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감상문
사회학과 2024130565 최우영
영화 <더 파더>는 치매 노인의 시선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치매에 걸린 삶을 체험하게 해준다. 기억의 혼란,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쓰지만 어쩔 수 없이 겪는 관계의 어려움, 익숙한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잃어가는 존재감을 있는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익숙한 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질 때, 자신의 정체성을 붙잡기 위해 시계나 그림 같은 물건에 집착하는 모습이 공감되었다. 언젠가 나 역시 나이가 들고 기억이 희미해질 때 이러한 경험을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치매를 ‘병’으로 규정할 때 노인들이 겪는 사회적 배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치매에 걸린 이들이 일상에서 멀어지고 요양원에 격리되는 과정은 무섭게 다가온다. 특히 마지막 요양원 장면에서 느껴지는 탁 막힌 느낌과 분리된 느낌은 이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해준다. 이는 노인들을 타자화하고 인간성을 훼손하는 방식이지만, 마을 공동체가 사라지고 가족 구조가 핵가족, 1인 가구로 변하면서 부양자의 처지에서 요양원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되었다.
많은 작품에서 치매를 소재로 다뤘던 박완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반드시 거치게 돼 있는 영아기, 유아기, 사춘기, 청장년기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두고 심신이 쇠약해진 시기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징후를 망령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병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생의 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뉘 집 노인이 치매라더라 하면 어머머, 저를 어쩌나 싶으면서 그 집 며느리나 딸은 물론 집안 식구를 동정하게 된다. 그 말은 노인을 모신 가정들이 그 노인을 소외시키거나 자신의 노고를 과장하거나 노인을 구박하고 불친절하게 구는 것을 너무도 당당하게 합리화시켜줄 수 있는 말이 되기도 한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의식을 했건 안 했건 간에 치매라는 병은 말이 만들어낸 병이라는 혐의를 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화에서 돌봄인이 ‘파랑이’라고 부르면서 파란 알약을 내미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노인이 "내가 장애아로 보이느냐"며 화내는 모습에서, 그가 병으로 인해 취급받는 것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어쩌면 치매는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기억은 한 개인의 정체성에 큰 부분을 차지하며, 이 기억들이 사라지면 나 자신에 대한 증거도 사라진다.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삶에서 치매는 그 과정을 그라데이션으로 서서히 맞게 해주는 장치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현재의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치매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영화는 치매가 정체성을 파괴하는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자아를 만나게 해주는 역설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은 기억과 정체성이 희미해지면서도 가장 본능적이고 깊은 감정을 찾게 해주는 과정을 시사한다.
치매가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간병 부담을 고려할 때, 국가가 치매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문제다. 하지만 국가적 지원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들이 치매 노인을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박완서의 소설 <해산 바가지>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의 복잡한 내면을 그린다. 처음엔 혐오와 귀찮음이 컸던 며느리는 시어머니와의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과거의 시어머니를 현재의 시어머니와 연결해 생각하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마음껏 못된 며느리 노릇을 하면서 점차 그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게 된다. 이는 치매라는 상황에서도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상기시킨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 실존의 모든 고난에 만족할 만한 해답은 바로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치매 노인을 부양하는 문제는 현대의 개인이 감당하기 과하게 힘든 문제이고, 부모님을 요양원에 보내는 선택 자체가 도덕적으로 악한 것도 아니지만, 어떠한 경우에서도 치매에 걸린 사람을 그저 병든 사람으로만 보지 않고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사랑의 가치를 되새기는 것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