된다오. 그러나 강위에 부는 맑은 바람과 산 사이로 떠오르는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아름다운 모양이 되나니, 취해도 금할 자 없으며 쓴다 해도 다하지 않을 것이오. 이는 조물주가 주신 무진장한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것들이라오.”
그러면서 소동파는 선유(船遊)의 객과 선상에서 술잔과 접시들이 어지럽게 흩어지도록(杯盤狼藉) 술잔을 기울였다고 하면서 끝을 맺는다.
원래의 ‘배반낭자(杯盤狼藉)’는 순우곤(淳于髡)이 제나라 위왕(威王)에게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라는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고사성어이나, 적벽부에서 소동파는 즐거움이 극에 달한 주연(酒宴)을 배반낭자로 표현한 것이다.
해질녘 경호강변, 적벽산을 마주하며 죽이 맞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설레고 흐뭇한 그림이다.
현실로 그려진다면 배반낭자를 마다할 수 없으리.
기대된다.
심적사 나한
둘레길 5구간은 내리교를 기점으로 경호강을 따르는 내리한밭 코스와 금당마을, 내리저수지를 거쳐 선녀탕까지 갔다가 내려서는 선녀탕 코스로 갈라진다.
어느 코스를 잡든 풍현마을 초입의 바람재에서 만나게 되는데, 선녀탕 코스는 곰골 초입인 선녀탕까지 갔다가 바람재로 내려오는 구간이다.
이 구간의 노정은 지곡사를 거쳐서 심적사 입구를 지난다.
두 사찰 모두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명확한 전거(典據)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탁본으로 그 일부가 전해지는 ‘진관선사 오공탑비의 비문’과 추파스님의 ‘산음 지곡사 유람기’에서 각각 고려 초기와 조선 후기의 지곡사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고, 심적사는 추파스님의 ‘산음 심적암기’에서 중건과 중수를 기록한 것이 전부이다.
(진관 석초(眞觀 釋礎,912~964)는 고려 전기의 고승으로서 광종의 명으로 지곡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10여 년간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리고 추파 홍유(秋波 泓宥,1718∼1774)는 조선 후기의 승려로 빼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으며 심적암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는데 심적사 입구에는 스님의 승탑과 탑비가 현존하고 있다.)
그나마 지곡사는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고려 예부상서 손몽주가 쓴 혜월과 진관의 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남명 조식이 이곳에서 제자들과 만나 강론을 하였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심적사는 추파스님의 기록 외에는 전하는 것이 전무한 편이다.
연륜을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기록이 빈약한 심적사이지만 대신 구전의 이야기가 재미난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심적사 뒤의 나한암터에 대한 전설이다.
옛날 강원도의 어느 절에서 한 스님이 난을 피하여 22구의 나한불을 멱서리(짚으로 날을 촘촘히 걸어서 만든 그릇)에 담아 짊어지고 산음 땅에 이르게 되었다.
내리의 지곡마을 나무 밑에서 쉬고 있다가 마침 밥 때가 되어 나한불을 그 자리에 두고 마을에 들러 탁발을 하였다.
그리고 나무 밑에 돌아와 보니 나한불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사방으로 찾은 끝에 심적사 절 뒤의 숲속으로 무언가 지나간 흔적이 있어 따라가 보았다.
산등 넘어 절벽의 바위 밑에 사라졌던 나한불이 모여 있었다.
이상히 여긴 스님이 그곳을 나한암으로 생각하고 나한불을 봉안하였다.
한해 겨울에 폭설이 내려 나한암에는 식량과 불씨마저 떨어진 채로 겨울을 지내게 되었다.
동지가 되어도 팥죽은 생각도 못했는데 동짓날 아침에 부엌에 나가보니 따스한 팥죽 한 그릇이 부뚜막에 놓여 있고 아궁이에 불도 피고 있었다.
이 뜻밖의 사실에 놀란 스님이 팥죽을 들고 법당에 들어가 살펴보니 한 나한불의 입술에 팥죽이 발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겨울을 지낸 뒤 이듬해 봄에 스님이 탁발하기 위해 웅석봉을 넘어 마을에 가게 되었는데 지금의 삼장면 홍계였다고 한다.
