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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에다이시'(杖大師) 요고인
요고인 츠야도까지의 밤길 안내는 아리따운 두 여인이 맡았고, 시코쿠헨로에서 적(敵) 1호
인 모기의 퇴치는 37번 이와모토지 마을의 앳된 여인이 책임지고 있는 밤.
공교롭게도, 손녀 같은 젊은 세 여인의 보호로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밤.
항일, 반일, 극일을 넘어서 용일하고 있다고 하지만 불가근의 정서가 여전하면서도 이같은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뻔뻔한 늙은이 아닌가.
작은 집의 지붕이 있는 좁은 안뜰에 불과해서 강약을 되풀이 하는 빗소리와 함께 보냈지만
불만이나 불평이 전혀 없는 밤이 갔다.
상쾌하게 밝지는 않아도 어둠만은 물러나는 중인 시각.
잠에서는 깨어났으나 침낭 안에 묻힌채 상념에 잠겨있는데 대문 여는 소리.
새벽4시가 지났을 뿐인데도 부지런한 여신도(?) 때문에 기상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늙은이가 누웠던 시멘트 바닥을 본 초로의 여인은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몸짓
으로 법당방 문을 열어 보이며 방을 두고 한데서 잔 내게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이와모토지 다음날 밤, 그 때도 비내리는 밤이었다.
칸온지의 법당방을 두고 댓돌 위의 좁은 앞마루에서 잤던 것.
'편한 몸과 불편한 마음'에 대비되는 '편한 마음과 불편한 몸'중 택일이라면 내게는 당연히
후자가 정답이다.
봉납은 못하나마 편한 몸이기 위해 그들의 신단을 침실로 만들 만큼 무례하지는 않으니까.
떠날 차비를 마친 후 안팎을 둘러보았다.
입춘방(立春榜)으로 알맞을 듯 한 대문 위의 편액, 액은 내쫓고 복만 들인다는 '제난초복'
(除難招福)은 정녕 중생에게 베푸는'지팡이대사'(杖大師)의 능력이며 자비인가.
'요고인.(養護院)이 일명 '츠에다이시'(杖大師)가 된 전설이 있단다.
에도(江戶)시대 후기에 이곳 호조(北条)에서 일어난 일이라나.
방문한 탁발(修行)승에게 카메지로(亀次郎/이 마을 거주)의 부인이 후하게 시주했다.
크게 만족한 승려는 그 후에도 여려 번 후한 시주를 받았다.
이듬해에 카메지로는 탁발승이 나타나 불교를 가르치고 지팡이와 염주, 짚신....등을 두고
떠나는 꿈을 꿨다.
꿈 이야기를 들은 한 고승이, 그 수행승이 바로 코보대사라고 단정함에 따라 승려가 두고
갔다는 지팡이 등을 비단으로 싸서 이 절(養護院)에 봉납했다는 것
이로써 요고인에 '츠에다이시'(杖大師)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단다.
하마터면, 지팡이대사 대신 또 하나의 에몬사부로가 나올뻔 했는데, 쿠카이(空海) 코보에
관련된 설화들로 미루어 그는 엄정함에 비해 자비심이 부족한 분이었던 것 같다.
외도(外道) JR요산선 열차
비가 오락가락하고 을씨년스런 새벽.
부지런한 여신도 아니었으면 아마 침낭 안에 누운채 늑장을 부렸을 것이다.
요고인은 53번엔묘지 ~ 54번엔메이지 사이인 34.5km의 3분의 1지점이며, 남은 3분의 2중
3분의 2는 어제 오후에 걸어온 해변의 빗길과 한판이다.
비가 그칠 기미가 없고 맑게 갠 날은 난망일 듯 싶은 새벽, 나는 유심히 보던 지도를 접어
배낭 깊숙이 넣고(젖지 않도록) 일어섰다.
비가 그칠 때까지는, 또는 엔메이지까지는 "헨로미치를 걷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걷는 길이
바로 헨로"라는 선언에 다름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코쿠88레이조의 헨로에 대한 반동이며 방종이다.
요고인에서 타테이와 강(立岩川)을 건넌 후 부터.
헨로미치는 카마다이시(鎌大師)를 거쳐서 가는 4km쯤의 내륙길로 시작한다.
해안에서 다시 결합하게 되지만 직각으로 꺾이는 해안로에서는 직삼각형의 사변에 해당
하는 길이므로 헨로로 인정받지 못하는 해안로에 비해서는 엄청 단축되는 길이다.
