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근대시近代詩와 그 발생에 대해
한국 근대시近代詩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는 보다 먼 근원根源에서부터 한국 시문학사의 중요한 족적을 되돌아보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시의 기원에는 고대의 가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문자 기록의 효시로서 남겨져 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은 사언사구四言四句의 한역가漢譯歌*다(본고에는 漢詩*).
公無渡河 공무도하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공경도하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墮河而死 타하이사 물에 빠져 죽었으니 當奈公何 당내공하 장차 임을 어이할꼬
강을 건너지 마시라고 했는데도 당신은 이미 강을 건너셨군요 강물에 빠져 저 세상 분이 되고 마셨으니 제 마음을 어떻게 전해 드려야하는지요. -〈홍윤기 의역〉
이 〈공무도하가〉는 지금부터 2천 수백 년 이전의 것이라고 하는 전승傳承의 시대인 고대 조선(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시대 이전의 옛날)의 ‘백수광부白首水狂夫’의 아내라는 여성이 읊은 가요歌謠다.
그녀는 남편이 새벽에 강에 빠져 죽은 것을 보고 슬픔에 잠겨 스스로 〈공무도하가〉를 읊으며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은 백발白髮의 광인狂人이었다. 이 광경을 강변에서 목도한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자기의 처인 여옥麗玉에게 전후 사정을 상세히 알렸다. 그러자 여옥도 슬퍼하며 비파琵琶를 닮은 고대 조선 악기인 공후[百濟琴]를 타면서 〈공무도하가〉를 읊었다고 한다. 여옥이 공후로 작곡한 때문에 그 가요를 〈공후인箜篌引〉이라고 이름 붙여졌으며, 이웃에 살던 여용麗容이라는 여성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가요는 그후 곽리자고의 처 여옥 작곡의 〈공후인〉이라 하여 중국 진대晉代의 《고금주古今注》(崔豹編注)에 실려 있다.
〈공무도하가〉의 뒤를 이은 시가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瑠璃王(B.C 19∼A.D18)이 만든 〈황조가黃鳥歌〉 즉 꾀꼬리의 노래이다. 꾀꼬리의 노래[鶯歌]는 유리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창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약 2천년 전의 노래다.
유리왕에게는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라는 두 왕비가 있었다. 화희는 고구려 여성인데 반해 치희는 한漢 나라 여인이었다. 왕이 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에 두 왕비는 서로 심하게 다투어 치희는 그만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유리왕은 급히 치희의 뒤를 쫓아갔으나 그녀를 되돌려 올 수는 없었다. 왕은 되돌아오는 길에 숲속에서 암수의 꾀꼬리 황조黃鳥가 즐겁게 퍼득이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黃鳥歌〉
翩翩黃鳥 雌雄依相 念我之獨 誰其與歸*
퍼드득 퍼드득 날갯짓하는 황조는 암수 서로 즐겁게 노니는데 홀로 된 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가리오*. -〈홍윤기 의역〉
〈황조가〉는 김부식(A.D1075∼1151)의 《삼국사기》〈고구려본기〉(유리왕 3년)에 실려 있다. (*황조가의 마지막 구절 誰其與歸[수기여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가리오’는 우리말 순서 그대로 한자를 기록, 읊었다. 즉 ‘황조가’는 ‘향가’임을 극명하게 드러내놓고 있다.〈한강 주석〉)
더구나, 한국 고대의 대표적 시가에는 무요舞謠로서 이름난 〈구지가龜旨歌〉가 있다. 이것도 일연(A.D1206∼1289)의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다.
구지가는 〈영신군가迎神君歌〉, 〈구하가龜何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 〈가락국가〉라고도 하며 집단 무요인 것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유리왕 19년(A.D 42)에 집단적으로 여럿이서 춤추며 노래 불려지던 것이다. 구지가는 새로운 나라 건설에 임해, 왕의 탄생을 기원하는 이른바 주술적인 노래로 여겨진다.
〈龜旨歌〉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거북이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 보려무나 만약 내밀지 않는다면 구워서 먹어 버릴 거야. -〈홍윤기 의역〉
이 노래는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에 기록된 가락국 건국 신화에 담긴 무요다. 가락국은 신라 남부 지대와 해안지대에서 서기 42년에 김수로를 개국왕으로 건국된 나라였다.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 건국 신화를 전해주는 역사서인데, 여기에 보면 김수로왕은 구지봉 산 정상에서 구촌九村의 촌장들에 의해 찾아낸 상자 속의 황금의 알에서 뒷날 탄생하게 된다. 구촌의 촌장들이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을 오른 것은 하늘로부터 신의 부름에서였다. 하늘의 소리는 “구지봉 정상에서 번쩍이는 땅속을 파 보아라”는 것이었다. “당신네들은 지금 그 땅 속을 파 보시오. 그리고 거북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시오” 거기서 구촌의 촌장들과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은 〈구지가〉를 함께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 고대 시가로서 주목되는 것은 향가鄕歌라는 중요한 존재다. 향가는 7세기 통일신라 문무왕(A.D 662∼680재위) 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 중기까지 계속된 한국 상대上代 문학의 정수로서 한국 시문학사 상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향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서동요薯童謠〉다.
〈서동요〉는 서기 6세기 신라 제26대 진평왕(A.D579∼599재위) 시대에 백제의 ‘서동薯童’이라는 행상 소년이 지었다고 한다. 서동은 후일 백제 제30대 무왕(A.D미상∼641재위)이 되는 흥미진진한 인물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서동의 아내가 되는데, 이 향가는 선화공주가 미천한 행상 소년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지 전해주고 있다. 이 노래는 한시漢詩가 아니며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차용한 향찰鄕札이라는 표기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본의 ‘만엽가명萬葉假名’(만요우카나/《만엽집萬葉集》)도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고 있어 매우 흥미 있는 점이다.
〈薯童謠〉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을 가서 서동방에서 밤이면 품에 안겼다 간다. -〈홍윤기 의역〉
이런 기괴한 동요가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불려졌다. 공주에 대한 실로 놀라운 이 추문은 대뜸 성내에 퍼져 나갔다. 이 소문은 금세 진평왕에게 전해졌고, 격노한 왕은 선화공주를 왕실에서 쫓아냈으며 공주는 유배의 몸이 되었다. 결국 공주는 성을 빠져나와 방황하게 되고 산길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서동이 공주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서동은 자기의 뜻대로 아름다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가 결혼했다.