어느 집에 들어가니 주인이 어느 절에 왔느냐고 물었다.
심적사 나한암에서 왔다고 하자 주인이 반기면서 지난 겨울 눈이 많이 온 동짓날 새벽에 나한암 상좌가 왔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팥죽을 먹인 뒤 스님이 한 분 있다는 말을 듣고 팥죽 한 그릇과 불씨를 주어 보낸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스님은 지난 동짓날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팥죽의 주인과 입술에 팥죽이 발린 나한불이 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나한불의 뜻임을 알게 된 스님은 더욱 신심을 키워 수행정진을 하여 성불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심적사는 6.25 한국전쟁 때 화재로 전소되어 폐사된 자리에 1991년에 새롭게 재건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산청읍에 심적정사라는 비슷한 이름의 절이 있는데 이곳 심적사 나한암에 있었던 나한불이 그곳에 봉안되어 있다.
그 사연인즉 전설 못지않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심적사의 22나한불은 6·25 한국전쟁 때 암자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또다시 난을 피하여 인근 삼봉산 자락의 모처로 옮기게 되었다.(삼봉산은 둘레길 3구간에서 거치는 남원 산내면과 함양 마천면 사이에 있는 산으로 추정된다)
난이 끝나고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려던 나한불은 당시 어수선한 상황에서 산청읍까지 왔다가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그리하여 1976년에 응진전(나한불을 봉안한 나한전을 달리 부르는 말)을 세우면서 이곳에 봉안한 것이 현재의 심적정사가 된 것이었다.
원래는 22기의 불상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통에 1기는 분실되었다고 한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16나한상 등 21기의 불상은 모두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310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폐사지에 새롭게 재건한 심적사는 나한도량의 복원을 위해 원래의 나한불을 모시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06년에 이르러 원래의 나한불을 대신하여 오백나한불을 조성하는 불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오백나한을 나한전에 봉안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그동안 끊어졌던 나한도량의 명맥을 잇게 되었다.
나한전의 측면에는 임제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법어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어디서나 주인공이 된다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진실하다.
성심원
아랫바람재를 넘으면 널찍한 터에 여러 동의 현대식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성심원이다.
이곳은 한센병력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복지시설이다
한센병은 나균(癩菌)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질환을 일컫는 말이며, 현재는 전세계적으로 24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연간 1만 명당 1건 미만으로 발생하는 드문 질환이다.
우리나라는 한센병 유병율이 0%인 국가이다.
소록도를 비롯한 전국 90여곳의 한센 수용시설 또는 정착지에는 한센병을 앓았던 병력자만 있을 뿐 현재 우리나라에서 한센병 환자는 없다고 한다.
한센병이라는 명칭은 노르웨이 의사 한센(G.A. Hansen)이 1874년에 나환자의 결절에서 나균을 처음 발견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나병(癩病)이라고도 부르는데, 과거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으로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으로 부르기도 했다.
성경에서도 저주받은 사람들로 묘사되었던 피부병이다.
한센병의 나균은 주로 손, 발, 눈의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간염부위가 지속적으로 손상을 받게 되면 손가락이 갈퀴처럼 변형되거나 손가락과 발가락의 말단 부위가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코점막에 나균이 침범하면 코연골의 만성적인 염증으로 인해 연골이 변형되어 안장코가 되기도 하며, 눈에 침범하면 시신경을 건드려서 시력을 잃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센병은 전염력이 매우 낮은 병이다.
치료를 받지 않은 증상이 심한 환자와의 긴밀한 접촉에 의해서만 전염이 되므로 치료를 받았거나, 후유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염력이 전혀 없다고 한다. 따라서 격리가 필요한 질병이 아니다.
그러나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으로 여겨져 일제 강점기에는 일정지역에 강제적으로 격리수용 되기도 하였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사회적으로 혼란할 때 이들 일부는 강제수용시설을 벗어나 거리를 떠돌았고, 곳곳에 숨어 생활하던 환자들도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부랑생활을 하면서 걸식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가톨릭교회에서는 구라사업(救癩事業:나환자구제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수용시설을 지어 이들의 자활을 돕는 한편 치료를 위한 병원을 짓기도 하였다.
