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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데라만 잘 구경해도 본전은 뽑는다?
산에서 거대한 검은 통배낭들이 뒤뚱거리며 내려가고 있다.
산나물을 채취한 초로에서 젊은이까지의 남녀들이다.
나물 채취용으로 제작된 대용량 특수배낭이란다.
벌이가 좋아서 신명이 나는지 엄청 무거울 듯 한데도 잘도 걷는다.
배낭 안의 나물은 삼나물, 참나물, 참고비, 섬더덕, 섬엉겅퀴, 땅두릅, 어성초, 전호,
큰미역취, 명이 등등.... 다양하단다.
기아의 시절, 봄이 오길 기다려 산속의 눈을 헤치고 캐먹으며 명줄을 이어갔다 해서
'명이'로 불리게 되었다는 일명 산마늘인 명이(茗荑)는 산나물의 퀸(Qeen)이란다.
저 배낭이 명이로 채워진다면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니 어찌 욕심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명이를 찾아다니다가 참변을 당한다는데 이 행운의 기간도
내일(5월10일)로 끝나기 때문에 마지막 피치(pitch)를 올리고 있는 듯.
산채류가 울릉도 주민의 주요 수입원임을 뜻하며 울릉군의 경쟁력 있는 특산품으로
자리매김 되어가고 있단다.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다양한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숲길이 꽤 넓은 알봉분지를
지나 나리분지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나리분지는 울릉도 화산의 소규모 칼데라(Caldera)지형이며 알봉(추산용출수쪽)은
칼데라 내에 형성된 중앙화구란다.
알봉은 개척 초기, 미역 따러 울릉도에 온 전라도인들이 새 배를 만들려고 나무베러
산에 올라갔다가 마치 새알 같은 산봉을 보고 ‘알봉(538m)’이라 했다는 봉우리다.
칼데라는 화산의 폭발로 인해 분출구 주변이 커다랗게 움푹 팬 지역을 말하며 용암
이나 가스 따위가 분출해서 생긴 작은 분화구와는 달리 넓게 함몰된 지역으로 지하
에서 다량의 마그마가 뿜어져 나온 뒤 그 자리가 꺼져서 생기는 경우가 많단다.
박종관(건국대지리학과) 교수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칼데라가 발견된 곳은 백두산,
울릉도 두 곳뿐인데 백두산 칼데라에는 천지(天池)가 칼데라호(湖)를 이루고 있고,
울릉도 칼데라에는 나리분지(羅里盆地)와 알봉분지가 들어서 있다"며 "칼데라만 잘
구경해도 힘들여 울릉도에 간 본전은 뽑는다"나.
특히 이 지역(나리동)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섬국화(울릉국화)와 섬백리향은 천연
기념물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화기가 9~10월인 여러해살이풀 울릉국화는 들국화의 일종이란다.
꽃향이 백리에 이를만큼 강해서 백리향이라 한다는 섬백리향은 키가 작고 밑둥에서
가지치기를 많이 하는 나무로 봄에 잎이 돋아 가을에 떨어진다고.
광대한 식물원인 듯, 이름도 수도 모를 식물들이 이력서 담긴 명판 하나씩 앞세우고
있는 나리동 길에는 울릉나리동투막집 (鬱陵羅里洞)이 있다.
건축사전에서 투막집이란 "울릉도 개척당시의 집으로 벽은 진흙을 두툼하게 바르고
창문이 없고 방문은 대나무로 엮고 통나무를 정방형으로 쌓아올려 3칸 방을 만들고
통나무 사이를 진흙으로 메운 집. 울타리를 집에 바짝 붙여서 찬바람을 막고 고로쇠
나무나 솔송나무로 기와를 얹었는데 매우 튼튼하다"
경북도민속자료제57호로 지정된 것도 자랑이던 집이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57호로 격상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여기, 나리1길71-316, 외1필지의 '투막집' 은
"울릉도 개척당시(1883년)에 있던 울릉도 재래의 집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서 1945
년대에 건축한 것. 4칸 일자집으로 지붕을 새로 이었으며 집 주위를 새로 엮은 우데기를
둘러쳤다. 큰방과 머릿방은 귀틀로 되었고 정지를 사이에 두고 마구간도 귀틀로 설치했다.