'henro-michi, へんろ道 最短コ-ス'라는 안내판마저 무시하고 해안으로 마냥 돌아가려는
늙은이.
편안했던 밤새에, 부지불식간에 판단력을 혼미하게 하는 어떤 충격이라도 있었는가.
타테이와교 북단에서 제2헨로미치라 할 수 있는 196번국도(今治街道)마저 버리고 강둑길
을 따라 해안으로 향한 시각은 새벽 5시쯤.
헨로미치에서 최초의 이른, 새벽같은 활동이다.
타테이와강 하구에서 해안으로 넓게 자리한 호조(北条)체육공원을 지나 북상을 시작했다.
81년 세월, 어느 꿈에서라도 본 적 없는 해안인데도 비가 내린다는 이유로 안내책자 마저
배낭 깊숙이 넣고, 먼동은 텄으나 우중충하고 비가 내릴 뿐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맨 먼저 통과한 곳은 타테이와 해수욕장(立岩)이다.
뜻도 모르는 이름 '몬칫치(モンチッチ)해안'으로 더 사랑받는다는 해변.
용도도 모르는 건조물들을 바꿔가며 앉기를 거듭했다.
정상 상태라면 이른 아침에 비맞으며 이해되지 않는 짓을 하고 있겠는가.
빗길을 나선 것은 헨로상이라는 신분(?)으로 해명되지만 이해되지 않는 짓은 자비심 없이
괴롭히기 시작한 이른 아침의 통증(허리와 다리)과 싸우는 중이었음믈 고백한다.
우중의 아침, 아무도 없기 망정이지 이 꼴을 누가 목격했다면 동정 불금이었을 것이다.
맛이 한참 간 영감으로 보일 것이 명약관화할 테니까.
이렇게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걸은 길이 국도196번에 합류되었고 미치노
에키 카사하야노사토 후와리(道の駅 風早の郷 風和里)에 당도한 시각이 아침 6시였다.
'요코소(welcome) 카사하야노사토'
신선한 야채와 해산물 등 특산물들의 홍보에 열성인 듯 한데 7시가 지났는데도 밝아지려
하지 않는 아침에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카메라를 꺼낼 수 없도록, 어제 오후의 이와이타이시도와 같은 상황이 시작되었다.
국도196번과 합류한 지점을 지난 후부터 길게 분포되어 있는 오우라(大浦/松山市) 타운을
지나 아사나미하라(淺海原)에 당도했다.
카마다이시를 거쳐 오는 정통 헨로미치에 합류되는 지점이다.
오후였다면 아마도 아사나미우편국 지근의 젠콘야도(善根宿/淺海大師堂お遍路無料宿)에
묵으려 했겠지만 해안을 많이 돌았다 해도 10km미만을 걸었을 뿐 이른 아침이다.
세찬 비를 잠시 피하려고 우측에 보이는 JR요산선 열차역(淺海驛)에 들렀다
비내리는 아침이지만 등교 또는 출근길인 듯 학생과 젊은이 몇을 볼 수 있는 작은 역.
관광 홍보용 시코쿠 지도를 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한 생각에 전혀 무심했던 열차시각표를
들여다보았다.
이어서 소스라치듯 일어나 승차장으로 뛰어갔으며 곧 도착한(07:21?) 열차에 올라탔다.
단지, 오후(어제)와 아침(오늘)이 다를 뿐 똑같은 빗속의 해안로.
어제의 해안로보다 좀 더 해안에 밀착해 있는 JR요산선이므로 걷기를 반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매표 창구가 없고 관리 직원도 없는 무인역인 듯 하며, 이런 경우의 승하차 요령을 모르는
나는 얼떨결에 승차를 했으므로 하차역을 정하는 것이 분초(分秒)를 다투는 문제였다.
이 열차는 키쿠마(菊間)와 이요카메오카(伊予龜岡), 오니시(大西) 역을 지나 타카마츠(高
松)로 가는 보통열차란다.
아사나미(淺海原, 淺海本谷) 이후의 헨로는 대부분이 곧 마츠야마 시(松山)에서 이마바리
시(今治)로 바뀌는 해안의 196번국도( 이마바리카이도)를 따른다.
54번엔메이지 한하고 가기 때문에 해안로(196번국도)와 열차로가 갈리는 오니시역 이내의
역에서 하차해야 하는데 어느새 오니시 역이란다.
엔메이지, 불신의 대미지는 치명적이다
완만한 속도로 겨우 15분 달리고(정차시간은 제외) 운전요원(?)의 지시대로 요금을 낸 후
황급히 내린 오니시 역(大西驛).
