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 (1고린 11,23-26).
가톨릭교회 교리 강좌 (22)
22과 : 성체성사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322-1419항)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를 완결 짓는다. 세례성사로 왕다운 사제의 품위에 올려 지고 견진성사로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게 된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온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한다.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원천이요 중심이요 정점이다. “아멘.”하면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교회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다. 성체성사를 통해 교회의 신비가 실현되므로, 성찬례에 참석하는 사람은 개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이 사랑의 성사를 거행하고 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성체성사는 무엇인가?
옛 교리 문답에는 “성체성사는 무엇이뇨?” “성체성사는 칠성사 중에 제일 큰 성사요, 천주교회의 제사요, 또한 우리 영혼의 양식이니라.”로 되어 있다. 한편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최후 만찬에서 당신 몸과 피로써 성찬의 희생 제사를 제정하셨다.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이고 일치의 표징이며 사랑의 끈이다. 이 제사는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어,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히 채우고 미래 영광의 보증을 받는 파스카 잔치이다”(1323항).
성체성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곧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미사성제’를 말한다. 성체성사를 성찬례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리스말 ‘에우카리스티아’를 번역한 것으로, 원래 ‘감사’라는 뜻이다. 주 예수께서 최후 만찬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 뒤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기 때문이며, 교회가 이 성사로써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주님의 만찬’, ‘빵 나눔’, ‘성찬 모임’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성체성사의 표징인 빵과 포도주
주님께서 성체성사의 재료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표징이다.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모든 일과 노고가 천상의 실재로 변화함을 의미한다.
한편 빵과 포도주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파스카 음식이다. 그들은 누룩 없는 빵으로 이집트 종살이를 기억하였으며, 과월절 식사 후에 나누는 포도주로 종말에 이루어질 잔치의 기쁨을 미리 누리고자 했다. 예수께서는 이 구약의 파스카 축제 음식으로 새 계약의 잔치를 마련하셨다.
3. 성체성사(미사)의 거행
미사성제는 이미 2세기부터 오늘과 같은 형태로 거행되었다. 미사는 크게 두 부분, 곧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나뉜다. 미사의 식탁에서 우리는 말씀과 성체이신 주님을 모신다.
- 미사의 순서 -
1) 그리스도 신자들이 주님의 식탁에 모인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모임을 주재하는 사제는 주님의 식탁에 모인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며 죄의 용서를 청하고 기도를 바치는데, ‘본기도’라 부르는 이 기도는 모음기도(Collecta)이다.
2) 말씀 전례는 구약과 신약의 독서와 복음을 듣는 것이 핵심으로, 사제의 강론은 회중이 들은 말씀을 깨닫게 하며, 신경과 보편지향 기도는 이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다.
3) 성찬 전례는 빵과 포도주를 예물로 봉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초대교회 때부터 예물 봉헌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도 함께 봉헌하였는데, 이제는 헌금으로 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4) 감사기도는 “감사송-성령 청원 기도-성찬 제정 축성문-기념-전구-마침 영광송”으로 이어진다.
5) 영성체 예식은 “주님의 기도-평화예식-영성체 전 기도-영성체-영성체 후 기도”로 이어진다.
6) 마침 예식은 파견 의식이다. 이 파견(“Ite, missa est!)에서 ‘미사’라는 말이 나왔다.
4. 성체성사 : 기념, 제사, 잔치, 현존, 감사
1) 성체성사는 기념이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제사요 잔치이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25). 우리는 성체성사 곧 미사로 주님을, 주님의 사랑을,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데, 이 기념은 과거의 기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오늘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성체성사는 제사이다.
우리가 거행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상 제사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
제사는 본래 흠숭과 감사와 찬미와 속죄를 위한 것으로, 주님의 제사는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최고의 흠숭, 감사, 찬미, 속죄이다.
3) 성체성사는 잔치이다.
우리가 거행하는 것은 또한 영원한 계약의 파스카 잔치이다. 우리는 이 잔칫상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의 음식으로 받아먹는다(요한 6,51-56). 영원한 생명의 음식을 나누는 것보다 더 큰 식사, 더 풍요로운 잔치는 없다. 우리를 이 친교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마태 26,26-27).
4) 성체성사는 주님의 현존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성사 안에 친히 참으로, 곧 실제로 계심을 믿는다. 일찍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봉헌물들을 그리스도의 모모가 피가 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가 말하지만, 그 말의 효력과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이는 내 몸이다.’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헌물들을 변화시킵니다.”
5) 성체성사는 감사이다.
성체성사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와 흠숭과 영광을 드리는 최고의 예배이다. 이 감사와 찬미는 물론 성령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다.
6) 성체성사는 다가올 영광의 보증이다.
성찬례는 주님 파스카의 기념이고, 영성체로 하늘의 온갖 은총과 축복을 가득히 받으므로 천상의 영광을 미리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그분의 약속(마태 26, 29)을 기억하며 “오실 그분”(묵시 1,4)을 기다린다.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성찬례보다 더 확실한 보증과 더 분명한 징표는 없다.
***
<기도>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사옵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쥐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 사도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 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첫댓글 다 아는 익숙한 내용일런지 모르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보면 그동안 그냥 스쳐지나갔던 내용들 또는 살면서 잊고 있었던 내용들이 또 새롭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 생활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미사, 그 새로움과 소중함을 다시 바라며...!
성체성사를 통해 교회의 신비가 실현되므로, 성찬례에 참석하는 사람은 개인차원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이 사랑의 성사를 거행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습니다. 교리 강좌 공부가 재밌어요. 신부님의 강의를 통하여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얼핏 딱딱해 보이기 쉬운 교리강좌를 재밌게 공부하시는 분이 계시다니, 참 반갑습니다!^^
신부님 성체성사를 모실때마다 저는 제자신에게 묻습니다..제가 자격이 있습니까?하고.. 당신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수시로 변한는 내마음을 바로 잡아달라고 기도하면서... 알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이 길을 가지만 흔들리는데 강좌를 읽으며 나를 재 정비의 시간으로 가져봅니다... 신부님 감사하고,신부님의 마음을 그대로 사랑합니다... *^&^*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하더군요. 그걸 믿기에,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이지만, 하느님 앞에 또다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항상 사랑과 겸손을 뇌이며 생활하시는 아네스님은, 참 소중한 두 가지를 잘 붙드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러워요~!^^
늘 다니던 매일 미사이기에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타성에 젖어서 다니기도 했나봐요. 요즘 이제 매일 미사 다니기도 힘들어질 상황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모시던 시간들이 저에게 얼마나 축복의 시간들이었는지를......주일 날 성당안에 앉아서 기도하면서 맛보았던 평화로움과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사람이 느끼는 안온함이 다시 생각납니다. 주님의 축복이 늘 그렇게 제게 있기를 소망하는것이 탐욕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