서동은 선화공주가 세상에 제일가는 미모의 규수라는 소문을 듣고 백제에서 일부러 신라까지 건너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성내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한 자루 가득 등에 지고 온 맛있는 참마[薯]를 성내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의도적으로 자신이 지어낸 노래인 ‘서동요’를 가르쳤다. 이 노래는 즉시 성내에 유행되기 시작했다. 본래 서동은 백제 제29대 법왕(A.D599∼600재위)의 왕자 ‘장章’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본인은 자신의 신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서동은 왕궁에 있던 지체 높은 궁녀 출신의 어머니와 함께 위기를 피하여 왕궁을 멀리 떠나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에서 살았다. 서동은 산 속에서 참마를 캐어 그것을 파는 소년으로서 성장했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권2〈무왕조〉에 나와 있다. ‘서동요’는 4구체四句體의 향가이다. 향가는 4구체를 시작으로 8구체, 10구체가 있으며 오늘날 전해져 오는 것은 도합 25수(편)이다.
〈서동요〉에 이은 향가로 〈혜성가彗星歌〉가 있다. 이것은 진평왕 시대의 승려 융천融天이 쓴 10구체이며, 선덕여왕(A.D632∼647재위) 시대의 ‘양지良志’의 향가는 4구체다. 향가 25수 대부분의 노래는 《삼국유사》에 전해져 있으며, 그 후의 작품은 《균여전均如傳》,〈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에 실려 있다. 특히 주목할 일은 현재 남아 있는 25수의 향가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노래이기에 신라의 ‘향찰’, 바꿔 말하면 ‘이두’로 표기되는 노래로서 이 표기 자체는 향가의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다수의 향가는 즉흥적으로 노래 불려진 것인데 그것이 우연히 당시의 표기법에 의해 후대에 남겨진 것이다.
본래 ‘이두[吏讀]’는 신라, 가야, 고구려, 백제)부터 지명과 인명 등을 표기하기 위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삼국시대의 언어로 표시한 한자 차용어借用語다. ‘이두’를 정의하는 이론은 각기 다르나 좁은 의미에 의하면 ‘이두’는 ‘향찰’과 ‘구결口訣’ 등으로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향가’는 신라의 삼국통일 시기부터 고려 중기까지의 시문학 형태를 아는 데 중요한 존재다. 한국 학자뿐 아니라 일본의 언어학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1882∼1944)는 향가 등 신라시대의 언어를 연구해서 《鄕歌及び吏讀の硏究》(1929)[《향가 및 이두의 연구》]라는 저서를 지었다. 신라의 향가에 이어 고려의 가요가 등장한다. 그리고 고려의 가요를 잇는 것은 조선왕조 시대의 시조時調며 가사歌辭 등의 시문학이다.
고려(A.D918∼1392) 시대의 대표적인 가요로는 〈동동動動〉을 시작으로 〈청산별곡〉, 〈서경별곡〉, 〈사모곡〉, 〈가시리〉, 〈쌍화점〉, 〈만춘전〉, 〈한림별곡〉 등을 들 수 있다. 고려가요는 조선왕조의 제4대 왕 세종世宗(A.D1419∼1450재위)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이후에 한글 문자를 사용해서 문헌에 수록해 둔 가요다. 고려가요는 입으로 외워 노래 불려진 형식으로 구전되어왔기에 대부분은 작자미상이다. 민요처럼 백성과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 불려지던 것이기에 관官의 제약을 벗어난 표현의 자유, 영탄의 자유가 인간 내부로부터 묘사되어졌다. 이들 시적 표현이야말로 이로부터 약 천년 후에 탄생하는 한국 근대시의 시사적 원천으로 간주해도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고려가요는 오로지 민중적인 가요로만 단정할 수 없는 면도 있다. 예를 들면 〈한림별곡〉의 경우, 그 시적 발상의 원천이 다른 가요와는 전연 다른 것이다. 〈한림별곡〉 류의 가요는 오로지 유학자儒學者들의 한문투의 시다. 물론 그것은 전부 한시로만 된 것이 아니고 한글도 함께 섞여진 가요이나, 내용은 당시의 양반계급의 화려한 풍류 생활이며 퇴폐적인 향락 등 반시대적反時代的 생활상도 묘사되어 있다.
조선왕조(1392∼1910) 시대에는 한시漢詩의 시작은 양반이라는 지배계급 사이에서 지어져 유행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려 후기 이후 고등관리의 임용 선발시험(과거)의 필수과목이 한시를 짓는 데 기인했기 때문이다. ‘과거科擧’의 응시 자격은 오로지 양반계급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시의 창작이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시의 창작 목적이 문학을 위한 예술성 존중보다는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의 등용문에 무게가 더해졌음도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과거에는 문관을 위한 문과 시험이 있었고 무관은 무과 시험이 있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시대는 문신들이 무신보다 사회적으로 단연 우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한시가 융성한 반면 고려 말기로부터 조선조에 걸쳐서 나타난 새로운 시형식인 ‘시조時調’라는 시문학의 등장이다. 시조는 한시와는 전연 다른 율격律格의 한국어 정형시定型詩다. 시조의 형식은 평시조, 연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으로 나뉘어진다. 대부분의 시조 작품은 작자가 있으며, 그 작자는 대체적으로 신분이 양반계급의 문사들이다. 그밖에 왕이나 왕족들, 무사나 여류시인 또는 기녀 같은 미천한 여성 그리고 작자미상의 작품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조문학의 전통은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늘날 한국 문단에도 많은 시조시인들이 현대시조를 짓고 있다.
2. 한국의 근대시와 두 사람의 소년 시인 |
| 한국의 근대시(자유시)는 두 사람의 소년 시인이 일본에 유학한 그 후에 발생된다.