지역 간의 차이인지 잠시(열차안의총22분)나마 시차가 이유인지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다.
무력했던 판초 대신 우산만으로도 걸을 수 있을 만큼.
역 대합실에서 비 경계령을 해제하고 역을 나온 후 곧 찾아낸 '54번엔메이지4.1km'안내석
이후 목적지를 찾아가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헨로미치가 된 직선 196번국도가 오니시초(大西町)의 신마치(新町)와 콤바라(紺原)
등 마을을 지나 타쿠마(宅間)마을 구간에서 이마바리 바이패스 도로로 격상된다.
너른 광장에 다름아닌 타쿠마교차로(交差点)에서 이마바라 카이도가 분기하는데 헨로는
카이도를 따라간다.
긴 카이도가 좌우로 엔기우편국(延喜)과 노마소학교(乃万)가 있는 4거리에서 38번현도가
되어 잠시 직진하면 공중에서도 땅에서도 엔메이지(延命寺)를 안내하고 있다.
9시방향 골목길로 가라고.
에히메 켄 이마바리 시 아가타 코(愛媛県今治市阿方甲)에 자리한 엔메이지에 도착한 때는
2014년 10월 3일 아침 9시 30분쯤.
이른 아침에 1시간 이상 하구와 해안을 우회했기 때문에 정오에 임박해서 당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해안의 빗길을 열차로 달림으로서 되레 2시간여를 단축한 것이다.
(억수같은 빗속에서 걷는 해안길은 세토나이카이가 아무리 절경이라 해도 어제 오후로 족
하고 오늘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 2시간이 미리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옛 이마바리성(城)의 성문 중 하나를 이설했다는 엔메이지 산문에 들어서서 맨 먼저 찾은
것은 엔메이지 연혁을 담은 안내판이다.
마츠야마시의 8개 레이조들에 시 교육위 이름으로 된, 일목요연한 창업 내력판이 있는 것
처럼 이미바리 시 교육위의 안내판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내가 소지한 시코쿠88레이조의 창업사(創業史) 요약 자료에서 낮에 당도할 엔메이지편을
살펴보던 새벽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이마바리 시에도 6곳의 레이조가 있다.
인구 수로 보면 50만명에 8곳인 마츠야마시에 비해 15만명에 6곳이므로 이 지역이 엄청
더 불교적이라 할 수 있으니까.(今治市는 四國 중에서 4県廳市다음으로 第5의 都市란다)
본래 엔묘지(圓明寺)였는데 53번(直前)레이조와 동명이라 훗날에 개명했다는 사찰.
엔메이지(延命寺)를 요로(養老(717~724) 4년에 쇼무천황(聖武天皇)의 칙령에 따라 교키
보살이 개창했다고 되어 있다.
대일여래(大日如來)의 화신으로 알려진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을 조각, 안치하고.
교육위의 안내판을 찾지 못한 나는 복사해 지니고 있는 일본의 역대천황과 연호 등 일본사
시대구분표(日本史時代區分表)를 꺼내어 대조해 보았다.
교키보살이 개창했다는 요로4년은 서기720년이다.
칙령을 내렸다는 45대 쇼무천황(701~756)의 재위기간은 724년~749년이다.
즉위 해에 령을 내렸다 해도 724년이며 720년은 즉위하기 4년 전인데 어느 쪽이 맞는가.
20세 황태자 신분으로 칙령을 내릴 수 있는가.
설영, 가능하다 해도 그 때는 황태자가 있을 뿐 쇼무천황은 아직 없는 때다.
소경의 안내를 받는다면 시궁창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애초부터 조심하면 되지만 불신의
대미지(damage)는 치명적이다.
수직적 관계인 종교 신앙은 물론 수평적 상호관계인 신뢰와 탐구의 세계까지 전체 방위에
걸친 질서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해 관계가 없는 극소의 오류일 수 있다.
그렇다면 더욱 큰 문제다.
이해에 따른 것이라면 이해를 제거하면 되지만 제거할 위험도 없이 광범하다면?
맥이 빠진 상태가 되어, 보는 듯 마는 듯 후다쇼를 나왔다.
이 사찰 역시 공식처럼 1c정도의 연차를 두고 코보대사에 의해 재흥, 진언종이 되었으며
괄목할만한 거리(資料)들이 있다지만.
이마바리시 소재 첫 레이조라는 의미도 있겠는데 이 오류를 지적하거나 바로잡으려 하는
노력이 전무한데(훗날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더욱 실망했다.