일부 벽에는 통나무 사이에 흙을 채우지 않아 틈새로 들여다 보기 좋고 통풍도 잘 되게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정지는 바닥을 낮게 하여 부뚜막을 설치하고 내굴로 구들을 놓았다."
(문화재청의 설명이며 본래 3칸집이었는데 1칸을 증축하여 4칸이 되었단다)
서북쪽에서 날카로운 송곳봉이 지근으로 다가오는 투막집 이후에 나리분지로 가는
숲길은 온종일 걷고 또 걸어도 물리지 않을 길이다.
나리에는 중요민속자료제256호 '너와집'도 있다.
울릉도 개척당시(1882)에 있던 울릉도 재래의 집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너와집으로
1940년대에 건축한 것이란다.
그러나 울릉도만의 투막집과 달리 얇은 돌조각이나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너와집은
울릉도 외에도 전국적으로 산재했던 집이다.
지금도 삼림이 울창한 산간지대나 옛 화전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집이기 때문일까.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외륜산으로 둘러싸인 나리분지가 신비로운 자연이다
울릉도는 우산국 때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나 이조 초기(3대 태종 때) 부터 단행된
공도정책으로 수백년 동안 비어있던 섬이다.
여기 나리동(羅里洞)은 개척령에 따라 개척민들이 이주해 오기 전, 공도정책 때보다
오랜 옛날부터 살아온 토착민들이 산야에 자생중인 많은 섬말나리 뿌리를 캐어먹고
연명했다고 하여 나릿골(谷)이라 불리게 되었단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인 나리.
해발984m(987m?) 성인봉을 중심으로 말잔등(967.8m), 나리령(798m) 등의 준봉과
준령이 북동 방향으로 뻗어 있다.
북서쪽으로는 미륵산(900.8m),형제봉(712.5m),송곳산,알봉 등 외륜산(外輪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인봉이 그 최고봉이다.
화산지대를 방문할 때마다 무수히 반복해 접하지만 늘 생소한 것이 지질전문용어다.
그래서 무지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본데 유식할 필요 있는가.
좁은 울릉섬에 이렇게 너른 분지가 화산 폭발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만 알면 되지.
면적 1.5~2.0평방km, 동서길이 약 1.5km, 남북길이 약2km인 울릉도 유일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일 뿐.
"오대령(五大嶺)을 넘고 홍문가(紅門街, 홍문동)라는 고개를 넘어 들어가니 여기가
울릉도의 중심지인 나리동이라. 지형을 둘러보니 남북으로 활짝 열려 있고 수목이
하늘을 가려 바라보아도 끝이 없고 평탄하다. 길이가 십리가 넘고 너비는 구리가량
...둘레는 근 사십리인데 여러 봉우리들이 첩첩이 둘러 있어 병풍같다. 이는 완연히
하늘이 만들어 낸 성곽 같다."(이규원의 일기)
유감인 것은 울릉도에서 경사가 가장 완만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다양한 식물자원이
서식하고 있는데도 논농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화구원저(火口原低)가 화산재로 덮여 있어 보수력(保水力)이 약하기 때문에 오로지
밭농사만 가능하다는 것.
울릉8경의 하나씩인 나리금수(錦繡)와 알봉홍엽(卵峰紅葉).
나리와 알봉 지역의 빼어난 단풍을 의미하는데 5월 단풍을 기대할 수 있는가.
논농사는 안되어도 밭이 많아 살기 좋은 곳으로 인구가 집중되던 개척 시기의 나리.
나리라고 인구의 격감현상에서 예외일 수 있는가.
산업사회로의 전이로 인한 인구 이탈인데 밭농사에 개척시대의 매력이 있는가.
명이의 인기를 반영하듯 너른 밭 대부분이 명이로 덮여있고 잔류 주민들의 직업도
밭농사에서 몰려오는 뭍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관광업으로 바뀌어 가고 있단다.
민박집과 식당 등.
성인봉이 그랬듯이 나리분지도 어제의 기상악화의 영향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나.
관광버스는 아예 오지 않고 천부~나리 지방버스에서도 내리는 외지인이 없다.
용출소를 거쳐 송곳봉이 있는 추산리 길과 천부 길 중 후자를 택했다.
