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信條, creed)란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기독교 교의의 요체를 간추려 적은 공신적이고 권위있는 진술. 엄밀히 말해서 믿는 바를 신조라고 한다면 그 신조를 기록해 놓은 경문을 신경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구분 없이 신조로 썼다. 신앙고백은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신앙생활의 증언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정당한 규범내에서 승인된 것이다. 이 신앙고백이 규범화 되어 신조가 되면 그것은 법적인 성격을 지닌다. 성경에는 신조의 규범화는 없고 신앙고백만이 나온다. 이 신앙고백을 통해 신조의 길이 열릴 것이다. 처음에는 세례식 때의 간단한 신앙고백에서 시작해 4세기 경에 마 28:19을 따라 차츰 세 단락의 단일한 형식으로 정비되면서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콘스탄티노플신조 등으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서방에서는 로마신경에서 나온 사도신경을, 동방에서는 니케아신조를 각각 세례식 때 사용했다. 초기에 있어 신조는 이념적으로 하나였으나 후대에 이를수록 복수화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각교파마다 신조를 달리해 독자적인 것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종교개혁 이후 칼빈의 개혁만큼 많은 종류의 신조를 내놓은 교파는 없다. 그리고 신조는 교회의 선교활동을 위한 규벌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보수적인 교파는 역사적 신조에 정착하고 있지만 진보적인 교파는 부단한 수정을 통해 새로운 신조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상에 있어서 고전적 신조가 주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면, 현대의 신조적 주제는 교회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교회와 문화 또는 사회 등이 주요 주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⑴ 사도신경(使徒信經, The Apostle's Creed)
서방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신앙교백. 다른 고대 신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3부로 나뉘어 있으며 초대 교회 세례문답의 기본 골격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신경」이라는 명칭은 4세기 말 루피누스과 암스로시우스의 기록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그들은 이 신경 12항목이 12사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12제자가 성령을 받은 후 복음 전도를 하러 나가기 전에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한 항목씩 고백했다는 설이다. 이같은 초대 교회의 전승은 중세까지 그대로 받아 들여졌으나 근대 학자들에 의해 신빙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도신경은 수세기에 걸쳐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뤄진 공동전례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⑵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o)
313년 1월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만나 기독교의 합법성과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을 취하겠다고 합의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 결정적으로 기독교 박해는 중단되었고 신앙의 자유와 함께 몰수당했던 재산을 반환받고 피해 보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밀라노 칙령’으로 알려진 칙령이 밀라노에서 반포된 적은 없다. 다만 이같은 결정이 밀라노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락탄티우스(Lactantius). 유세비우스(Eusebius) 등 역사가들의 글 속에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⑶ 니케아 신조(the Nicne Creed)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기독론을 수립하려는 취지에서 산출된 것이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 의해 예루살렘 세례신조를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칭호로 규정하고 있다. 니케아신조는 니케아공의회 이후 동방교회에서 정통신조로 채택되었고, 로마에서는 1014년 이후 채택되었다. 현재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제외한 기독교에서는 모두 니케아신조를 정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채택한 콘스탄티노플신조도 통칭 니케아신조로 불린다. 콘스탄티노플신조도 예루살렘 세례 신조를 기초로 한 것으로 니케아신조와 기본 구조가 같으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이 길고 성령에 관한 부분이 빠진 대신 교회. 세례. 죽은 자의 부활 및 영생에 관한 조항이 삽입된 것이 다르다. 보통 이 신조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라 부른다.
⑷ 콘스탄티노플 신조(Constantilopolitan Creed)
콘스탄티노플신조는 소위 기독교 교회의 에큐메니칼 신조 중 두 번째 것이며, 희랍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의 여러 이단들과 대다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신조라고 부르기에 가장 합당한 신조이다. 이것은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리탄 신조 또는 단지 니케아신조로도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381년에 개최된 이른바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공의회에 의해 채택된 것으로 가정되고 있는 신앙고백의 단순한 확대라고 공언하고 있는 역본을 의미한다.