55번레이조 낭코보
엔메이지에서 가리키는 55번낭코보(南光坊)는 3.6km동방, 이마바리시 다운타운에 있다.
자료들이 3.5km~4km로 각각이지만 오류는 무시해도 되는 단거리다.
엔메이지를 나온 헨로는 규모는 작지만 석물들로 보아 가족단위 위주인 듯한 묘역을 지난
후 농로와 마을길의 곳곳에 서있는 안내판을 따르면 되는 무리 없는 길이다.
고가 시마나미카이도(しまなみ海道) 밑을 가로지른 후, 이번에는 대규모 공원묘지(大谷墓
園墓地)를 돌고 오르내려야 한다.
이마바리 시영 망자들의 유택에 헨로가 이리저리 쫓기며 시달리는 형국일 것이다.
시마나미카이도는 에히메 켄(愛媛県/四國) 이마바리 시와 히로시마 켄(廣도県/本州) 오노
미치 시(尾道市) 간의 바다(瀬戸内海)를 연결하는 자동차용 도로다.
세토나이카이의 6개 섬을 잇는 7개의 연육교를 포함하여 총 길이 약 70km로 '니시세토(西
瀬戸)자동차도' 또는 '세토우치(瀬戸內)시마나미카이도'라 불리는 해상도(海上道),
자동차도로지만 자전거와 도보 전용도로도 병설되어 있으므로 걸으면서 세토나이카이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는데 당시(2014년)에는 이 도로에 왜 관심이 없었을까.
준비 단계인 한국에서는 오직 걷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라 해도 시코쿠에서 나루토 해협의
도보 불가라 하여 포기해야 했을 때 왜 이 도로(시마나미카이도)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88번오쿠보지(大窪寺)에서 나루토(鳴門)로 가지 않고 이 곳으로 되돌아와서 이 해상교를
걸으면 되는 것을.
아마도, 관심은 온통 반년 계획의 까미노에 있고, 헨로는 빨리 마치고 일본을 빨리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기 때문이었을까.
하긴, 오로지 '아루키헨로'만을 위한 빠듯한 일정이었으므로 딴 생각은 아예 할 수 없었다.
우산 받기 어중간한 비가 그친 것은 다행인데 거푸 통과하는 묘역 때문에 시코쿠헨로에서
발병한 나쁜 병이 도진 듯 하니 어찌 한다?
편히 통과하지 못하고 마치 쿠로타(黑田) 성을 가진 묘비를 찾느라 혈안이 된 듯이.
찾아낸다 해도 내가 찾는 쿠로타일 리 없고, 설영 맞다 해도 부관참시라도 할 텐가.
종심(從心)에 10년을 더 했건만, 부질없이 왜 그러는지 정녕 죽음 외에는 약이 없는 병?
많은 묘역을 거쳐 왔지만 처음 느끼는, 여유롭게 꾸며진 대규모 공원묘역(大谷)이다.
산의 경사에 따라 많은 층을 만들면서도 유휴공간을 충분히 확보해서 공원 분위기를 한껏
살렸으며 묘지 개념을 느끼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된 공원이다.
일본의 다른 대규모 공원묘지들을 접하지 못했으므로 단언적일 수는 없으나 한국의 공원
묘지 당국자들은 이 곳을 벤치마킹 하라고 권하고 싶다.
공원묘지의 긴 종단로를 따른 헨로는 묘지가 소재한 야마카타 초(山方町)의 끝 아사카와
(淺川)의 사쿠라교(櫻橋) 앞에서 부담 없이 두 길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
바로 다리를 건너서 38번현도(今治街道)를 따르거나(직각 좌회전) 아사카와 왼쪽 강변을
따르다가 다음 다리(茶堂橋)를 건너 좌회전하거나 .
38번현도를 따라 이마바리북고교앞 교차로 다음 신호등 교차로 지나 고가요산선(予讚線)
철로를 건넌 후 미야와키(宮脇)교차로와 다른 신호등교차로를 건넌다.
다음 신호등교차로는 낭코보니시(南光坊西).
우회전하면(317번국도) 진자 집단지다.
작은 블록(block) 안에 4개의 진자(別宮大山祗神社를 비롯)가 모여 있으니까.
다음은 55번레이조 낭코보 산문이다.
낭코보의 산문 앞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33분.
엔메이지에서 낭코보는 3.6km라 했는데 낭코보지에서는 엔메이지가 4.9km라니?
어느쪽이 맞는가 다 틀리는가.
이제는 이런 것 따지기도 진저리가 날 정도가 되었다.
도심에 자리한 것도 특이하지만 88레이조 중에서 유일하게 '보'(坊)자로 된 사찰.
