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90세인 어머니는 시골에서 혼자 생활하시며 틈틈이 불경을 배껴 쓰는 사경을 한다. 지금까지 사경한 노트가 수백 권은 될 듯싶다. 어머니가 늘 펜을 쥐고 무언가를 써온 탓인지 어머니 기억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이 아들보다 총명할지 모른다.
아들이 출판사를 하니 종종 어머니가 읽기 편안한 에세이를 가져다 드리곤 한다. 어머니는 당신이 다 읽은 책을 일주일이면 몇 번씩 방문하는 보호사에게 건넨다. 엊그제도 당신이 읽은 책을 건넸더니 자기도 벌써 읽었다고 하여 깜짝 놀라셨단다. 90세 노인네가 책을 읽고 있으니 무슨 책인가 싶어 제목을 검색하고 인터넷으로 구매하며 읽었다는 것이다.
특히 어른들에게는 에세이기 편하게 읽힌다. 때로는 그 안의 내용에 공감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저자가 자기와 동시대 사람이기도 하고, 때로는 아들딸 세대이기도 할 것이다.
이번 어버이날에는 부모님에게 책 선물해보면 어떨까 싶다.
부모님이 6~70대라면 민혜 수필집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 나 이명지 수필집 [육십, 뜨거워도 괜찮아]가 좋을 것이다. [육십, 뜨거워도 괜찮아]는 부모님을 지금보다 훨씬 활기차게 할 것이다. 70대 이상이라면 민혜 작가가 엮은 [어머니의 불]을 추천한다. 이 책은 저자 어머니가 53년 동안 써온 일기에다 저자 생각을 조금씩 붙여 묶은 에세이집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아, 어머니’ 하는 안타까운 탄성이 터지기도 한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아래 글은 [어머니의 불]에서 발췌한 일기다.
1962년 7월 25일
돈 가지고 온다는 남편은 소식도 없다. 최고 더위로 마음도 피도 다 타는 것 같다. 한두 시간 애태우며 울기도 하고 기막힌 듯 웃음도 지어 보다가 서교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애태우며 걸어가니 그만 정신조차 아찔해진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첩은 저녁 찬거리를 사 가지고 들어온 양 얼굴이 빨개 가지고 샐쭉하며 “어서 오세요.” 한다. 첩은 저녁을 하는 지 왔다갔다하더니 얼마 후 들어온다. 일이 끝났는가 물으니 그렇다기에 내가 묻는 말에 해명을 해달라며 입을 열었다. 왜 우리 애들에게 악담했는가, 왜 나보고 고소하라고 했나, 내가 고소하면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 하고 물었다. 임■■는 악담한 건 잘못이라고 하며 고소하라고 했던 건 자기 죄가 많아 법의 심판이라도 받을 생각이었다며 급히 말했다. 나는 좌우간 당신을 첩으로는 절대 인정 못한다며 못을 박았다.
잠시 후 남편이 술에 취해 들어왔다. 언제 왔느냐며 묻는 게 영 못마땅하다는 눈치다. 나는 돈 때문에 왔다고 했다. 술에 취한 남편은 자리에 누워 자는 척을 한다. 나는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화를 벌컥 내며 “내가 없어져야지.”라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나섰다. 남편은 어딘지도 모를 샛길로 가면서 따라오지 말라며 뛰었다. 나도 따라 뛰어갔다. 한강에라도 따라가겠다는 심정으로. 그러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집으로 가겠으니 돈 100원만 꿔달라고 했다. 남편은 집으로 가더니 꼬깃꼬깃 접은 돈을 주며 비관 말고 잘 가라고 한다. 오는 길에 차창 밖을 보니 길바닥에 참외가 널려 구미가 당겼다. 침을 삼켜가며 저것 하나 못 사 먹어 보는구나 싶었다. 통금 시간이 다되어 한적한 정릉 골짜기를 지나 우리 집으로 왔다.
아버진 58세 때 간암으로 고인이 되셨고, 엄마는 지금 요양원에 외로이 누워 계신다. 한 시절 엄마에게 말 못할 상처를 남긴 임■■씨의 생사를 알 길 없지만 모두가 지난 일이기 때문인가 그녀를 향한 연민이 인다. 누군들 남의 첩이 되고 싶었겠는가. 첩이란 소리가 얼마나 듣기 괴로웠으면 엄마에게 악담을 퍼부었을까. 살아있다면 한 번쯤 그녀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문득 일었다. 삶의 매듭을 풀고 싶었다.
