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5. 부활주일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15장 30-34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부활 때문이다!
■ 모든 삶에는 이유(理由)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目的)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거창한 질문 같지만 매우 일상적인 질문입니다. 매번 이 질문을 던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이 질문을 무의식적으로 던지고 있고, 우리는 날마다 이 질문에 답하며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시간 자신에게 이 질문을 직접해보죠.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답은 무엇입니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분들은 오늘 본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답을 찾은 분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정답 여부를 판정받게 될 겁니다. 혹시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질문을 생각지도 못한 분들이 있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질문하게 될 겁니다.
■ 바울은 본문에서 두 개의 질문을 내 놓습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30절)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32절) 바로 이 두 질문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던지는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두 개의 일상적 질문에 어울리게 30절과 32절을 재문장화 해볼까요? “내가 이토록 위험한 일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단지 영웅처럼 행동하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까?”
사실 바울은 이 두 개의 질문을 고린도전서 15장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본문으로 축약해서 읽었습니다. “내가 행하고 말하는 것, 내가 사는 방식을 뒷받침하는 것은 부활, 부활, 언제나 부활(復活, Resurrection)이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사는 이유가 부활이고,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도 부활이라고 고백하고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부활>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단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즉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살다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과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그리고는 이토록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당당할 수 있는 이유를 고린도전서 15장 전체와 연결된 30절과 31절을 통해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보증하신 자신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이 믿음이 사실인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난 사건을 상기(想起)시킵니다. 에베소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32절) 그가 말하는 에베소서 맹수사건은 사도행전 19장에 설명된 사건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역사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우상숭배를 더 이상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도시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에 우상숭배 덕에 평생벌이를 하던 은장색(은장이) 데메드리오가 생계의 위협을 느끼자 일을 꾸몄습니다. 자기 직공들과 동업자들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이런 말을 한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자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 에베소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사업이 타격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데미스 신당이 괄시를 받게 되고, 마침내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상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터이니 참으로 위험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격분하였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 아르데미스 만세!” 이 소리를 들은 온 도시가 소란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찾지 못하자 바울의 동행인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가지고 떼를 지어 극장으로 몰려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극장에 몰려든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모여들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대신해 고초를 치르고 있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살기 가득한 군중들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도들이 그를 말렸고, 그와 가까이 지내던 몇몇 아시아 지방장관들도 전갈을 보내어 바울더러 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간청하였던 겁니다.
이렇게 광분하여 아우성치는 이들이 맹수와 같았다고 바울이 설명한 겁니다. 바로 이 맹수와 같은 이들을 상대로 싸우려 한 것은 객기가 아니라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고 고백한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맹수와 붙지 못했지만, 붙었든 붙지 않았던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 때문이었던 겁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2-33절) 부활이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에도 쾌락주의에도 속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도 똑바르게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깨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겁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설교의 시작에서 만났던 질문 두 개를 기억하시죠?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자, 여러분의 답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부활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부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무주의의 속임수에, 쾌락주의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소망할 것이 없으니, 지금을 즐기자’는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대신 똑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수상한 세월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 똑바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1. 그래야 국가가 중요하고 우선이라며 국가주의로 호도하는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국가주의가 아닌 ‘하나님 나라’ 사고에 의해 살아가야 합니다.
2. 그래야 사람이 중요하고 민중이 고귀하다는 입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입장이고, 이것이 거룩한 생각이고, 이것이 거룩한 삶인 겁니다.
3. 그래야 그리스도가 낮은 자로 오시고, 낮은 자로 살아가시고, 낮은 자를 위해 부활하신 보람이 있으신 겁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4절)
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란 부활을 믿으면서도 부활의 의미와 목적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 즉 하나님 나라의 의도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의도를 따라 살지 않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인다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