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내가 자취하던 상도동 집에서는> 대학시절 자취를 했다.어머님 표현에 의하면 쓸개질 (빗자루질) 한번 않하고 손쉽게 자란 몸이 나였다. 바꿔 말하면 제손으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냄비 밥을 짓고 국도 끓이고 손으로 옷을 빨라 말려 입어야 하며 볕이 좋은 날엔 이불 빨래도 손은 물론 발까지 동원해서 널고 말리고 사는 동안 틈틈히 공부도 병행하는 처음 부딪힌 신천지 생활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살림을 차린 셈이었다. 학비를 마련해 주시고 지극한 사랑으로 늦둥이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다하시던 둘째형님의 기숙사 입주 권면을 뿌리치고 택한 고생길은 많은 부분 친구가 좋아 함께 살고 싶은 속내가 작용했고 한편은 자립에 대한 도전의식도 있었다. 주착없이 일찍 탕진한 생활비 고갈로 어이없이 허덕일 때는 여자친구(지금의 아내)가 사주는 넉넉한 고기파티로 주린배를 면하기도 했었다 . 고단한 서울 생활에 지쳐 심하게 앓아 누울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간호사였던 여자친구가 어김없이 영양제를 주사(注射)해 줘서 기사회생하던 기억도 또렸하다. 지금의 아내는 그때부터 무려 40년을 한결같이 내조를 한 셈인데도 간혹 볼멘소리로 타박하고 구박한 세월이 부끄러워 사랑이라는 말이 어거지 변명같아 맘이 궁색하다.
각각 학교가 다른 친구들의 통학 거리를 감안하고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3만원을 알뜰하게 물어내며 셋이서 같이 상도동으로 보금자리를 정해 동거한(同居) 자취생활에는 나름 생활 수칙이 있었다. 절대 음주.흡연 금지와 쉽고 간단한 취식이 불러 올 위장장애를 염려하여 라면반입을 엄금(嚴禁)했는데 몇차례 개.종강파티때 만취했던 한 친구의 일탈 외엔 잘 지켜냈다. 빗자루질 한번 않했던 나였지만 어쩌다 보니 요리를 담당하게 됐고 곧 잘해냈다. 살림이라는게 하다보면 요령도 생기고 솜씨도 는다. 배추국.아욱국도 맛나게 간을 맞추어 내는가 하면 콩나물국과 소고기 무국에 더해 생일날 먹는 미역국 정도는 눈감고도 뚝딱 끓여 낼 줄 안다. 반찬류 중에서는 꽤나 까다로운 것이 생채무침이나 호박볶음인데 아삭아삭하고 싱싱한 식감을 유지하기가 생각보다 힘든 반면 아주 간단한 듯해도 오뎅(어묵)볶음이나 콩나물 무침은 비린내 없이 담아내야 하는데 그 신통한 비결도 그때 터득했다.
밥상을 차려 내어 놓는다는 것은 어쩌면 살림하는 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식구(食口)들 눈치를 살피게 되는데 다름아닌 반응이다. 맛있게 먹어주면 뿌듯하지만 시원찮은 눈치를 보이면 여간 속상한게 아니다. 살림하는 여자 마음이다. 그때 그시절 살림꾼으로 일희일비 하던 기억때문에 적어도 난 결혼하고나서 반찬투정은 해보질 않았다. 살림하는 마음을 이해 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긴시간 집을 비워도 아이들 먹거리는 걱정하지 않는 우리집 이다. 먹고 탈이 나지 않을 만큼의 솜씨를 대타(代打)인 내가 갖고 있는 덕이다. 자랑같지만 책이나 유트브의 도움없이 차려 낼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가 동.서양 메뉴를 아울러 50가지는 된다. 세상 살이 도둑질 말고 다 배우라는 말이 철석같이 믿어 진다. 번거롭고 힘이 들던 자취생활하며 터득한 살림살이 기술이 이토록 요긴하게 쓰일 줄 누가 알았던가 말이다. 우리집 식탁에 앉아 내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맛본 많은 지인들이 분명 글의 진실여부에 대한 증인이다.