이런 취지로 카톨릭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서는 1959년 6월 부랑생활을 하는 한센병환자들의 자활과 치료를 위해 현재의 이곳에 성심원이란 자활촌을 세우게 된 것이다.
1961년 8월에는 보건사회부로 부터 나환우 수용보호시설로 인가를 받게 되었고, 그 후 이곳의 환우들은 프란치스코회의 도움으로 양돈⋅양계⋅양잠 및 농사를 지으면서 자활을 하게 된다.
1995년에는 한센 요양시설인 ‘성심원’과 중증 장애요양시설인 ‘성심인애원’으로 정부의 인가를 받아 사회복지시설로 전환하고 통합 명칭은 기존의 ‘성심원’으로 정했다.
2003년 8월에는 한센 후유 장애와 노후로 각종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을 위한 중증장애 전문요양원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부부생활을 하는 환우들을 위해 빌라형태의 가정사 4개 동을 지어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였다.
현재 성심원에 살고 있는 한센 환우들은 70~80세 노인들로서 모두 완치된 상태이라고 한다.
이들은 반백년의 세월 동안 성한 사람들의 편견과 박해, 질시와 냉대가 두려워 이곳 육지속의 섬에 스스로 갇혀 있기를 원했다.
손발과 얼굴이 기형적으로 일그러졌다는 외형 때문에 사회적으로 배척되고 소외되었던 이들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정상인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다.
어쩌면 외형적으로는 멀쩡하지만 사치와 허영의 일그러진 탐욕이 내면에 가득찬 자들이 득실대는 현실의 사회에 더럽혀 지지 않고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 성심원의 생활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영적 상처를 피할 수 있는 이들의 성지(聖地), 성심원(聖心院)을 지나면서 이곳의 환우 노충진(돈보스꼬)님의 시를 베껴 보련다.
‘우리들의 무도장(舞蹈場)’이란 시이다.
반백년 한세월
성심원은 우리들의 무도장.
쪼그라진 귓볼 꺼져버린 안공(眼孔)
문드러진 코납작이 비뚤다 흘러내린 입술
농주(農酒) 한 잔 없이도
흔들 흔들!
우린 함부로 막춤을 추었다.
반백년 한세상
성심원은 가면 놀이 한마당.
퇴락된 두발(頭髮) 일그러진 미간(尾間)
앗아간 아미(蛾眉) 꼬부라진 수지오지(手指五指)
북 장단 없이도
삐거덕 삐거덕!
목발은 춤임새를 넣었다
아~ 애증(愛憎)의 세월
성심원은 광대놀이 수련장
광대놀이 둘째 마당 문둥이 놀음
무의도식(無爲徒食) 유리표박(流離漂泊) 인간사 희노애락
그 훼손된 품위도 쌓여 엉긴 울화도
막춤으로 털어내고 내면으로 승화시켜
대동굿 한 판 추자 웅석봉(熊石峰)의 곰네야!
후기 (구간전체 15.9km) 2018. 1. 6 / 2. 10
(수철 ⇨ 지막: 0.8km)
제5구간의 들머리는 수철마을 버스정류소 주차장이다.
우리는 주차장 후면의 수철마을 표지석 앞에서 신발끈을 묶으면서 5구간의 노정을 준비하였다.
둘레길은 버스길인 향양방향 군도와 반대방향인 마을회관을 거치는 마을길을 따른다.
마을회관 앞에는 아담한 정자가 버스정류소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이름이 회락정(會樂亭)이다.
‘함께하니 즐겁다’라는 구절이 둘레길을 함께하는 오늘의 우리를 가리키는 것 같아 묘한 즐거움이 인다.
곧이어 우측으로 꺾어진 논두렁길이다.
그리고 둔덕을 오르는 짧은 숲길이 끝나면 시야가 트이면서 향양, 평촌 들녘이 훤하게 열린다.
좌측으로는 필봉산, 왕산과 쌍재에서 고동재로 연결되는 지난 구간 걸었던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는 기산, 밤머리재, 왕등재로 연결되는 능선이 힘찬 용틀림을 하고 있었다.
둔덕의 밭길을 내려서 좌측으로 꺾어 들면 곧바로 지막마을이다.