코묘지('光明寺金剛院南光坊')라는 정식 명칭을 두고 별난 느낌을 주는 이름(약칭)을 고수
하고 있는 것이 더 기이한 감을 주는 사찰이다.
개창과 연기에 관한 설들은 엔메이지의 실망 이후 언급하지 않기로 작심했으므로 특이한
사항 외에는 일체 생략할 것이다.
Sorry 泰山寺
낭코보를 떠난 시각은 도착하여 10분도 되기 전인 11시 42분.
이전이라면 30분 안팎의 탐방인데 엔메이지의 오류 발견이 만든 결과다.
신뢰가 가지 않는 문서를 들고 부화뇌동하는 꼴이 얼마나 가소로운가.
한판에 다량 생산하여 곳곳에 심어놓은 듯 한 건물들에 붙인 억지 연기(緣起)를 익히려고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꼴이니.
낭코보에서 남서쪽으로 3km타이산지(泰山寺/52번太山寺와는 漢字가 다름)까지는 인내심
만 있으면 되는 길이다.
낭코보의 납경소 뒷담을 끼고, 좌우 아무 길에도 눈을 주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가기를
이마바리 역 북측 끝의 고가 철로 밑으로 횡단하기 까지 한다.
도심뿐 아니라 일부 외곽까지 바둑판식 블록으로 구획 정리를 한 도시라 낭코보에서 도로
따라 4개의 큰 블록을 직진하면 된다.
2번째 블록(이마바리소학교앞)과 4번째 블록에는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다.
이마바리역이 지근인 지점에서 교회를 만났다.
성구는 도처에서 읽었으나 교회 건물을 보기는 3번째인 듯.
공교롭게도 예배일의 예배시간에 당도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교회의 관계인 아무도 만나지
못한 것이 유감인데 오늘도 그랬다.
까미노에서 교회(가톨릭)는 헨로미치에 있는 사찰 만큼이나 많지만 일본의 기독교는 신.구
교를 망라하여 건물에서 초라함을 느낄 수 있다.
외빈내실(外貧內實)의 형국이라면 다행이지만 외빈내빈 상태라면?
이마바리역 앞에서 지도를 꺼내어 살펴보았다.
횡단지점에서도 1블록을 남하(驛출입구로터리),우회전하면 타이산지까지 일직선 길이다.
그보다, 오타니(大谷)공원묘지에서 내려온 차도하시(茶堂橋/38번현도)가 지근이다.
낭코보를 거쳐오기 위해서 긴 P턴을 한 것이다.
낭코보가 아니었으면 타이산지가 1km안팎에 불과했을 텐데.
이마바리역서(今治驛西), 메이토쿠(明德)고교앞 등 2개의 신호등교차로가 있는 대로 이후
에는 좁아지기는 해도 빈듯한 직선로가 계속된다.
케이세스 교(螢雪橋/日吉川)를 건넌 후에도 넓은 196번현도와 교차하는 신호등교차로가
있고 완만한 커브가 있을 뿐 직선로는 계속된다.
히요시강(日吉川)을 건넌 후에는 전답의 면적이 현저하게 늘어나는 지역이다.
일부 도로변을 포함해 많은 면적이 여전히 영농지역이다.
이마바리 시 코이즈미1초메(小泉1丁目)에 자리한 56번타이산지(泰山寺)에 당도하였음을
알리는 것은 길 좌측 논에 조성된 주차장이다.
우측, 좁은 골목길의 끝에 자리한 레이조까지 통행 불능의 대형 차량들이 주차하는 곳.
중소형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골목길이 있기는 하나 경내 수용공간이 좁기 때문에 이곳에
주차할 수 밖에 없겠다.
52번레이조와 발음이 같아서 혼동하기 쉬운 후다쇼.
엔메이지의 영향으로 무심하게 된 타이산지.
낭코보처럼 10분 이내에 끝내고 10분 이상을 휴식에 할애했다.
13시 21분에 당도하여 40분에 나와서 57번레이조 에이후쿠지(榮福寺)로 향했으니까.
타이산지에서 정남으로 3km거리에 불과하나 효과적인 영농을 위해 정지가 잘 된 바둑판
논길이라 헨로미치 찾아가기가 의외로 거북한 길이다.
빤히 보이는 곳이므로 축자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지그재그를 짧게 해야 하는 길.
잔여 길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의 헨로는 빤히 보이면서도 찾아가기 까다로운
도로에 의탁하고 있다.
본래 그랬겠는가.