한국의 신문학 개화기에 최초로 발표된 소위 ‘신체시新體詩’라고 불려진 시는 최남선崔南善(1890.3.8∼1957.10.10)의 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다. 이 시는 1908년 《소년少年》(1908.11월, 창간호)지에 실렸다. 참고사항으로, 소년지의 발행인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시인 최남선 본인이었다. |
최남선이 일본에 처음 유학한 것은 1904년 4월의 일이었다. 그는 당시 14세의 홍안의 소년으로 ‘토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한다. 최남선 소년은 한국韓國 황실皇室 ‘관비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유학생의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것이다. 최남선 소년과 함께 일본에 간 황실 유학생들은 모두 최남선보다 나이 많은 20대의 청년들이었기에 동창생이 되는 최남선 소년과의 접촉은 그리 매끄럽지 못한 것 같았다. 최남선 소년은 입학한 후 겨우 1개월 지나자 자퇴하여 귀국하게 된다. 최남선은 그로부터 만 2년 후인 1906년 16살이 되는 해 봄에 다시 유학을 시도해 일본에 간다. 그때는 자비로 학비를 마련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지리과에 입학했다. 이때도 유학생활은 순조롭지 못해 3개월 후에는 다시 퇴학하게 된다. 그 후 최남선은 야망에 차서 토쿄에 머물면서 출판사업에 주목한다. 그해 가을 그는 인쇄기 한 대와 참고 서적들을 사가지고 귀국하게 된다. 최남선은 다음 해 서울에서 ‘신문관新文館’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단행본의 출판을 시작한다. 앞에 지적했듯이 그는 1908년 11월에 《소년》이라는 이름의 종합교양잡지를 발행했던 것이다. 그날은 1908년 11월 1일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시인들은 매년 11월 1일을 ‘시의 날’로 정해 한국 근대시의 시작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
‘신체시’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에서다. 1882년(메이지 15년) 8월에 당시 토쿄대학 교수인 이노우에 테쓰지로우[井上哲次郞]와 토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 야타베 료우키치[失田部良吉] 등 세 사람에 의해 간행된 《新體詩抄》[신체시초]에서 ‘신체시’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책의 최초의 부분을 인용해 보면 ‘나늘 일찍부터 신체시를 만들 것을 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손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여 우선 일본과 중국 고금古今의 시가詩歌의 문장을 배우고, 그에 의하여 점차로 신체시를 만들었다…’라고 되어 있다. 소년 시인 최남선의 ‘신체시’라는 표현은 ‘이노우에’ 교수 등의 《신체시초》로부터 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우선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그 당시까지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식의 시였다. 이 새로운 시의 통장에 의해 지금까지의 시조와 창가 등 정형시의 시적 형식이 파괴되고, 파격적인 자유시의 형식이 일어나게 된다. 그때까지의 시작은 정형시의 전통을 지켜, 시의 율격이라고 해서 3·4조, 4.4조 등등의 표현형식을 고집스레 지켜 왔던 것이다. 18세의 소년 시인 최남선의 새로운 시의 시도는 이 신체시라는 자유시의 시문학상의 성공 여부를 묻는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어쨌든 혁신적인 시도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시의 형식적 특징은 1인칭의 자유시인 동시에 산문적 어체語體의 시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이 시는 전부 6부로 나누어진 6연의 시다.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ᄮᅡ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泰山갓흔 놉흔뫼, 딥턔 갓흔 바위ㅅ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 ᄭᅡ디하면서 ᄮᅡ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텨...ㄹ썩, 텨...ㄹ썩, 튜르릉, 콱.
이 시를 읽으면 누구나 파도의 의성어를 많이 표현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 읽어봐도 더없이 신선하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주요한朱耀翰(1900.10.14∼1979.11.17)이라는 시인이 자신의 시 〈불놀이〉가 한국시로서는 최초의 자유시라고 주장하는 일이다. 〈불놀이〉는 동인同人 문예지, 즉 주요한을 대표하는 《창조創造》 창간호(1919년 봄)에 발표된 작품이다. ‘창조’는 당시 “일본의 동경에서 발행되었다”고 주요한은 《조선문단朝鮮文壇》 창간호(1924년 10월, 63쪽)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놀이〉 이전인 1918년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報’에 황석우黃錫禹며 김억金億이 쓴 시도 자유시에 속한다. 여기서, 〈불놀이〉 제1연 최초의 부분을 읽어보자.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주요한이 창조 창간호에 “〈불놀이〉는 자유시의 최초”라고 거론한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그 형식도 역시 매우 격을 파괴한 자유시의 형식이었다. 자유시라고 말하는 형식은 당시 주로 프랑스 상징파의 주장이며, 고래로 전해 오던 형식을 파기해 작자의 자연적인 리듬에 의해 쓰기 시작한 것이다”
주요한도 소년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시인이다. 그는 일찍이 1912년인 겨우 12살 때 일본에 유학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토쿄 조선인 유학생들을 위한 기독교 선교사’로서 토쿄에 머물고 있었다. 주요한 소년은 토쿄의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를 거쳐 토쿄 제일고등학교에서 고교시절을 보낸다. 그는 8년간의 일본 유학 시절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메이지학원 시대에는 메이지학원의 학보였던 《백금학보白金學報》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시의 창작에 몰두했다. 이때 주요한 소년은 시인 시마자키 토우손[島崎藤村](1872∼1943) 등 일본 근대시인들과 영국의 바이런 등 서구 시인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후일 주요한은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읽은 시집은 《바이런 시집》(일어版), 《추억[思ぃ 出]》(北原白秋, 키타하라 하쿠의 초기작품), 그리고 일본 메이지 시대의 초기낭만파 시인들인 시마자키 토우손[島崎藤村], 칸바라 아리아케[浦原有明], 쓰치이 반즈이[土井晩翠]의 시선집 등이었다. 4∼5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프랑스 세기말 작가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책을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주로 나가이 카후우[水井荷風]가 번역한 《산호집珊瑚集》, 요사노 텟캉[與謝野鐵幹] 역譯의 《리라꽃 [リラの花)]》, 우에다 빈[上田敏]의 번역시집 《해조음[海潮音》 등이었다. 이 번역시집들 속에 수록되어진 수많은 작풍作風들 중에 특히 나의 모방심을 자극한 것은 폴 포오루(Paul Fort)와 레니에(Henri de Rénier)였다고 생각된다”(《自由文學》(창간호,1956.6.1.) 서울 자유문학사 간행, 〈《창조》시대의 문단〉에서 인용)
이상과 같이 주요한은 자신의 젊은 청년시대의 시가 일본어로 번역된 서구시의 영향을 받게 된 것 등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당시 ‘시마자키 토우손’의 근대시와 《해조음》 등 일본의 서구 번역시집이 한국의 젊은 일본 유학생들에게 많든 적든 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주요한이 최초로 창작시를 발표한 것은 그가 18세 때였다. 주요한 소년은 당시 《학우學友》(1919년 1월 발행, 창간호, 일본 토쿄, 학우사 간행)에 5편의 시를 동시에 발표한다. 그 다섯 편의 시는 전체 제목이 〈애튜드(étude)〉로 그 밑에 각기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여져 있다. 즉 〈시내[小川]〉」, 〈봄[春]〉, 〈눈[雪]〉, 〈이야기[お話]〉 그리고 〈기억記憶〉 다섯 편이다. 이들 시는 낭만적 서정시인 동시에 자유시인 것이다.
