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국사를 공부하게 된 것은 ‘욕심’이었지만 어떤 눈으로 중국사를 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우연 가운데 하나는 1978년 김경진(75) 선배로부터 <<동양문화사>>(라이샤워, 페어뱅크 著 ; 全海宗, 高柄翊 共譯, 서울 : 을유문화사, 1964. 원저: East Asia the great Tradition : A history of East Asian civilization, 1960년 간행)라는 책을 받은 것이다. 이 책은 이미 나온 지 40여년이 되었고, 그 개정판이 1991년 서강대 팀에 의해 번역되었다. 중국사 부분의 저자인 페어뱅크(작고)는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중심에 있었고, 학술적으로도 미국의 중국사 연구의 대부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대가와 미국 학계의 개방적 인식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1970년대 말 내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국사 개설서라고는 고작 <<東洋史大觀>>(曺佐鎬), <<中國通史>>(傳樂成 著; 辛勝夏 譯), <<中國最近世史>>(金俊燁), <<中國歷代政治의 得失>>(錢穆 著; 辛勝夏 譯) 등 지금 보아도 고색창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나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80년대 초가 되어서 비로소 맑시즘에 기초한 중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비롯하여 중공의 입장에서 씌어진 책도 조금씩 접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당시 고조되던 중공이나 사회주의권, 그리고 동양사에 대한 나의 관심을 학술적으로 접근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그 공백을 매워주고 있었던 것이 <<동양문화사>>로 상징되는 미국의 중국사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중국어나 일본어가 더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영어권 연구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게 되고, 또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다각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비록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27년 전의 그 우연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열린 제국 : 중국 고대-1600>>(발레리 한센 저, 신성곤 옮김, 서울: 까치, 2005.5)도 최근 미국의 중국사학에 대한 흐름을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예일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로서 둔황과 투루판에서 출토된 계약문서를 분석해서 10세기 중국인들의 계약관행과 사후세계의 관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진 신진 여성 중국사학자이며, <Changing Gods in Medieval China, 1127-1276>, <Negotiating Daily Life in Traditional China> 그리고 <How Ordinary People Used Contracts, 600-1400> 라는 세 권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역자는 이 책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관료나 사대부들이 기록해놓은 과거의 문헌자료에 대한 회의적 시각, 과거 비역사 자료로 여겨졌던 문학 자료와 예술자료 및 출토자료에 대한 역사적 이해, 인물 및 시대배경의 세밀하고도 탁월한 분석, 황제나 관료가 아닌 일반인이 느꼈던 종교적 관념과 일상생활, 한족보다는 역사에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한 주변 소수민족을 재구성한 모습들, 남성 중심의 역사보다는 증대되어가는 여성의 역할과 활동상 등을 강조하는 것 등이 그 실례이다. 둘째, 재미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중국 역사서나 정치사 위주의 왕조변천사 내지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사회경제사를 뛰어넘어 한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그리고 가끔은 격렬하게 들려주고 있다. 갑골문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여성 부호(婦好), 장중한 의례의 희생으로 바쳐졌던 이름 없는 강족(羌族) 사람들, 긴 유랑생활 끝에 금의환향한 중이(重耳), 사후에도 현세처럼 살고 싶었던 마왕두이의 대후 부인, ‘동약’에 등장하는 제 꾀에 넘어간 노비 편료, 시대에 좌절한 뛰어난 여류 학자 반소, 출가를 위해서 부친을 눈물겹게 설득한 비구니 안령수, 중국 유일의 여자황제였던 측천무후, 기녀 출신으로 남편을 과거에 급제시킨 이와, 원진에게 사랑의 배신을 당한 가련한 앵앵, 오아시스 도시 투루판의 사채업자 좌동희와 둔황의 과부 아룡, 정치적 부침과 개인적 회한을 간직한 시인 백거이와 원진, 역사와 경전을 각기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라이벌 사마광과 왕안석, 남성보다 더 뛰어났던 시인 이청조와 화가 관도승, 관도승의 남편이자 이민족 치하에서 고뇌했던 조맹부, 도적 두목에서 지방장관이 된 여성 양묘진, 중국인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더 중국인다웠던 마테오리치, 주신의 그림에 보이는 이름 없는 걸인들, 베이징으로 사업여행을 나섰던 <<노걸대>>속의 한국인들…… 이 모두가 하나같이 한 시대를 이야기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인문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셋째, 매우 과감하고 명쾌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크게 세 개로 시대구분 하였다. 초기 중국적 원형이 형성되는 창조기(기원전 1200-기원후 200), 불교의 전래를 중심으로 한 서방과의 대면기(200-1000), 정복왕조와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북방과의 대면기(1000-1600)이다. 아마도 이런 시대구분이라면 1600년 이후는 다시 서방과의 대면기가 될지 모르지만 책은 1600년으로 마감하였다. 이런 시대구분은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열린 제국: 중국’이란 말에 걸 맞는 것이며, 기존의 고립적이고 폐쇄적 중국이란 선입관을 비판하고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중국상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역자가 제시한 것 이외에 흥미 있는 부분을 들면 다음과 같다. 갑골문 속에 보이는 남아 선호 사상, 신장의 백인종 사체와 전차 이야기, 시경을 통해 본 주대의 일상생활 및 조상숭배, 풍환을 통해 본 능력주의 시대로서의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의례와 맹약, 환경 악화에 대한 증언, 수호지 무덤에서 발견된 진간 자료와 진 왕조의 통치, 당 황제의 지옥여행, 목련의 지옥구모(地獄救母) 설화, 송대 지주와 관료의 결혼 생활, 청명상하도에 나타난 도시생활과 요대 북방의 사회생활, 전족의 확산, 神과 商品의 관계, 요대의 결혼 초상, 판타지의 세계 :마르코 폴로, 몽골시대의 사회변화와 언어변화, 유럽의 배와 중국 선박의 비교 및 정화의 원정, 죽은 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표현한 한 아버지의 제문, 왜 기독교 교리가 개종의 장애물인가에 대한 조목별 서술, 신대륙 작물 및 인구증가의 영향 등이 그것이다.