이혼율이 높아진 요즘이라면 이상하게 보일 법하지만 엄마는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애정이었는지, 오기였는지, 아니면 그냥 신앙 같은 거였는지. 일부종사라는 신앙. 그리고 자식이라는 신앙.
1962년 8월 19일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배고픈 설움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벗에게 쓰는 이 글도 생활고로 20일간 얼마나 근심을 했는지 글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쓸 노트도 떨어지고 하여 비로소 오늘에야 쓴다. 그러다 보니 너무 쓸 것도 많고 잊은 것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생각나는 대로 줄거리만 쓰기로 한다.
8월 1일부터 3일간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오는 밤에 홀로 집을 지켰다. 남쪽으로 떠나간 삼 남매를 생각하며 비 오는 무서운 밤을 지냈다. 5일 날은 세계적인 명배우 마릴린 먼로가 자살을 해서 나도 무척 슬펐다. 나 자신도 외로움 때문에 비관하는 입장이라 고인이 된 먼로 영혼에게 머리 숙여 애도하였다.
9일 날은 안면도에 간 진이에게서 아버지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왔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이러하다. 아버지, 약속은 잊으시지 않으셨겠지요(이 뜻은 진이가 없는 동안 엄마가 쓸쓸하니 집에 와서 자라는 약속이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인사해야 하는 서글픔을 주지 마세요(이 뜻은 며칠 만에 집에 오는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유를 원하기에 아버지의 행동을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싶지 않으니 속히 집으로 돌아오라는 애달픈 사연이었다. 어린 줄로만 알았던 진이가 제법 자기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공격하다니 이제는 진이가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편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으며 울었다.
9일은 승애가 소아마비에 걸려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놀란 나는 아무것도 못 사들고 빈손으로 문병을 갔다. 여기저기서 환자들 신음소리가 들렸다. 어쩌다 병에 걸렸을까. 얼마나 아플까. 안타까움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문득 우리 식구가 굶주리다 병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 다 팔고 하나밖에 안 남은 두 돈짜리 금반지를 팔아보려고 언니네로 갔다. 혹시 이웃에게 팔면 값을 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언니는 누가 지금 비싼 금반지를 사느냐며 내가 낄 테니 나에게 팔라고 한다. 나는 언니가 하자는 대로 반지를 내주었다. 언니는 곧바로 반지를 손가락에 낀다. 반지는 유난히 빛났다. 나는 마음이 퍽 우울했다. 내가 아끼고 아끼며 한 번도 껴보지 않던 게 언니 손에서 빛나고 있으니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반짝이는 반지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먹기 위해 판 거니까 반지 판 돈을 들고 시장으로 갔다. 소고기와 당면을 사 가지고 잡채를 만들었더니 남편도 애들도 맛있게 먹는다. 그러나 나만은 속이 쓰렸다.
1962년 10월 19일
사람들은 호강에 겨운 사람들은 팔자가 늘어졌다고 하고, 나 같은 사람에겐 팔자가 사납다고 한다. 과연 나는 팔자가 센 사람인가.
점점 쪼들리는 살림살이는 쌀도 한 가마니 사 오다 닷 말로, 다음에는 한 말로, 다음에는 한 되로 줄다가, 요즘은 한 되를 구하려면 피가 몇 그램 마를 정도로 돌아다니며 돈을 꾸어야 하고, 쌀 한 되를 사 오면 이걸 어찌 먹어야 넉넉하게 먹을 수 있나, 죽을 끓이면 물을 많이 붓고 끓여야 한 그릇씩 차지가 돌아가고 이마저도 없으면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도록 굶어야 한다.
어쩌다 시장엘 가면 돈 10원이나 20원을 들고 뭐가 제일 싼가 목을 빼고 몇 바퀴 돌다가 무 우거지 한 다발 사들고 터덜거리며 집으로 간다. 집에 가면 남편은 담배꽁초 찾느라 집안을 뒤지고 있다. 이 가난이 누구 죄의 대가인지 천주님께 알려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그러나 알려주실 리 만무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상할 때면 입속으로 예수, 마리아여, 죄인을 굽어 살피소서, 하며 끝없이 넓고 파란 하늘 향해 한숨을 쉬어 본다.