⑸ 아타나시우스 신경(The Athanasian Creed)
첫 문장이 ‘quirumque rult'(믿는 자만이 구원될 수 있다)로 시작되어 ’퀴쿰케 신경‘으로도 알려졌다. 중세이후 아타나시우스 저작으로 알려져 왔으나 보스(G.J. Voss)의 연구가 나온(1642) 이후 이 신경이 아타나시우스 이후의 저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40개 신조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 후반부에서는 사도신경. 니케아신조와 함께 서방 기독교의 대표적 신경으로 인정받고 있으마 동방교회에서는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⑹ 칼케돈 신조(The Definition of Chalcedon)
칼케돈공의회(451)에서 채택된 신조. 니케아신조와 콘스탄티노플신조의 정통성을 인정하며 유티케스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모두 배격하고 있다. 즉 네스토리우스파처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분리 가능성을 암시하며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나님을 낳으신 분‘)라는 칭호를 쓸수 없다는 주장이나 단성론자들처럼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되고 이러한 혼합에 의해 신성이 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은 모두 배격하며 ’혼란됨이 없이, 변함이 없이, 불가분하게, 나뉠 수 없이‘(asugxutos, atrephtos, adiairetos. axoristos) 연합된 두 본성의 한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주장했다. 이로써 단성론자들을 제외한 동. 서방교회의 보편적 기독론이 확정되었다.
⑺ 쉬말칼덴 조항(Schmalkaklic Articles)
1537년 루터가 작성한 교리적 문서. 작센의 선고후 요안네스 프리드리히의 요청을 받아 1537년 5월 23일 교황 파울루스 3세에 의해 만투아에서 소집된 교회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이회의에 앞서 2월 23일 쉬말칼덴에서 루터파 제후와 신학자들이 모여 내용을 정리했는데, 루터가 쓴 기본 조항에 멜라히톤이 작성한 보충 항목을 교황에게 제출하기로 했다(그러나 인쇄과정에서 멜란히톤의 보충 항목은 누락되었다). 내용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기본 교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입장, 미사를 비롯한 기톨릭교회의 전례와 기구에 대한 비판, 교황. 수도원제도 및 성인숭배비판, 성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교회들간의 이견 등을 담고 있다. 내용에 있어「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공통적이었던 이 조항은 초기 프로테스탄트교회 교리형성과 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
⑻ 아우크스부르크 신조협정(Interim of Augsburg)
1548년 독일의 종교적 일치를 이루기 위한 황제 카알 5세의 계획된 가신조협정. 쉬말칼덴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의 패배한 후 카알 황제는 독일에서의 종교적 통일이 가능하리라는 의도 속에 가신 조협정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협정의 내용들이 가톨릭에 유리하게 되어 있어 북부 지역과 프로테스탄트들의 반대로 인하여 실패함으로써 결국 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가 조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⑼ 쭈리히 일치신조(The Zurich Agreement)
1549년 스위스의 프랑스계 프로테스탄트 대표자인 칼빈. 파렐과 독일계 프로테스탄트 대표자인 불링거가 공동 조인한 29개조 신조. 쯔벙글리파인 불링거는 성만찬 교리를 제외하고 대체로 칼빈주의 신앙.
⑽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년 독일의 개혁파 교회가 채택한 교리문닥, 루터파 열성주의자들이 파문을 일삼는 경향에 감정이 상한 프리드리히 3세가 개혁교회의 교회 쪽으로 마음을 돌린후 하이델베르크의 교수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에게 새로운 교회 규칙을 위촉함으로써 작성되었다. 한편 이 교리문답서는 인간의 비극. 구속. 감사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국의 개혁교회들이 채택하게 됨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11) 돌트 신조(Creeds of Dort)
돌트회의에서 제정된(1618-1619) 엄격한 칼빈주의 신조를 말한다. 알미니우스파의 5조항에 대응해서 다섯 가지 주요 교리 즉 예정,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은 인단의 속죄, 인간의 타락, 인간의 회심과 방침, 성도의 견인(堅忍)등에 관하여 먼저 전자의 오류를 지적하고 계속하여 정통과 칼빈주의의 교의를 논증하여 93개조에 미쳤다.
