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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우리 삶의 무대
“아니, 애가 그 애 예요?”
“네, 벌써 초등학교 6 학년인 걸요.”
〈오산시립도서관〉의 연극 강좌는 신체활동을 통해 영어를 익히고 종강 때는 많은 관객 앞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번 학기 강좌 역시 신청자가 넘쳐서 선별을 거처 수강생을 추려할 상황이다.
4년 전에 왕자로 참여했던 현주 엄마가 ‘신데렐라 (Cinderella)’에서 주연을 뽑는 오디션에 딸 현주를 데리고 온 것이다. 오디션은 읽기와 동작 두 가지를 본다. 미리 배포된 대본을 큰소리로 정확히 읽고 또 심사위원의 지시에 따라 A, B, C, D, E 등 알파벳 5개를 몸으로 적절히 표현해 내야한다. 간혹 넘치는 끼를 주체할 수 없는 학생들은 서슴없이 표정연기, 노래, 춤 따위를 보여주어 자신의 존재를 부각 시킨다. 매년 수준이 향상되고 있어 이번에도 영어 구사력, 동작, 적극성 등 삼박자를 고루 갖춘 반짝이는 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그 흔한 팸플릿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지만‘주부영어강좌’수강생들과 공연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잊혀 지지 않는다.
다니던 무역 회사를 그만두고 기업체 강사가 되었다. 강의가 없는 토요일을 의미 있게 보낼 생각에 자청한 도서관 강좌가 어느새 3회 째 되었다. 영어 강좌 이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주부들의 높은 관심에 힘입어 한 회 수강생이 40~50명에 이르렀다.
“우리가 연극을 준비해서 아이들을 보여주면 어떨까요?”
수업시간에 이렇게 제안하자 의외로 몇 명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단박에 의기투합한 열두 명은 수업이 끝나고 2시부터 5시 까지 연습에 돌입했다. 아이를 동반한 주부들은 어쩔 수 없이 연습실 한 쪽에서 놀게 놔두면 한 두 명은 아빠가 도중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학교가 파한 초등학생 삼총사는 엄마를 찾아 도서관으로 달려왔다. 그때 찾아오던 꼬마 중에 한 명이 '현주’라는 아이다.
“엄마가 영어 공부 한다는 사실만으로 아이의 시선은 달라져요.”
더구나 무대 위에 서있는 엄마를 본 아이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우리 엄마 최고!’를 외친다. 남편들도 서툴지만 아내의 진지한 연기에 어깨를 으쓱거린다. 큰 관심 속에 첫 공연을 무사히 끝마쳤다. 그리고 들뜬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치원의 요청으로 일주일 후 재공연까지 올렸다.
그 당시에는 오산시에 변변한 공연 시설 하나 없었다. 도서관 4층 대회의실을 무대로 꾸미고 객석 앞쪽은 돗자리를 깔아 아이들을 옹기종기 앉혔다. 나머지 뒤쪽은 의자를 놓아 어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무대는 비록 보잘 것 없지만 배우의 열의와 관객의 뜨거운 호응은 서울 대형 뮤지컬 공연의 그것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이제는 문예회관이 건립되고 도서관 관계자와 지역주민의 공연예술에 대한 관심이 모아져 〈오산햇살마루도서관〉 내에 ‘희망 소극장’이 생겼다.
“내가 진짜 연극을 해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아.”
“연습에 열심히 참여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연극에 참여한 주부들은 감격과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내가 그들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니? 너무 과분한 칭찬이다. 내 꿈을 향해 등을 곧추 세우고 한 걸음씩 내딛다보니 어느새 ‘우리의 꿈’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대학 시절 강의실이나 도서관 보다는 무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졸업 후 육 년 동안 수출 업무를 천직처럼 여기며 회사에 다녔다. 그러다 새록새록 용솟음치는 연극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영어 교육의 모색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년 후 ‘영어선생’이 되어 왔을 때는 기존의 비효율적 방식을 탈피해야 한다는 막연한 사명감과 모종의 의무감이 생겼다. 사회적 과열, 들뜬 분위기 이러저러한 찬성과 비판적 시각을 종식 시킬 수는 없지만 영어연극은 어째 됐든 영어 학습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준다. 특히 도서관 문화강좌는 경직된 기존의 교육 틀이 아닌 유연성이 보장되는 큰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수강생은 ‘아이쇼핑(Eye shopping)’의 올바른 단어‘윈도우 쇼핑 (Window shopping)’을 맞춰 상품으로 살림을 장만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연극을 올리고,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Love 등 팝송을 따라 부르고, 생활 속의 잘못 쓰이는 엉터리 단어를 찾아 고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 물론 자녀 영어 지도학습법도 빠트리지 않았다.
첫 강의에 들어가 보니 맨 뒷줄에 유독 임산부들이 많았다. “태교에도 좋아요." 란 강좌 안내 문구가 임산부들을 불러 모았다. 그 중엔 어렵사리 임신한 내 아내도 끼어 있었다. 수업이 태교에 효과가 있었는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영어를 퍽이나 좋아하는 초등 4학년 딸아이를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이론만은 아닌 듯하다.
재미있고 유용하다는 주위 평가 덕택에 화성시 소재 도서관에서도 강의를 하게 되었다. 병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기 전 ‘태안’ 이나, 접근성이 용이치 못한 ‘남양’둘 곳 다 정해진 인원 채우기 급급했고 종강까지 유지시키기는 더욱 어려웠다. 적은 인원이라도 꾸준히 출석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날씨에 따라 또는 남편 회사 사정상에 따라 좌석이 텅 비는 날은 강사로서 심한 자괴감마저 느끼게 했다.