문제는 앞에서 제시한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11.1)가 말 그대로 자유시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그 논의는 한국의 시문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계속되는 일로서 결론을 서두르는 것은 밀어두기로 하자. 어쨌든 여기서 하나 말해두는 것은 자유시의 구조적 문제는 차치하고 ‘최남선’, ‘주요한’ 두 시인은, 묘하게도 홍안의 소년 시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다감했던 청춘시대를 보냈다는 점이 주목된다.
3. 한국 근대시와 서구시 등과의 관련 양상
한국 근대시 발생과 그 발전 과정에 있어 주목되는 점은, 서구시의 영향이 현저하다는 것이다. 논論을 전개하기에 앞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주간지 ‘태서泰西문예신보’(1918년 9월 26일 간행, 발행인 윤치호, 주간 겸 편집인 장두철)에 관한 것이다.
이 주간지는 시와 소설 등의 문예전문지로 그 특색을 이루고 있다. ‘태서문예신보’는 1919년 2월 17일까지 제16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 주간지를 통해서 시인 안서岸曙 김억金億(1895∼미상)은 많은 프랑스 시,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번역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베를레느를 비롯하여 랭보, 보들레르 등 프랑스 시의 번역은 물론, 프랑스 시단의 상황, 프랑스 상징주의의 이론 등을 광범위하게 소개했다. 또한 ‘태서문예신보’를 통해 그와는 달리 ‘해몽海夢’(?)은 10여편의 H. W. 롱펠로우(Henry W. Longfellow, 1807~1882)의 시를 번역한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김억, 해몽 이외에도 서구시를 번역해서 발표한 시인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서구시의 소개는 한국 근대시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근대시 또는 자유시의 발생은 본래 서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1920년 전후의 한국시에 직간접적으로 서구시의 영향이 보였다.
일본의 경우는 모리 오우가이[森驅外](1862∼1922) 등의 번역시집 《오모카게[於母影]》(1889)가 최초의 서구시의 번역시집이다. 당시 이 번역시집은 정통적인 아어雅語(시가와 옛글에 쓰인 세련된 일본어)를 사용하여 청신淸新하며 우수적憂愁的인 서구시의 향기를 전하여 일본 근대시의 원류가 되었다. 이 《오모카게》에는 영국 시인 바이런, 독일의 괴테, 하이네, 레나우 등의 시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여주인공 오필리아의 노래도 번역되어 있다. 어쨌든 일본에 있어 특히 주목할 서구시의 번역시집은 우에다 빈[上田 敏](1874∼1916)의 《해조음海潮音》(1905)이다. 《해조음》은 아속雅俗(아어와 속어)을 병용한 청신, 유려한 번역 솜씨로 서구시의 일본 이식에 성공했으며, 일본에 프랑스 상징시象徵詩를 활발히 소개하여 일본에서 상징시를 부흥시킨 유력한 전환기를 가져온 것이다. ‘우에다 빈’의 《해조음》 간행을 기점으로 해서 일본 근대시는 상징시며 국어 시詩 운동의 새로운 시풍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상징시 운동은 《신체시초新體詩抄》의 단계를 넘어 낭만주의를 그 주류로 하는 ‘시마자키 토우손’ 필두의 일본 근대시의 골격을 확고하게 가다듬게 되었다.
안서岸曙 김억金億은 ‘태서문예신보’ 뿐만 아니라 1920년 전후의 여러 문예지와 시동인지에 수많은 번역시를 발표하여, 한국 시단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중요한 문예지와 시동인지 등을 발행 연도 순으로 보면 《창조創造》(1919)를 시작으로 《서광曙光》(1919), 《폐허廢墟》(1920), 《개벽開闢》(1920), 《장미촌薔薇村》(1921), 《백조白潮》(1922), 《금성金星》(1923), 《조선문단朝鮮文壇》(1924), 《영대靈臺》(1924) 등이 있다. 안서 김억은 이들 잡지에 번역시를 발표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안서가 번역시를 빈번하게 발표한 문예지는 《창조》, 《폐허》, 《개벽》 등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안서의 번역시가 정리 정돈 수록되어 《오뇌의 무도[懊惱の舞蹈]》(1921년 3월 초판, 1923년 8월 재판)가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으로 출판된 일이다. 《오뇌의 무도》에 대해 당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오뇌의 무도》가 발행된 이후 새로 등장하는 청년들의 시풍은 오뇌의 무도화(化)하는 데 이르르고 있다. 그것이 단지 단순한 표현법에만 의존한 것이 아닌 사상과 정신에까지 도달하는 놀라운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이광수 전집》제10권, 415쪽)
이상을 참고로 해서 보더라도 안서 김억의 프랑스 시 등의 번역이 당시의 한국 근대시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안서 김억은 한국 최초의 서구시 번역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것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최초의 근대시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6)도 출판했다.
여기서 안서의 학력을 잠시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는 고향의 오산중학을 졸업한 즉시 일본에 유학, 케이오우[慶應義塾]대학 문과에 입학한다. 안서 김억은 케이오우대학 재학 중인 1914년 《학지광學之光》 8월호에 그의 시 〈이별〉을 발표한다. 《학지광學之光》은 당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 학생들의 ‘일본유학학생회’의 기관지였다. 《학지광學之光》은 1914년 4월에 창간(편집겸 발행인 崔八鏞)되어 연 2회 발행했던 것이다. 김억은 그의 최초의 창작시 〈이별〉을 《학지광學之光》 창간호에 발표한 후 1915년 5월호에는 또다시 〈야반夜半〉 외 〈수종數種〉이라는 제목으로 몇 편의 시를 발표한다. 안서 김억의 초기 시는 일본 케이오우대학 재학 중 《학지광》을 통해 발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케이오우대학을 중퇴한 후 고향에 돌아가 모교인 ‘오산중학五山中學’에서 교편을 잡는다. 여기서 부언해 두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김억이 고향의 오산중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1902.8.6∼1934.12.24)이 시대를 초월해 주목을 받는 시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오산중학에서 김억의 가르침을 받은 김정식은 안서 김억 선생의 지도하에서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김억은 제자 김정식의 시를 1920년 3월, 《창조》지誌 5월호에 발표해 준다.