상당히 지친 몸이기 때문에 용출수의 매력보다 만일의 경우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서.
완만하게 오르는 꼬부랑 차로를 따라 고개에 올라 뒤돌아본 나리분지는 고요한 산
마을이라기는 넓고 평야라기는 거대한 외륜산이 걸리는 기묘한 자연현상이다.
(알봉분지에서 달랑달랑하던 배터리의 수명이 나리분지에서 완전히 갔다. 디카에
담을 일도 없어 무료한 걸음이었다)
대원사에서 오르는 시멘트 오름만은 못해도 꽤 심한 내리막길이 홍살문을 지난다.
난데 없는 홍살문인 사연이 있단다.
개척당시(1882년), 이 마을 가운데에 붉은 문이 있어서 마을이름이 홍문동이었는데
그 때를 리셋(reset)하느라 홍살문을 세웠다는 것.
왜 홍문(紅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하는 궁전, 관청, 능, 묘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이어야 했는가.
악귀를 내쫓는 풍수적 기능을 하는 문으로 알려진 대로 악귀의 침입을 막아 마을을
보호하겠다는 뜻이었을까.
홍살문을 세웠지만 마을은 보호되지 않아 폐동 직전단계에 있다.
이규원의 족적을 역으로 걸으면 홍문가를 지나 다섯 재를 넘는다.
재란 다분히 넘는 당사자의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 높낮이와 난이도가 평가된다.
하나의 고개도 싱싱한 오전과 지친 오후 다르고 건강할 때와 병약할 때 다르다.
이규원은 오대령이라는 표현으로 5번을 힘겹게 오르내렸음을 말했지만 130여년이
가는 동안에 많히 완만해졌는가 성인봉을 넘어온 늙은이인데도 별로 였다.
천부 앞바다가 열리고 송곳봉까지 눈에 잡히고 오래지 않아 어제 아침에 소나기를
피하느라 한참 머물렀던 천부항에 도착했다.
어제는 날씨 때문에 중단된 무인등대 설치공사려니......무심코 지나쳤는데 100여m
해상인도교 끝에 원통형 구조물 공사가 진행중인 것이 목도되었다.
최근에 울릉도를 다녀온 분에 의하면 7월 1일 개방된 해중전망대란다.
바다 속에 들어가서 신비로운 바다의 할발한 생태를 관찰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제주도의 잠수함 바다체험이 이동형이라면 울릉도는 고정형이라 할까.
도동 뭐무꼬의 Mrs.박
버스편으로 돌아온 도동에서 목욕탕으로 갔다.
아무리 둔하고 참을성이 많다 해도 어제 거의 종일 비에 젖은 몸인데도 어제는 목욕
탕의 마감시간에 걸려 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때는 24시간 찜질방도 운영했다는 도동의 목욕탕이 초저녁(8시?)에 마감한다면
경기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에 나왔을 때 평소에도 알레르기 현상이 있는 에어컨 바람이
더욱 짜증스러웠고 돌연 오한을 느끼게 했다.
영업 종료시간이 된 듯해서 종업원의 양해를 구한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탈의실의
의자에 누워 오한이 진정되기를 기가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단골식당에서.
성인봉에 오른다고 떠난 늙은이가 어두워진지 꽤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데 정상적인
인정이라면 걱정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같은 마음씀에 감동적으로 고마워하는 것은 세태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뜻한다.
식당의 Mrs.박은 오후에 귀가한 친구의 당부가 생각나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는 것.
정녕,그 헬기가 나 때문에 뜬 것 아닌지 하고.(산나물채취자의 사고때문이었다는데)
걱정 끼쳐서 되레 미안한 마음에 곧바로 식당으로 갔으나 몸은 나쁜 상태대로 였다.
낮 동안의 일들을 서로 이야기 나누다 주인 부부는 퇴근(?)하고 홀로 남은 Mrs.박은
"식사를 도저히 못하실 것 같아서"라며 나를 위해 미음을 끓였다.
그녀의 짐작대로 식사할 몸이 아닌 것이 사실이지만 늙은이가 거듭 감동먹은 것은
그녀의 지극한 마음씀이다.
그리고 이 밤에는 그녀의 권고대로 민박집에서 자기로 했다.