도시계획과 농토의 정지로 인해 쫓기고 밀려서 본의와 달리 까다롭게 된 것이지.
57번 榮福寺의 하코구루마(箱車)와 목발
아무튼, 헨로 안내표지를 찾느라 농로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닐 때였다.
낭코보~타이산지에서 오리지널 헨로를 찾겠다고 부리던 고집을 포기하니까 길이 순순히
풀렸는데 여기에서도 그래야 하는가.
이 꼴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는 성품인지 한 영감이 다가왔다.
소형트럭을 몰고 저쪽 길로 가던 영감인데 내가 에이후쿠지를 찾아가려는 헨로 영감으로
간파하고 방향을 돌려서 온 것이리라.
한국늙은이임을 알 리 없는, 60대 말쯤으로 보이는 그는 매우 빨리 말했다.
어찌나 빠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은 매우 적었다.
미기노카타(오른쪽 방향), 히다리노호(왼쪽편) 등 손짓을 하며 설명을 하는데도.
일본인들은 묻는 범위를 넘어 더 많이 대답하는 경향이 있다.
이 영감도 그런 쪽인데 내 대꾸에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내가 캉코쿠진(韓國人)이라고 한 말에 당연히 뒤 따른 것은 알아듣지 못했으리라는 것.
아무 말 없이 차를 몰고 앞으로 간 그는 넓은 길에서 차를 돌려 다시 왔다.
그가 나를 태우고 달려간 곳은 헨로미치가 아니고 평지보다 조금 높은 엔후쿠지 앞.
까미노에서도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차에 태우고 필요한 지점까지 달려갔는데 이 영감이
그리한 것 역시 늙은이라는 프리미엄(premium) 덕일 것이다.
짧은 거리라 금방이기는 했으나 심성이 선량한 영감이며 언어 습관으로 보아 급한 성미인
것도 틀림 없다.
14시 10분에 당도한 이마바리 시 다마가와 초 야와타 코(玉川町八蟠甲)의 에이후쿠지.
이색적인 물체는 본당 옆 회랑에 봉납되어 있는 박스(box)수레(箱車)와 목발이다.
15세의 지체(하체)장애 소년 미야모토(宮本武正)가 타고 순례했다는 수레.
수레를 끌고 가던 개가 이 사찰(榮福寺)에 당도하여 물을 마신 후 갑자기 달려나감으로서
수례가 전복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한데, 소년은 이 충격으로 병이 악화된 것이 이니라 완치되어 두 발만으로 걷게 되었다.
그래서 목발(松葉杖)과 함께 수레를 봉납했다는 것.
내가 태어나기 직전해인 쇼와(昭和)8년(1933)의 일이란다.
나도 소년시절에는 하체 불구자였다.
이즈음의 의술이라면 불구로 방치하지 않겠지만 원인도 모르는, 속수무책의 원시적 의술
시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존하던 목발로부터 1차로 자유롭게 되기는 19세때였는데 내 목발의 행방은 묘연하다.
할머니는 당신이 손자의 목발에 흘리신 눈물이 하도 많아서 늘 축축했던 목발을 던져버린
손자를 보지 못하셨지만 아들의 목발에 한이 많으셨던 내 어머니가 처치하셨을 것이다.
(불구자와 장애인 유감 :
당시에는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나는 그 단어에는 부정적이다.
불구자는 온전하게 갖추지 못했다는 뜻일 뿐인데 반하여 장애인은 남에게 장애가 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인격적 비하를 내포한 단어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훗날에 정치적 박해로 지체의 일부가 온전하지 못하게 된 대통령의 뜻이라 하여 불구자를
장애인으로 대체한 것이다.
대통령의 사려 깊지 못한 이 처사에 이의 한마디 내놓지 못한 소위 국어학자와 전문가들.
우리 역사에서 최악의 망국정책으로 꼽일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제한,
서울 물바다를 막는다는 평화의 땜, 운하와 사대강사업 등등에 이의는 커녕 용비어천가를
부른 사계의 학자들과 전문가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하긴, 단군 이래 유일한 민족 중흥의 기회, 복받은 민족임을 의미한다며 유신헌법을 만든
자들이 육사출신과 서울법대 교수, 소위 육법대학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이마바리 시에 레이조가 6곳이며 모두 세토나이카이 연안지역인데 특이하게도 낭코보와
에이후쿠지, 2사찰만 해상안전을 기원하고 있다.
지역민들이 겪은 재앙의 재발 방지와 숙원을 간추려 기원하며 봉납의 조건(?)은 제액초복
(除厄招福)인데 해난사고가 두 사찰지역에 유난히 많았던가.