오늘도 짧은 해는 무심히 기울어간다. 저녁거리는 또 무엇을 마련해야 하는지. 학교에서 돌아오는 세 애들은 배고파서 올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수천 명을 먹이셨다 하는데 나에게도 기적을 베풀어주셨으면.
고통의 도돌이표. 언제나 똑같은 고통의 메뉴.
1962년 10월 21일
저녁거리가 없고 보니 서글프고 괴로운 심정을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다. 양심에 가책을 받아가며 핸드백 속에 외제 화장품을 넣어가지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하나만 팔아주세요 라고 애원해도 안 팔린다. 그러다 보니 쌀집에 쌓인 쌀가마니가 제일 부러울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1원이 필요해서 집안을 뒤져보아도 어느 구석에도 없다.
화단에 사루비아가 시들어가는 걸 보니 가을이 깊어가는 모양이다. 오르기만 하는 물가. 김장 고추 마늘 준비가 우리 집은 아직 꿈나라만 같이 아득하다. 조석으로 날씨가 몹시 쌀쌀해서 겨울 스웨터 하나 입고는 목을 웅크리게 된다. 진과 숙은 스웨터 하나 가지고 먼저 입는 놈이 제일 인 듯 싸움을 한다. 경대 앞에 앉아 내 얼굴을 보면 주름살이 자글자글해서 내 신세가 너무 가엽다. 파란 속에 어느덧 40이 되고 보니 억울하고 허무하다.
미제는 똥도 좋다고 하던 시대였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들을 몰래 파는 양키 물품 장사는 짭짤한 수입원이 되었다. 불법이라서 화장품이나 담배 등의 일용잡화를 몸속에 숨기고 감시의 눈을 피해 가며 팔았다. 가난한 엄마도 돈푼이나 만져보겠다고 미제 화장품 같은 걸 조금씩 받아다 가슴 졸이며 팔곤 했다.
남자들이 몰래 양담배를 피웠다가 걸리면 벌금을 물던 그 시절. 사실인지는 몰라도 경찰들은 2, 30미터 떨어진 데서도 양담배연기를 구별해 잡았다고 한다.
1962년 10월 27일
인생살이란 굽이쳐 흐르는 강물 같기도 하다. 잔잔히 흐르다 갑자기 파도가 일기도 하는 강물을 연상하며 나의 비운을 비교해 보기도 한다. 자주 끼닛거리가 떨어지고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고 보니 그 설움은 무엇에 비할 수가 없다. 동기간과 친척들은 나만 보면 궁색한 소리가 나올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럴 것이다. 이제껏 너무 많은 폐를 끼쳤으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외롭기 짝이 없다. 나와 가장 가깝던 사람도 멀어졌다.
푸근한 날씨에 함박눈이 펄펄 내린다. 거리엔 X- 마스 노래가 흐른다. 나는 성당에 교무금도 못 내서 판공성사도 보지 못했다. 그런 내 심정은 주님과도 멀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쌀 한 됫박으로 아침을 해 먹으면 저녁거리가 없고 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을 해 먹으면 아침거리가 없으니 자식에게도 할 도리를 못하고 산다. 심지어 여름옷을 겨울까지 입히고 있으니 이런 어미 심정을 어디에 비교할까. 남편 일은 무엇이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고 있어 환장할 지경이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모든 쌀과 연탄뿐이다.
교무금을 못 내서 판공성사(가톨릭 신자들이 1년에 두 번 의무적으로 보는 고해성사)를 보지 못했다는 내용에 갸우뚱했다. 어쩌면 엄마의 자격지심으로 고해성사를 못 본 건지 모른다. 혹은 교무금을 내지 않아 냉담 신자로 분류돼 성사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학교는 등록금을 못 낸 학생들에게 일시적으로 통학을 못하게 했지만 설마 성당도 그랬을라고. 아무튼지 돈 없으면 교회도 못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사람 사는 세상엔 어느 세계나 돈이 결부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