당시 김소월의 이름으로 발표된 시는 〈낭인浪人의 봄〉, 〈야의 우적,夜의 雨滴〉 등 5편이었다. 당시 그는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었는데, 이 다섯 편의 시 발표로 인해 김소월은 18세 때에 신인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김소월은 1923년에 일본으로 유학차 건너갔었다. 그러나 김소월은 1924년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할아버지 소유의 광산에서 잠시 사업을 거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 창작은 배재고보 시절부터 32살에 음독 자살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 근대시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김소월이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 되었다는 일이다. 그가 남긴 작품은 전부 합하면 154편에 이르는데 대부분의 시는 20세 전후 때에 쓰여진 것이다. 주옥같은 그의 시 중에서도 〈진달래꽃〉은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는 20세 때 《개벽》(1921.01) 제19호에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진달내ᄭᅩᆺ〉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ᄯᅢ에는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 藥山 진달내ᄭᅩᆺ 아름ᄯᅡ다 가실길에 ᄲᅮ리우리다
가시는 거름거름 노힌 그 ᄭᅩᆺ츨 삽분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ᄯᅢ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니우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원문/*편집삽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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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시에는 서구시와 일본시 등의 영향이 얼마간 엿보인다. 이는 그의 은사였던 안서 김억이 활발하게 프랑스 시집을 번역해 ‘태서문예신보’ 등 각지에 발표하고 있었던 시기에 스승 김억으로부터 시 창작 지도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인 황석우黃錫禹(1895∼1960)는 한국 근대시문학상 주목되는 대표적 시인 중 한 사람이다. 문예주간지 ‘태서문예신보’를 통해 번역시와 창작시를 여러 편 발표했다. | |
그는 태서문예신보에 발표한 창작시 6편 중 제16호(1919년 2월 17일 발행)에 ‘상아탑象牙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봄〉 등 4편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들은 한국 근대시 초기의 시단 형성에 크게 공헌한 작품이라는 것이 잘 어울리는 표현인 셈이다.
그는 1919년에 유학 중이던 와세다대학 정경학과를 중퇴하고 귀국한 후 시동인지 《폐허》(1920년 창간)의 동인으로서 시인 김억, 오상순吳相淳(1894.8.9∼1963.6.3) 등과 시단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황석우는 동인지 《폐허》에 이어 《조선시단》(1920), 《장미촌》(1921) 등의 동인지를 스스로 창간해서 정력적으로 활동한 모습은 참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황석우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보들레르의 시에는 퇴폐적 경향이 녹아 있었다.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1894.8.9.∼1963.6.3)’은 한국 근대시 초기의 시단 성립에 크게 공헌한 대표적인 시인으로써 황석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시인이다. 아호를 공초空超라고 하는 오상순은 1918년 일본 도우시샤[同志社]대학 종교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김억, 황석우와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여기서 또 한 사람, 이 시대 한국 근대시의 발전에 기여한 잊기 어려운 중요한 시인을 간략하게 얘기해 두고자 한다. 그는 노자영盧子泳(1901∼1940)이다. 그는 토우쿄우의 니혼대학(日本大學) 문과를 중퇴한 후 귀국해서 신문기자로서 활동하는 한편 시단에서도 활약한다. 노자영은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일간지 ‘매일신보’의 현상문예작품 모집에 응모한 시 〈월하의 꿈〉이 입선되어 시단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매일신보’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는 등 한국 근대시의 초기시단에 활발한 시창작활동을 보여줬다. 노자영은 《처녀의 화환》(1924, 《내 영혼이 불탈 때》(1928), 《백공작》(1938) 등 3권의 시집이 있다. 그의 시풍詩風은 낭만적 감상주의가 일관되게 심미적이며 감각적인 신선한 이미지가 당시 주목되었다. 그의 시는 다분히 서구의 낭만주의 시 또는 낭만주의적 일본 근대시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상과 같이 1920년 이후의 한국 근대시가 서구시며, 일본 근대시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경우는 메이지 초기부터 서구시의 영향을 받았다. 요시다 세이이치[吉田精一]는 《현대일본문학사》(筑摩書房,1965)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문학사는 메이지유신(1868) 이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 요컨대 유럽의 시민사회 성립의 계기가 되었던 프랑스 혁명에 필적되는 것은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중략)... 메이지 10년 전후까지는 거의 새로운 시대의 문학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으며 에도[江戶] 문학의 계승시대였던 것이다. 11년째 무렵 이후부터 서구 번역 문학이 번성하여 새로운 문학의 서광이 비취기 시작한다. 그래서 제2기 메이지 20년 전후부터는 많은 작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근대문학의 동이 트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쿠니키다 돗포[國木田獨步] (1871∼1908)와 미야자키 야모키치[宮崎八百吉]의 《서정시抒情詩》(1896년간)의 〈독보음獨步吟〉이라는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이 사람도 역시 시를 선망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메이지 시대의 사람으로서, 예컨대 바이런의 시를 읽고, 실러의 시를 읽는 사람으로서, 그 정감이며 상념이 큰 것이나, 그런 것을 마음껏 읊을 만한 시형詩型이 우리 일본에는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어김없이 많다고 믿으며, 이 사람 역시 그중의 한 사람이다”
시인 우에다 빈[上田敏](1874∼1916)의 번역시집 《해조음》(1905)이 일본 근대시의 발전에 영향을 준 일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카와모리 요시죠우[河盛好藏]는 《일본의 시가》(제28권. 번역시집, 中央公論社, 1976)의 해설문에서 다음처럼 논술하고 있다.