(지막 ⇨ 평촌 ⇨ 대장: 3.4km)
둘레길은 지막마을 초입의 지막교 삼거리에서 평촌을 향하는 신촌 앞들의 들길로 직진을 한다.
지난번 답사 때 빼먹었던 춘래대와 춘래정을 보기 위해 우리는 직진의 둘레길을 잠시 유보하고 우측으로 꺾어진 천변의 마을길을 따랐다.
춘래대와 춘래정은 덕계 오건과 남명 조식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런데 폐허가 되다시피 쓰러진 정자를 발견하고도 그것이 춘래정이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춘래대 각자(刻字)까지도 놓치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수철에서 내려오는 버스길에 합류했다가 59번 지방도의 향양교를 다시 건너는 헛바퀴의 발품을 파는 헤프닝을 거친 끝에 원래의 둘레길인 신촌 앞들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신촌 앞들을 들어서는 순간 또 다른 어수선함이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평온해야할 들판은 부산스럽게 파헤쳐져 어디가 논바닥이었는지 길이었는지를 분간할 수 없이 혼란스럽다.
문제는 우리가 가야할 둘레길이 어디에서 끊겼는지 어디로 우회해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왔던 길 어디에선가 분명 우회로의 표시가 있었을 터인데 우왕좌왕하면서 그것을 놓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경우 정답은 원위치로 되돌아가 우회로 표시를 찾는 것이다.
그렇지만 평촌 앞들과 대정마을 앞의 금서농공단지가 눈앞에 훤히 보이는데 이를 무시하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지금까지 왔던 길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미련 때문에 우리는 평촌마을과 대장마을 방향만 가늠하면서 그대로 가기로 하였다.
공사판의 거친 도로를 거치고 산자락의 묵전을 헤치는 무식한 산행(?) 끝에 기산 자락의 임도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길은 곧바로 대장마을 후면으로 이어져 우리가 거쳐야 할 평촌마을을 건너뛰게 된 것이었다.
사실 오늘 구간에서 2018년 둘레길 시산제를 지내려 하면서 내심 찜해 둔 장소가 평촌마을 건너편 산자락에 위치한 정자였는데 그곳을 놓치고 만 셈이 되었다.
(대장 ⇨ 내리교 : 3.4km)
대장마을은 기산 자락이 금서천과 경호강을 만나면서 멈추어 선 둔덕위의 아담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내림길을 따라 내려서 마을어귀에 이르러서야 원래의 둘레길을 만나게 되었다.
길은 금서천을 건너서 육중한 고속도로 다리 밑을 지나 경호강을 거슬러 오른다.
그리고 경호교를 건너면 메기찜으로 유명한 강변식당이다.
오늘은 강변식당을 그대로 통과하기로 한다.
강변식당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반원으로 휘어진 경호강을 따라 걷는 강변길이다.
우리는 강변 둔치의 이곳저곳 눈길을 주면서 시산제를 지낼만한 장소를 물색해 보았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였다.
산청고등학교 옆의 산청군민 근린공원이었다.
돌탁자에 제물을 차리고 강 건너 웅석봉 향하여 함께 절을 하면서 올해 한 해 무사하고 행복한 둘레길 탐방이 되길 빌었다.
우리는 클라이밍 연습장 옆에 자리를 잡고 제주인 막걸리로 음복을 하면서 즐거운 오찬을 시작하였다.
(내리교 ⇨ 지곡사지 : 2.8km)
내리교를 건너면 길은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우측으로 꺾어들면 신흥 팬션촌인 마당머리 마을길이고, 좌측으로 꺾으면 원래의 둘래길인 경호강변길이다.
오늘 우리는 원래의 둘레길을 버리고 뒷들을 거쳐 내동마을로 이어지는 직진의 아스콘 포장로를 따랐다.
이 길은 웅석봉의 깊숙한 곳인 선녀탕을 거쳐 바람재로 내려오는 둘레길 6구간의 또 다른 코스이다.
내동마을을 지나고 내리저수지에 올라서면 웅석봉 자락의 가장 깊숙한 곰골이 정면에 마주하는데 그 묵직한 풍광은 내리저수지에 오롯이 담겨있었다.