셍유지(仙遊寺)와 이누즈카이케(犬塚池)
14시 25분에 에이후쿠지를 떠났다.
이 하루를 마감하고 쉴 곳으로 정한 58번레이조 셍유지의 츠야도를 향해서.
아침의 예불참석 의무가 걸림돌이 되기는 해도 나의 의지와 무관한 규정으로 돌리면 되고
온천이 있는 셍유지의 매력이 그 츠야도에서 머물기로 한 이유다.
아침의 빗길을 열차편으로 처리하지 않았고 에이후쿠지 트럭의 도움이 없었다 해도 새벽
5시에 시작했으므로 58번셍유지까지 35km정도는 무난한 일정이다.
더구나, 엔메이지의 사건 이후 레이조 탐방 시간을 대폭 단축함으로서 세이브(save)되는
시간이 적잖으니까.
셍유지는 이마바리 시 타마가와 초 벳쇼코(玉川町別所甲)에 위치해 있으며 에이후쿠지의
남방 3km, 해발250m가 넘는 지대라 완만하게 오르는 길이다.
에이후쿠지~셍유지 간의 헨로는 마을을 벗어난 후 이누즈카이케(犬塚池)를 끼고 산길을
오르다가 포장로(차로)에 합류한다.
차량은 에이후쿠지 마을길을 벗어나 동쪽 59번코쿠분지 길(무명 지방도)에 합류, 이 지점
(T字)에 있는 헨로코야에서 100m여를 동진해 남행하는 포장로를 따르면 셍유지다.
아루키 헨로미치가 지나가는 이누즈카이케에 관한 전설이 있다.
한 승려가 에이후쿠지와 셍유지, 2사찰의 주지로 양쪽을 왕래하며 일을 처리하던 때.
사찰에서 기르는, 영리한 개 1마리가 전령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지가 부재중인(상대편 사찰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절에서 주지의 처결이 필요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종을 울리면 전령(개)이 달려와 주지의 뜻을 전했다.
어느날 양쪽 절에서 동시에 종이 울렸다.(소승들의 장난?)
어느 쪽으로 달려가야 할지 결단을 하지 못해(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고민하고 탄식
하던 개가 마침내 눈 앞(평소에 오르내리던 길가)의 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개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마을민들이 못가에 개 무덤을 만들고 '이누즈가이케'(犬塚池)
라 부르게 되었단다.
우연이겠지만, 서있는 개의 형상이라는 못가의 이누즈가이케 앞에 14시 40분에 당도했다.
셍유지가 2km인팎 남은 지점이며 비탈도 심하지 않은 지형이라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모처럼 개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국내에도 개의 전설은 도처에 있다.
유구한 세월에 걸쳐, 양의 동서를 망라해서 충견(忠犬), 의견(義犬)으로 각인되어 온 개의
신분에 경천동지할 변혁이 왔다.
미구에, 개무덤을 견총에서 유택(幽宅)으로 품위 있게 부를 날이 오지 않을까.
사람은 묘지와 납골당의 한계에 봉착하여 풍장 수장이 날로 늘어가는 때에 개를 비롯하여
페트(Pet)의 공원묘지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사람의 공원묘지는 고작 조화 한송이인데 페트의 공원묘지는 온갖 치장 천국이다.
사람은 의료보험 혜택에도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데 페트는 의료보험이 없는데도 수
(壽)를 누릴 만큼 충분한 치료를 받고 있다.
사람의 고령화보다 더 큰 문제로 부상하는 페트의 고령화.
'펫코노미(Pet-Economy)'라는 신조어에 함축된 논란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
페트 신드롬(Pet Syndrome) 현상이 아니라 페트가 가족묘지에 함께 묻히고 자자손손의
추모를 받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만물의 영장은 커녕 돌연, 초라해 가는 듯 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위해 걷기를 재개했다.
곧, 코쿠분지 길을 횡단하고, 다시 곧 차로에 합류했다.
노변의 휴게소를 지난 시각은 15시 26분이고 셍유지 산문을 통과하기는 15시 30분.
16시 이전에, 에이후쿠지에서 2.4km라는 셍유지의 츠야도에 당도했다.
무슨 용도로 지은 건물인지, 파이프 등이 설치된 천정이 100% 노출된 가건물 같기도 하며
정리정돈이 되지 않아 어수선하고 사찰내 각종 공사의 종사자들 숙소 같기도 한 츠야도.