또 저자는 문학작품을 통하여 시대변화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이와전[백행간(776-827; 백거이의 동생)이 795년에 지음], 앵앵전[원진(779-831) 지음], 제궁조서상기(동해원이 1190-1208년경 지음. 본문에는 서상기로 되어 있으나 중국문학사에서는 제궁조서상기라고 한다), 두아원[관한경(1220?-1307?) 지음], 서상기[왕실보(1250-1300) 지음], 원림오몽[이개선(1502-1568) 지음] 등을 통하여 각 시대별 여성의 위치나 사회적 가치를 서술한 부분은 역자도 말한 것처럼 비록 사료적 가치의 문제는 있을지 모르나 독자들에게 당시 사회를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예컨대 “(明代에는) 앵앵의 행동과 명문집안의 딸로서의 혈통을 조화시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원진이 8세기에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썼을 때, 명문집안의 소녀들은 혼전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1500년대에는 한층 구속적인 도덕이 중국 사회를 얽매고 있었다. 앵앵은 기생과 도덕관념이 해이한 여자주인공에게나 걸 맞는 역할인 ‘화려하게 분장한 여자 배우’가 연기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의 원림오몽(園林午夢 : 한 어부가 오후에 졸다가 앵앵과 이와가 만나는 꿈을 꾼 것)에서는 혼전관계나 기녀가 된 것에 대해서도 비난함으로써 도덕적 기준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홍무제가 실시한 과부 재가의 억제 등 엄격한 도덕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이 시대적 변화에 대한 한 원인을 제시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미 개설서 수준에서 일상사와 미시사적 서술이 각종 거대담론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의 변화를 통감한다. 시원한 나무아래서 피서삼아 한번 읽어보시길……
목차
제1부 중국적 원형의 창조기(기원전 1200 - 기원후 200)
제1장 문자기록의 시작(기원전 1200? - 기원전 771)
용골 한약재와 초기의 한자 / 안양의 발굴/ 타국과 상나라의 관계 / 주나라의 상나라 정복
제2장 사인의 시대와 사상가 : 중이와 공자(기원전 770 - 기원전221)
'좌전'과 '좌전'에 그려진 사회 / 승리를 위한 중이의 투쟁 / 공자의 세계
세계의 분열 : 공자 제자들의 불협화음
제3장 제국의 탄생(기원전 221-기원후 200)
법치국가 / 지역 통치자의 세계 : 마왕두이의 출토유물 /한 무제 통치하의 한왕조
/ 한대의 경제문제 / 후한의 부흥 / 후한왕조에서의 황후의 권력 /도교 교단의 성립
제2부 서방과의 대면기(200-1000)
제4장 중국의 종교적 경관(200-600)
중국 최초의 불교 전래 / 중앙 아시아의 불교 : 쿠차 왕국의 사례
인도와 중국의 접촉 / 북위왕조(386-534) / 강남의 종교생활
제5장 중국의 황금시대(589-755)
수왕조의 제국 통합정책 / 수왕조의 몰락과 당왕조의 창업
수도에서의 일상생활 / 농촌에서의 일상생활
제6장 안녹산의 반란과 그 여파(755-960)
안녹산의 반란 / 755년 이후의 둔황
제3부 북방과의 대면기(1000-1600)
제7장 화폐와의 타협 : 송왕조(960-1276)
첫 번째 상업혁명과 그 영향 / 송왕조의 건국
화북지역에 대한 회고 / 남송 치하의 생활상(1127-1276)
제8장 북방민족이 건립한 왕조 : 화북의 비한족 통치(907-1215)
거란 / 여진의 흥기 / 금나라 통치하의 학술과 문화 / 화북과 강남의 분열
제9장 몽골(1200?-1368)
몽골 연맹체의 기원 / 칸의 궁정을 방문한 서구인들
몽골의 강남 정복 / 조맹부와 수준 높은 표현예술 / 몽골의 멸망
제10장 몽골과의 끊임없는 전투 : 명(明, 1368-1644)
명왕조의 창업자와 그가 지향한 체제
정화의 원양항해 / 명왕조의 사회변화 / 명대의 두 번째 상업혁명
<2005. 6. 12. 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