연락받은 민박집(도동 호박민박) 여인이 왔다.
식당의 간곡한 당부가 있어서인지 방 온도와 잠자리 등 각별하게 살펴주는 민박집.
이 여인이 자기 집에 묵는 모든 이에게 이처럼 최선을 다하는지는 내 알 수 없으나
울릉도민 모두가 그러면 울릉도야 말로 1등 관광지가 될 것이 분명한데.
내가 며칠간 상대한 울릉도민은 단골식당과 명이빵집, 관음도 여직원과 이 집 여인
인데 하나같이 호의적이다.
무리하게 강행하면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을 수도 있는데 밤 사이에 진정됨에 따라
귀환 일정을 고민하게 되었다.
예약된 선박은 11일(일) 오전 9시 30분 사동항~묵호항 씨플라워호 여객선이다.
그러나 믿지 못할 것이 울릉도의 기상이며 결항이 잦은 것은 다 아는 사실.
들어올 때는 맘대로지만 나갈 때는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울릉도 여행.
들어갈 때도 맘대로가 아니었다.
내 첫 예약일인 5월 5일 결항하고 다음날 연기를 거듭한 끝에 떠났으니까.
6. 7일 운항했지만 8일 또 결항했다.
9일은 이미 괜찮았고 10일도 기상이 좋을 것이나 11일 또 악천이라는 예보니까.
잘 나가던 4박 5일의 울릉도 여행은 마지막 순간에 구겨지고 말았다.
내가 목적한 울릉도 여정은 3일 3시간에 대충 끝났다.
독도와 죽도가 남았지만 그 곳들은 내 여정에 아예 없는 곳이다.
독도에 가서 우리 땅이라고 외칠 깡통, 허수아비 애국심이 내게는 없다는 뜻이다.
기상이 괜찮아 앞바다까지 가도 섬에 한발도 내디디지 못하기 일쑤라는 독도.
어쭙잖은 애국심을 자극해 주머니 불리는 것은 선사(船社)일 뿐 그 앞에 자꾸 가면
일본의 기가 죽는다던가.
박정희도, 노무현도 계륵으로 취급했다는 독도지만 이미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데
무슨 선박 시위를 하겠다는 건지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선사 배불리지 말고 승선비 1%만 기부해라.
그 돈으로 독도경비대를 격려하면 그들의 사기가 충천할 것이다.
내가 타는 배는 육지와 울릉도 간의 2회가 전부다.
그러므로 죽도도 내 여정에 없다.
남은 곳이 있다면 봉래폭포.
그러나 자연을 막고 돈받는 김선달은 거부한다고 이미 언급하였거니와(관음도에서)
봉래폭포 정도의 자연은 눈이 피곤하도록 보아왔는데 또?
결론이 자명해졌다.
11일 귀환을 하루 당기는 것.
기상 악화로 묶인다 해서 내게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약수공원에 잠자리터가 있고 식사도 1일 1매식일 뿐이으로 약간 지루한 것 외에는.
다만, 순연(順延)되는 것이 아니므로 귀환 배편 때문에 서로 옥신각신 하게 되거나
항의 소동이 나는 등 소란한 마당에 서게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국내.외를 말론하고 작은 불편도 참지 못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소란 피우는 사람은
언제나 한국인이다.
여행에서 기다림을 미학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그의 여행은 대부분 불행하다.
육상과 하늘과 바다의 각종 운송기의 안전한 운행이 지상목표라면 몇시간의 지연은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침 일찍 도동항으로 갔다.
'묵호행 울릉 출항시간 13시', '09시부터 발권' 안내판을 믿고 1시간여를 기다렸다.
9시가 되어 옆의 타지방 승선권은 발권 중인데도 닫힌 문이 열리지 않는 매표소.
늙은이가 홀로 창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귀띔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선박이 수리 중이기 때문에 운항이 중지되었고 사동항에서 출항한다는데도 안내글
한 줄 없는 터미널 매표소.
사동항(13시30)에서 묵호항(16시30분), 뭍으로 귀환은 했으나 잘 나가던 4박 5일의
울릉도 여행은 마지막 순간에 구겨지고 말았다.
울릉도의 관문이 이래서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