60인을 수용하는 슈쿠보(宿坊)를 운영하고 있으므로 후다쇼 본연업무 외에도 상주인들이
기거하는 장소가 필요하겠다.
이 츠야도가 헨로상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듯.
백제에게 극악무도한 주적은 신라
배낭을 내려놓고 경내를 살펴보았다.
석양이 오기 한참 전이며 이곳 츠야도에 짐을 풀었으므로 마냥 여유로운 오후인데도 주마
간산식 일별로 끝냈다.
이미 말한대로 관심도가 많이 약화된데다 특별히 시선을 끌 만큼 괄목할 만한 주목거리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한국늙은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눈여겨보게 된 사람은 셍유지의 창건을 명한 텐지
천황(天智/재위663~671)이다.
중앙집권제의 확립과 사유지의 폐지를 골자로 한 소위 타이카이노 카이신(大化の改新)의
주역인 그는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때 대규모 지원군을 이끌고 백제로 갔다.
661년, 천황이며 모후인 사이메이(斉明)의 급서에 따른 즉위식도 미루고 출병, 백강(白江
/현 錦江)에서 백제부흥군과 연합해 라.당(羅唐)연합군과 싸웠다.
그러나, 663년 8월 27, 28일 양일에 걸친 전투에서 백제.일본연합군은 대패했고 이로인해
백제부흥군 지휘부와 백제 유민 대부분이 당시 백제의 우호국이었던 일본으로 망명했다.
백제의 문물을 수입했으며 역사에서 한 때나마 우호적이던 일본은 그로부터 1밀레니엄도
채우지 못하고 임진과 정유의 양 란을 일으켰다.
호시탐탐 노리기 300여년 만에 결국 야욕을 달성했으나 그들의 과욕은 자멸을 초래했다.
그들의 피에 우리 유민들의 피가 섞여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레이잔(作札山) 9부능선의
평화로운 밤도 물 건너간 듯 안타까웠다.
까닭에 관계 없이 화가 나거나 심란하면 많이 먹고 많이 마시고 많이 완더링(wandering)
하는 것이 내 굳어진, 평생 버릇이다.
만복이 되었기 때문에 소화를 위해 많이 걷고 취했기 때문에 취기를 몰아내려 많이 걷고,
많이 걸었기 때문에 피로가 쌓여 쉬이 잠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화 내거나 속이 상할 겨를이 없으므로 육체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에도 유익하다.
일석다조(一石多鳥), 무해다익(無害多益)으로 아무에게나 주저없이 권하는 내 버릇이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로 심란해져서 이마바리 시 다운타운에서 많이 사온 먹거리와 술을
몽땅 먹고 마신 후 높지 않은 사레이잔을 마구 누비고 다녔다.
역사에서 가장 부질없는 짓이 가정(假定)이라지만 그래도, 만약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임진, 정유 양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한일 관계는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을까.
7c 후반, 백제인에게 극악무도한 주적은 신라였고 다음으로 당나라였다.
백제에게 일본은 자기네의 우수한 문화를 이식해 줄 정도로 우호국이었다.
그러므로, 정립(鼎立) 형국이었던 삼국 중 외세를 빌어서 가장 주체적인 나라(高句麗)와
가장 문화적인 나라(百濟)를 강제 굴복시킨 나라(新羅)에 원죄를 물어야 하지 않은가.
과거완료형인가.
휴화산 처럼 잠재적 진행형인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불행한 관계일 수 밖에 없는 일본땅에서 한국의 늙은이가
이같은 과거사로 인해 심란해져 있다니 심한 자괴감이 아닐 수 없다.
어두워진 시각에 돌아온 츠야도에는 처음 예상했던 대로 공사현장에서 본 청년들과 젊은
헨로상 1명이 보였다.
이 몇명이 확정된 이 밤의 츠야도 멤버인 듯 한데 일어를 쓰지 않는 내게 영어로 접근하려
했던 헨로상과 다른 멤버들이 어느새 통했나 함께 원정(?)에 나서는 듯 츠야도를 나갔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온천욕을 안내하는 후덕한 인상의 노(老)보살.
백두대간을 탈 때마다 묵던 해발1.000m 속리산암자의 나이든 보살이 연상되는 이미지다.
슈쿠보에 든 헨로상들이 끝나야 된다고 안내받았는데, 그렇다면 꽤 깊은 밤에나 차례가
올 법 한데 늙은이에게 특별 우대?
더구나 최근 며칠 목욕을 하지 못한 몸이라 천상에 오른 기분인데 목욕후식(음료수 과일)
까지 준비해서 나를 어리둥절 하게 한 보살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