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용띠 4인방이 올해 미국 LPGA를 휩쓸고 있다. 겁없는 '박세리 키즈'의 경쟁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중앙SUNDAY가 그 속내를 들여다봤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중략)//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 작사,작곡 김민기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시절 TV에서 들려오던 노래 ‘상록수’. 박세리(31)가 맨발로 물속에 들어가 샷을 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흐르는 이 노래를 들으며 대한민국은 절망을 딛고 밝은 미래를 꿈꿨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인 고통이 뭔지 모르고 자라난 세대였지만 박세리의 흰 발에 오버랩되는 양희은의 노래를 들고 자란 그들은 마치 마술 피리의 구슬픈 가락에 끌린 듯 줄줄이 골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박세리 키즈(Kids)’의 태동이다.
◆박세리 키즈는 누구인가
“아빠, 저게 뭐하는 거야.”
1998년 7월6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 이제 만 10세가 된 소녀가 잠에서 깨 졸린 눈을 비비며 아빠와 엄마에게 물었다. 소녀의 부모는 새벽에 일어나 TV를 통해 중계되는 US여자오픈을 시청하고 있었다.
“응,저건 골프라고 하는 운동이란다. 저 언니 보이지. 이름이 박세리야.”
어린 소녀가 부모와 나눈 이 짤막한 대화 한 토막이 10년 뒤에 일어날 사건의 계기가 되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소녀는 TV를 통해 박세리 언니가 우승하는 모습을 지켜본지 이틀 뒤 골프 클럽을 처음으로 손에 쥐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난달 미국 미네소타주 에디나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박인비(20). 위의 대화는 그가 우승한 뒤 털어놓은 골프 입문 계기다.
‘박세리 키즈’는 박인비처럼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연장ㆍ재연장전 끝에 우승한 박세리의 성공에 자극을 받고 골프를 시작한 20대 초반의 여자골퍼들을 일컫는다. 박인비 이외에도 김인경ㆍ오지영ㆍ김송희ㆍ민나온ㆍ최나연ㆍ이선화 등이 대표적인 박세리 키즈다.
지난 6월 웨그먼스 LPGA대회에서 우승한 지은희와 브라질 교포 안젤라 박도 이 그룹에 속한다. 국내 투어에서 활약 중인 신지애와 김하늘ㆍ박희영 등도 빼놓을 수 없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선수만 해도 줄잡아 30명을 넘는다.
이 가운데 박인비ㆍ김인경ㆍ신지애ㆍ오지영ㆍ김송희ㆍ민나온ㆍ김하늘ㆍ안젤라 박 등은 1988년에 태어난 용띠 동갑내기다. 이선화와 지은희는 86년생으로 이들보다 두 살이 많다. 최나연과 박희영은 한 살 많은 87년 생이다. 그런데 88년생 가운데 걸출한 스타가 워낙 많다 보니 88년생 용띠 골퍼만을 박세리 키즈로 부르기도 한다.
◆박세리 키즈의 공통점, 펀더멘털
박세리 키즈의 공통점은 튼튼한 펀더멘털이다. 어렸을 때 골프를 시작한 뒤 체계적으로 레슨을 받은 덕분에 기본기가 탄탄하다.
김인경의 아버지 김철진(56)씨는 “인경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회 때마다 (박)인비ㆍ(최)나연ㆍ(오)지영이와 항상 우승을 다퉜던 사이”라며 “크고 작은 주니어 대회에서 마주치면서 서로 장단점은 물론 성격까지 훤히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또 “김하늘은 고교 때까지는 강호(?)에 이름이 없었는데 프로 무대에서 빛을 본 특이한 경우”라고 덧붙였다.
박세리 키즈를 읽는 또다른 키워드는 자신감이다. 서양 사람들만 보면 이유없이 주눅이 들었던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리낌없이 행동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80년대 말에 태어난 그들은 대부분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났다. 60년대와 70년대에 태어난 세대에겐 ‘상록수’가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가요’로 들리겠지만 박세리 키즈에겐 ‘응원가’로 들린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해외 투어에 대한 정보도 많아서 어렵지 않게 미국 생활에 적응한다. 박세리 키즈의 우상인 박세리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박세리의 말.
