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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모 < 최경환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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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 여행모임 스크랩 목포 밤거리에서 김대중선생의 자취를 찾다
─━큐ㅌ1★ 추천 0 조회 155 13.11.08 15: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목포지역 정치 경제 문화의 1번지 ---->> 목포오거리

오른쪽 국민은행 바로 건너편으로 100m 선창쪽으로 가면 구호남은행(현준호설립)이 있다. 곧장 가면 구중소기업은행.

구남교동파출소 (현 중앙파출소) . 1946년 10.31 남교동파출소습격사건 발생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사건이 터졌다.

사건의 계기는 서울에서 일어난 철도노동조합,출판조조,전신조조 등의 파업이었다. 서울의 파업은 곧 대구로 번졌다.

명분은 노동자의 처우개선이었지만 그 안엔 '미 군정청이 발표한 공산당 간부 체포령의 해제 요구'가 들어있었다.

그동안 기회를 엿보던 좌익세력들은 파업을 계기로 전라도, 경기도 등 곳곳에서 들고 일났다.

홍익선이가 1946년 10.31 남교동파출소습격사건 발생 배후자가 김대중이라고 말해서 붙잡힌다. 전신에 구렁이 감아 놓은듯 시퍼렇게 멍이들도록 맞고,

20일만 장인의 증언으로 풀려났다.

"딸(차용례)이 친정에서 출산하여 내 눈 앞에 앉아 있었는데 무슨짓들이요?"

그날 김대중은 첫딸을 얻은 기쁨에 들떠 있었다.ㅇ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만큼 이뻤다.

그런데 큰아들 홍일이가 태어나고 얼마지나서 홀연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소희였다. -->(김대중자서전 p60~61 내용 간추림)

<목포파출소 습격사건>

11월 2일 경무부에 보고된 것을 보면

목포 10월 31일에 폭동이 일어났고, 이날 오전 10시경 이천명의 학생들이 목포 경찰서로 끌려들어갔으나 곧 해산했다.

그 중 수명의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인근 파출소도 습격을 당했다.

급보를 접한 미군부대가 목포로 파견되는 동시에 경찰도 광주로 부터 응원대가 파견되었다.

목포전화교환원도 동시에 파업했다.

동시에 광주에서도 2천명 파업단이 파업했다. (1946.11.2 -경향신문 기사내용)

 

 

김대중 자서전 1권 81쪽

"나는 1950년 10월, 목포일보사를 인수했다. 일제강점기에 남북한을 합쳐서 지방지로는 제일 큰 신문사였다.

전쟁이 계속되자 신문사도 경영이 어려워져서 큰 타격을 입었다. 기자들과 종업원들이 내게 인수의향을 물었다.

평소 언론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망설이지않고 인수했다.

  나는 기자들에게 공정보도를 주문했다. 어느 누구도 왜곡보도의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사시로 내걸었다."

 

왼쪽길은 1907년도 개통된 '신작로' 국도 1호선이 시작되는 길이며 오른쪽 길은 유달산 등구로 이어진다.

 

목포역 앞에 육교를 막 건너 오른쪽 한국은행 지점이다. 건너편 Kt 라고 씌여진 큰 건물은 교보빌딩다.

교보빌딩 자리는 구삼학소주 공장이 있던 곳이다.

 

김대중 자서전 1권 81쪽 하단...

"한번은 박숙희 한국은행 부총재가 목포지방을 시찰하다가 우리 신문사에 인사차들렸다. 한국은행 목포지점장과 함께 사장실에 들어선 그는 나를 보더니

"사장님은 어디 가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같이 온 지점장이 화들짝 놀라며 어쩔줄 몰라 했다.

"앞에 계신분이 사장님이십니다."

그러자 그는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사장일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날 밤 지역 경제인들과 간담회를 갖었다.나는 그자리에서 지방에서 사업을 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더욱이 은행들이 융자를 징역별로 차별하는 형태에 대해서 실례를 들어 설명했다.

....중략

그는 내게 다가오더니 한장의 메모지를 쥐어주었다.

'한국은행 목포지점장 귀하. 김대중 사장이 요청한 대출건은 그대로 집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한국은행 본점에서 보증을 서겠습니다.'

....중략

나는 2년 정도 운영을 하다 사업 거점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김문옥(가수 남진의 아버지/5대 민의원)씨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목포역 옆 교보빌딩(구 삼학소주 공장 자리)

지금은 없어진 삼학소주는 정미소를 운영하던 김문옥(가수 남진의 아버지/5대민의원)씨가 운영했다.  당시 진로소주와 더불어 잘 알려진 브렌드였으나

안타깝게도 큰화재로 재건불능상태가 되고 말았다.

김문옥씨가 운영했던 1959년 목포일보에 호남의 거부 조선내화 성옥 이훈동씨가 유럽기행문을 2달에 거쳐 연재 했었다.

성옥 이훈동(해남출생/1917~2010)씨는 내화주식회사와 완도,해남등에 4개 광산과 성옥산업(주),대주기공(주),대한세라믹(주)등

국내 15개 사업체와 중국에 4개 업체를 두고 있다.

보해소주 전신인 청주주류회사를 3년 운영하고 현 보해양조에 운영권을 넘겼다.(자서전 '나의 아침은 늘 새로웠다.' p 236)

 

역전에서 오거리 방향

 

 역전 파출소

 

목포 오거리 구목포일보(현 예향꽃집)자리

 

북교동 성경교회 주차장 코너쪽 김대중선생이 살았다는 집터.

 

 

목포 밤거리...차안다니는 거리 - 구목포극장(현 롯데시네마)

 

김대중은 1946년 '대구 10.1 사건' 이후 조그만 배 한 척을 구입하여 목포해운공사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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