“번역시집 《해조음》이 일본 시단에 가져다 준 거대한 광석鑛石에 관해서는 이미 밝혀진 바 있으나, 그 첫째는 과거의 신체시의 시형詩型과 운률에 커다란 혁신을 단행했다는 점이다. 즉 ‘일본의 신체시는 아직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그 시형이 정해져 있지 않다. 7.5 조라고 하던가 5.7조라고 말하는 지금까지의 체재로서는 지금 세상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세밀하고 어김없게 노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우에다 빈[上田敏]은 7.5 율조를 4.3.3.2의 단위로 나누어, 그것을 여러 가지로 구성시켜 새로운 운률을 창출해냈다. 이를테면 베를레느의 시 〈낙엽〉에서는 각 행行을 5음으로 하는 새 스타일을 창출하여 원시原詩의 1행 4음의 율격에다 접근시키려 했다. 〈흔히 꾸는 꿈〉에서는 7.5를 두 개 겹쳐서 원시의 ‘알렉산드리아율격’(12음절)을 일본어로서 재현하려 하고 있다.(중략)... 원시와 번역시를 자세히 대조하여 읽어본다면, 누구나 번역자의 뛰어난 어학력과 이해력 및 감상력鑑賞力에 크게 감동 받을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아름답고도 신선하며 정확한 일본어로 옮겨 놓은 천재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재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시어詩語를 비길 데 없이 풍요하게 거기다 새로운 길을 연 《해조음》의 공적은 불멸할 것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번역시집 《해조음》을 통해 일본 근대시 발전에 공헌한 사람은 ‘우에다 빈’이었다고 한다면 그와 호응되는 일본시의 새로운 면모를 확립시킨 것은 시집 《와카나슈우[若菜集]》(1897)의 시인 시마자키 토우손[島崎藤村](1872~1943)이다. 나카무라 미쓰오[中村光夫]는 《현대일본문학신사》(별권 1, 築摩書房,1959)의 제7절 〈문학계〉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시마자키 토우손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와카나슈우[若菜集]》는 이런 의미로서, 처음으로 메이지 시대라는 근대近代를 숨 쉬고 성장한 청년의 감정이 새로운 형식의 운문에 풍성해진 작품이라고 하여도 좋으며,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이듬해에 《히토쓰바후네[一葉舟]》(1898)와 《나쓰쿠사[夏草]》(1898)를 잇달아 서둘러 간행하여 신체시의 존립을 확립하였고, 1901년에는 《라쿠바이슈우[落梅集]》를 간행하여, 그의 시문집을 완성했다. 그 시집들의 합본合本에서 그는, ‘드디어 새로운 시가詩歌의 때가 왔도다. 그것은 아름다운 동트기와 같으리’라고 시작되는글귀의 유명한 서문을 썼거니와, 이는 그의 청춘의 자서전인 동시에 신체시 승리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는 명문名文이다”(하략).
한국 근대시에 있어서 문학적으로 중요한 시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박종화(1901∼1980), 한용운(1879∼1944), 이상화(1900∼1943), 김동환(1901∼미상), 이장희(1902∼1928), 김상용(1902∼1951), 정지용(1903∼미상), 변영로(1898∼1961), 홍사용(1900∼1947), 김영랑(1903∼1950), 박용철(1904∼1938), 신석정(1907∼1974), 이육사(1904∼1943), 유치환(1908∼1967). 이상(1910∼1937), 노천명(1913∼1957), 모윤숙(1901∼1990), 임화(1908∼1953), 김기림(1908∼미상), 김광균(1913∼1993), 김광섭(1905∼1977), 윤곤강(1911∼1949), 백 석(1912∼1997), 이용악(1914∼미상), 오장환(1916∼미상), 김현승(1913∼1975), 윤동주(1917∼1945), 서정주(1915∼2000), 박두진(1916∼1998), 박목월(1916∼1978), 조지훈(1920∼1968), 이한직(1921∼1976) 등이다. (본고에서는 한국 근대시의 내용만을 다루었기에, 1945년의 종전終戰 이후의 시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구어자유시口語自由詩’를 쓰기 시작한 위에서 밝힌 시인들에게는 그 시적 경향에 일반적인 공통성이 보인다. 그것은 주제主題로서 고독과 비애, 감상感傷, 정경情景, 환상幻想 등을 종종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어김없이 그 시대의 한국 역사의 반영이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는 3·1운동으로 부르는 ‘조선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3·1운동에 의한 민족적인 비통감悲痛感 또는 절망감絶望感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시작품의 저변에 짙게 깔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과 더불어 프랑스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1821∼1867)의 퇴폐적인 경향이 일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도 지적해 두고 싶다. 프랑스어로 일컫는 이른바 데카당티즘(Décadantisme)의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경향은 보들레르 이외에도 ‘포올 베를레느’(1844∼1896), ‘아르튀르 랭보’(1854∼1891) 등의 시에도 나타난다. 한국 근대시상 우선 그들의 데카당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은 《폐허廢墟》(1920, 창간) 동인과 《백조白潮》(1922, 창간) 동인들이다. 《폐허》의 주된 동인은 황석우, 김억, 오상순 등이며, 《백조》의 주된 동인은 홍사용, 박종화, 노자영, 이상화, 이광수 등이었다.
4. 1920년 이후의 시단의 여러 경향
1920년대 이후의 시 창작면에서의 현저한 현상은 3.1운동에 연동하는 일제日帝에 대한 저항시의 등장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7월에 시동인지 《폐허》가 창간된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다. 이 《폐허》 창간호에서 오상순吳相淳은 〈시대고時代苦와 그 희생〉이라는 논설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며,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이다. 이 말이야말로 우리 청년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픈 소리다. 여하간에 나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소름이 끼치는 무서운 소리이나, 이것은 의심할 수도 없으며 부정할 수도 없다”
이 시기에 오상순은 동시대의 비통한 느낌을 계속하여 시로 발표했다. 주된 작품은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제단〉, 〈타는 가슴〉, 〈미로〉, 〈아시아의 마지막의 밤풍경〉 등이며 어느 것이나 그의 대표작이다.
한용운은 3·1운동 당시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독립선언문〉 서명에 참가한 33인 대표 중의 한 사람이며 불교 승려였다. 종교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독립선언’에 직접 참가한 것이다. 그 이래로 한용운은 조국애 넘치는 민족적 저항의지가 담긴 불교적 경향의 시를 계속하여 썼다. 그는 항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1920년에 투옥당하여 3년형을 받았다. 그의 대표시집 《님의 침묵》의 님이란 조국의 상징이며 또한 불타의 상징이다.