부엌살림은 보기보다 바쁘다. 모처럼 주말에 친구 셋이 방콕하다 보면 삼시세끼를 해 먹어야 하는데 참으로 분주하다 . 9시에 아침먹고 설겆이 하면 곧바로 점심식사 일과가 반복되고 짬을 내서 과제나 독서를 하다 보면 간식거리 별반 없던 시절의 한참 왕성한 젊은이들의 식욕이 저녁밥 짓는 일에 나를 의무처럼 내어 몬다 . 저녁상을 물리고 뒷정리 하고 없는 전기 밥솥 때문에 아침쌀을 물에 담그고 젖은 손을 닦으면 밤 9시가 넘어선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는 일도 빈번하다. 골똘히 메뉴를 고르고 골라 장보는 일. 각종 양념류를 제때 마땅하게 준비해 두는 일은 두번째 문제이고 밥을 다 준비 했는데 식구가 때 맞춰 모이질 않는게 화근이다. 차려놓은 음식을 제시간에 냉큼 달려들어 먹어주면 좋겠건만 핸드폰도 없는시절에 연락할 방법도 전무(全無)한채 오지 않는 식구를 마냥 기다려야 한다. 같이 먹을 마음에 이제나 저제나 하며 문밖에 시선을 꼿아두고 연탄불에 국을 뎁히고 또 뎁힌다. 졸아드는 국물에 물을 부으면 애시당초 맞춘 양념간이 엉망이 되니 속이 상해 울화통이 터지는데 밤 12시나 돼서 술이 취해 돌아와 문턱에 쓰러진 채 횡설수설 하던 친구를 하마터면 때릴 뻔 했던 기억도 있다. 가사노동은 육체적 희생만 있는것이 아닌 정신노동이다. 사랑과 정성이 받쳐든 집중력 있는 요리과정이 맛을 보장한다고 나는 믿는다. 음식맛은 손맛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양념과 재료를 넣는 순서에 따라서 차이가 나고 가열(加熱) 정도와 수분함량에 의해 맛이 좌.우 된다고 보면 온맘을 다 쏟아 붓고 착오 없는 요리의 전과정을 잘 치뤄내야만 엄지척을 받고 안도 할 수 있다. 음식은 때우는 것이 아닌 생명을 연장하는 원천이기 때문에 살림을 하는 아내들은 결국 식구들의 생명수를 공급하는 고마운 존재 인식에 걸맞는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자취생활을 추억하며 부엌살림만 지루한 푸념처럼 늘어 놓았는데 우리가 살던 그집은 시장통 옆 이었지만 달동네 같은 환경이었다. 공동 수돗가에 공동화장실을 5가구가 나눠썼다. 영등포에 있는 본집에 살며 월세 받을 때만 오시던 주인할머니가 대학생이라고 조용한 뒷켵의 외진 방을 주셨는데 우린 형식상 두칸인 방 모양을 빗대 로켓트 방이라고 자칭(自稱)했다. 허름한 문을 열면 바로 연탄아궁이가 있는 부엌이고 다시 쪽문을 열면 기다란 로케트처럼 생긴 방의 한가운데를 연두색 커튼으로 막아 수면실과 공부방으로 나눈 심플하고 초라한 그곳은 내가살던 시골집 소(牛) 여물 창고 보다도 작았다.
땀냄새와 피곤에 지친 코고는 소리가 진동하고 생활고를 못이겨 악다구니를 쓰며 주고 받는 세입자들의 욕지거리가 난무하던 상도동 자취집 시절은 지금은 추억이고 그때는 내가 장차 바꾸어야 할 불편부당하고 억울하며 불공평한 세상을 향한 사명감 같은 무거운 주제였다. 스무살 청년의 힘있는 눈과 가열찬 마음에 칼날같은 사회의식을 심고 가꾼 때였다.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꽃처럼 환하던 지금의 아내가 내가 가진 총기와 바른생활태도만 보고 희망이 되어 자취방을 찾아와 준 것이 그나마 한줄기 빛이었다. 내가 그뒤로 줄곧 그녀에게 빛과 희망이 돼주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큰 부채감으로 남아 있어 아쉽다.
철대문을 열면 왼편 쪽마루 안쪽으로 구로공단 비누공장에서 일하며 혼전동거하던 젊은 커플이 살았고 수돗가 바로 앞에 방과 깊숙한 안채 방엔 꼭같이 1남1녀를 가진 재원이네와 영웅이네가 궁핍하고 허기진 삶을 지탱하며 하루건너 부부싸움을 했다. 오른편쪽 담장을 등지고 버선코 처럼 튀어 나온 볕이 잘드는 방엔 낮에는 자고 밤에는 분냄새 풀풀 날리며 사라지는 유흥업소 나가던 누이들 세명이 살림살이 없이 잠만 잤다. 떡뽁이나 오뎅국을 만드는 날엔 괜히 나 혼자 생각으로 자주 울던 누이들이 불쌍해 보여 은밀히 나눠 주다가 친구들에게 들켜 오해를 받고 눈흘김을 당하며 허접하게 웃던 일도 있었고 가구를 옮겨주다가 연탄불에 올려 놓고 간 냄비의 플라스틱 꼭지가 녹아 버려 당황한 기억도 있다. 강원도 촌놈이니 서울살이 하느라 지친 시골 출신 누이들에게 동병상련의 인정을 베풀려다가 마주한 에피소드일 뿐 흑심은 없었다. 그때는 세상의 고뇌와 가난과 불우한 일은 다 내 책임인 양 심각하던 열혈 청년중의 하나가 나였다.