⑿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Westminster Catechism)
1647, 8년에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작성된 장로교회의 신앙문답서. 교역자들을 위한「대요리문답」(Larger Catechism)과 아이들을 위한 「소요리문답」(Shirter Catechism)이 있는데, 전자는 196문답, 후자는 107문답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십계명 및 주기도문의 해설과 칼빈주의의 형태를 따른 교리체계의 독자적 진술로 되어 있고, 사도신경이 부록으로 첨가되어 있다 그 특징으로는 간결함과 철저한 논리를 들 수 있다. 이중 소요리문답은 대요리문답을 앞질러 널리 보급되고 큰 영향을 끼쳤는데, 현재까지도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됨과 동시에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을 교회의 표준서로 채용하였다.
⒀ 헬베티아 일치신조(Helvetic Consensus)
1675년 스위스 개혁교회의 상징으로서 만들어진 신조의 이름. 그 목적은 프랑스의 소무르학원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서문과 26개 조항의 교령들로 구성되어 있고, 엄격한 칼빈주의와 소무르학파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한편 이 헬베티아 일치신조는 당시 군림하던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의 산물로 1686년 이후 스위스 개혁교회에서의 위치를 잃고 말았다.
⒁ 바르멘선언(The Bamen Declanation)
1934년 독일 바르멘에서 모인 고백교회 지도자들이 채택한 6개조 신앙고백. 나찌정부가 추진하는 독일국가 기독교회에 반대하며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뿐이라는 신학적 고백을 하는 루터교회, 개혁교회, 연방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바르멘회의 및 선언은 바르크(K. Barth)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독일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역사적 근거가 되었다.
⒂ 다음은 칼빈주의 신조들이다.
① <제네바 일치신조>(1552) : 목회자들의 서명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신앙고백이라기보다 논쟁적인 논문이다. 이것은 사실상 로마파 신학자인 핏기우스와 이전에 까르멜회 수도사였던 의사 볼섹이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 비난했을 때 칼빈이 이에 대답한 것 중 두 번째 것이다. 이것이 다소 심한 논쟁서로서 칼빈은 풍자적인 비판과 논쟁을 받아가면서 그리고 친구들이 주저하고 지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교리를 극단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이 교리가 믿는 자에게 위로와 의지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그 설명은 흥미롭다.
② <브레멘 일치신조>(1595) :1572년의 「선언」에 이어 나온 것으로 이 신조로 인해 이 도시에서 칼빈주의가 확립되게 되었다. 저자는 페첼이었으며 그 교리는 페첼 이전의 신조와 비교해 볼 때 예정론과 환자에 대한 성찬에 관한 항목들만 다를 뿐이었다. 이것은 목회를 위한 편람으로서 스위스 개혁자들이 편람들과 멜란하톤의 편람들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 분명하다. 1784년까지 모든 목회자들은 이에 서명해야 했다.
③ <스위스 일치신조>(1675) :취리히와 바젤을 중심으로 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에서 나온 스위스의 정통 칼빈주의의 신조이다. 이것은 소뮈르의 칼빈파 신학 교수들인 아미로. 드라플라스. 카펠 등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혁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혁신적 사상에 반대해서 작성한 것이다. 이 <스위스 일치신조>는 취리히의 교수인 존 헬리 하이데거가 바젤의 루카스 게르눌러와 제네바의 프란시스 투레틴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것이다. 그들 모두는 신학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며 훌륭한 크리스챤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목적은 논쟁적이었지만 그 어조는 정중했다. 그것은 무엇을 정죄시하기 보다는 배격했다. 그것은 이미 공인된 칼빈주의적 표준들에 대한 추가로 작성된 것으로서 엄격히 말해 새로운 신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것은 취리히. 나젤. 제네바 및 개혁파를 받아들인 스위스의 주들에서 교회와 정부의 명령에 따라 반세기 동안 지역적 권위를 행사했다.
④ <프랑스 자유교회의 헌장>(1849) : 신앙과 원칙들을 좀더 간단하고 소박하게, 좀더 성서적으로 진술하고 있으며 그 용어는 따뜻하고 복음적이며 그 언어는 품위가 있고 정중하다. 그 구절들은 성서 및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에 근거한 신앙, 회개와 구원에 대한 보편적 부름, 앞으로 올 부활과 심판 등을 선포한다. 그리고 송영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