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돌려서 때는 1942년. 유럽은 한참 독일군이 득세하고, 동쪽에서만 소련과 좀 티격태격하는 상황입니다. 대서양 건너 미국은 아직 독일에게는 약만 올릴 뿐 별로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뒤통수를 후려칠 준비는 당연히 하고 있었죠.
FP-45 리버레이터
이즈음 미국 제너럴 모터스사(이름만 '모터스'지 별 걸 다 만듭니다)에서 미군의 주문을 받아 이상야릇한 권총을 디자인합니다. 생긴 것부터가 좀 안 좋은 의미로 범상치 않은 권총이었죠. 육군은 이 권총에 '신호탄 발사기, .45구경(Flare Projector Caliber .45)', 즉 FP-45란 이름을 붙입니다. 나름대로 권총을 양산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덥잖게 머리를 굴린 거죠. 은폐공작은 권총 이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설계도면상에는 총열이 '튜브', 방아쇠는 '이음쇠', 공이 격침은 '조종막대', 방아쇠울은 '스패너'...이런 식으로 써 넣기까지 했으니까요.
여러 각도에서 찍은 리버레이터.
권총 생산 과정에는 몇 가지 웃기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별로 복잡할 것도 없는 권총 생산에 약 6개월 가량이 들었는데, 이 중 절반 정도는 컨셉 잡기등등의 잡다한 업무였죠. 나머지 절반 3개월, 정확히는 11주일 동안 약 1백만정의 FP-45가 생산되었는데, 단순계산으로 따지면 부품 23개짜리 권총을 노동자 300명이서 11주동안 1백만정 만드는 데 한 정당 약 6.6초가 소요되었다는 겁니다. 생산성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깡통인 스텐건도 끽소리 못하게 만들 생산속도죠. 이것 때문에 이 권총은 '한 정 만드는 게 한 발 재장전하는 것보다 빠른 세계에서 유일한 권총'이라는 기묘한 칭호를 얻게 됩니다(1발 장전에 10초정도 걸립니다).
양산 전의 프로토타입. 실전모델보다는 약간 고급스런 듯도 합니다.
위쪽이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리버레이터, 아래쪽은 생산라인 폐쇄 직전에 나온 마지막 리버레이터입니다.
이 권총의 유래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보통 OSS(미군 전략 사무국, CIA의 전신)가 제작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사용 목적은 유럽에 뿌려 각지의 레지스탕스가 이 총을 습득, 독일군 병사에게 접근하여 이걸로 사살한 뒤 그 병사의 무기를 빼앗아 그거나 쓰라는, 좀 바보같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뭐 아니면 암살목적으로도 쓸 수도 있는데, 차라리 이 쪽이 더 멋질 것 같긴 합니다. 그 이외에도 상당히 무시무시한 목적이 있었는데, 바로 정신공격(?)입니다. 막대한 양을 유럽에 뿌리면 필시 독일군도 이 권총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테고, 어디서 레지스탕스가 이 총을 들고 나타날지 몰라 덜덜 떨게 할 수 있다...는 목적이었습니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역시 '리버레이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윈체스터사의 산탄총. 리버레이터 권총의 설계사상을 이어받아 값싸고 단순한 무기를 만들자는 컨셉이었지만 실패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유럽에 뿌려진 양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특히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거의 줍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필리핀과 중국에서 대부분의 양이 발견되었는데, 이것 때문에 이 총의 제작 목적이 유럽용이 아니라 태평양전선의 일본군을 괴롭히기 위해 반일 게릴라들이 사용하도록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총 내부입니다. 정말 소련은 저리가라할 정도로 단순합니다.
뭐 이름도 갖가지죠. 원래 이름은 FP-45지만 울워스 피스톨(울워스는... 백화점 이름입니다;;)이란 이름도 있고, 가장 유명한 리버레이터란 이름도 있습니다. 이 리버레이터란 이름은 1944년 6월 이 총의 기밀등급이 해제된 이후 공개된 OSS 무기 카탈로그에 리버레이터란 이름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레지스탕스에게 주어진다면 리버레이터(해방자)란 이름도 괜찮긴 합니다만, 이 총의 퀄리티를 볼 때는 사실 그런 말도 나오질 않는군요.
오하이오 건 콜렉터 협회 쇼에 무더기로 나앉은 리버레이터.
성능상으로 따져보려고 하면 좀 난감하게 됩니다. 생산성을 위해 극도로 단순화된 이 총의 총열에는 강선도 없었고, 강선총에 사용되도록 만들어진 .45 ACP탄은 이 총에 넣고 쏘면 한 7~8m 날아간 뒤에는 비실비실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한 정당 가격이 2.1$짜리라 총에는 탄환이 한 발밖에 안 들어가는 구조였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한 발 쏜 뒤에는 총 후부를 개방한 뒤 총구를 야포 수입할 때 수입봉으로 쑤셔주듯이 나무 꼬챙이(또는뭐 아무거나 가느다란 것)로 쑤셔서 탄피를 빼내줘야 했습니다. 덕분에 실전에서 두 발 쏴 보기도 힘들 정도였지요.
총열 내부. 역시나 강선은 안 보입니다.
유럽에 투하될 때 리버레이터는 파라핀으로 코팅된 마분지 상자에 .45 ACP탄 10발과 수입봉(!), 그림으로 된 사용법 종이와 함께 포장되어 떨어졌습니다. 사실 이 포장상자와 사용법 종이는 이제 실총보다 몇십 배는 더 희귀해져서, 콜렉터들에게는 총값의 2배는 받을 수 있을 품목이 되었죠. '그런데 단발총이라면서 왜 10발이나 탄환을 끼워주냐?'하면... 사실 이 총에도 탄창은 있습니다. 6발들이죠. 문제는 이 탄창이 급탄구조와 연결되었다든가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손잡이 빈 공간에 탄환을 넣어 두었다가 탄환 교체할 때 한 발씩 꺼내서 쓰는 매우 고색창연한 구조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동봉된 설명서. 정말 복잡한 구조...
캐나다의 한 총기판매업자가 팔고 있는 리버레이터. 상태가 꽤 좋아서 여기저기가 자세히 잘 보입니다. 그립 아래의 부실하게 생긴 뚜껑과 함께 있는 빈 공간이 바로 탄창입니다.
2차대전 이후 대부분의 리버레이터는 폐기처분되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전 당시, CIA도 뭔가 리버레이터를 닮은 총이 필요하게 되었죠. 그래서 제작한 것이 '디어 건(Deer Gun)'이었습니다. 디자인은 좀 더 세련되어졌지만 어쨌든 리버레이터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단발총이었죠. 역사는 반복되는지 베트남전 종전 이후 이 디어 건도 폐기처분됩니다만, 덕분에 리버레이터보다 더 귀한 몸이 되셨습니다.
디어 건. Dear Gun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는데, 사실 생김새 때문에 '우주총'이라고도 불립니다...
여담으로, 리버레이터는 요즘에는 상태에 따라서 1정당 450$~1,000$까지도 된다고 합니다. 2.1$짜리가 많이도 출세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