바람 잘날 없던 그곳의 공식주소는 상도1동 244ㅡ133번지 17통3반 이었다. 없이 사는 것도 추스르기가 힘겨울 텐데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웬 싸움은 뻔질나게 하는지 눈물이 흥건한 스토리도 많다. 수돗가 바로 옆방에 살던 재원이네와도 사연은 많다. 셈베과자 공장 다니던 소심한 아저씨가 여러차례 건네 주는 과자에 담긴 감사한 손길을 되갚는 마음과 반찬 만드는 요령을 알려준 몸집이 넉넉하던 재원엄마가 고마워 자청한 재원이 에게 베푼 무료 과외 였지만 무엇을 입어도 배꼽이 보일만큼 통통한 녀석은 먹는 시간 외엔 노상 졸았다. 똑소리 나던 여동생 재숙이와 달리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던 재원이와 여동생 재숙이는 지금은 50의 나이가 다 되었을 텐데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약골인 미스터 셈베과자 재원이 아버지는 부부싸움은 했지만 오히려 살집 좋은 아내에게 지금 더듬어 보니 맞고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
어느 날인가는 나 혼자 있는 우리집 문턱에 피를 철철 흘리며 내 이름대신 학생!학생! 이라고 부르며 쓰러진 영웅이 엄마를 들쳐없고 동네 병원에서 무려 마흔 다섯 바늘을 꿰메고 내 돈으로 일만 이천원을 병원비로 내준 적도 있다. 영웅이 아빠는 술만 취하면 아내를 두들겨 팼다. 육척장신에 남궁원처럼 잘 생긴 그는 평소의 젊잖은 모습을 술에 차압 당하고 난폭해 졌다. 그날도 소주병으로 아내를 내리치며 분풀이를 했고 영웅 엄마가 흘린 피는 내가 뒤집어 썼었다. 1979년도 20억이면 천문학적 숫자인데 영웅이 엄마가 대형 계모임 오야(계주)를 하다가 파동을 내서 노량진 수산시장에서도 알짜배기로 소문난 가게를 날리고 급기야 방 한칸에 네식구가 웅크리고 살게되니 남편의 울화병이 폭력과 우울증으로 합병(合病) 이 된것이다. 하옇튼 술도 마실줄 모르던 내가 겨울에도 냉기가 오싹하던 영웅이네 안방에 끌려가 술에 취해 굶주린 맹수처럼 변해 버린 영웅아빠의 한탄과 울분을 몇시간씩 지켜보며 목구멍으로 삼키는 고초를 견뎠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갔다 , 5가구는 어제와 오늘이 다름없고 발전도 없이 근근히 살아 갔다. 문간방 혼전동거 젊은이가 좁은방에 모시던 할머니가 치매로 근심거리가 되신 것 외엔 그날이 그턱 이었다. 내가 먼저 자취방을 나와 군대로 갔다. 친구들이 6개월을 더 살다 입영(入營)을 하고 로켓트방은 우리 셋의 일기장 한켠에 추억이 되었고 젊은 날의 붉은 단풍잎이 되어 버렸다, 특별히 소중할 것은 없다 해도 같은 울타리안에서 녹녹치 않은 삶을 이겨 나가던 식구들에게서 배웠고 호주생활 초기에 밀려드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넘어서는데 그때 그 시절은 꽤나 도움이 됐다. 군을 제대하고 영화처럼 찾은 그 집에는 아직 재원이네가 여전한 가난을 뒤집어 쓰고 끙끙거리며 살고 있었고 재원이 아버지는 셈베공장 반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맥스웰 커피 한잔에 들깨와 김이 듬성듬성 박힌 셈베과자를 내주며 펑퍼짐한 재원 엄마는 영웅이네 가족의 소식을 눈물과 함께 건네 주었다. 그곳에 살때도 아빠엄마의 투견싸움 같은 다툼이 있을 땐 우리방에 와서 숨어지내던 영웅이와 여동생 채림이. 한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못하던 잘생긴 영웅이 남매. 연탄을 지피지 못한 냉골방에서 겁에 질린채 야윈 새처럼 떨고 살던 영웅이와 채림이네는 내가 군대가고 얼마 후 상도동을 떠나 부천에 연립주택 한칸을 얻어 이사를 했다고 한다. 몹씨 추운 겨울날 지하 연탄 보일러실에서 몸을 녹이던 남매는 환풍창을 닫고 잠이 들었고 일산화탄소는 그들의 생명을 아주 거두어 갔다. 남매는 그렇게 다신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는 재원이 엄마 말에 속이 푹 패일 만큼 속을 끓이고 눈물을 왈칵 쏟아 냈었다. 가수 정태춘이 부른 노래 <우리들의 죽음>에 흐르는 나레이션 같은 영웅이와 채림이의 짧은 삶이 슬픈 영화처럼 나의 뇌리 한쪽구석에 지금도 살아 있다. 1984년 봄날의 이야기다. 자꾸 옛생각이 나고 조금만 슬픈일에도 눈물이 비치는 것이 늙어 가나 보다. 늙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나도 피해가기 어려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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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드라마, 영화를 보는듯 잠시 푹 젖었네요. 젊은이들이 모르는 가난했던 그시절, 미래가 암흑처럼 캄캄하던 그시절.... 슬픔과 분노를 안고살던 그시절 오늘 다시 아픔이 가슴에 밀려들어옵니다.
작가님 글 그리고 지기님 댓글 모두가 불과 얼마전 우리의 처지였었죠 隔世之感 이란 표현이 적절합니다
아무리 경험을하고 마음에 있어도 이리 드라마틱하게 표현할수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텐데 대단하십니다
저는 김창완의 청춘이 떠오르고 남매가 연탄가스에 죽었다는게 너무 슬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