“요즘 한국에서 건너온 선수들은 정말 다르다. 무엇보다도 기량이 뛰어나고, 준비를 철저히 해서 그런지 쉽게 (미국 생활에) 적응한다. 경기장을 찾다가 길을 잃는다거나 한국 음식점을 찾아 헤매는 일도 없고, 외국 선수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한다. 이들이 나를 보고 골프를 시작했다니 나로서도 영광이다. 그러나 어떨 때는 이들이 부럽다. 우리들이 없던 길을 만들어 냈다면 이들은 선배들이 닦아놓은 탄탄대로를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박세리 키즈, 손오공의 세포 복제(?)
2008년은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지 꼭 10년이 되는 해. 박세리 키즈가 국내 무대는 물론 세계 골프의 전면에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이선화ㆍ지은희ㆍ박인비ㆍ오지영 등 올들어 LPGA투어에서 우승한 거둔 한국 선수들은 모두 ‘박세리 키즈’다.
특히 US여자오픈에서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박인비는 우상인 박세리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박세리는 1998년 20세 9개월의 나이에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최연소 우승 기록이었다. 그러나 박인비는 19세11개월의 나이에 보란 듯이 우승했다. 박세리의 최연소 기록을 10개월이나 당긴 것이다.
올해 2승을 거둔 이선화는 ‘리틀 박세리’라고 불린다. 견고한 스윙이 박세리의 전성기 시절과 흡사하다 해서 얻은 별명이다. 그런 점에서 박세리를 보고 자란 ‘박세리 키즈’는 박세리의 복제판이다.
J골프 성백유 본부장은 “박세리 키즈의 활약을 보노라면 손오공이 털 몇 가닥을 뽑아낸 뒤 훅 불어 여러 명의 분신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떠오른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박세리 키즈는 ‘제2의 박세리’를 넘어 ‘박세리의 분신’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제 20대 초반인데도 기량만큼은 세계 정상급 골퍼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1000대1 경쟁 뚫어 100대1정도는 부담 없어
어렸을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거쳐 살아남았다는 이유에서 박세리 키즈를 ‘젊은 사자’에 비유하는 시각도 있다. 특히 신지애와 김인경ㆍ김송희ㆍ민나온 등 88년 용띠 4인방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2005년 국가대표와 상비군에 뽑혀 한솥밥을 먹던 사이다.
김인경의 아버지 김철진 씨는 “다른 해에 태어난 선수들은 중도에 골프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88년 용띠 선수들은 낙오자가 거의 없다. 치열한 경쟁이 이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는 이유 외에 다른 말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골프의 산 증인인 민영호 중고골프연맹 부회장은 “주니어 대회 때 마다 1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경쟁을 벌인다. 올해 중고연맹 대회에는 1250명의 중ㆍ고등학교 선수가 출전했다. 1000명이 넘는 선수들과 경쟁하던 아이들이라 100여명과 우승 다툼을 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여긴다. 구름같이 갤러리가 몰려들어도 박세리 키즈는 겁을 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박세리 키즈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우상(박세리)보다 큰 선수가 될 지는 물론 미지수다. 그러나 이들은 젊다. 걸출한 기량에 경험까지 더해지면 파괴력이 얼마나 클지 상상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박세리 한 명의 파괴력보다는 ‘박세리 Ⅱ’ 10명의 파워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
21세기는 특출한 한 명보다는 개성이 강한 10명을 요구하는 다양성의 시대다. 하나의 대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보다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 살아남은 10개의 중견 기업이 이끌고 나가는 사회가 포트폴리오 측면에서도 더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레인보우 컬러’로 무장한 박세리 키즈는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박세리 키즈의 돌풍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정제원 골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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