한용운에 이은 대표적인 항일 저항시인은 이상화와 이육사 그리고 윤동주 등이다. 이상화는 3.1운동 당시, 그의 고향인 대구에서 한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21년에 시동인지 《백조》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그 이듬해인 1922년에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토쿄의 ‘아테네·프랑세’에 입학하여 프랑스 문학을 배운다. 1923년 ‘칸토우대지진’(토쿄 지방)이 발생한다. 그 재화災禍 중에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무참하게도 일본사람들로부터 학살당하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그 현장의 참상을 목격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시인은 3년 뒤에 월간종합지 《개벽開闢》(1926. 6, 제70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으로 항일 저항시를 쓴 것이었다. 이 시에는 일본 군국주의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울분과 시대적인 고뇌가 괄목할 만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시의 발표로 인하여 《폐허》가 일제로부터 강제적으로 폐간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시인 이상화는 1927년에 독립운동에 연관된 ‘의열단의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한 때 경찰에 구금당했다. 시인은 1934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2년 후에 귀국했고, 그 직후 다시금 경찰에 체포당했으며, 2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영어 과목의 교원으로 근무했으나 1943년에 병사했다.
시인 이육사는 시인인 동시에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21세 때(1925년) 고향인 대구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 해 일본에 건너간 다음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했다. | |
그는 다시금 1926년에 중국에 건너가 ‘베이징[北京]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에 귀국하여 독립운동가‘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하여 투옥당했으며, 3년간의 형을 받았다. 1930년에 출옥한 이육사는 다시금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대학 역사학과 입학했다. 그는 1933년 9월, 중국에서 귀국한 무렵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나 1943년 4월, 4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그동안 모두 17번이나 투옥당했던 옥고獄苦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그의 대표적 시작품은 〈광야〉, 〈절정〉, 〈청포도〉 등이다. 이들 시詩에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애와 조국 독립의 저항 의지가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
| 똑같은 항일 저항시인으로 이름 높은 사람은 윤동주다. 그는 1941년, 23세에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立敎]대학에 입학한다. 릿쿄대학에서 1학기를 마친 다음 쿄토의 도우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영문학 전공)로 전학했다. 1943년 대학의 여름방학 때 귀국하기 직전 윤동주는 체포당했다. 죄명은 사상 불온과 독립운동 및 서구사상 농후였다. 그는 1944년 3월 31일, 쿄토지방재판소 제2형사부에서 치안유지법 제5조에 의한 징역 2년의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
윤동주는 복역 중이던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옥중 병사했다. 그는 경찰에 체포당하기 전까지 시 〈참회록〉과 〈십자가〉, 〈서시〉 등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 작품에는 항일 저항시로서의 민족애와 순국 정신 등이 깊게 묘사되어 있다.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의 밤〉(1925. 3)도 주목할 만한 장시다. 이 서사시는 한국사상 최초의 서사시(전 3부작 72장)이기도 하다. 이 시의 무대가 되는 장소는 조선과 만주의 국경지대인 두만강 유역이며, 그 고장에 사는 조선인들의 망국亡國의 슬픔이 묘사되어 있다. 김동환은 1901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요[東洋]대학 문과에서 공부한 시인이다.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조국이 식민지화된 조선 사람들의 망국의 슬픔은 그 밖에도 김영랑의 장시 〈춘향〉(1940),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1932), 변영로의 시집 《조선의 마음》(1924)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백조》 동인이었던 박종화는 민족애의 시로써 저명한 시인이다. 그는 민족 문화재로서 이름 높은 고려청자를 칭송하는 명시 〈청자부〉, 조선백자를 위한 명시 〈백자부〉, 신라시대 경주 문화재 〈석굴암〉 등의 시를 써서 애국심을 짙게 묘사했다.
또한 김영랑을 비롯하여 박용철, 정지용, 변영로 등 소위 《시문학》(1930.3∼1931.10) 동인지에 대해서도 꼭 밝혀두고 싶다. 한국 근대시는 《시문학》을 통해서 더욱 발전하면서, 과거와 다른 새로운 각도에서 창조적인 언어의 기능을 ‘시어詩語’로서 활성화 시켜 나갔던 일이다.
《시문학》 동인으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시인은 김영랑이었다. 그는 전라도 방언을 시어로 하여 빼어나게 이미지화 시키는 동시에, 신선한 서정미를 음악성과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시문학》동인들이야말로 한국 근대시가 순수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영랑은 17세 때인 1920년 봄에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야마[靑山]학원 중등부에 입학했다. 그 이듬해 봄, 박용철이 아오야마학원 중등부 4학년생으로서 한국으로부터 편입해 온다. 이것이 두 소년 시인이 서로가 처음 만나 친우가 되는 계기였다.
박용철은 김영랑 등과 시동인지 《시문학》을 창간, 주재하게 되었다. 당초 《시문학》 창간의 이념은 ‘민족어民族語 발견과 순수시의 옹호’였다. 박용철은 1931년에 폐간된 《시문학》을 계승시킨 《문예월간文藝月刊》(통권 4호로서 폐간)을 새로이 창간했으며, 다시금 1933년 12월에는 《문학文學》을 창간, 주재했다. 박용철이 주재한 이들 문학지는 ‘시문학 동인’들의 활동무대가 된 것이다.
《시문학》 동인인 변영로는 1933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San Jose)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영문학자였다.