길은 저수지의 끝자락을 감아 돌아 지곡사를 만난다.
그 옛날 남명이 이곳 지곡사에서 덕계 등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면서 회포를 풀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당우는 1950년대에 새로이 지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해지는 그 연륜에 비하여 고찰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만 주변에 민가와 절 주면에 흩어져있는 귀부, 세진교비, 물확 등이 그 옛날의 명성을 희미하게나마 전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의 둘레길 일정은 여기에서 마무리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걷기로 하였다.
둘레길에서 비켜나 있는 심적사의 탐방이 그 이유였다.
(지곡사지 ⇨ 선녀탕 ⇨ 바람재 : 3.6km) 2018. 2. 10
2월 10일, 지곡사를 거쳐 심적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둘레길 6구간의 남은 후반을 시작한다.
천변의 임도는 적당한 경사의 완만한 오름길이다.
비록 딱딱한 시멘트 포장로이지만 한적하고 고즈넉함이 녹아있는 명품길이다.
길 가장자리에는 고로쇠나무가 가로수로 식재된 듯 일렬로 도열해 있는데 밑둥치에는 링거호스 같은 고무관들이 꼽혀 연결되어 있었다.
고로쇠나무 수액을 채취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이곳 산골에도 봄이 가까이 다가서 있음을 알리는 듯하다.
선녀탕은 얼음으로 단단하게 결빙되어 있었으나 이 역시 머지않아 해빙을 맞을 것이며 그때쯤 원래의 청정한 물빛으로 곰골을 담을 것이다.
이곳 선녀탕은 한국의 아름다운 물 100 곳(한국명수백선)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청담옥류의 선경이다.
선녀탕에서 휘어 돈 임도는 평탄한 비포장의 흙길로 이어진다.
건너편에는 심곡사가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며 마주하고 눈 아래에는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 나뭇가지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진다.
몇 굽이의 모롱이를 돌자 시야가 훤히 트이면서 건너편 정수산과 둔철산이 눈앞에 다가서고 눈 아래에는 경호강이 시원하게 펼쳐있었다.
여기서부터 내림길이다.
주변을 조망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풍현마을 초입의 바람재이다.
내리교에서 헤어졌던 원래의 둘레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오늘 걸었던 선녀탕 코스는 원래의 둘레길 보다 약 2km 정도 늘어난 거리가 되지만 결코 지루할 수 없는 명품길이다.
누구에게든 자신있게 추천하고 싶은 길이었다.
(바람재 ⇨ 성심원 : 1.9km)
바람재는 경호강의 휘돌아 흐르면서 만든 벼랑위의 오솔길인데 ‘재’라기보다는 작은 언덕길이다.
고개에서 내리한밭 쪽으로 돌아보면 경호강의 유장한 물길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평화롭게 펼쳐진 풍경과 달리 경호강의 강바람이 매섭게 불어 닥친다고 해서 바람재란다.
바람재를 한자로 하면 풍현(風峴)이다.
그래서 이곳의 마을이름이 풍현마을인데 마을이라기 보다 산자락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서너 가구의 독가촌이다.
바람재의 내림길이 끝나는 작은 개울에는 아담한 징검다리가 3년 전 그대로의 앙증맞은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밭 속의 터널같은 환상적인 오솔길을 잔뜩 기대하였는데 그 길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숲은 제거되었고 민둥벌거숭이의 둔덕만 남아 허망한 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던 꾸부렁한 논두렁길의 한적함도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토지를 개발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라 생각되는데 아쉬운 마음이 인다.
산청분뇨처리장을 지나면서 길은 경호강에 바특 다가선 강변길이다.
경호강은 경쾌한 보폭으로 우리들과 걸음을 맞춘다.
과거 성심원의 나병 환우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녹아있는 축사 건물을 지나 성심원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취사가 불가능한 원내를 피하여 경호강변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준비하였다.
강변이지만 다행히 바람도 불지 않았고 따스한 햇살이 은혜롭게 비치고 있었다.
오늘의 오찬은 라면에 떡국을 넣은 떡라면인데 그 맛이 일류 요리 못지않았다.
겨울의 끝자락에 우리는 6구간 오찬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내친김에 7구간의 일부인 아침재까지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