그래도 미국으로 건너 간 수강생이 보내온 한 통의 편지는 뿌듯한 자부심을 심어준다. 수업시간에 익힌 영어를 실생활에서 써보니 의사소통이 잘 된다면서 30여개 문장을 실례로 적어 보내왔다.
〈평택시립도서관〉〈경기도립평택분관〉〈안성시립도서관〉에도 거푸 강의를 나갔다. 한때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에는 늘 도서관에서 강의를 했다.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는지 매번 표시해 놓는 것은 물론이고 오죽하면 농담한 내용까지도 체크해 놓아야 낭패를 보지 않을 정도였다.
일주일에 한번 씩 있는 강의. 강의료만 챙길 요량이면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다. 강의와 함께 주어지는 덤, 문화피크닉을 넉넉히 즐길 수 있다. 마음을 가다듬기 좋은 길이 있는 ‘남양성모성지', 하늘을 가리는 숲이 아름다운 '융건릉', 온갖 유기제품을 보면 내 인생도 광내고 싶은 충동이 이는 ’안성마춤박물관‘, 평택분관을 나와 에둘러 찾아간 황구치천에서 자연의 따뜻함과 벗한다.
“선생님 강의는 영어를 배우면서 여행과 문화정보를 얻을 수 있어 좋아요.”
주말이면 어김없이 경기도 일원 박물관, 미술관 을 찾아 나섰다. 또 철마다 배낭을 꾸려 〈수원화성 연극제〉〈과천 한마당축제〉〈안성 바우덕이축제〉〈이천쌀문화축제〉 등을 돌며 각 지역의 역동성을 피부로 느낀다. 수업 종료 전 가져온 팸플릿를 보여주며 여행담을 들려주고 다음 여정에 대한 귀띔도 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한 수강생이 나를 ‘경기도의 문화메신저’라고 추켜세운다.
‘문화’란 공유하는 것이다. 미처 몰랐던 문화의 향기를 맛보고, 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힘을 느끼고, 그곳을 찾는 즐거움이 문화를 향유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새로 문을 연 도서관 문화 강좌는 비교적 경험 있는 강사가 안정적으로 운영해주길 원한다. 그런 까닭에 〈화성병점도서관〉 으로부터 강사 제의를 받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인근 도서관에서 초급, 중급 강좌를 2~3년 간 수강한 적 있는 주부들이 찾아와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자녀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하고 수강했던 분은 딸아이가 영문과에 들어갔으니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요즘도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분은 그래도 물건 값 흥정만큼은 본인이 영어로 척척 한다고 한다. 다른 분처럼 교육과 여행에 끼친 영향은 잘 모르겠지만 우울했던 한때를 잘 이겨나갈 수 있었다고 하는 분도 있다. 수강 목적은 다르지만 모두들 내 강의가 삶에 지표가 되었다니 기쁠 따름이다.
안성이나 남양으로 가는 길은 족히 40~50분 이상 걸린다. 등교를 서두는 아들딸과 함께 집을 나서 도서관에 한 시간 전에 도착한다. ‘미술’과‘연극’ 에 관련된 글을 읽는 나만의 시간이다. 일 년 내내 단 한권의 책조차 펼칠 여유가 없던 직장 생활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다 못 읽은 책은 다음 주에 와서 이어 읽으면 된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 때만 되면 새벽같이 종로구 북촌 길에 있는 〈정독도서관〉로 달려갔다. 자칫 몇 분 만 늦어 버리면 수백 명의 학생들과 대기실에서 마냥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학습 열람실은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자료실 표를 받아 도서관으로 쉽게 입장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자료열람실’ 좌석은 항상 여유가 있고 ‘학습 열람실’은 매워 터졌다. 나는 분통을 터트렸다.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도서관이 단순히 시험공부를 위한 공부방이 아니라 다양한 정보의 제공, 시민의 호응에 부응하는 문화 행사와 공공을 위한 사회 강좌를 추진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올 4월 수원의 한 갤러리에서 주관한 토론회에 패널로 초청받았다. 열심히 미술관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전문적인 독서를 통하여 미술 지식의 영역을 넓힌 결과이다. 독서는 네 삶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왕성한 발전적 에너지로 작용한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연거푸 커튼콜(Curtain call) 이 이어진다. 출연진 모두 최선을 다한 무대다. 배우들만 만족하는 무대가 아니라 관객과 호흡하며 즐기는 무대를 만들어낸 배우들이 대견스럽다. 특히 주인공 신데렐라를 역을 맡은 현주에게 아낌없는 찬사가 쏟아졌다. 키는 그때나 지금이나 또래보다 작았지만 영어, 동작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다. 대본을 건네주자마자 완벽히 외우는 적극성이나 한번 지적한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성실함은 남보다 돋보였다. 현주는 4년 전 익히 모든 것을 다 해보았다는 듯이 술술 잘 해낸다. 왕자 역할을 했던 현주 엄마는 감격했다.
한 아름 책을 대출해서 도서관을 나선다. 새로운 정보를 내려 받기 (download) 할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저만치에서 나만큼의 책을 반납하려고 계단을 올라오는 오는 어느 주부와 가볍게 목례한다.
“세상은 무대(All the world's a stage)" 란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있다. 나는 감히 “도서관은 우리의 무대 (All the libraries are our stages.)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내 꿈의 실현을 위해 힘껏 뛰다 돌이켜보니 나 혼자가 아닌 우리의 모든 꿈들이 영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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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글
감사합니다.
원고료 10만원...어디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