《시문학》 동인인 정지용은 1923년에 일본에 유학하여 쿄토의 도우시샤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수많은 시를 일본어로 써서 발표한 게 주목된다. |
| 그의 시의 대부분은 그 당시 일본의 시지詩誌인 《킨다이 후우케이[近代風景]》)에 발표되었다. 최초의 일본어 시詩는 1926년의 《킨다이 후우케이》(제1권 2호)에 게재된 시 〈카페 프랑스〉다. 그 이후로 정지용은 〈우미[海,うみ]·1〉(《近代風景》제2권1호) 등에 일본어 시를 계속 발표하여, 1928년 2월, 시詩 〈타비[旅]노 아사[朝]〉(《近代風景》제3권 2호)까지 ‘킨다이 후우케이’지誌에 모두 21편을 발표한 것이었다. 그 밖에도 1928년 10월 《도우시샤문학》 3호에 발표한 일본어 시 〈우마[馬].1〉, 〈우마[馬].2〉 2편이 있다. |
한국 쪽에서는 일본어 시 〈후루사토(고향)〉 1편이 1939년 12월에 《휘문徽文》 제17호에 발표되었다. ‘휘문’ 지는 정지용이 1922년에 졸업한 서울의 모교 ‘휘문고등보통학교’의 교지다. 일본어 뿐 아니라 시집 《정지용시집》(1935) 및 《백록담》(1941)은 한국 서정시 발전에 공헌한 시집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항목에서 한 가지 첨가하여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일본의 식민지시대인 1943년에 당시의 한국시가 ‘조선시집朝鮮詩集’의 제호로 합하여 두 권이 토쿄에서 출판된 일이다. 그 두 권의 시집은 《조선시집 전기前期》와 《조선시집 중기中期》로 되어 있다. 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은 김소운金素雲(1907년, 한국 부산의 영도 출생)이었다. 이 두 권의 시집에는 전기에 20명의 시인의 시 88편, 중기에 24명의 시인의 시 98편이 각기 실려 있다. 이들 시집의 속표지에는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선생 묘앞에 바친다’고 기술되어 있고, 그 다음 쪽의 역자譯者 김소운의 서문인 〈각서覺書〉와 잇대어 시인 사토우 하루오[佐藤春夫](1892∼1964)가 쓴 장문長文의 〈조선의 시인 등을 내지內地의 시단에 맞이하는 글〉이 실려 있다. 물론 이 두 권의 번역시집이 당시의 한국시를 일본에 최초로 소개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한국시가 번역시집의 꼴로 일본에서 최초로 발행된 것은 《조선시집》 두 권보다 앞선 3년 전인 1940년의 《乳色の雲》(젖빛 구름)이다. 이 ‘젖빛 구름’도 김소운 번역으로 출판된 것임을 부기해 둔다. 여하간 종전終戰(1945. 8. 15) 이전까지 일본에서 한국시가 번역시집의 형태로 발행된 것은 이상 합쳐 3권뿐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 한국 시단에 영국의 ‘T. S 엘리엇’의 영향을 받은 주지주의적 시인들이 등장한다. 주지주의는 엘리엇 뿐 아니라, ‘하버드 리드’며 ‘올더스 헉슬리’ 등도 이미 주장해 온 문학적 경향이다. 주지주의란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지성과 지성적인 것을 존중하는 문학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한국에 그와 같은 문학적 경향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그 당시 영문학자 ‘최재서崔載瑞’였다.
엘리엇에 관해서는 그 이전에 ‘김기림金起林’ 《사상과 기술》이라는 문학론에서 〈전통과 개인의 재능〉을 소개하고 있다. 김기림은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日本]대학 예술과와 토호쿠제국[東北帝國]대학(영문과를 졸업한 시인이었다.
당시의 주지주의적 시로 말하자면 김기림의 〈기상도〉(1936)를 들 수 있으며 이상李箱(1910∼1937)의 시 〈오감도〉(1934)며 〈거울〉도 상당히 주목받은 시였다. 그러나 이상의 시는 주지주의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지적 심리주의의 작품 또는 초현실적인 시로서 많이 평가되고 있다.
한편 그 무렵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서는 김광균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더니즘 시론인 〈시는 그림(회화)이다〉고 하는 이론을 실제 자신의 작품을 통해 표현했기 때문이다.
1935년에 창간된 시전문지 《시원詩苑》은 중요한 존재였다. 이 《시원》을 통해서 활약한 시인은 박종화를 필두로 하여 김상용, 김광섭, 이상화, 노천명 등을 들 수 있다.
1930년대 말경부터 문학종합지 《문장文章》(1939.2 창간∼1941.4 폐간)이 발행되었다. 이 문학지에서는 이른바 ‘신인시인 추천’ 제도가 생겼다. 그 추천제도에 의해 신인 시인으로서 등장한 시인은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등 7인이었다.
그들 7인의 신인들 중에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세 시인은 1946년 6월에 이른바 《청록집》을 발행했다. 《청록집》은 발행과 동시에 한국 시단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서정시가 지금까지 볼 수 없을 만큼 신선한 표현미로 넘쳤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은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감격적인 날이었다. 제2차 대전의 종결과 동시에 한국은 군국주의 일본의 지배로부터 35년 만에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온 민족의 감격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지 못했다. ‘포츠담선언’ 에 의해 당시의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남북으로 분단하는 민족적인 비극이 일어난 것이었다. 외세에 의한 한반도의 강제적인 국토 분단은 그 후 정치체제가 각기 다른 두 개의 정부의 탄생, 민족의 이산과 ‘6.25 동란’ 등 가지가지 비극이 잇따라 나타났다. 6.25 동란을 전후로 남쪽(한국)에서 그때까지 문단활동을 하던 시인이며 소설가 중에서 자진하여 북쪽(북한)으로 월북한 문인이며, 또는 강제적으로 북측에 납치된 납북문인도 상당수에 달했다. 또한 북쪽에서 문단 활동을 하던 문인들 중에도 남쪽(한국)으로 자진 월남해 온 문인들도 적지 않았다. |
자의거나 타의든 간에 6.25 사변을 전후로 하여 북한으로 간 문인들의 문학작품은 금서禁書가 되었다. 그 후 한국 정부는 1988년까지 4차에 걸쳐, 월북작가들의 해방(1945. 8. 15) 이전의 문학작품 등을 금서목록에서 해금시켰다. 해금된 중요한 시인들의 이름만을 몇몇 들자면 김기림을 비롯하여 김동환, 정지용, 이용악, 백석, 임화, 오장환 등등이다.
김동환과 김기림 및 정지용에 관해서는 앞에서 논했다. 백석과 이용악에 관해 논論하자면, 백석은 본래 북한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 |
그는 젊은 날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야마[靑山]학원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운 뒤 1934년에 귀국하여 서울의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여성》 지의 편집에 종사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백석은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한다. 그는 고향인 평안도 지방의 민속을 소재로 하여 평안도 사투리를 시어화 시키는 등 특색있는 시를 창작했다.
이용악도 마찬가지로 토속적인 서민 생활의 애환이거나 향토애의 민족적 정서를 시화詩化 했고, 시집 《분수령》(1937)을 상재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의 제3시집 《오랑캐꽃》(1947)도 주목받은 시집이었다. 이용악은 1936년 일본의 죠우치[上智]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신문기자 등 언론계에 투신하는 한편 시를 썼다.
임화의 경우는 1938년에 상재한 시집 《현해탄》이 발행과 동시에 화제가 되었으며, 오장환의 경우는 《성벽》(1937) 등이 평가되었다.
북쪽 시인들에 관해서는 생존 여부 또는 사망 연도도 확인하기 어려운 사정 등 시사詩史 )의 연구상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제가 있음을 양찰하기 바라며, 일본에서 일본어로 발표한 〈한국 근대시와 시사적 배경 소고〉를 통하여 한국시 발생과 발달 과정에 있어 한국 시문학사의 작은 부분이라도 독자 제현에게 이해가 된다면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련다.(부분교열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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