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1/25일) 신흥무관 동창회원을 중심으로 경기.평택지역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최근에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 평택지역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이 지역의 인문.지리.역사를 꼼꼼히 조사하고 기록하고 계신 향토사학자 김해규 샘을 모시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평택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이신 우당 이회영 집안과 관련있는 경주이씨 가문 지역을 찾았습니다. 이 일대 5만 여평이 우당 집안의 땅이었는데, 1910년 서간도에 독립군 양성소를 설립하여 무장독립투쟁을 하기 위해 급히 처분을 했다고 합니다. 시가의 30% 수준으로 당시 집안의 마름한테 팔았다 합니다.
날씨는 비교적 따뜻했고, 비가 추적추적 내려 사방이 고요하여 김샘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1912년 추가가에서 합니하로 이전했던 신흥무관학교 (추정도):
이곳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이끌어 갈 간부를 양성하였고, 1920년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011년 여름 답사 때 가보았던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터
평택은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삼남길을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 중 길옆에 보기 힘든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어 사진으로 담아봤습니다.
다음 장소는 요즘 드라마로 뜨고 있는 삼봉 정도전 기념관입니다. 삼봉과 관련된 유적지는 이곳이 유일하다 합니다.
삼봉이 추구하고자 했던 조선 건국정신, 혁명에 대해 간략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사당을 관리하는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민본재
현판 글씨는 지금부터 12년전 (갑신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쓰셨습니다.
민본재의 마지막 글자가 '재'인지 '루'인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조선 건국의 기틀을 세운 문헌공 삼봉 정도전을 배향하는 사당, 문헌사
1차 왕자의 난 때, 왕권 강화세력인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참수 당하고, 조선 500년 동안 복권이 안되다가 고종 2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조선의 왕궁, 경복궁 건설의 공을 들어 비로소 복권되었다 합니다.
삼봉 정도전 초상
아래로 다시 내려와 삼봉기념관 안을 구경하였습니다. 삼봉의 저서를 목판으로 만든 것.
복권이 안되었던 조선 시대 때도 삼봉의 저서는 정조 때를 비롯하여 몇차례 출판되었다 합니다.
다음 답사지인 원균장군의 묘
원균장군은 1540년 이곳 평택시 도일동 내리마을에서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순신 장군보다 5살 연상이었으며 기골이 장대한 용장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칠전량 해전에서 아들, 동생과 함께 전사하였는데 이곳의 묘는 가묘입니다.
원균 장군 묘 앞에서, 원균의 입장에서 역사 속의 공과 과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 일행. 김 샘께서는 이순신 장군의 그 유명한 23전 23승 가운데 13승은 전라좌수사, 경상우수사, 경상좌수사 등 3지역 해군의 연합함대에 의한 승리라는 사실로부터 원균 장군도 임진왜란 때 분명히 전공이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공도 우리 역사의 위대한 인물, 이순신 장군과 갈등과 더불어 칠전량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에 따라 삼도수군절도사에 오른 원균 장군도 처음에는 부산포 공격을 반대했으나, 권율 장군에 의해 한양(?)으로 불려와 곤장을 맞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 왔을 때 동생과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내가 부산포 공격을 하지 않아도 죽을 목숨이고, 부산포를 공격해도 죽을 목숨이지만, 장수로써 비겁하게 전투를 회피하진 않겠다"
원균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로부터 권율,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선무 1등공신에 올랐다. 당시에 전투에 패한 장수를 1등 공신에 올리는 것은 거시기하다고 신하들이 말하자, 선조께서는 칠전량에서 패전한 것이 어디 원균만의 잘못이냐, 그러면 부산포를 공격하라고 무대포로 명령한 권율 역시 과가 없다할 수 없으니 권율과 함께 2등 공신으로 강등시키랴? 하니 신하들이 더이상 반대를 못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 때는 그렇게 비난을 받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나 박통 시절 이순신 장군을 부각시키면서 원균 장군은 천하의 모함꾼에, 무능한 장군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고 그 후손들은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균 장군의 묘가 지금처럼 성대하게 조성된 것은 이러한 원씨 후손의 명예회복의 일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뭏든 국운이 걸린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했기에 역사에 자랑할 수 있는 장군은 아니겠지만, 그가 지은 잘못 이상으로 매도당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 인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답사 현장이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 현대 평택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송탄시 미군 오산기지 앞 기지촌 풍경입니다. 서울의 여느 대학가 거리처럼 옷가게, 카페, 술집, 음식점이 있었고 오늘은 토요일이라 외출 나온 미군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송탄시 미군 기지(오산기지) 출입문입니다.
오산기지가 오산에 있어 오산기지가 아니고, 기지 명칭이 오산기지라서 그리 불린다 합니다. ^^
이곳 평택의 대표음식은 바로 부대찌개.
부대찌개의 원조가 바로 송탄의 부대찌개랍니다. 가장 유명한 최네집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해서 못 갔고, 그 다음 최근에 뜨고 있는 김네집는 우리 일행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장소가 비좁아 못 갔고, 세번째로 유명한 서정리역 앞 조네집에 들러 부대찌개와 보드카, 소주를 반주로 해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일행은 다음 답사를 기약하며 서정리 역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첫댓글 홍샘. 수고하셨네요. 계획은 내려가는것인데.... 못같네요.
역시 홍선생님 ㅎㅎㅎㅎㅎ 원균에 대한 새로운 정보 엄청 고맙습니다. ㅎㅎㅎㅎㅎ
답사 후기 감사합니다. 역시 홍석경 총무님의 정리 능력 대단하십니다. 훌륭한 복습이 됐습니다. 다만 '선조대왕'은 그냥 '선조'가 맞겠죠? '옳바른'은 '올바른' 그리고 부대찌개 먹은 식당은 서정리역 앞에 있는 '조네집'이지요.
흑, 맞춤법이 틀렸군요. ㅠ
곧 본문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